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많이 풀렸네요.
봄이 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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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일이 있어도, 그 또한 꾸역꾸역 지나가리.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험 기간도 막바지에 들어섰다.
오늘 남은 한 과목 시험만 치면, 잠시동안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래봐야 다시 밀려오는 과제에 정신차리고 보면 기말고사겠지만, 어쨌든
당장 며칠, 몇 주라도 여유가 생긴다는 점이 중요했다.
"야, 함주찬."
"?"
복도에서 마주친 주찬이를 불러세웠다.
역시 시험 끝난 날은 소주 한 잔 꺽어야 제 맛이지.
"나 오늘 시험 끝인데 한 잔 고고?"
"안 돼, 난 다음 주까지 시험 남았다고."
"몇 개 남는데?"
"3개."
대학교 시험 기간의 단점 중 하나는 사람마다 제각각 끝나는 시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남은 시험이 2개 정도 였어도 어떻게 졸라봤을텐데, 주찬이는 일단 안되겠다.
"왜 이렇게 늦게 끝나냐?"
"나도 몰라. 아 짜증나. 어쨌든 나 공부하러 간다."
주찬이는 그대로 사라졌다.
기분 좋게 시험을 끝내고 오늘 하루는 진탕마시고 싶었는데, 아쉽다.
거기에 이번 학기가 끝나고 나면 1년동안은 얼굴도 못 볼 녀석인데.
"형 멀뚱멀뚱 서서 뭐하고 있어요?"
들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현중이 녀석이 눈을 꿈뻑거리고 있다.
"야, 오늘 시험 끝나냐?"
"에, 뭐 일단은 거의요. 다음주에 교양하나 남거든요."
"술 한 잔 할래?"
"후후후후후."
드디어 미친건가?
현중이는 다짜고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든지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끽끽댔다.
"드디어 미쳤냐?"
"후후후. 그게 아니고요. 오늘은 제 인생 최고의 날이랄까? 어쨌든 오늘은 안 돼요."
현중이 녀석 연신 싱글벙글인 게, 안 들어도 뭐때문에 그런지 예상이 간다.
보나마나 여자랑 술 마시는 거겠지.
"안 물어봐요?"
"여자랑 술마시는 거 빼면 나랑 술마시는 걸 마다할 녀석이냐?
보나마나 여자애 하나 잡고 술 마시는 거겠지."
"크크크. 여자라도 어떤 여자인지가 중요한거죠. 저번에 말했던 하얀이 기억하세요?"
류하얀이었나. 분명히 현중이가 예쁜 신입생들 중 한 명으로 거론했던 이름이었다.
과생활을 잘 안 한다더니, 정말로 아직까지 얼굴 한 번을 본 적이 없었다.
"이름만 대충 기억난다."
"어쨌든 전 그렇게 됐으니 다름 사람 찾아보세요."
현중이 놈한테 퇴짜를 맞다니, 오늘은 정말 술복이 없는 날인가 보다.
술은 무슨, 그냥 시험마치는 대로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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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시간까지 남은 두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1. 도서관을 간다. 2. 과실을 간다. 3. '카페 허니'로 간다.
정답은 당연히 3번! 수영이가 있든 '카페 허니'로 가는 것이다.
카페에서 공부도하고, 수영이도 보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시험 기간임에도 좋았던 점을 뽑으라면, 역시 남는 시간마다 카페에서 수영이를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서오세요. 카페 허니입니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수영이가 고운 목소리로 손님을 반겼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싱긋 웃어주는 모습이 사람을 설레게 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 한 뒤 수영이가 잘 보이는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후우. 저렇게 아메리카노를 열중해서 만드는 모습이라니.
새삼 느끼지만 수영이는 정말 예쁘다. 땀 흘리는 모습마저 아름답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진동벨과 아메리카노를 교환하며, 수영이와 눈빛도 교환한다.
서로 말을 섞진 않지만, 소소하게 주고 받는 눈빛이 오히려 심장을 자극했다.
한창의 점심시간이 끝나고, 북적이던 손님들이 하나 둘씩 잦아들면 수영이도
조금씩 여유를 찾았다. 바로 그 순간이 내가 가장 기대하고 바라던 순간이었다.
카페 사장님이 있어서 직접 대화는 못하지만 서로 같은 공간에서 카톡을 주고받았다.
- 시험 잘 보고 있어요?
- 그럭저럭? 어쨌든 오늘이 시험 끝나거든.
- 와 좋겠다. 오늘은 그래도 편하게 놀겠네요.
슥, 수영이를 본다. 때맞침 마주친 눈빛에 수영이는 싱긋 미소지었다.
으아, 정말 심장에 해로운 미소다.
- 놀고 싶은데, 오늘 친구고 후배 녀석이고 다 퇴짜맞았어.
수영이를 보며 우는 시늉을 해보였다. 수영이는 내 모습에 다시 한 번 싱긋 웃더니
카톡을 톡톡 두드렸다.
- 음, 이래서 사람이 공덕을 쌓는게 중요하다고 하는 건가 봐요!
- 무슨 소리야. 그럼 아무도 나를 퇴짜 놓을 리가 없는데? 내가 전생에 나라도 구했는데.
수영이가 풉하고,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 전생에 어느 나라를 구했는데요?
- 비밀이야. 너무 많이 알면 다쳐. 천기누설이다?
- 에이, 하나도 못 믿겠는데요?
키득키득. 별 것 아니 내용일지라도 그것이 수영이와 얘기하는 거라면 실없이 웃기다.
이렇게 좋아하는 표정 지어도 되는건가 싶을 정도로.
- 어쨌든 이따 시험보러 가고 바로 집이나 가야지. 시험도 끝나는 날인데... 시무룩
- 음...
지금은 수영이 얼굴이라도 봤으면 됐지 싶다.
- 그럼 시험 끝나고 잠깐 기다릴 수 있어요? 늦을지도 모르지만 저랑 같이 마셔요.
오 주여!
내가 진짜로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걸까? 세상에, 하늘에서 호박이 넝쿨째 떨어졌다.
참 사람이란 게, 간사하게도 술 마시자던 권유를 거절한 주찬이와 현중이가 새삼 고마웠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하더니, 진짜 이렇게 대박이 터질 수도 있는거구나.
- 싫어요?
- 아니! 나야 완전 좋지!
- 근데 아마 통금때문에 오래는 안 될텐데, 괜찮아요?
완전, 완전 괜찮다. 한 두시간만 내주더라도 감지덕지였다.
- 응 괜찮아. 그럼 시험 끝나는 대로 연락할게!
- 네 저도 알바 끝나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흐뭇함과 뿌듯함에 웃음이 키득키득 터진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 현중이 녀석이 왜 그렇게 미친놈 마냥 키득거렸는지 알겠다.
마지막 시험을 치러 가는 발걸음이 정말 이보다 가벼울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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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우우우우.
불길한 진동 소리. 왜 슬픈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을까.
소희였다.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나라는 것은 욕심일테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좀 넘어가 줬음 좋겠다.
- 왜?
- 오늘 시험 끝나지?
두근두근. 아니야, 안 돼. 제발!
- 음.. 왜?
- 시험 끝나는 거 맞네. 크크.
안 그래도 슬이 보러 가는데 겸사겸사 간만에 학교에서 볼까?
미치겠군. 소희 얘는 어쩜 옛날부터 타이밍을 이렇게 예술적으로 맞추는 지 모르겠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 나 약속 있는데?
- 괜찮아. 그래봐야 저번에 봤던 그 친구 분이나 후배 분이랑 술 마시는거 아냐?
애석하게도 아니거든?
어쨌거나 진퇴양난이다. 걔네랑 마신다고 하면 분명히 들를려고 할테고, 아니라고 하면
꼬치꼬치 캐물을 텐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 어쨌든 이따 봐.
- 야, 야! 야. 은소희!
제 할말만 해버리고 내 톡은 보지도 않는다.
후, 이렇게 된 이상 소희한테 맞을 각오를 하고 소희 연락을 씹는 수 밖에 없다.
강의실에 들어가 시험칠 준비를 하는데 마냥 기쁘지가 않고 착잡한 기분이 든다.
분명히 기쁘긴 한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나를 감쌌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지금은 좋은 생각만 하자.
당장 이 시험만 끝내면 수영이와 단 둘이 술을 마실 수 있다고.
시험을 치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몰랐다.
사람의 우연이 그토록 지독한 필연일 줄은.
37 끝. 38에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늦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