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야근에 신체 각 부분이 파업투쟁에 들어갔다. 눈은 자꾸 콕콕 찌르고 이따금 시야가 뿌옇게 변하기도 하고, 어깨에는 대왕 흑곰이 늘러 붙은것 같다. 다리는 이게 내 다린지 쇠뭉치를 끌고 다니는지도 모르겠고, 허리는 당장 눕게 해달라고 아우성이고...... 온 몸 구석구석, 손가락 관절 하나까지도 "이 양심없는 주인놈아 노동착취 다메요!!" 하고 울부짖는다. 사실 정신줄도 떨구기 일보 직전이라,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막차에 몸을 싣고 퇴근하다 보면 내릴 무렵에는 몸이 열차 좌석에 늘러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요사이 늘상 역에서 내리기 직전이면 돈지랄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몰캉몰캉 솟구친다. 오늘도 그랬다. 아, 진짜 피곤하고 만사 귀찮은데 내려서 택시 타고 갈까... 하는 생각도 잠시, 역에서 집까지 도보로 10분 거린데 조금만 더 참자, 하고 퍼진 몸을 겨우겨우 추슬러 집 근처 역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 위에 몸을 얹었다. 길고 긴 계단을 나대신 올라주는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서 무심코 뒤를 돌아 본 순간, 누군가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제였던가. 비를 싫어하는 나조차 가혹한 가뭄이 걱정스러워 제발 비 좀 내렸으면 좋겠다, 하고 빌고 빈 끝에 비가 왔었다. 그날도 야근 끝에 막차를 타고 겨우겨우 내릴 역에 도착해 에스컬레이터 위에 몸뚱아리를 얹어놓았었는데, 바로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검정색 고무신을 신고, 하얀 뜨개질 모자를 쓰고, 커다란 장바구니를 양 손으로 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허리가 완전히 굽어 고개도 잘 들지 못하셨다. 짐작컨대 그 허리는 120도쯤 굽었을 것이다. 코딱지만한 나의 딱 절반높이까지 오는 그녀는 양 손을 뒤로 돌려 그 두 손에 장바구니를 쥔 채였다.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는 1분 미만의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그 시간동안 속으로 계속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아, 힘드실 것 같은데 짐 들어드린다고 할까.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와서 짐 들어준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볼지도 모르는데. 괜찮다고 거절하시면 겁나 뻘쭘할 것 같은데. 근데 정말 엄청 힘드셔서 누군가가 도와주길 기다리실지도 모르는데. 아, 어쩌지.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는 동안 에스컬레이터는 2층에 도착했고 그녀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나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바쁜 일상 속에 빠르게 걷는 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할머니와는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내 옆으로 빠른 걸음의 중년 남자가 지나가며 그녀를 뒤돌아 보더니 쯧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불쾌한 기분이 들어 그 남자를 쏘아보았으나 그는 이미 개찰구를 빠져나가버렸다.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혀는 차고 지랄이야, 하는 욕지기가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개찰구 앞에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할머니는 여전히 개찰구를 향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찰나동안 어쩌지, 하고 다시 고민했으나 역시 선뜻 나서기가 쑥스러워 그냥 개찰구를 지나 역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습관처럼 역전 옆 골목에서 우산을 받쳐든 채 담배를 피웠다. 주홍색 가로등 아래 얕게 고인 물 웅덩이에 빗물이 낮게 튀어오르는 것을 쳐다보며 담배를 몇 모금 빨다가, 문득, 할머니의 손에 우산이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차 싶어 역 출입구쪽으로 되돌아갔다. 길빵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나의 신조도 까맣게 잊고, 손에 담배를 든 채 그대로 역까지 가보았으나 그녀는 없었다.
다른쪽 출입구로 나가셨나. 한번 위에 올라가볼까. 아직 역에 계실지도 몰라.
출입구 계단 앞에서 나는 또 한참을 망설였다. 얼마나 망설였을까, 나는 그냥 걸음을 돌려 다시 골목으로 되돌아왔다. 몇모금 빨지 못하고 재가 되어버린 담배를 버리고 새 담배를 태우면서, 나는 내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애썼다.
오분 가까이 되었을텐데 아무리 걸음이 느리셔도 역에 계실 리가 없지. 어디로 가셨는지 알고 찾겠어. 어쩌면 누군가가 역 앞에 마중나와 있었을지도 몰라. 그 할머니가 어디 사시는 줄 알고 집까지 데려다 주려고 그러냐, 너 내일 출근 안 할거냐?
하지만 담배를 다 태우고 집에 도착해 씻고 자려고 누울 때 까지도 그녀의 굽은 등과 불룩한 장바구니를 든 그녀의 손이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건강이 좋지 않은 편이라 밖에 있다보면 종종 돌발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길바닥에 그냥 쓰러지기도 하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기도 하고, 몸을 잘 가누지 못할 때도 있다. 부지불식간에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종종 겪다보니 대부분 아주 잠깐이라도, 조금이라도 전조가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갑자기 혈압이 뚝 떨어지면서 손발이 떨린다든가, 갑자기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든가, 갑자기 토기가 밀려오고 배가 찢어질 듯 아프다든가,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다든가, 하는 등의. 그런 상황이 차라리 길바닥에서 발생한다면 어딘가에 앉아서 쉬거나 할 수 있지만, 사람으로 가득찬 출퇴근 열차 안에서 발생하는 경우에는 정말 고역이다. 사람으로 꽉꽉 들어찬 열차 안에서 바닥에 주저앉고 싶어도 그럴 수 없거니와, 섣불리 내릴 수도 없으니. 그래서 그럴 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간절한 마음으로 내 앞에 앉은 이가 일어나주길 바라는 것 뿐이다.
제발 내려라. 아니면 내릴 때 안 되었더라도 제발 내 얼굴좀 쳐다봐주라. 안색이 말이 아닌걸 보면 내가 지금 아프다는 걸 알아봐 주지 않을까. 몸이 안좋으신 것 같은데 앉으실래요 하고 물어봐주라, 제발, 제발, 제발.
하지만 열의 아홉은 내 이 간절한 바람이 통하지 않는다. 제발 누군가가 도와주길 간절히 바래도 그런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들 사연 있고, 다들 힘든 삶 속에 있는 이에게 내가 너무 아프니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가끔 한번씩은 기적처럼 자리를 양보받는 경우도 있다. 주로 어르신들이다. 새하얗게 질린 내 낯짝을 보고, 아가씨 어디 아파요? 여기 앉아요, 하고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이지 눈물나게 고맙고 미안할수가 없다. 한번은 호호백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받았는데, 내가 속으로 그토록 애타게 바라던 도움의 손길을 이 연약한 할머니가 내밀어주었다는 것이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펑펑 울었었다.
남들에겐 별 거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그 사소한 순간이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는 순간일수도 있다는 걸 나는 잘 안다.
잘 아는데. 그런 내가. 어쩌면 빗속에서 혼자 힘들게 걸어가야만 했을지도 모르는 할머니를 그냥 두고 왔다. 그 사소한 순간이 그녀에게는 정말 간절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월요일 밤이 지나고 화요일 아침에도, 화요일 밤에도 그녀의 굽은 등과 짐을 든 그녀의 손이 생각났다.
그런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이다. 순간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그 앞에 가만히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조금 지나니 그녀가 천천히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렸다. 난 크지도 않은 키로 무릎을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마주보려고 애쓰면서,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할머니, 어디 사세요? 짐 무거우시면 들어드릴까요?"
그녀가 겨우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데, 참 예쁘게 웃고 있었다. 목구멍으로 울컥울컥 치미는 불덩어리를 꾸역꾸역 삼켰다.
"아니예요, 이거 가벼워요. 일부러 기다린 거예요?"
네, 그래도 들어드릴게요, 하고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어설프게 웃으면서 겨우겨우 네, 하는 말만 뱉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순간 그냥 정신줄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에게 뭐라고 말했더라. 아니예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랬던가. 아무튼 대충 얼버무리고는 도망치듯 역을 빠져나와 골목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고마워요, 하는 말을 듣는데 그자리에서 울어버릴 것 같아서 도망쳐버렸나보다.
괜찮다고 해도 들어다 드릴걸. 눈물이 좀 나도 할머니 안 보이게 울 수 있었는데 그냥 도망치지 말 걸.
또 후회한다. 두 번째 후회다.
세 번째 후회는 하고싶지 않은데,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오늘도 여전히 검정 고무신에 하얀 뜨개질 모자를 쓴 그녀의 굽은 등과, 초록색 장바구니를 쥔 그녀의 양 손이 잊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