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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11/30 10:24:10
Name 글곰
Subject [일반] 게으름이 때로는 목숨을 살린다
  나는 가습기와 친하지 않다. 가습기를 틀면 공기가 눅눅해지는 그 느낌이 싫었다. 축축한 공기보다는 차라리 건조한 공기가 나았다. 그러나 아내는 가습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아이가 태어나면 그 방에는 반드시 가습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아내를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우리집에는 가습기가 하나 생겼다.

  나는 가습기가 제때 물만 보충해 주면 알아서 돌아가는 물건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었다. 가습기는 시시때때로 청소를 해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물통을 열고, 부품을 분해하고, 베이킹소다를 푼 물에다 담근 후, 칫솔을 쥐고 박박 닦아주어야 했다. 그나마도 물통 속까지는 칫솔도 닿지 않았고 원반 틈새는 도저히 닦아낼 재간이 없었다. 애초에 가습기를 원한 적도 없었던 나는 매일매일 가습기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마트에서 기적의 상품을 보았다. 가습기 살균제. 그것도 원플러스원 묶음 판매.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가습기를 청소하는 건 균이 번식할까봐 우려해서이다. 그런데 저걸 쓰면 균이 없어지니 청소를 할 필요도 없다. 할렐루야! 나는 당장 그걸 사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날 당장 가습기에 투입했다.

  문제는 나의 게으름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살균제를 사기 전부터 나는 가습기를 청소하지 않았다. 게을러빠진 나는 대충 물만 부어서 씻는 시늉만 한 후에 아내에게 청소했다고 거짓말하며 슬쩍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런 게으른 나에게는 가습기 물을 갈 때마다 때맞추어 살균제를 넣고 흔들어서 섞어 주는 단순명료한 작업 자체가 너무나도 번거로웠다. 그래서 나는 나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칸트식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했다. 즉, 가습기 살균제를 보관함 안에 처박아놓은 채 잊어버렸다. 그리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대충 물만 행군 후 대충 물을 채워 갈아넣었다. 원플러스원으로 사서 두 통이나 있는 가습기 살균제는 단 한 번만 사용된 채 보관함 안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뉴스가 터졌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수백 명이 죽었고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족은 무사했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게으름, 물건을 사 놓고도 쓰기 귀찮아서 처박아버린 나의 게을러빠진 성격 덕분이었다. 그러니 감히 말하건대, 누가 나의 게으름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 글은 일하기 싫어서 쓴 글은 아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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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나시 쿄코
17/11/30 10:26
수정 아이콘
가습기 씻으시는 패턴이 저랑 비슷하십...
아무튼 다행입니다. ㅠㅠ
켈로그김
17/11/30 10:26
수정 아이콘
저도 그 당시 마눌님이 가습기 사라고 하는거..
쇼핑 결제가 귀찮아서 집에 있던 커피포트로 떼웠습니다 크크;;

귀찮지 않았다 해도 초음파식 + 살균제는 안썼겟지만;
17/11/30 14:59
수정 아이콘
전기요금 많이 나오지 않았나요? 크크
켈로그김
17/11/30 15:00
수정 아이콘
컴이랑 TV를 당시에 집에서 쓰지 않아서 누진적용이 거의 없었지요 크크;
17/11/30 10:26
수정 아이콘
저도 그랬습니다... ㅜㅜ 그것도 귀찮아서 안넣었는데 정말 다행이었죠.
17/11/30 10:32
수정 아이콘
저희는 윤남* 가습기 쓰고 있는데 청소랄 게 있는지 모르겠네요. 통만 그냥 물로 헹구고 손으로 뽀드득뽀드득 하게 닦은 후에 물 넣고 씁니다;;
17/11/30 11:06
수정 아이콘
청소가 편하고 심플한 가습기가 좋은(안전한) 가습기죠.
17/11/30 10:38
수정 아이콘
참 다행이네요... 글곰 님의 경험담을 본받아 저도 매사 더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게을러져야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게으르지만.
17/11/30 10:45
수정 아이콘
게으르기 때문에 원플러스 원 제품을 산 것까지는 저와 비슷한 과정이네요. 안타깝게도 저는 당시 부지런한 룸메이트와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성실한 녀석이 자기 전에 꼭꼭 살균제를 사용하더군요. 아마 그 살균제 빈 통을 봤던 것 같기도... 어쨌든 둘 다 멀쩡히 결혼하고 살아는 있습니다만.
빛날배
17/11/30 10:50
수정 아이콘
그 가습기 살균제가 옥시 제품이 아니였다면 별 문제 없지 않았을까요?
수정비
17/11/30 10:54
수정 아이콘
옥시가 제일 널리 쓰여서 입에 오르내릴뿐이지... 다른 업체들 꺼도 다 똑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17/11/30 11:05
수정 아이콘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산 건 가장 유명한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이었죠...
빛날배
17/11/30 11:30
수정 아이콘
큰일날뻔 했네요..
솔로13년차
17/11/30 11:07
수정 아이콘
가습기 살균제 자체가 문제가 없고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제품이어서요.
사악군
17/11/30 11:03
수정 아이콘
저는 그거 사야지 사야지 하면서 안샀습니다..
17/11/30 11:11
수정 아이콘
마지막 문단이 심금을 울리네요.
드아아
17/11/30 11:14
수정 아이콘
크흠.. 대도셨군요
D.레오
17/11/30 11:19
수정 아이콘
전 일주일에 한번 베이킹소다로 소독한번하는게 끝인데 크크
17/11/30 11:20
수정 아이콘
저 사건 피해자분이 했던 인터뷰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매일매일 부지런히 아이를 위해 갈았는데, 그게 내 손으로 우리애를 조금씩 죽이고 있던 것이었다.
제가 만약 저 피해자처럼 부지런히 우리 아이를 죽였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Lord Be Goja
17/11/30 11:21
수정 아이콘
아내분이 글곰님을 더 빧세개 굴려서 가습기를 3달마다 새로 살수 있었자면 저런 문제가 없었을겁니다!
17/11/30 11:31
수정 아이콘
아내가 저보다 1.5배는 더 버는데요...
17/11/30 15:00
수정 아이콘
복 받으셨네요. 흐흐
바밥밥바
17/11/30 11:25
수정 아이콘
가열식쓰시면 편-안
17/11/30 11:30
수정 아이콘
초음파 식 사용중인데 청소 맨날 해줘야 하나요?

매일 물은 갈아주고 있습니다.-_-
고란고란
17/11/30 11:41
수정 아이콘
물에 식초 조금 넣고 닦아주세요. 일주일에 서너번은 닦으셔야 될거에요.
17/11/30 12:56
수정 아이콘
아 네 감사합니다 ㅠㅠ
고란고란
17/11/30 11:40
수정 아이콘
다른 얘기지만, 사실 그 살균제는 가열식 가습기용이라고 하더라고요. 해외에서는 초음파식보다 가열식을 훨씬 많이 쓰고, 가습기 살균제 역시 가열식 가습기에만 사용해야 된다는 애기를 봤습니다. 제가 해당 가습기 살균제를 보지 못해서 거기에 가열식 가습기용이라고 적혀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둥실둥실두둥실
17/11/30 11:52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저도 비슷한 케이스입니다. 사실 좀 수상쩍다고 생각도 했지만... 몇번 쓰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두 해쯤 지나 가습기 살균제를 찾아내고는 '오래됐으니 세척에나 쓰자' --> 띄엄띄엄 몇 번 세척제로 씀 --> '너무 오래됐으니 버리자'의 테크트리를 탔지요. 개인적으로 다행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아이가 호흡기가 약한게 유전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저걸 쓴 탓일까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빛
17/11/30 12:23
수정 아이콘
503호가 게을렀던 것도 다 나라를 위해서..?
공도리도리
17/11/30 12:48
수정 아이콘
큰 그림입니다만, 참 괘씸하죠
Blooming
17/11/30 12:27
수정 아이콘
아이 태어나고 가습기를 샀더니 살균제를 번들로 주던데, 저렇게 위험할거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뭔가 잔류물질이 조금이라도 없을수가 없다는 생각에 안 쓰고 버렸죠.. 제 촉이 맞은 몇 안되는 경우였습니다..
밤톨이^^
17/11/30 14:34
수정 아이콘
도망치는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17/11/30 14:57
수정 아이콘
저도 큰애가 어릴 때 가습기 청소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마트 갈 때마다 살균제 살까 말까 고민 많이 했었습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살균제면 소독제일텐데 그걸 가습기에 넣어서 마신다는게 영 찜찜해서 안샀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요.
미사쯔모
17/11/30 15:02
수정 아이콘
저는 게을러서 아예 가열식을 썼지요.
가열식은 자주 안 씻어도 괜찮거든요.
파라돌
17/11/30 15:03
수정 아이콘
어설픈 지식으로 살균제? 그거 기체상태에서 호흡하면 좋을리 없을텐데???라고 생각은 했고
청소도 거의 안하는데 굳이 살필요가...? 라고 생각했죠.
예전에 부모님이 락스나 세제넣고 행주나 속옷등등을 삶을때 숨쉬는게 죽을맛이었거든요.
17/12/02 15:16
수정 아이콘
음 삶는건 소독용이니 락스나 세제는 따로해도 되는건데 같이 하면 건강에 안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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