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1/08/22 22:22:38
Name 눈시BB
Subject [EE 기념] 율곡 이이 下

이전 글에 이어서 2X2X2월 22일 황ㅛ일을 앞둔 22시 22분 황황시에 글을 올립니다. 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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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대에 오른 경장
위에서 적었듯 이이는 해야 싶겠다는 말은 무조건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이건 임금인 선조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죠. 아래의 예를 보죠.

"이와 같이 한다면 한갓 관례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어떻게 천재에 대응하겠습니까 (중략) 구제할 대책을 상량해 정하시되 개혁을 위주로 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보수를 위주로 하지도 말며 (중략) 그렇지 않고 그저 공구 수성한다는 이름만 내세우고 그 내실이 없으면 장차 어떻게 위로 천심에 보답하고 아래로 인민의 여망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선조 14년 10월 16일)

이런 식으로 임금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지적하며 (꼬투리 잡으며) 형식으로 끝나는 게 아닌 제대로 된 움직임을 요구했던 것이죠. 이런 적도 있죠.

"조정에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 많으니 만약 오랑캐의 기병이 침입해 오면 큰소리 치는 사람을 써서 막으면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 아니 이건 그냥 요약하죠.

"제가 큰 소리치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요. 그런 사람이면 써도 분명 제대로 못 할 건데 적은 어떻게 막죠? 옛 것을 좋아하고 성인을 사모하는 사람한테 그런 거면 님 말 틀린 거고요. 옛날 맹자는 어쩌구저쩌구 주절주절 이게 어떻게 큰 소리 친 거죠? 지금 님이 유학자들 말 듣도 않으면서 큰 소리 쳤다고 뭐라 하면 간신들만 일어나지 않겠슴요?"

오죽했으면 이에 대한 해설로 "상이 말을 하지 못 하고 있는데"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죠.

"전에는 님이 신하 말 잘 들어줘서 기뻤는데 요새는 맘이 변하시니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 전으로 돌아오시면 기쁘지 않을까 시포요."

... 조광조가 왜 쫓겨났는지 이해가 될 만한 부분입니다. 그러고보니 조광조 등 사화로 몰락한 사림들을 신원하고 그 때 그들을 모함해서 공신이 된 이들의 지위도 박탈할 것을 주장한 것도 이이였습니다. 사림들 사이에서도 소극적이었던 일을 그는 밀어붙였고, 선조 10년에 마침내 성공하죠.

이렇게 탁상공론을 싫어하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주장을 원하는 것이 이이였습니다. 이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까지 이르는 기간 동안 그는 여러 가지 주장을 합니다.

(1) 수령의 임기
"반드시 성현이 되기를 요구하여 털끝만한 잘못이 있어도 반드시 체차를 하고야 맙니다. 임금의 이목이 되고 있는 그들이 자주 바뀌면 공론이 따라서 갈팡질팡하게 되니 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체통이 아닙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수령의 임기가 너무 짧고 너무 쉽게 바뀐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예 권력을 잡은 이들이라면 몰라도 대간부터 지방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윤리적인 잘못이나 집안의 잘못으로도 탄핵당한다는 거였죠. 그 능력 및 임무를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임기를 늘리고, 쓸모 없이 많은 지방을 통합시키자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더해 명예직의 경우 품계를 회수할 것까지 건의했죠.

담당관이 너무 자주 바뀌어서 정책이 길게 이어지지 못 한다는 것, 이건 현대에도 볼 수 있지 않나요?

(2) 차별 완화
"서얼과 공천·사천 중에서 무재가 있는 자를 모집하여 스스로 식량을 준비해서 남도와 북도에 들어가 방수하게 하되, 북도는 1년, 남도는 20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응모자가 많도록 하는 한편 병조에서 시재한 뒤 보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서얼은 벼슬길을 허통하고 천례는 면천하여 양인이 되게 하며, 사천인 경우에는 반드시 본주인이 병조에 단자를 올린 다음에 시재를 허락하여 주인을 배반하는 종이 없게 하고, 그 댓가는 자원에 따라 골라 주도록 하소서."

이이는 이런 주장을 통해 서얼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신분 상승을 할 기회를 주라는 건의를 합니다. 이는 군제 개혁에 들어 있던 주장으로 임진왜란 때 현실이 되죠. -_-; 생각할 여지가 많은 부분입니다만, 이렇게 신분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국방을 강화할 길을 주장한 것입니다.

재밌는 것이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유학인데 반해 세종대왕부터 정조, 조광조와 이이 등 유학에서도 끝판대장의 위치에 있는 이들은 오히려 신분제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이는 여성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쳐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일시적으로나마 신분제가 완화되기도 합니다. 이후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신분제 자체가 크게 흔들리기도 했죠.

(3) 공안 개혁
"양병은 양민이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무엇보다도 공안을 개정하여 전역으로 하여금 10분의 7∼8 정도를 절감받게 한 후에 경우에 따라 가세할 것은 가세하도록 하여 국용에 여유가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역시 군제 개혁 속에 들어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군사를 기르려면 그 전에 백성을 길러야 된다는 것이죠.
이이는 국고가 부족한 것을 관리와 임시로 설치하는 기관이 너무 많은 것에서 찾았습니다. 때문에 관리의 수를 줄여 쓸 데 없는 지출을 멈추고, 지출 역시 수입에 맞춰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당시 관리들은 재난 때문에 세금을 줄이는 "급재"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 때 이르러서는 재난이 있든 없든 명성을 얻기 위해 이렇게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막을 수 없으니 세금을 기본적으로 낮춘 다음에 풍년이다 싶으면 더 해서 받기를 주장한 것입니다. 왠지 후대의 영정법이 떠오르네요. 여기에 더해 그는 나라의 제사가 너무 많다면서 그것도 줄일 것을 건의합니다.

또 한 가지 엿볼 점은 그가 선조 3년에 만들어 바친 동호문답의 내용입니다.

"해주의 공물법을 보면, 논 1결마다 쌀 한 말을 징수하는데 관청에서 스스로 비축해 두었던 물건을 서울에 바치기 때문에 백성들은 쌀을 내는 것만 알고 농간하는 폐단은 전혀 모르고 있으니 이것이 참으로 오늘날의 백성을 구제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만약 이 법을 사방에 반포하면, 방납의 폐단이 머지않아 저절로 개혁될 것이다"

그 역시 방납의 폐단을 알고 있었고, 일찍부터 그걸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낸 거죠. 백성들은 쌀을 대신 내고 관청에서는 그 쌀로 물건을 사서 비축했다가 나라에 바치는 방식입니다. 뭔가가 떠오르죠? 대동법입니다.

(4) 국방
"서울이 복심이라면 사방은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울타리가 튼튼해야지만 복심이 믿는 데가 있어 안정을 누릴 것인데, 지금 사방의 여러 고을들이 모두 잔폐되어 있는 데다 감사까지 자주 바뀌어 백성들이 도주가 어느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가령 포악한 적이 불의에 나타나 사납게 쳐들어온다면 감사가 비록 창졸간에 절제를 하려고 해도 백성들이 서로 믿지를 않아 명령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니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사실 이들 얘기는 크든 작든 국방에 관련된 것이고, 그가 주장한 것도 이런 것들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그를 통해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잘 살고 국고가 튼튼해야 국방을 잘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지 않으니 개혁해야 했고, 수령이 너무 자주 바뀌어서 정책을 길게 끌 수 없고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없으니 수령의 임기를 개혁해야 하는 것이고, 인재가 없으니 차별을 완화해서 서얼과 천민도 올라갈 길을 주어야 되는 것이라는 거였죠. 또한 그는 적에게 맞서기 위해 기병을 양성할 방법을 논하면서 백성들에게 말을 받고 군역을 면제하자는 것, 무역을 통해 중국부터 여진족에 이르기까지 말을 널리 구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섬에서 말을 기르고는 있지만 전쟁에 곧바로 쓰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거였죠.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이는 "십만양병설"이라는 단어 하나로 대표되고 있습니다.

(5) 결론
"전하께서는 선을 좋아하는 것이 지극하지만 도를 믿는 것은 독실하지 못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폐단이 오랫동안 쌓인 뒤에 계승하였으니 의당 경장시킬 계책을 강구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옛법을 고수할 뿐만 아니라 한때 잘못 만들어진 법규라 할지라도 시행한 지 오래된 것이라면 성헌으로 인정하여 더욱 경건하게 준수하므로 해독이 온 국내에 미치는 데도 돌보지 않고 있으니, 이 나라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성군 시대를 만나서도 끝내 도탄의 고난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입니까."
"옛날 제갈양은 ‘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왕업 역시 망할 것이니, 그저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적을 치는 것이 낫다.’ 하였습니다. 신 역시 ‘경장하지 않으면 나라는 필시 망할 터인데 그냥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경장하는 것이 낫다.’고 말할 수 있으니 경장하여 잘 되면 사직에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이가 문제 삼은 것은 "지금이 나라의 중기"라는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 이후 뻗어 올라가던 나라의 힘이 정점을 찍고 각종 폐단을 낳으며 주저앉을 때라는 거죠. 예전에 흔히 나오던 제 2의 건국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거였습니다. 이를 위해 옛 법을 지금에 맞게 고쳐야 된다는 거였구요. 이 무렵 니탕개의 난이 일어납니다. 이이는 병조판서에 있으면서 북방의 흐름에 주시했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생각을 한 것이죠.

십만양병설을 대표적으로 꼽지만, 이건 실제 있었다 하더라도 이 중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애초에 이이가 주장했던 10만이 정규군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죠. 그의 말 어디를 봐도 이게 "정규군"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없으며, 그가 임진왜란을 대비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가 대비한 건 어디까지나 북방이었죠. 이 점을 볼 때 십만양병설이라는 건 임진왜란이라는 현실 때문에 지나치게 부각된 것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십만 양병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고 볼 순 없습니다. 이이는 쭉 개혁적인 입장이었고, 그에 반대한 류성룡은 역시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했으니까요. 다만 어떤 형태로든 십만양병은 있었더라도 우리가 아는 식은 아니었을 거라는 거죠.

십만양병설에 대해서 경기도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상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고 적은 이는 송시열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이런 구체적인 내용을 볼 수 없죠. 십만양병 = 상비군설을 만든 사람은 송시열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십만"이라는 숫자에 연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이의 주장은 국방을 위한 양병, 그리고 국가와 백성을 위한 양민이었습니다.

재밌는 점은 이런 십만양병을 신나게 띄운 서인은 정작 이이가 그리도 걱정했던 북방의 위협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 했다는 점이죠.

그리고 너무 당연한 면이지만, 이와 함께 책을 많이 간행하고 전국에 보급해서 성리학을 퍼뜨릴 것 역시 건의합니다. 조선 내내 강조된 백성 교화였죠.

5. 나라를 그르칠 소인(誤國小人)
"이 상소문의 내용은 나라를 위한 정성이 참으로 지극하다." (선조 16년 2월 23일)
"경은 경장과 개기(改紀)를 부단히 주장해 왔었으니 이것은 바로 경의 평소의 생각인 것이다. 지금 경이 참으로 기발한 계책을 세워 전래의 폐습을 모조리 혁파하고 이어 양병의 계획을 세운다면 국가에 있어서 다행일 것이다. (선조 16년 1월 22일)

이 무렵 선조도 이이의 말에 이렇게 반응하며 적극 지지할 것을 거듭 밝힙니다. 서얼과 천민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이가 말을 하자마자 바로 받아들일 정도였죠. 하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 재밌는 게 서인에 의해 만들어진 선조 수정 실록에서는 오히려 "이거 어렵지 않겠는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죠. 뭐 그게 위의 말을 하기 4개월 전이긴 했습니다.

이이의 평소 태도, 아무래도 양반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정책들, 너무 개혁적인 모습 등에서 이미 동인에게 찍힌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심심하면 꼬투리 잡고 이이를 탄핵하기 시작했죠. 예를 들면 이이가 경연에서 말 하기엔 너무 많으니 선조와 독대할 것을 청했는데, 그걸 또 문제 삼습니다. 또, 그가 군마를 바치는 자의 군역을 면제하는 방안에 대해서 선조의 허가가 떨어지기 전에 명령을 먼저 내렸는데 이게 문제가 됐고 (이게 잘못은 맞죠 - -) 병이 있어서 승정원까지 못 가고 내조에만 들렀다가 집으로 간 일이 있었는데 이것도 문제가 됐습니다. 이 때 선조는 어의를 보내 진찰하라고 명령을 내렸었죠. 건수가 잡혔습니다.

삼사는 힘을 합쳐 이이를 탄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이가 그렇게까지 방자할 줄이야 신들이 처음에 생각이나 했었겠습니까. 다만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다보면 해가 갈수록 점점 깊어져서 결국은 한 세상을 겸제하고 한 나라를 구솔하여 못하는 짓이 없게 될 것이니 이이의 죄가 이 점에서 크다 하겠습니다." (선조 16년 6월 19일)

이 과정에서 나온 말이 바로 오국소인, 나라를 그르칠 소인이라는 거였죠. 선조는 전에 없이 이를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 전부터 이이는 신진의 선비들이 시속에 따라 당부하는 꼴을 싫어하여 그들을 재억하기 위한 진론을 누차에 걸쳐 해왔는데, 이 때문에 시론에 미움을 받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중략) 소중한 것은 공론을 담당하는 것뿐이니, 자기의 사사로움을 달성하기 위하여 배빈과 경함을 일삼는다면 그것이 어디 대간으로서 할 일인가. 경들이 만약 이이를 일러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죄를 분명히 밝혀 그를 물리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를 공격하는 자가 소인인 것이다." (선조 16년 6월 20일)
"썩은 선비의 말이라서 웃음이 나올 뿐이니 그냥 두라" (선조 16년 8월 21일)

이 과정에서 성혼이 이이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렇게 반응하죠.
"그대의 상소를 보니 충분이 격렬하여 만약 간사한 무리들이 듣게 한다면 충분히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것이다" (선조 16년 7월 15일)

그러면서 그는 송응개, 박근원, 허봉 등 탄핵의 주도자를 처벌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말까지도 나오죠.
"이이를 일러 당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러한 말로 내 뜻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중략) 지금부터 너희들은 나를 이이·성혼의 당이라고 부르도록 하여라. 그래도 너희들은 다시 할 말이 있는가? 이이·성혼을 헐뜯는 자는 반드시 죄를 내리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선조 16년 9월 3일)

선조의 강력한 신임, 하지만 이이는 이런 공격을 받고 사직을 몇 차례 청합니다. 오국소인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파주로 가는 건 허용했던 선조지만, 그가 아예 사직하려 하자 이런 말로 그를 다시 부르려 했습니다.
"아아, 하늘이 우리 나라를 태평의 치세로 만들고 싶지 않으신 것일까? 어찌하여 경과 같은 사람으로서 때를 얻지 못한단 말인가? 아마 하늘이 경으로 하여금 마음을 다그치고 참을성을 길러 아직 부족한 점을 닦게 하여 장차 이 나라가 곤경에 처했을 때 구원해낼 책임을 맡기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중략) 경은 속히 와서 나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회포도 겸하여 아뢰라. 뭇 사람의 뜻을 위안시키는 것은 이번 한 걸음에 있으니 속히 역말을 타고 올라오라" (16년 9월 5일)

하지만 그는 다시 올라오지 않습니다. 10월에 다시 이조 판서를 내리지만 이렇게 답 하죠.
"신은 젊어서부터 병이 많았는데, 노쇠해지면서 더욱 심하게 혈기가 소모되고 정신이 감소되어 잠시만 노동해도 바로 현기증이 발작합니다. 지금 지혜와 생각을 다 짜내어 위로 상의 일을 보필하고 싶지만 정신력과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힘을 내어 조정의 반열에 나아가 미력이나마 바치고 싶지만 체력이 따라가지 못하니,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첫 번째는 자기 능력이 부족하다, 두 번째는 제대로 된 의견이 힘을 얻지 못 하니 자신 없다, 세 번째는 자기가 다른 사림의 신임도 받지 못 하는데 어찌 하겠냐는 거였죠. 네 번째는 첫 번째처럼 그냥 겸손의 뜻으로 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불과 석 달 뒤인 선조 17년 1월, 1583년 그는 눈을 감습니다. 어쩌면 정말 자기의 목숨이 다 했다고 느낀 것일지도요. 향년 49세. 젊지는 않았지만 황희부터 이황에 이르는 위인들을 보면 아쉬운 마지막이었죠.

34살부터 관직에 오르면 경장을 부르짖고 임금이 따르지 않으면 사직해서 학문과 교육에 힘 썼습니다. "임금 자신에게 충성하면 배반하게 되지만 뜻에 충성하면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죠. 그렇게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뛰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힘을 얻게 된 것은 불과 1년 정도. 시대의 병은 치유되지 못 했고, 그가 걱정했던 북이 아닌 남쪽에서였지만 병란은 일어났으며, 그가 그렇게 막으려 했던 붕당은 가속화 되었습니다.

6. 기축옥사
이이가 죽은 후 동인은 죽은 그와 박순, 성혼, 정철에 맹공을 가했습니다. 힘을 잃은 서인은 끌려갔고, 정여립과 정개청 등 동인으로 옮기는 자도 많았죠. 하지만 이제 든든한 아군은 계속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조헌, 서익, 조광현 등으로 대표되는 이이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된 거죠. 그들은 스승을 보호하며 동인에 역공을 가합니다. 하지만 동인의 힘은 여전히 강했고, 그들은 다시 심의겸을 공격하죠. 이 때 선조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심의겸과 박순, 정철 등이 당을 맺었고) "이이·성혼과 같은 위인 역시 혹은 친척의 정분이나 혹은 교유의 친밀한 것으로 그들의 농락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선조 수정 18년 8월 1일)

이이의 삼년상이 끝나기도 전이었습니다. 이를 보면 이전에 보여줬던 이이에 대한 신임 역시 진심이었는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이를 통해 정철 등 서인은 대거 몰락하고 동인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러고도 조헌 등은 계속 항의하는 상소를 올리죠. 이 과정을 통해 서인이라는 존재가 구체화됩니다. 20년 3월에 조광현 등이 올린 상소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죠.

[심의겸과 아이들(윤두수 등)] -> [서인을 구원하는 자(정철 등)] ->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 자(이이, 성혼)] -> [이이와 성혼을 높이는 자(조헌 등)]

이것이 서인의 변천과정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신진 사림 동인에 반대된 소수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던 서인은 이이라는 구심점을 가지게 되면서 하나의 확실한 당이 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인을 만들어 준 것이 동인이었습니다. 그들로서는 사림이 등장한 이후 마법의 말이 되었던 "붕당"과 "소인"이라는 말로 그들을 아예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입니다만... 선조는 그걸 원하지 않았죠.

1589년, 선조 22년에 크나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정여립이 역모를 꾀한다는 거였죠. 그가 정말 역모를 꾀했는지, 관련자는 누구인지도 알지 못 할 이 사건은 크게 확대됩니다. 정철을 비롯한 서인이 돌아왔고, 선조가 여기에 힘을 넣어줍니다. 동인의 과격파인 이발, 최경영 등이 죽었고, 2년간의 옥사를 통해 10여명의 동인이 죽고 3명이 유배당합니다. 관련돼서 죽은 이도 많았다고 하죠. 서인은 이를 통해 확실히 거대한 당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붕당정치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붕당을 막으려 노력했던 이이는 서인의 종주가 되었구요.

7. 뒷이야기
이이의 정책이 얼마나 옳았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힘을 가진 시간이 정말 짧았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그가 다른 유학자들과 보여준 차별성과 나라를 고쳐 보려 했던 태도는 높이 평가 받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군제 개혁이 임진왜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전 임진왜란 글을 보면 알 수 있듯 조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전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걸 따지더라도 국방에 대한 노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붕당에 미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십 년만 더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IF 놀이에 가장 맞는 인물이 아닐까 합니다. (왕으로 보면 문종이구요) 그가 죽은 1583년은 임진왜란 10년 정도 전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막 천하를 먹기 시작할 때였으니까요.

또 하나 재밌는 점은 그가 주장한 것들이 후대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실현이 됐다는 점이겠죠. 시대의 요구라는 게 정말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 율곡 이이 편을 마치겠습니다. 뒷이야기나 몇 개 해 보죠.

- 대한민국 해군은 1만톤급 이지스 구축함(순양함? -_-;) [2번함]의 이름을 율곡 이이라고 짓습니다. 뭔가 노린 걸까요. 다만 이걸 일본식으로 읽으면 야한 말이 된다고 그 쪽에서 이걸로 놀린다는군요. 가엽고 딱한 자들 -_-

-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표본이지만, 남편에게 순종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동계만록을 보면 그녀가 죽을 때 남편 이원수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참 대단하죠. 공자부터 증자, 주자의 예를 들며 그들도 재혼하지 않았다면서 남편의 입을 다물게 만들죠. 그녀는 확실히 조선의 대표적인 인텔리 여성으로 봐야 될 것이고, 이이가 여성 교육을 주장한 것도 그 영향이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아니 애초에 유교 사회의 현모양처에 맞추기 위해 그녀의 모습을 바꿨거나, 우리가 아는 "유교의 현모양처"라는 이미지 자체가 달랐다고 봐야겠죠. 뭐 결국 그 남편 이원수는 재혼하고 이는 이이가 절에 들어가는 원인이 됐다고 봐도 되겠죠.

- 이황과 이이의 밤일에 대한 좀 야한 얘기가 있는데 서술하진 않겠습니다. 엔하위키 참조하세요. (...) 뭐 출처가 뭔지는 모르겠으니 야사 내지 전설이 아닐까 싶은데요. 애초에 한 세대 정도 차이가 있는 인물들이니까요. 생각해보면 화폐에 나온 5명의 인물 중 세종대왕을 뺀 4명이 거의 동시대 사람이네요. 짠 건가요.

- 원균옹호론이라는 괴팍한 이론 때문에 선조 수정 실록에 대한 말이 많은데, 실록만 봐도 그게 이해가 갑니다. 내용이 정말 적거든요. 한 달 중에 절반만 남은 것부터 하루이틀만 있는 것도 있습니다. 아예 없는 달도 있을 걸요 -_-; 그래도 심의겸을 딱히 편 들지 않고 정철을 신나게 욕 하는 모습 등을 보면 그들도 노력한 게 보입니다. 분명 서인의 필요성도 있었지만 명분이 있는 거였고, 그냥 실록도 동인이 만들어서 편향성이 심각합니다. 특히 이이에 대해서는요. 양 쪽 다 편향적이라고 봐야 됩니다.

- 그에 연관되어서 십만양병이 실록에 없다고 날조된 거라는 인식은 곤란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게 이이의 주장의 요점이었다고 보는 것도 곤란하죠.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단순한 얘기가 아니라 군제 개혁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해야겠죠.

- 기축옥사에 관련돼서 이를 통해 "호남 사림의 씨가 말랐다"고 하는데, 이 역시 과장으로 보입니다. 정철부터가 호남 출신이었고, 동인을 공격함에 있어 호남 유생들의 힘이 컸습니다. 그저 정여립이 호남이었고 정철의 정적 이발이 호남이어서 호남이 집중적인 타겟이 됐을 뿐이죠. 이 때문에 전라도가 반역향이 됐다고 하는데 이런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역향에서 하는 것처럼 어느 고을의 등급을 낮추고 전라도의 이름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여립은 전주를 기반으로 했고, 충청도가 청홍도, 공충도가 된 것처럼 전주라는 이름이 없어졌어야 했는데 말이죠. 이 때 호남의 사림의 없어졌으면 효종 때 "왜 호남만 감싸느냐"는 일갈은 뭐였을까요? 몰락한 건 호남의 동인 뿐이었고, 그 후에도 서인의 텃밭이었습니다. 왠지 현대의 전라도 상황에 맞춰서 더 부각시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옛날부터 우리는 한의 민족" "옛부터 우리는 일본에게 당하면서 살았다" 이런 것처럼요. 이런 건 지양돼야겠죠.

-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정말 흔히 알려진대로 수백명부터 1천명까지 죽은, 4대 사화를 다 합쳐도 더 많은 희생자를 낸 거대한 옥사일지 하는 것 자체도 의문입니다. 동인 입장에서 쓴 선조실록에도 이런 숫자는 나오지 않고 최경영 등 개인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정작 수백명이라는 말이 나오는 건 서인의 입장에서 쓴 수정실록이구요. 일천명이라는 말의 출처 자체를 모르겠네요. 역모에 관련된 큰 옥사이긴 했지만 그게 천명 수준의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을지는 회의적입니다. 수정실록에서도 정철을 나쁘게 보고 기축 옥사의 피해를 강조하는 걸로 봐서 크긴 컸던 것 같긴 하네요. 그런 면에서 후대의 서인들에게 정철은 버림말이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도저히 쉴드를 칠 수 없으니 포기도 할 겸 그걸 통해 나름 객관성도 확보할 겸으로요.

- 이후 동서인은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합니다. 그 중심은 정철, 이산해 같은 각 당의 영수들이 아닌 선조였구요. 기축옥사 때 일을 크게 확대한 것도 선조였고, 이산해, 류성룡, 정인홍 등 각 파의 영수들에게 불길이 번지는 걸 막은 것도 선조였습니다. 그리고 기축옥사가 끝날 무렵에는 뜬금 없이 정철을 실각시켰고, 왜란 중에는 또 전쟁의 책임을 물어 서인을 대거 등용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런 돌려막기는 계속됩니다. 한 신하에게 권력을 몰아주지 않기 위한 정치적인 계산이었죠. 광해군은 이걸 제대로 이어받지 못 해서 이이첨에게 큰 권력을 줘 버렸구요. 분명 권력의 집중을 막는 데 도움은 됐겠습니다만... 이황, 기대승, 이이 등부터 시작해서 류성룡,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까지도 이어지는 (에이 그 분은 옛날에 얘기 많이 했잖아요~) 세종대왕 대와 비견될만한 인재가 쏟아진 시대임에도 딱히 성과가 보이지 않는 건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원흉은 선조! _-)

- 이이에 대한 비판에는 "너무 서인 중심으로 당쟁을 해결하려 했다"는 점이 있습니다. 전 이것을 결과론이라 봅니다. 그는 정철에게도 욕 먹었으니까요. 그 때 다수는 동인이었고, 이런 상황에서는 중립을 아무리 지키려 해도 서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늘 한 말이 "별 거 아닌 다툼이다" "당사자끼리도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거였는데 어쩌면 그게 진심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 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사림은 분열되지 않을 것이다는 이상주의일까요? 그의 최대 단점으로 꼽을만한 건 역시 정치 싸움에 약했다는 거라고 봐야 될 것 같네요. 만약 서인이 처음부터 동인보다 유리했다면 이이는 동인에서 한 파벌의 종주로 남아 있지 않았을까요?

- 저는 (솔직히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이렇게 가운데에서 노력하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그에 대한 비판, 그의 정책의 비현실성에 대한 이론은 얼마든지 있겠습니다만, 저로서는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이죠. 마침 날도 잡았겠다, 이렇게 이이 편을 써 봤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전 편에서 붕당의 마지막을 썼는데 이번 편에서는 붕당의 시작을 썼네요. 사림의 역사와 붕당의 역사... 임진왜란 쓸 때부터 써 보고 싶은 건데 참 도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도전해 보고 싶네요.

- 마지막으로 하나 더 추가. 본문 전체에 걸쳐 탁상공론보단 현실적인 걸 원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정작 그는 이기일원론으로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유학자로 추앙받죠. 먼치킨은 먼치킨이었습니다.

- 그럼 마지막으로... 외쳐!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8-2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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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봐라
11/08/22 22:26
수정 아이콘
선리플 후감상 하겠습니다.
외쳐 EE!
11/08/22 22:38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외쳐 이이!
11/08/22 22:4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배경지식이 짧은 저도 재밌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아요!!
11/08/22 22:48
수정 아이콘
황시황분 사수 실패....
정말 당시에 서인이 다수 였다면 이이가 동인으로 취급당했을것 같군요-_-
현시대만 봐도 비슷한예가 많으니까요.
Francesc Fabregas
11/08/22 22:55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외쳐 이이!!
Je ne sais quoi
11/08/22 23:0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뭐 지금 시대에 대입해도 크게 다른 말은 없어 보이는군요. 역사는 반복되서 그런건지 아니면 지금 시대가 엉망이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네요...
진리는망내
11/08/22 23:04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제 생각에 선조는 좀 변태같아요...

어쨌든 EE!!
물여우
11/08/23 00:09
수정 아이콘
외쳐! EE!!

잘봤습니다. 세종 대왕(만원), 율곡 이이(오천원)~ 이제 퇴계 이황(천원)이 남았군요. 기대하겠습니다.
꺼뱅뱅
11/08/23 00:43
수정 아이콘
김상헌은 "신하는 임금의 뜻을 좇는 것이지 행보를 좇는게 아니다" 라고 했었는데
세종대왕이나 정조, 이이, 조광조 등의 분들 역시 그러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유학의 진정한 본 뜻은 확고한 신분제 확립 같은 곳에 있는게 아니었는데 말이죠...

그나저나 선조입장에서 이이느님은 정말 피곤한 신하였겠네요;
매번 저렇게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다면 정말 짤리지 않은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봐도 될 정도네요
나이트해머
11/08/23 00:54
수정 아이콘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실학자인 유형원은 '경장' 의 시초를 이이로 보고 있는 걸로 압니다.
서인이 보수적이고 남인이 개혁적이라는 말을 하곤 하지만 실제로 정책방향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지요. 근데 정작 '뛰어난 실무 관료자' 는 남인층에 더 많아 보인다는 게 또 아이러니.(...)
Noam Chomsky
11/08/23 09:1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깡다구 센 현실주의자 이이;였네요. 다음편도 기대합니다. 건필하세요.
무리수마자용
11/08/23 19:15
수정 아이콘
물조에서만 보다가 간만에 로그인해서 추천 날립니다 ^^
Judas Pain
11/08/26 14:47
수정 아이콘
초대의 유가도 그렇지만 신유가-주자학-성리학-송학의 사대부론은 본래 신분제 강화보단 약화에 가까운 사상이고
개념상 황제를 제외하면 다 평민입니다. 공부 잘해서 과거에 합격하면 사대부지요.

그러니 향원이 아닌 진지한 유학자라면 신분제에 연연하지 않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조선이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삼았음에도 노골적으로 혈통에 따른 반상 신분제가 유지된게 위선적이라 봐야겠지요.

결국 한반도의 강고한 귀족 전통으로 인해 신분제와 결합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봐야할 겁니다.
형식규정상이긴 하지만 조선에서도 양인이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대대로 몇번 반복하면 양반으로 올라갈 수 있던 걸로 기억하네요.

그러니 한국에서 성리학이 조선의 억압적 신분 제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건 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신유가가 등장 당시엔 혁신적인 사상이었고 고려조에 수입되었을때도 사회모순을 어느정도 진전시키는데 기여를 한 시의성 있던 사상이라고 봐야겠지요. 너무 늦게 물러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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