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2/02/10 14:05:17
Name PoeticWolf
Subject 암호를 대란 말이다!
또각또각 발톱을 깎던 아내가 갑자기 두 손을 나팔처럼 입 주위에 동그랗게 모아 저를 향해 소곤댑니다.
“쿠웨이트!”
지난 번에는 ‘똥깨멍청이’였던 암호가 보름 정도 만에 바뀐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표시를 했습니다. 한두 번 본 게 아닌데, 아내가 암호를 바꿀 때마다 웃음이 납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겠지만 아내는 쥐를 무서워합니다. 4~5살 때였나, 하여간 어렸을 때 잠깐 시골에 살았었던 아내는 삼촌이 쥐를 잡는 걸 보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는 것에조차 진저리를 치고 입맛을 잃을 정도라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듣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기절하다시피 경악스러웠던 쥐의 기억을 가지고 있던 여자 아이가 어느 날 너무나 무서운 이야기를 또 들었으니, 그건 바로 발톱 먹은 쥐가 발톱의 주인으로 변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꼬마 아내는 쥐가 자기 모습으로 돌아다닐 것을 상상하고 몸서리를 쳤습니다. 쥐가 사람 모양으로 돌아다닌다는 그림도 징그러워 죽겠는데, 그 쥐가 자기 모습을 해서 식구들을 속여 같이 밥 먹고 누워 잘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니, 이건 공포를 넘어 ‘그런 일을 사전에 막아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발전하더랍니다. 꼬마 주제에 그래서 생각한 게 암호였습니다.

“그래서 매일 엄마 옆에서 발톱을 깎으면서 암호를 알려줬어.”
“아하하. 그거 너무 귀엽잖아.”
“엄마는 황당해 했어. 그런 이야기를 믿냐면서.”
“몇 살 때 얘긴데?”
“나 사실 다 커서도 그랬어. 지금도 그러잖아.”

어느 날은 그걸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발톱을 깎다가 아내에게 툭, “오늘 암호는 멧돼지야.”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검지를 세워 입에다 가져다 댑니다. 쉬!
“아니, 그걸 그렇게 크게 말하면 어떡해! 암호가 발톱에 새겨진단 말이야!”
“아, 그런 거야? 고런 건 참 연구 많이 했네.”
강조하듯, 훈계하듯, 고개를 크게 끄덕인 아내는 저에게 가까이 오더니 ‘살짝 말해, 나한테만.’이라고 속삭였습니다. 갑자기 이게 뭐하는 짓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 아까랑 똑같이 ‘멧돼지’라고 했더니, 아내는 무슨 심리전을 생각했는지 ‘오, 머리 쓰네? 좋았어.’라며 어깨까지 두드려줬습니다.

그런 아내가 며칠 전에는 갑자기 저 때문에 징그러울 뻔 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제가 며칠 전에 올린 ‘수챗구멍에서 건져 올린 건’을 읽다가 중간에 쥐 잡은 이야기를 보고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는 겁니다. 스티븐 킹이 자기 아내는 자기의 첫 독자라고 쓴 걸 보고 멋지다는 생각에 저도 연애 때부터 제 아내에게 ‘넌 내 첫 독자’라며 제일 먼저 낙서한 걸 보여주곤 했었는데 어느 날부터는 그게 흐지부지 되었고, 그래서 그 날 그 날 쓴 걸 별 생각 없이 아내에게 먼저 보여주지 않고 게시판이나 페이스북에 올린 지가 꽤 오래 됐었기 때문에 저는 꽤나 놀랐습니다. 게다가 아내는 SNS니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과는 거리가 먼 아날로그한 사람이거든요.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읽었어?”
“올라와 있으니 알지, 뭘 어떻게 알아.”
“아니. 그니까... 너 그런 거 잘 안 하잖아?”
“오빠가 쓴 건 다 읽어. 한꺼번에 몰아서라도. 연애 때는 내가 첫 독자네 어쩌고 했으면서. 하여간 남자들 결혼하면 다 변한다니까.”

마치 아내의 기억 속에 있는 쥐를 본 것처럼 두려운 마음이 순간 든 것은 여기 저기 전혀 아내를 의식하지 않고 써놓은 아이유 관련 댓글과 게임과 관련하여 불평불만을 쏟아놓은 것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 친구들과 그룹 카톡을 하다가 누군가 ‘K팝 스타 보아?’라고 쓴 것에 ‘보아하니 보아가 참 이쁘더군’이라고 장난친 게 그날 저녁 아내 귀에 들어간 사건이 있었는데 - 범인은 아직도 오리무중 - 그날처럼 몸이 살짝 경직되는 걸 느꼈습니다. 어떻게든 지금 이 분위기를 훈훈하고 따스한 감동과 감사의 장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아, 그랬지. 맞아. 내가 그동안 참 무심하게 살았구나. 미안해.”
평소에 사과 같은 거 잘 하지 않는 성격인데, 이 날은 바로 꼬랑지를 감추고 과도하게 감동스런 표정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살짝 확인을 했습니다.
“그 동안, 내가 쓴 거 다 읽어 준거야?”
“그럼. 난 다 서너 번씩 읽었는데?”
서너 번? 서너 번이라니!
“아, 너무 감동스럽잖아.”
이 부분부터는 약간 진심도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출판사에 용기 내어 출판 검토를 부탁했다가 수필집은 유명인이 쓴 거 아니면 잘 안 팔린다고 거절을 당했을 때 아내가 “잘 됐다! 오빠가 쓴 거 다 내가 독점하게 되잖아! 불쌍한 출판사 같으니라고.”라고 위로해줬던 게 생각났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왜 요즘 자기한테 유치한 시 안 써 주냐고 서운해 하던 것도 기억이 났습니다. 하긴, 그 유치한 단어들을 아내가 좋아해 주었던 건, 그게 대단한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자기한테만 공개되는 것이었기 때문인데, 잘 쓰려고만 하다 보니 아내가 원하는 ‘독점’은 놓치고 있던 것입니다. 이게 뭐라고 독점까지 하고 싶어 할까, 아까 했던 ‘무심해서 미안해.’라는 사과가 진심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천만 독자가 없으면 어때, 나에겐 눈 먼 독자가 이미 한 명 있는데! 게시판 추천수 좀 안 올라가면 어때, 조회수가 더 감사한 숫자지!

“이제 정말 널 첫 독자로 할게. 알겠지?”
“아니야. 그냥 내가 계속 찾아볼게. 편히 쓰고 올려.”
“그러면 내가 주말까지 네 이름으로 뭐라도 하나 쓸 거야. 너만 보도록.”
“진짜?”
“응. 진짜로.”
아내가 눈을 살짝 흘깁니다.
“그래? ‘김연아이유리’라는 아이디가 부러우면서, 잘 쓸 수 있겠어?”
“......”

도대체 봤다는 게 어디까지 본 것인지, 설마 댓글도 다 본 것인지, 갑자기 전 다시 아내의 옛 기억 속에 있는 쥐가 떠올랐습니다. 발톱에 암호가 새겨지니 조심하라는 아내의 경고도 같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암호를 자기한테만 살짝 말하라며 다가온 것처럼 아내가 할 말을 못 찾는 저에게 다가와서 속삭입니다. ‘나한테만 써야해, 알겠지? 그리고 다른 데다 올리지마.’ 독자는 힘없는 작가 지망생에겐 독재자입니다.

어느 덧, 금요일입니다. 백지는 언제나처럼 뒤돌아 앉아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정 제 쪽으로 돌아앉지 않겠다면 주소를 새긴 발톱을 잘라 쥐에게 먹여볼까 합니다. 아, 그런데 남은 발톱이 없네요. 그렇다면 백지에 암호를 새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에게만 가는 암호, 이번엔 ‘멧돼지’ 보다는 성의 있게 새겨야 할 듯합니다. 금요일 아침부터 백지에 아내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구상합니다. 싫지 않습니다. 가끔은 검열이 반가울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독점욕이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2-1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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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몬트콜드
12/02/10 14:10
수정 아이콘
언제나 글은 잘 보구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댓글로 시적늑대님의 지난 날을 파해치는 주소가 링크되기 시작하는데.......
눈시BBver.2
12/02/10 14:14
수정 아이콘
저도 제 글이 한 사람의 여자사람에게 독점 받고 싶습셒습... ㅠㅠ
좀 달달한 역사 얘기로 바꿔 볼까 ( ..).........

근데 정말 다 보시는 거 아닌가요? '0';;; 왠지 파도 파도 끝이 없고 좋은 찬스 때 쓸려고 다 묵혀 두실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지니쏠
12/02/10 14:19
수정 아이콘
엉엉 결혼하고싶다. 누군가에게 거짓말로라도 설리보다 니가 이쁘다고 말해보고 싶다. [m]
선데이그후
12/02/10 14:19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한동안 바빠서 쪽지를 확인을 못했는데 방금 했습니다.
전 보통 와이프가 미우면 와이프가 샤워할때를 노려서 보일러를 작동중지를 시키거나 같이 어딜나가면 오랜시간 익힌 브래지어 풀기신공을
펼쳐서 풉니다.(이거 연습이 필요한데 익숙해지면 겉옷 바깥에서도 1초안에 풉니다... 연습이 많이 필요합니다.)
12/02/10 14:22
수정 아이콘
젠장.. 읽다보니 너무 부러워지잖아요... T_T
Empire State Of Mind
12/02/10 14:42
수정 아이콘
아내느님께서 잠든 뒤 스타하는 위험한 행동은 안하고 계시죠?

눈팅을 자주 하신다기에...ㅠㅠ
같이 게임하던 분들 닉네임까지 알고계실거같아서... 등골이 오싹! [m]
피렌체
12/02/10 14:42
수정 아이콘
이별의 아픔을 배가 시키는 글 감사합니다
아 일이나 해야지 괜히 딴짓하러 들어왔네..........
덕분에 주말에 술 먹을 이유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매번 읽기만 하고 댓글은 달지 못했는데
글 너무 잘쓰시네요 염장글보다 필력이 더 부럽네요
노하우 있을까요?
저도 사실 이런식의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 했었는데
방송글을 쓰면서 부터 '아무나' 쓸 수 있는 간단한 문장이 되어서 상실감이 큽니다
늑대님께서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글 읽을 방법 없을까요? 쪽지든 링크든 부탁드려봅니다~
기회가 되면 아내분을 위한 구글링을 전수 하고 싶어지네요 크크
다시한번말해봐
12/02/10 14:44
수정 아이콘
이런표현이 실례가 되지 않으려나... 지난번 영어회화 연습글 읽었을때도 생각했지만 새삼..아내분이 너무 귀여우세요>_< 진짜 같은 여자가봐도 너무너무 귀여워요..!!! 진짜 사랑받을만한 그런 분이신 듯_<
무지개
12/02/10 14:47
수정 아이콘
이 글을 읽으시는 늑대님의 아내님!!!!

가슴따뜻하고 사람 냄새나는 남자와 함께 사신다는것에!! 감사하십시오!!!

결혼따윈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았는데.. 늑대님 글을 읽을때마다..

제 신념이 흔들립니다.유유
12/02/10 15:20
수정 아이콘
두 분 정말 부럽네요. 유유
별로네
12/02/10 15:47
수정 아이콘
제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밤에 발톱을 깎으면 쥐가 물고가 먹어서 발톱의 주인으로 변한다고.......
그래서 외할머니께서 밤에는 발톱깎지마라고 했었던것 같습니다.
12/02/10 16:08
수정 아이콘
PoeticWolf 님의 아내분. 보고 계신가요? PoeticWolf 님의 글 중 50% 이상은 에게에 모여 있습니다. 혹 그쪽에 추가 댓글이 달릴지도모르니까, 그쪽도 꼭 체크하세요.
12/02/10 16:22
수정 아이콘
아내분 보고 계신가요? 이곳은 https://pgrer.net/?b=8&n=35114&c=1222536 이렇게 징그러운 리플이 득실대는 곳이므로 함부로 출입을 금합니다. [어른폰]
12/02/10 16:41
수정 아이콘
"암호!"
"..."
"암호!"
"..."
"암호!"
"..."

母 : Shura야 화장실에서 거울보고 뭐하는 짓이니

ㅠㅜ
아키아빠윌셔
12/02/10 16:42
수정 아이콘
불펜이었다면 '저번에 보내주신 오디오비디오 잘 봤습니다' '취향 너무 센거 같으세요' 등등의 식구금 댓글이 달렸겠지만...
차마 여기엔 달 수가 없어 안타깝네요. 이런 염장글엔 저런 리플을 달아줘야 한다는 솔로의 사명감이 있는데ㅜㅜ

몇년전 결혼한지 1달된 사촌형을 우연히 마트에서 만났는데, 얼굴 보자마자 '야. 너도 빨리 결혼해. 결혼하니까 좋다. 크크크.'라고...
그리고 바로 형수님께 웃으면서 뛰어가는 사촌형을 보고 '저 인간이 개과천선했나, 아니면 꽉 잡혔나. 혹시 정신이 확 나가버린걸까.'하고 5분여 고민을 하고 몇 주동안 무지 부러워했었습니다. 그 부러움을 또 느끼게 하시다니... 나빠요ㅜㅜ

앞으론 건전한 악성댓글을 달 방법을 여러모로 연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_- 크크크
一切唯心造
12/02/10 17:04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재미있는데 현재 헤어진 상태라 눈물이 나네요 부럽기도 하고요

제가 쓰는 글도 제 애인이 첫 독자였는데 흑흑 [m]
12/02/10 17:34
수정 아이콘
PoeticWolf 님의 아내분. 보고 계신가요? 구글링을 배우세요!! 후다닥..
KillerCrossOver
12/02/11 01:31
수정 아이콘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멧돼지.

아, 이게 아니구나.....
김치찌개
12/02/11 12:16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봤습니다^^

결혼하고싶다 으..
12/02/11 12:23
수정 아이콘
PoeticWolf님의 아내님...뭐 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런 남자가 진국입니다...좋은 남편이랑 행복하게 사셔요...

부러우면 지는 건데...눈에서 비가 오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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