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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5/06 20:54:00
Name 할러퀸
Subject [일반] [모난조각] 봄이라서 그를 봄



※본 글은 피지알 글쓰기 소모임 모난조각 카페에 올린 본인의 글을 수정, 퇴고하여 올린 것입니다.


※선정주제 : 일기


※ 염장질이 들어가 있으므로 주의를 요합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러 들어온 이상 댓글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크큭)


























새벽에, 눈이 떠졌다. 시계를 흘낏 보니, 4시 50분이다. 맙소사, 5시도 되지 않았다고? 창 밖은 한 밤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어두컴컴한데?그런데 나는 왜 내리쬐는 햇빛에 깜짝 놀란 좀비마냥 벌떡 일어나는 것인지. 거기다 일어나자마자 십 수년 동안 제대로 해 본적 없는 이불 정리를 자동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  그것도 콧노래를 부르며 말이지? 비음섞인 음정이 엉망이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쳇 베이커의 'I fall in love too easily'의 기본 멜로디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지.


후드의 지퍼를 올리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운동화 끈을 죈다. 집 앞에는 민주화의 성지를 기념하는 조각 공원이 있고, 나는 그곳을 한 바퀴 산책할 예정이다. 예정이라고 말하기엔 어색할 정도로 익숙한 루틴이 되었지만. 정확히는, 한 달째다. 그를 만난 지 한달이 되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4월의 끝자락이다.


이슬이 내려앉아 축축한 공원의 풀 냄새가 더없이 상쾌하다. 수 없이 지나쳤던 길은 익숙하지만 똑같은 풍경이 아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다채롭게 물들여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듣는 곡의 목록은 조금 쑥쓰럽지만, 아이돌 노래 일색이다. f(x), 오마이걸, 러블리즈, 레드벨벳, 샤이니, 아이오아이 , 트와이스 (사나쨩 사랑해)  많은 노래들 중에서 내가 재생버튼을 누르는 곡은 오마이걸의 coloring book이다. 단순히 가사 때문에 끌렸다. 온 세상이 봉숭아 (color), 너로 물들어  대략 이런 가사의 정신없고 시끄러운 노래. 어른들은 안 좋아할 노래. 사랑에 빠진 소녀들의 재잘거림에 나도 모르게 빙의한 것인지. 나잇값을 못하고 실실 웃는다. 4월이니까, 봄이니까. 이정도는 괜찮잖아.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들어오니, 카톡이 와있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내라는, 별 거 아닌 것 같은 내용이지만 바로 이 카톡을 위해 내가 새벽에 눈을 번쩍 떴던 것이다. 일찍 출근하는 그의 시간대에 맞춰서 답장을 하기 위해, 내 신체는 라이프 스타일을 완전히 새벽형으로 바꿔버렸다. 이런게 가능하리라고는 나도 생각치 않았다. 마치 그를 처음 만났을 때 '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이야' 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래. 잠깐만 한 달 전으로, 3월의 그날로 돌아가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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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오보에가 뭐에요? 둘 중에서 어떤 거죠?




그러니까, 내가 그 때 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극장에서 우연히 내 옆에 앉은 남자1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를 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하루종일 그를 생각하는 일도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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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나는 너무나 심심했다. 함께 공연을 볼 예정이었던 엄마는 피곤함을 이유로 티켓을 되돌려주었고, 나는 평소 그랬던 것처럼 홀로 극장을 찾았다. 클래식 공연이다. 이런 공연을 같이 볼 친구가 내 주변에는 없다. 경험을 공유할 대상이 없다는 것은, 딱히 외롭지는 않지만 심심한 일이다. 그래도 공연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비엔나 필하모닉 앙상블의 팜플렛을 뒤적이고 있는데 옆 자리에 누군가 앉는 게 느껴졌다. 앉든 말든. 그런데 혼자 앉는다. 나처럼 혼자 공연을 보러 왔다고? 호기심이 일었다. 왜냐면, 심심했기 때문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별개로 공연에 대한 호기심도 스물스물 기어올랐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것 치곤 조예는 없는 터라서 악기 구성에 나와 있는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매우 거슬리기 시작했다. 둘이 비슷한데.. 뭐가 오보에였더라? 옆을 흘낏 바라본다. 그도 팜플렛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혼자 보러올 정도면.. 나보다는 상식이 있지 않을까? 더구나 나는 젊은 성인 [남성][혼자] 클래식 공연을 보러 왔다는 것에 기이함을 느끼고 있으니까.



- 저 실례합니다만, 혹시 오보에가 뭔지 아세요?

- 네?

- 오보에랑 클라리넷이랑 헷갈려서요. 뭐가 오보에에요?



그 때,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멋지고 세련된 대답 대신에, 부끄럽다는 미소와 함께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런 공연 보러 오는 게 처음이라서요 ' 라는 맥빠지는 대답에 아 그렇구나. 저도 잘 몰라서 여쭤봤어요. 실례했습니다. 라고 황급히 대화를 수습하고 공연을 보려는데, 기분이 묘했다.  뭐지. 뭐지. 당초 궁금했던 오보에는 뇌 한구석으로 밀쳐지고 있었고 나는 이 묘한 기시감이 무엇인지 생각해내려 했다. 아 맞다. 얼마 전에 봤던 일본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의 미소를 쏙 빼닮았다. 굉장히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였는데. 남주가 상당히 괜찮았었지.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곧 공연이 시작되었다. 레퍼토리는 봄 답게 왈츠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불편하게 느껴지는 신발을 벗고, 곡이 끝날 때마다 정신없이 박수를 치기 바빴다. 그리고 인터미션 시간이 되었다. 아, 그런데 이제 알 것 같다. 오보에랑 클라리넷의 차이를 말이다.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가 부는 은은한 저음의 악기가 오보에고, 대머리 아저씨가 부는 맑고 높은 음색의 악기가 클라리넷이었지. 라고 생각하는 그대로 나는 옆자리의 남자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 저게 오보에고, 저어게 클라리넷인 것 같아요.



그때 나는 굳이 왜 다시 말을 건것일까? 그도 모른다고 했으니 내가 알아낸 것을 말해주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인가? 예비교사로서의 자질이 여기서 발현되는 것인가. 직업병도 직업병 나름이지 오지랖이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조금, 예상치를 넘는 것이었다.



- 잘 아시네요. 이런 공연 자주 보러 오시나봐요.


그리고 그 뒤로는, 어떻게 대화가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얘기하다보니 원래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일행이 있었고, 그것도 땜빵으로 대신 보러 온 것이었고, 영어 교사라길래, 영어 잘하시겠네요 영어잘하는 팁좀? 하다가, 공연이 끝나고 연락처를 받아가고 연락이 오고, 차를 마시게 되고, 영화를 보게 되고, 뭐 그리고 그렇게 사귀게 되고. (하필이면 교제를 시작한 날이 만우절이 될 뻔했던 것도 )어떻게 나에게 연락할 생각을 했냐고 나중에 물어보니, 처음에 그는 나를 사이비 종교단체의 관계자(..)가 아닐까 오해하고 공연을 보는 나를 관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내 내가 신발을 벗고 털털히 앉아 맹목적으로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보고 경계를 풀었다고 한다(..) 자기가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내가 공연에 푹 빠져 있었다나. 그리고 처음으로 차를 마시는 날, 영화를 보자는 애프터를 먼저 청하는 나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 고백을 결심했다고 한다. 뭐 그렇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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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라서 그를 보러가는 날이다. 하필 봄이라서 왈츠를 듣고 싶었고, 하필 봄이라서 낯선 이에게 말 걸기 좋은 계절이었고, 그렇게 봄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시작이 되었다. 이 이야기가 하나의 역사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스운 말이지만 마치 운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두 사람이 포갠 손이 잘 맞는다. 열 살 터울의 나이 차와, 내가 고시생이라는 사실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성당에 다니고, 내가 교회에 다닌다는 점도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봄이라는 것. 봄 밤을 걸어가는 연인들의 그림자가 우리들의 그림자에도 비쳐진다는 것. 서로 찾고 있던 사람을 만났다는 것. 서로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것. 그렇게 사랑을 시작했다는 것.


봄은 분명 끝날 것이다. 무덥고 습한 여름이 오고, 태풍도 오고, 가을바람에 코트를 여미고, 겨울에 내린 한적한 눈에 우리의 대화가 파묻힐 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시 봄이 오는 것처럼 우리가 시간을 견디어 낸다면, 이 사람과 쭉 함께여도 좋지 않을까. 봄은 시작이니까. 그를 봄으로써, 봄을 만끽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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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의 변

죄송합니다. 100% 실화입니다. 돌을 내려놓으시고 키보드로 배틀을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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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감는새
17/05/06 21:03
수정 아이콘
모난조각이 뭔가 했더니 던지라고 써놓은 거였군요.
마스터충달
17/05/06 23:15
수정 아이콘
글에서 꽃 냄새 나요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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