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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8/14 18:40:05
Name OrBef
Subject [일반] (책후기) Gary Wills, Marcus Borg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 저번 글에 이어서 기독교 관련 서적 후기입니다. 개인 사정으로 기독교를 공부할 이유가 있고, 공부한 내용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그렇다고 해서 싸움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므로, 일부러 ‘피지알의 모든 글을 클릭하는 하드코어 피지알러’ 와 ‘제 아이디를 알아보시는 분들’ 을 주 독자층으로 한정하려고 제목을 일부러 좀 재미없게 달았습니다. ‘그렇게까지 할거면 뭐하러 피지알에 업로드하는가?’ 라는 비판이 가능합니다만, 제가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 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피지알 이상 가는 곳이 없어서입니다.

- 저번과 마찬가지로 긴 글이 될 것 같습니다. 당장 급한 일이 없으실 때에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특별히 구별하지 않는다면 본문에서의 기독교는 구교와 신교, 그 외에도 동방 정교회 등의 모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종교를 칭합니다. 다만 ‘초기 기독교’ 와 ‘현대 기독교’ 는 엄격히 구분할 예정인데요, 본문을 읽으심에 따라서 조금 더 확실해지겠지만, 초기 기독교와 현대 기독교는 근본 교리부터 조직 운영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제가 다루려는 내용은 초기 기독교와 역사적 예수에 관한 것들입니다. 저번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예수의 육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비록 저는 예수의 생애와 초기 기독교인들의 삶에 대해서 강한 감명을 받은 사람이긴 합니다만, 제가 이후에 적는 글은 기독교인 회원들이 보시기에 약간 거슬리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작성 당시의 배경을 파다 보면 종종 현대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당시 예수나 초기 교회의 가르침 간의 불일치에 대해서 언급하게 될 텐데(제 말은 아니고 저자들의 의견이긴 합니다만), 그 또한 읽는 입장에서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또한 피압제자들을 위한 종교였던 초기 기독교와 로마 황제에게 공인받은 시점 이후의 제도권 기독교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고 이야기할 예정이기 때문에, 그 또한 일반 기독교인분이 보시기에는 거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 적었다시피 저는 예수를 존경하는 사람이고 이 글의 주 의도가 현대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아니니만큼, 이 글에 대한 비판은 글을 일단 끝까지 읽으신 뒤에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영어 표현이 종종 등장합니다. 제가 미국 거주 중이고 이번에 읽은 책들이 전부 영문판인데, 특히 Marcus Borg 의 글에서는 히브리(구약)/그리스어(신약)로 적혀있던 성경 원문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생긴 교리상의 오류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여러 번 나오는 관계로 부득이한 경우에는 영문 표현을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어족인 그리스 – 영어 사이에도 그런 문제가 있다면, 그리스 – 영어 – 한국어의 2단 번역을 거친 대한민국 성경에는 더 큰 문제가 있겠지요. 이런 부분들은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저번 글을 올릴 때에 ‘종교 글인데 삭제당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걱정을 했었습니다. 분란이라고 할 만한 일이 없었고 글은 무사히 지금도 남아있어서 다행입니다. 이번 글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공격적인 표현은 최대한 자제했으니 (글을 끝까지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근본정신에 대해 알아보려는 의도가 더 큽니다), 댓글로 참여해주실 분들께서도 (설령 비판의 강도가 세더라도) 분란으로 이어질 표현보다는 차가운 표현을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배경 설명)
제도권 기독교에서는 원죄와 참회, 신앙과 신의 용서가 성경 가르침의 요체라고 합니다. 물론 성경이 그렇게 단순한 책이 아니고 성직자들의 설교도 다양한 주제를 대상으로 하지만, 그래도 길거리 교회 팸플렛에서 항상 하는 이야기는 ‘님은 죄인인데 예수님이 쿨하게 용서해줌. 고맙지? 그러니까 교회 나와’ 가 그 핵심이고, 미사나 예배에서 참회라는 과정은 거의 필수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교회에서는 개인의 도덕적 완성을 상당히 중시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비롯한 보수적인 가치에 대한 수호자의 역할도 하지요. 하지만 예수는 사람들에게 부모를 미워하라고 했으며, 부자 교인의 헌금 접시를 채찍으로 내려쳤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라고 외쳤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라거나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라는 말도 예수가 한 말입니다. 그는 비록 비폭력주의자이긴 했으나 분명 급진파였습니다. 그럼 그가 급진적으로 주장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무래도 급진적 평등주의밖에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병은 죄의 결과이고 특히 정신병은 악마에 사로잡힌 징표라고 믿던 시절입니다. 또한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고 로마에 부역한 사람은 배신자로 취급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병환자와 정신병자들, 간음한 여자와 부역자들과 항상 가까이 지냈습니다. 심지어 식사도 같이 했지요 (요즘 문화에서도 서로 집에 초대하며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상당한 친밀감의 표시입니다. 하물며 2천 년 전 고대 사회에서 식사를 같이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지요). 나중에는 대놓고 사제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신의 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말해서 그들의 분노를 샀고, 이것이 그의 죽음의 이유 중 하나가 됩니다.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고 믿건 믿지 않건, 예수가 부드럽고 자애로운, 개인적인 도덕의 완성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Gary Wills & Marcus Borg)
이 두 성서학자는 현대 미국 기독교 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이고, 성서와 예수에 대한 견해에서 서로 정 반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권위에 기대기는 싫지만, 적어도 제가 어디 지식인의 끄트머리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주워온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말씀드려야 하겠기에, Gary Wills 는 퓰리처상을 받은 저널리스트로서 주 저술은 역사/종교입니다. Marcus Borg 는 미국의 진보 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하나입니다). Gary Wills 는 예수가 신의 아들이며 성부/성자/성령은 삼위일체를 이룬다고 믿는 가톨릭교도입니다. Marcus Borg 는 예수는 단지 인간이었으며 보다 정의롭고 사랑이 가득한 세상을 꿈꿨던 예수의 꿈이 그의 죽음 뒤에도 살아남아 초기 기독교도들에게 이어진 것이 예수 부활 전설의 시작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재미있게도 그는 그 근거로 성경을 드는데, 성경의 저자 중에서 예수 부활을 직접 겪은 사람은 바울 한 명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겪은 부활한 예수가 일종의 Vision 이었으며, 다른 사도들과 자신이 겪은 부활 예수에 대한 체험이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록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예수 생전에 시간상으로 가까운 것이고, Borg 는 따라서 이 기록이 진실이고 이후에 기록된 복음서는 상징을 강하게 쓰려다 보니 육체부활이 있었던 것처럼 적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과 신의 소통 가능성을 믿으며, 예수는 신의 뜻을 강하게 느꼈고 신의 정의와 자비를 그 몸에 체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루터파 기독교인이며 루터파 교회에서는 다소 이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Borg를 파문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차이점에도 두 학자 간에 일치하는 부분은, ‘예수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라는 이야기를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대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믿는 몇 가지 교리들이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경우를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보수주의 기독교와 초기 기독교는 별로 닮지 않았다?)
휴거 - ‘인류 멸망의 때가 오면 독실한 신자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나머지는 큰 고통을 겪고 어쩌고저쩌고’ 이런 얘기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 처지에서는 교인들이 저런 휴거 이야기를 할 때 ‘우와 정말 저러면 어쩌냐’ 하는 공포를 느끼는 일도 없고 사실 저런 식의 전도는 역효과만 불러일으킵니다. 자 그런데 정말로 성경에서 저런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참으로 아쉽게도(?) 성경에서는 휴거 이야기 같은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휴거는 19세기 복음주의 목사였던 John Darby 가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물론 나름의 근거가 필요하니 바울의 데살로니가 편지 일부분을 ‘창의적으로’ 해석해서 그 근거로 삼긴 했는데, 정말로 많이 창의적으로 해석해야만.. (거의 창의력 대장 수준이어야) 휴거라는 개념을 바울의 편지에서 뽑아낼 수 있습니다. 고로 Borg 의 입장에 따르면 휴거 그런 거 없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요한계시록 – 성경의 맨 뒤에 있는 요한 계시록에서 인류 멸망의 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것은 사실 신약 성경을 편집하던 시점에 창세기의 paradise lost 과 요한계시록의 paradise restored 간의 수미대칭법(?) 을 이루기 위해서 맨 뒤에 넣었을 뿐, 계시록이 처음부터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같이 묶일 예정으로 쓰인 글은 아닙니다. 사실 4세기의 교회에서는 계시록을 외경으로 분류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의 주교 Cyril 은 외경 정도가 아니라 금서로 지정해놓을 정도였습니다. 일부 기록에는 4세기 말 무렵에는 정경으로 인정받았다고도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서기 810년에 이르러서도 정경 리스트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사실 성경의 기본 정신인 ‘신과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주제와 워낙에 동떨어진 책인 까닭에, 종교 개혁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는 요한 계시록에 대해서 2차 참고 자료 정도의 가치만을 인정했었고 (개인적으로는 성경에서 빼고 싶었으나 전통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울리히 츠빙글리는 대놓고 성경에서 빼버렸으며, 칼뱅은 계시록에 대한 완전한 무시를 보였습니다. 이 계시록이 현대에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이 책이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잘 보여줘서라기보다는 ‘죄와 지옥, 회개하면 천국’ 이라는 공포 마케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Borg 는 계시록을 ‘그래 뭐 솔직히 이 계시록을 쓴 사람은 아마 로마가 곧 멸망할 거라고 믿은 것 같긴 해. 하지만 그런 오류에도 이 책에서는 배울 것이 많아’ 라며 계시록의 해석에 상당한 공을 들이긴 했습니다만…
원죄론과 대속사상 -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며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씻어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혔다’ 라는 것 또한 현대 보수주의 기독교의 근본 중의 근본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를 대신 속죄함’ 이라는 사상은 예수나 바울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11세기 캔터베리 주교 안셀무스가 발명 (물론 안셀무스 입장에서는 성경 속에 – 이를테면 베드로의 편지라든지 - 원래 암시되어있던 사상을 발견한 것이겠지만) 한 것입니다. 예수 본인은 ‘너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대신 희생해주마’ 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너희를 위해서 희생해준다’ 라는 이야기는 몇 번 한 적이 있지만, 희생 = 대속은 절대로 아니지요. 마틴 루터 킹이나 오스카 로메로 신부, 간디 같은 사람들은 주변의 수많은 사람을 보다 좋은 세상으로 이끌기 위해서 희생했습니다. 이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요.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Borg 가 굉장한 깊이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일단 여기서는 대속 사상이 예수나 초기 기독교회의 가르침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정도만 짚어두겠습니다.
성경 무오류 설과 문자 주의 - 이 또한 초기 교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일례로, 초기 기독교의 아버지 중 한 명인 3세기의 오리진이나 16세기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는 한목소리로 ‘성경이 당연히 상징과 은유지 그걸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이 정말로 있나?’ 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 믿은 사람도 있긴 했었지만 (십자군 전쟁 때에는 한 사제가 십자가를 들고 불 위를 지나감으로써 군인들에게 신의 권능을 보여주려다가 불타 죽은 일이 있었다더군요… 이 자리를 빌려서 애도를..), Marcus Borg 는 ‘성경에 적힌 사건들은 문자 그대로 다 사실임’ 이라는 문자 주의가 본격화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의 대두 이후라고 봅니다. 그전에는 상징과 은유가 가지는 가치가 실제 사실이 지니는 가치에 비해서 작지 않았기에 홍해의 기적이 정말로 일어났든 말았든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흥부 놀부전의 주제가 지니는 가치는 흥부 놀부가 정말로 조선 시대에 생존했었는지 여부와는 아무 관계가 없지요). 하지만 계몽주의와 과학 만능주의가 등장하게 되고 ‘이 세상은 fact 와 fact 가 아닌 것으로 구별된다’ 라는 사조가 팽배하게 되자, ‘성경도 fact 임’ 이라고 말함으로써 교회를 지키려던 과잉보호의 결과물이라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런 후대의 창작물에 대해서는 일단 무시하고, 성경과 당대의 역사적 상황들을 고려해서 당시 예수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정말로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가능할까? Gary Wills 와 Marcus Borg 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다만 Gary Wills 는 정통 가톨릭인 관계로 그 작업은 오로지 성경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Marcus Borg 는 당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하며, 특히나 그 당시의 해당 단어들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쪽입니다. 이 글은 Gary Wills 의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라는 책의 내용을 기본으로 하되, 구약에 관한 내용은 Marcus Borg 의 책들을 (Gary Wills 의 구약에 대한 글을 아직 읽어본 적이 없어서요..) 참고로 했습니다. 다만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예수가 정말로 무덤에서 육체 부활을 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는 관계로, 부활 관련된 이야기는 Borg의 입장을 소개하는 선에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의 종교적 배경
당시 유대인들이라면 대부분 바리새인으로부터 종교 교육을 받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지금은 구약이라고 일컬어지는 유대 경전을 일반 민중에게 가르쳐주는 바리새인 계층은, 기독교회의 신부나 목사와 비슷한 권위를 지닌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 종교가 가진 권위는 현대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이 막강했다는 점 (당시는 재판도 성직자들이 했습니다), 또한 당시 민중은 대부분이 문맹이었기에 경전을 접할 방법은 바리새인을 통하는 것밖에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현대 성직자보다 훨씬 더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바리새인에게서 유대교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지만 성인 예수는 성경에 등장하는 시점에 이미 고급 언어인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고 (유대 사회는 하층민이 사용하는 아람어와 귀족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의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였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도 어디선가 이러한 지식을 배우긴 해야 했으니, Gary Wills 는 그가 당시의 유대교 소수파 지식인들로부터 유대교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크게 두 가지 소수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에세네파 종말론자들 (종말이 다가왔으니 우리는 은둔하며 명상하자), 다른 하나는 세례 요한으로 대표되는 침례파 (신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 현대의 침례파 교회와는 다름) 였습니다. 예수는 처음에는 에세네파와 어울리다가 그들의 은둔 성향에 실망하였는지 이후 침례파에 가담함으로써 자신의 본격적인 커리어(?) 를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의 침례파는 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좌빨 유대교입니다. 세례 요한이 성직자들에게는 겸손할 것을 요구하고 세리들에게는 탐관오리가 되지 말 것을, 군인들에게는 백성을 괴롭히지 말 것을 요구했던 기록이 남아있는데, 너무 당연해 보이는 이런 것들이 당시 기준으로는 현대의 좌빨보다 더 좌빨이었지요.

세례요한과 예언자들
<예수는 신의 아들이니 태어날 때부터 히브리어를 말했고 유대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에게도 스승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이후에 종교적 견해 차이로 결별했다 한들 세례 요한과 예수는 요한의 사후에 이르기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당연히 예수의 사상 중 상당 부분은 요한과 요한이 이해한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설파한 유대교의 핵심 정신은 무엇이냐?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모세에서 세례 요한까지 이어지는 예언자들이라고 불리는 집단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이 부분은 Borg의 의견을 따름) 예언자 – Prophet  - 은 현대 언어에서는 ‘미래에 대한 일들을 미리 보고 말하는 사람’ 이라는 뜻이 있고, 따라서 현대 기독교에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예수님이 태어나실 것을 미리 알고 성경에 적어둔 사람들’ 로 격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례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의 오프닝은 이사야의 예언서 구절 (예수의 구원 사업을 미리 적어두었다고 교회에서 주장하는) 로 시작합니다. 근데 본인이 직접 시간을 들여서 이사야 서를 다 읽어보면 꽤 명확히 알 수 있지만, 그 구절은 미래의 예수 탄생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처절했던 운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현대 교회의 이해와는 반대로, 고대의 유대 사회에서 예언자라는 것은 미래를 꿰뚫어보는 초능력자가 아니라 신탁을 받은 자라는 의미가 더 강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자들은 자신이 받은 신탁을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정치적인 존재들이었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받았던 신탁과 이들이 행하고자 했던 일들이 천 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서 대체로 일관된다는 점입니다.

모세의 출애굽이 왜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일까요?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애초에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살게된 것은 본인들의 선택입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탈출기는 민족 vs 민족의 이야기로 보면 좀 곤란하고, 지배층 vs 피지배층의 이야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개인 생각이지만, exodus 이전의 유대인들에게 확고한 민족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있었을 지도 사실 의문입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당시 이집트는 약 3% 정도의 지배층이 대부분 부를 소유하며 97% 정도의 농민/노동자 계층은 그야말로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만을 소유하던 시절입니다. 모세는 이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고 확신했으며, 유대인들을 이끌고 평등하고 풍요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대탈출을 시도합니다. 이 와중에 정말로 메뚜기떼가 이집트를 덮쳤는지, 홍해가 정말로 갈라졌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불평등한 세상은 신의 뜻이 아니다. 신은 우리가 정의롭고 사랑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라는 메시지를 모세가 제시하였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믿고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했으며, 그 탈출은 성공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일은 해당 민족에게 잊혀지지 않는 영원한 상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이끈 출애굽이 성공한 이후 이스라엘은 일종의 원시 부족 공동체 사회를 이루게 됩니다. 유대인들끼리 돈을 빌려줄 때 절대로 이자를 받을 수 없으며 50년에 한 번씩 남들에게서 취득한 모든 땅은 그 이유가 뭐가 됐든 간에 무조건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규율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배했습니다. 이 고대 유대인들은 생산 수단에서 인간이 소외되면 어쩌고저쩌고 하는 맑스의 자본론을 읽어보지 않았을 뿐, 빈곤층의 출현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사회를 2백 년간이나 유지해 나갑니다.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에도 엘리트 계층이 출현하게 되고 이들은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게 됩니다. 물론 처음에야 다윗-솔로몬으로 이어지는 리즈시절도 있었지만, 곧 이스라엘 내부에 부유층과 극심한 빈곤층이 출현하게 되고, 이때부터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뭐 부족 공동체 시절에도 예언자가 있긴 합니다만, 왕의 출현 이후부터 예언자들이 하는 일의 성격이 ‘선동가’ 쪽으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이들은 거의 항상 한결같이 지배층에 대해 비판을 하게 되는데, ‘죄짓지 않은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돈 몇 푼에 팔아버리다니 너희는 벌 받을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짓밟는 너희들!’ 이라는 노골적인 이야기로 시작해서, 신의 이름을 빌려 ‘나는 너희가 바치는 제물 따위는 받지 않겠다. 나는 너희의 축제를 혐오하며 너희 음악을 듣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다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미카등의 예언자들 역시 타락한 지배층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갔으며, 이 전통은 세례 요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물론 시대 상황에 따라 다른 소명의식을 가진 예언자도 있었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 이사야2 미안) Borg 는 이런 예언자적 전통 – 피지배층에 대한 교감, 지배층에 대한 저항, 평등/사랑에 기반을 둔 공동체에 대한 지향 – 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며,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례 요한의 침례파로 활동하고 있었던 예수 역시 이 정신을 이어받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부정한 자들 – 평등사상
하지만 예수는 곧 요한과도 결별 수순을 밟게 되는데, 개인 개인에게 높은 도덕을 요구했던 요한과는 (그는 일반 백성에게도 마구 욕을 해대는 쿨가이입니다) 달리 예수는 ‘그런 거 없어’ 라고 말하는 듯이 당시의 단식 관습을 비롯한 고행 수도를 무시하고 요한의 관점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속세의 하층민과 어울리기 시작합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고대 유대교 사회는 병자는 죄의 결과이니 불결하다고 생각하던 곳입니다. 하다못해 생리하는 여자도 부정하다 여겨서 생리가 끝나기 전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부정하기 때문에 음식도 만들 수 없었고 남의 옷을 만질 수 없으니 빨래도 금지였습니다 (근데 이건 해당 여자들이 좋아했을 지도?). 그 정도로 병자들에 대한 혐오가 만연했던 유대 사회에서, 예수는 만성 혈루증을 앓던 여자, 나병 환자, 장님과 귀머거리들을 치료하고 같이 식사했습니다. 이 사건들을 단순히 현대적 관점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고쳐주는 예수님 우왕 굿가이’ 라고 보면 예수가 주려고 시도했던 중심 메시지를 놓치는 것이 됩니다. (Marcus Borg 는 ‘에이 설마 장님이 눈을 뜨겠어?’ 라고 생각하는 쪽이고, 성경에 나오는 기적의 상당 부분이 상징과 은유라고 봅니다만, 중심 메시지에 대한 해석은 Gary Wills 와 동일합니다) 그는 병자뿐만이 아니라 로마 병사, 창녀, 이교도에게도 기적을 베풀었으며, 그 와중에 반복적으로 설교한 내용은 대충 이런 겁니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형제나 부자들을 부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초대하여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과 절름발이와 장님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원수를 사랑해라. 너희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물론 다른 대목에서는 예수가 불의한 사람에 대한 강렬한 증오를 보이기도 하므로 저런 말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듭니다. Gary Wills 는 이런 예수의 가르침을 사람들을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 가치 있는 자와 없는 자, 존경받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등으로 나누지 말라는 것으로 봅니다. 예수 사후 초기 기독교회를 이끌어간 바울은 이런 정신을 매우 구체화했고, 그가 남긴 편지들에는 이런 구절들이 나옵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면,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바울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기독교회에 들어오려면 유대인의 전통대로 할례 (포경수술!) 를 받아야 한다’ 라는 보수적인 유대인들의 불만에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댁들 거시기에 칼 대는 것이 중요하면 아예 고자가 되든가?’ (2천 년 전의 원조 고자 되기 vs 백억 받기!) 그렇게 초기 교회는 만인 평등사상을 구현해나갔고, 예를 들어서 초기 교회의 지도자 중에는 당시의 엄격한 성차별 전통에도 글로에, 뵈뵈, 눔바, 압비아, 유니아 등등의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교회 자신 역시 이후에는 성차별적인 집단으로 변해가지만, 이것은 훨씬 후대의 이야기이고 예수나 초기 기독교운동과는 관계없는 일이지요.

여담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Wills 는 동성애에 대해 짧은 언급을 하는 데, ‘이 보슈 계율 계율 하지 마쇼. 성경을 보면 노예를 소유해도 되고 딸을 노예로 팔아도 되고 랍스터를 먹으면 안 되고 관자놀이 부근을 면도하면 안 됩니다. 여자를 보고 우왕굿 한 적이 있으면 눈을 뽑아야 하지요. 당신은 저 계율들을 다 지킵니까? 중요한 것은 성서의 중심 사상이고, 예수의 가르침 어디에 동성애에 대한 반대가 있소?’ 라는 것입니다.

급진 공산주의자로서의 예수
교회에서도 이 사실을 아예 감출 수는 없기에 아주 완화해서나마 알려주듯이, 예수는 부자를 공격합니다. 부자 천국 가기 vs 낙타 바늘구멍 들어가기의 우화는 유명하지요. 그가 꼭 나쁜 부자만 공격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저 일화에서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천국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비판받은 부자는 ‘어려서부터 유대교의 모든 계율을 다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성실하게 일해서 돈을 벌었는지 아니면 유산을 많이 상속받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나쁜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성경의 저자들은 부자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예를 들어서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비웃었다’ 같은, 다소 지질학자 스러운 표현도 나옵니다), 만인 평등사상을 지닌 예수 본인이 정말로 부자를 혐오했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는 예컨대 ‘가난한 사람이 복 받는 이유는 하늘에는 그들의 재물이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비유를 한 적도 있는데, 인간에게 소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다면 저런 표현을 사용할 일도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그가 말하려던 메시지는 결국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과 마찬가지의 ‘부의 불평등에 대한 경계’ 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인간 개인의 죄’ 와 ‘인간 사회에 systematic 하게 존재하는 죄’ 의 두 가지의 차이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첫 번째의 죄는 회개와 사랑으로, 두 번째의 죄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급진적 ‘좌빨’ 주의는 현대 교회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상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제도권 교회는 이런 이야기들을 ‘개인적 청빈’ 에 대한 권장 정도로 축소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교회는 탄압받는 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강력한 권력 집단이 되었고, 사회 제도에 대한 급진주의적 접근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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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14 18:41
수정 아이콘
<b>길이가 너무 긴가 봅니다. 댓글로 이어서 씁니다 </b>

하지만 이런 급진적 ‘좌빨’ 주의는 현대 교회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상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제도권 교회는 이런 이야기들을 ‘개인적 청빈’ 에 대한 권장 정도로 축소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교회는 탄압받는 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강력한 권력 집단이 되었고, 사회 제도에 대한 급진주의적 접근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워렌 버핏이니 빌 게이츠가 개인 자격으로 기부할 때에는 다들 침이 마르게 칭찬하다가, 그들이 부유층 증세를 주장하니까 빨갱이라고 욕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지요) 물론 급진주의적이지 않다고 해서 나쁜 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꽤 보수적인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이렇게 저렇게 욕도 많이 먹지만 결국 자선 단체들의 대부분이 종교 단체들의 후원을 받는 것도 사실이니 말입니다. 다만, 기독교회의 초기 정신은 불평등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포함했었다는 점, 그리고 그 초기 기독교의 정신과 현대 기독교의 개인적 청빈에 대한 강조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정도는 사실로 보입니다. Gary Wills 는 현대 교회가 좌빨 기독교인들을 탄압한 예를 두 가지 드는데 20세기 중반의 프랑스 ‘노동 사제단’ 이나 20세기 후반의 남미 ‘바닥 공동체’ 각각 교황 피오 12세와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폐쇄된 것이 그것입니다.

<b>종교인이 아닌 예수</b>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말들을 하나하나 인용하기에는 공간이 모자라니, 그 모든 말들을 요약한 Gary Wills 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는 예배의 식에 있어 정결 예식, 희생제, 형식적인 기도와 규범, 안식일과 식사 규례, 성직자, 성전 등의 모든 형식주의를 반대했다.’ ‘그는 이런 외형적인 것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근본적인 마음의 정화를 요구했다’

실제로 신약 성경에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언급할 때 제사장이라는 직함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제자 중 어느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고 12 사도에 등장하는 사도라는 말의 어원은 사절 같은 개념에 가깝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심부름꾼이라는 개념이지, 성직자/제사장 등의 개념이 아니지요. 예수는 꽤 노골적으로 자신의 제자들에게 ‘백성 위에 군림해선 안 된다’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지 말라’ 라고 말했습니다. 초기 교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바울과 베드로는 그 뜻을 이어받아서 교회의 지도 그룹에 대해서 단순히 도와주는 사람, 사도,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 장로 등의 호칭을 사용했지, 종교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제사장이라는 호칭은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

Marcus Borg 는 여기에 더욱 추가하여 예수는 사후 천국/지옥의 교리를 설파하러 온 것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일단 <b>구약 성경에서는 내세의 개념 자체가 아예 없고!!!</b> (다니엘 서에서 아주 짧게 언급이 나오긴 하지만, 문맥이 일반적인 내세와는 좀 다릅니다), 예수 탄생 직전 즈음에 이르러서야 유대교 성직자들 간에 내세에 대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자 그렇다면 신이 아브라함부터 모세를 거쳐 최소한 1500년, 최대한 수천 년의 이스라엘 역사 동안에는 사후 세계의 존재를 유대인들에게 숨겼다가 예수의 시점에 이르러서야 짜잔~!! 하고 가르쳐주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까요?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면, 예수 역시 천국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을 뿐, 그 천국이 사후 세계라고 확언해준 것은 별로 없습니다 (난 니가 이쁜 여자를 만날 거라고 했지 니가 그 여자랑 사귈 거라고 하진 않았다?). 한국어 성경에서 천국에 해당하는 단어인 Heaven 은 성경에서 굉장히 여러 가지 문맥에서 등장하는데, 그 중 대부분은 잘 보면 인간 영혼이 사후에 가는 좋은 곳(?) 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 기도문에 등장하는 Our Father in heaven 의 heaven 은 신의 영역을 의미하고, Kingdom of heaven 에서의 heaven 은 신과 동의어입니다. 물론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이 기독교 교리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천당 불신지옥’ 의 프레임이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위에 적었던 대속 개념의 등장과 더불어서 11세기부터입니다.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여기까지는 Gary Wills 의 입장, 이후는 Marcus Borg 의 입장)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러 온 것도 아니고,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려고 온 것도 아니라면 예수는 도대체 무엇을 하러 온 것이었을까요? 예수는 일견 모순되는 이야기들을 많이 남겼는데, 이 하나하나의 단어들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 지녔던 의미들을 추적함으로써 Borg 는 예수의 이야기가 당시로써는 굉장히 일관된 메시지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 현세의 지배자들이 요구하는 삶을 살지 말고 애초에 너희에게 삶을 준 절대자가 너희에게 원하는 삶을 살아라. 절대자에게 돌아가라 (고대어의 회개/repent 는 어원이 귀향/return).
‘신과 이웃을 사랑해라. 이것이 모든 율법의 정신이다’ –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며 정의롭게 사는 것이다.
‘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의 빚을 용서해주소서’ 라고 기도해라. – 신이 바라는 정의롭고 사랑하는 인간 세상의 모습이 이루어지소서. 죄/불완전함/혹은 문자 그대로의 경제적인 빚 등으로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할 테니 우리의 죄/불완전함 등을 용서해주소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 Borg 는 이 말을 정말로 예수가 했다기보다는 해당 구절을 적은 요한의 상징적인 창작물로 봅니다. 그리고 Borg 가 추정하는 요한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우리는 예수의 삶을 (이정도로 정의와 사랑에 대한 노골적인 갈망을 드러낸 사람도 드물지요) 통해서 신에게 이르는 길과 진리, 그리고 진실로 충실한 삶을 볼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이미 신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 이미 신의 뜻대로 정의롭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신의 나라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 신이 바라는 그런 세상이 언제 이루어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Borg 는 현대어의 believe (믿다) 와 faith (신앙) 에 해당하는 성경의 단어가 당대의 유대 사회에서는 belove (사랑하다) 와 be faithful to (~에게 충실하다) 의 의미로 사용되었었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앙체계 자체 역시 예수가 요구했던 신앙이 아니었음을 지적합니다. 이 밖에도 의미가 변화된 단어들이 제법 있는데, 이런 것들을 고려하여 성경의 몇몇 유명한 문장들을 다시 써보면:

나는 만물의 창조자이신 신을 믿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 나는 만물의 창조자이신 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성령을 사랑합니다.
신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메시아여 자비를 베푸소서. -> 신이시여 나와 공감해주소서. 메시아여 나와 공감해주소서.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의미가 전혀 달라집니다. 저로서는 사실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갑니다' 라는 말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말도 드문데, 믿고 안 믿고는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런 말은 '키가 180 넘으면 죽어서 천국 갑니다' 와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말이 '예수님을 사랑하면 천국 갑니다', 조금 더 풀어서 쓰면 '이러저러한 삶을 살았던 예수님을 당신이 사랑하고 따른다면 당신의 삶은 신이 원하는 삶에 접근하게 됩니다.' 라는 뜻이 된다면 얘기가 많이 다르지요. 꼭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생각해볼 여지는 주어지게 됩니다.

결국 Borg 는, 예수가 하려 했던 일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참혹하게 나뉘어있던 당시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서로 사랑하되,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평등과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어나가기를 바랐고, 그런 세상을 폭력 없이 이루기를 바랐으며, 그 꿈을 위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너무나도 강렬한 메시지를 그의 사도들에게 남겼으며, 12명의 사도 중 (가롯 유다가 빠진 후에 신규 멤버를 한 명 충원했지요) 11 명이 순교할 정도로 그의 후계자들은 예수의 뜻을 오롯이 따랐습니다. 저는 여전히 부활을 믿지 않기에, 예수 사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초기 기독교 운동을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표현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된 이후 그의 오랜 친구였던 Samuel Kyles 목사가 추도회에서 남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b>You can kill a dreamer but you can’t kill the dream. Dream lives on, dream lives on.
비록 꿈꾸는 자는 죽일 수 있지만 꿈은 죽일 수 없습니다. 꿈은 계속 이어지며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b>

참고 문헌 –
Gary Wills, What Jesus meant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Gary Wills, What Paul meant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Marcus Borg, Reading the bible again, for the first time
Marcus Borg, Speaking Christian
12/08/14 19:11
수정 아이콘
잘 보았습니다. 정성들여 쓰신 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우디 사라비아
12/08/14 19:22
수정 아이콘
우와.... 대단한 글입니다

과문한 저로서는 신선한 기독교 해석이기도 하구요


막연하게 "예수님"이 이런저런 분이 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는데.... 그런 바램이 망상이 아니니 반갑기도 합니다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한번 더 읽어야 겠습니다
저글링아빠
12/08/14 19:35
수정 아이콘
어차피 종교적 신앙이야 개인 내부의 절대적 영역입니다만, 종교적 제도로 왔을 때는 사회의 한 부분이니 그와 같이 절대적일 수 없고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쌓임에 따라 그 내포와 외연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고 어떠한 절대적인 모습을 고수하려 하였다면, 이렇게 긴 세월동안 그렇게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었겠지요.

또 예수의 존재는 지극히 오래전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그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정도이니 실제 예수의 모습을 밟는다는 것도 추정이긴 합니다만,
말씀하신 대로 성경의 여러 부분들이 사실은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것처럼 성경 혹은 기독교에서의 예수도 이미 긴 기독교의 역사를 거친 지금에서는 어떠한 상징으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그 상징이 의미하는 바 역시 시대에 따라 변천하여 온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러한 시각은 지극히 근본적인 시각의 기독교와는 배치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참고로 저는 불교도입니다)
저는 극단적인 근본주의적 시각만 버린다면 반대로 이와 같은 초기 기독교의 지금의 교리와 다른 모습에 대한 고찰은 현재의 기독교의 주류적 가르침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기독교의 모습도 더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는 재료이자 자양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의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DoroDoro
12/08/14 22:04
수정 아이콘
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러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m]
몽키.D.루피
12/08/14 22:1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게리 윌스 책은 번역되어 있다면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글을 읽고 생각나는데로 적어보면,

== 요한계시록과 공포마케팅.. 완전 공감합니다.

==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주교 뿐만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처음부터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고 보완되고 구축되어 왔다고 보는게 맞을 겁니다.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초기 기독교 삼위일체 정립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교부들도 있으나 나중에 이단으로 정죄 받기도 하고... 사실 삼위일체라는 거 자체가 예수 이후 기독교의 최대 성과죠. 결국 기독교 교리란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렇고, 안셀무스나 아퀴나스도 그렇고, 이런 학자 집단에 의해 오랫동안 정립되어 온 교리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기독교 교리의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인도하심이 있었다라고 믿는 거고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그냥 이런 식으로 정립되어 왔다고 생각하면 될 듯..

== 출애굽기에서 야곱이 자기 식솔 70여명을 이끌고 애굽으로 갔을 때는 유대인이라는 민족 개념 자체가 없었죠. 400년 후 탈출할 때 그들은 거의 이집트인이라고 봐야할 겁니다. 종교나 풍습이 다 이집트인들의 그것을 따르고 있었죠.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신의 언약을 기억해내고 민족의 정체성을 정립한 인물이 모세입니다. 구약에는 이 언약을 기억해내는 게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에게 빼앗긴 언약궤를 되찾는 장면, 유다왕국 말기의 요시야왕이 잃어버린 두루마기를 찾아 언약을 기억하는 장면 등 구약의 중요한 인물들은 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신과의 언약 중요시 여깁니다. 구약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자주 반복되는데 결국 이 언약이 바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었던 것이죠.

글에서 적으신 것처럼 신이 주셨다는 유대공동체의 율법은 지금 봐도 상당히 진보적이고 빨갱이적(?)입니다. 아마 우리나라 보수 목사들이 보기에 상당히 불손한 사상일 겁니다. 가장 소외되기 쉬운 고아와 과부를 굶어죽지 않게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땅을 공평하게 나누며, 심지어 구약에는 딸들이 땅을 상속받는 장면도 나옵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자의 신분을 생각해볼 때 상당히 인상적이죠. 율법에는 도피성을 만들어 고의가 아니라 사고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몸을 피신할 수 있게 하는 제도도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굶지 않게 추수 때 네 모퉁이를 남겨놓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전쟁 때는 적 여자를 강간하지 말라거나 남편이 아내를 불륜으로 몰아세울 때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가장 압권은 희년 제도인데 7x7년의 다음 해, 즉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하고 빚을 탕감해주고 땅을 돌려주게 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희년 때까지만 버티면 자기 선조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돌려받을 수 있고 다시 새출발하게 되는 거죠. 절대로 빈곤이 되물림되지 않는 시스템입니다. 물론 희년이 제대로 실행된 적은 없다고 하더군요.

문제는 솔로몬 이후 왕국이 분열되고 북쪽 이스라엘왕국보다 더 북쪽으로부터 다른 민족의 신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성경에서 보여주는 게 아합과 이세벨이죠.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 왕은 엣바알 왕과 사돈을 맺고 엣바알의 딸 이세발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결혼합니다. 아합은 성경이 묘사하는 가장 악한왕인데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은 사건이 가장 상징적입니다. 아합이 별장을 짓는다고 나봇에게 포도원 땅을 팔라고 하는데 나봇이 선조들의 유업이라고 거절하자 그냥 죽이고 빼앗은 겁니다. 어찌보면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유대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죠. 이후 유대공동체도 여느 인간 사회와 마찬가지로 부가 부를 낳고 빈곤이 빈곤을 낳는 사회로 전락해 버립니다. 어쩌면 희년제도는 유대공동체의 이상향이고 그 이상향 자체를 무너뜨린 거겠죠.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토지공개념이고 이게 현대적으로 개조되어서 종합부동산세로 우리나라에 잠시 도입된 적이 있는 개념입니다. 간단히 말해 토지는 우리 모두의 것이니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회공동체원들에게 땅에 대한 사용료를 내라는 겁니다. 그래서 토지세를 매기게 된 것이고 아파트가 많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토지세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 같아 건물에 대한 세금까지 보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종합토지세가 아니라 종합부동산세가 된 것이죠.

== 예수가 사역 초창기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라고 외칠 때, 마태복음에서는 '천국',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라고 번역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성경이고 마가,누가복음은 이방인 대상으로 쓴 성경이죠. 즉,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천당, 극락의 개념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천국이라고 하면 옥황상제가 계시는 저 하늘을 의미하죠.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천국은 현실에서의 유대왕국의 재건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천국이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이방인들에게 이 단어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천국, 마가,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나라라고 했다는게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 영화 '아고라'를 보면 초창기 그 영향력이 날로날로 커져가는 기독교와 헬라 전통 종교와의 갈등을 직,간접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파라볼라노는 기독교 초창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어려운 이웃,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을 돌보던 성자들의 집단을 의미하는데 영화에서는 이 파라볼라노들이 점점 종교 세력의 홍위병이 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죠.

결론적으로 기독교 사상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을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2천년동안 인류 최고의 지성들이 끊임없이 수정, 보완해왔고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고 토론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상당히 재밌고 흥미로운 문화이며 일정부분 받아들일만한 구석도 있는 충분히 매력적인 사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동정녀 탄생과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믿습니다. 이건 어떻게 믿느냐, 근거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키르케고르가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죠. 그냥 믿든지 말든지, 선택의 문제입니다.
김연아이유리
12/08/15 06:48
수정 아이콘
사랑과 정의, 평등 같은 내용은 사실 기독교에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인간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볼수있는 보편적인 사상입니다.

저는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차별적인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대속" 개념이라고 봤는데
초기 기독교에선 대속 개념이 교리에 있지 아니었다는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군요.
RegretsRoad
12/08/15 16:17
수정 아이콘
상당히 흥미롭네요. [m]
눈시BBver.2
12/08/15 20:42
수정 아이콘
아아......... ' '......
잘 봤습니다 (__);;;;
12/08/16 17:07
수정 아이콘
잘 정리된 글, 흥미로운 토론 모두 잘 보았습니다.
연필깎이
12/08/17 00:44
수정 아이콘
정독했습니다.
이런 수준 높은 글을 이해하기 편하게 읽을 수 있다니 행복하네요.
토론도 잘 봤습니다.
종교가 없는 제 입장에서는 OrBef 님의 입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네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기독교의 교리도 '이러한 과정이 있었구나' 싶기도 하구요.
신이 존재한다면 대자연... 우주... 자체가 아닐까 생각하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저도
기독교 자체의 그런 힘과 선동력에는 흥미가 있어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런 멋진 글을 읽게 되었네요.
'기독교는 잘 모르겠고 예수는 므쪄'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종교에 관해서라면 어설픈 지식으로는 함부로 말하면 안되는게 정답이더라구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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