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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 흔히 나오는 장면이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여주인공은 슬리핑 가운 차림으로 부엌에 나와 물을 끓인다. 그리고 잠기운이 덜 가신 눈으로 커피를 곁들인 토스트로 식사를 하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한다. 마침내 식사를 마친 그녀는 - 아름다운 몸매를 잔뜩 뽐내면서 – 샤워를 마친 후 흑백 대비가 눈부신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하이힐 굽 소리를 내며 현관을 나선다. 그녀의 힘찬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대체로 나의 아침은 휴대전화 알람소리에 짜증을 내면서 시작된다.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굴러 내려온 나는 잠옷과 속옷을 바닥에 벗어던지고는 욕실로 직행한다. 뜨거운 물을 머리에서부터 한동안 뒤집어써 잠기운을 쫓아낸 후, 양치질을 하면서 눈곱을 떼어내고 머리를 감는 동시에 몸을 씻는 묘기를 부린다. 그렇게 한바탕 법석을 떤 후 팬티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옷을 고른다. 선택할 수 있는 옷의 종류는 서너 가지쯤 된다. 줄무늬 블라우스, 민무늬 블라우스, 옅은 초록색 블라우스, 그리고 가끔씩만 입는 꽃무늬 블라우스 정도일까. 바지는 그보다도 더 종류가 적어서 굳이 옷을 고르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치는 않다. 서른을 넘은 후로는 쓰는 화장품 종류도 대폭 줄였는지라 욕실에서 나와서부터 출근준비를 끝내기까지 딱 이십 분이면 차고 넘칠 정도다. 그렇게 절약한 시간은 결코 다른 데 쓰지 않았다. 다는 그 모든 시간을 단 일 분이라도 더 늦잠을 자기 위해 알뜰히 투입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조금 달랐다.
“일어나, 언니.”
스무 살에 독립한 이후로 누군가가 나를 깨워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 이마를 살짝 누르는 손가락의 감각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단지 열기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온종일 쳐 두는 커튼은 활짝 걷혀져 있어 눈부시리만큼 하얀 아침 햇살이 방 안에 비쳐들었다. 내 방이 아닌 것 같은 낯선 풍경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몇 시야?”
그녀는 시간을 말했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이네.”
“아침이야. 회사 늦기 전에 일어나.”
“......나한테는 아침이야. 그리고 내가 일어나는 시간보다 한 시간은 이르다고.”
그녀의 목소리에 놀람이 묻어났다.
“정말? 그렇게 늦게 일어나고도 정말 회사에 안 늦어?”
“......가끔씩은.”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오랜만에 바닥에서 자니 허리가 조금 아팠다. 내 잠자리는 침대 아래에 손님용 이불을 깔아 만들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같은 침대에 눕기를 제안했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바닥에서 자겠다고 했으나 나는 두 번 모두 거절했다.
“같이 자는 건 아직 좀 그러니까........ 그리고 손님한테 침대를 주고 내가 바닥에 자는 게 당연한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복잡한 심정을 외면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 내게는 너무나 어색했다. 그녀와 같은 침대에서 몸을 맞대고 잠든다는 생각도, 굳이 손님과 주인이라는 건조한 단어를 끄집어내야 했던 우리 두 사람의 사이도. 다행히 그녀는 순순히 내 주장을 받아들였다.
나는 이불을 빠져나온 후 욕실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속옷을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겼다. 그녀가 놀란 기색이 역력한 소리를 내는 것을 들으며 나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나는 잠시 문에다 귀를 대고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아주 가만히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보다 더 놀란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바람에 나는 나도 모르게 등을 문에 기댄 채로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내 벗은 몸을 보았음을 깨달은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그 감정이 부끄러움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예전에 애인을 사귀었을 때도 그들에게 내 몸을 내보일 때마다 나는 항상 어느 정도 쑥스러운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느낀 감정은 달랐다. 그것은 마치 몰래 남우세스러운 일을 하다 들켜버린 것과 흡사한 부류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느꼈다는 사실이 결코 그녀를 기쁘게 하지 못할 것임을.
‘미안해.’
나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샤워기를 틀었다. 살갗에 와 닿는 물은 언제나처럼 뜨거웠다.
몸을 씻은 후 나는 욕실 문을 열고 빼꼼하게 밖을 내다보았다. 방에 그녀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나와 얼른 새 팬티와 브래지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다시 욕실로 돌아가 속옷을 입었다. 속옷을 입고 나서 그 위에다 다시 큼지막한 샤워 가운을 걸친 후에야 나는 도로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뭐해?”
나는 내 목소리가 어색하지 않게 들리기를 기원하며 말했다. 부엌 쪽에서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침 준비. 먹고 갈 거지?”
“넌 프리랜서가 어찌 나보다 부지런하냐?”
나는 투덜대며 부엌으로 갔다. 고소한 베이컨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식탁에는 이미 노릇노릇하게 구운 토스트가 네모난 접시 위에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초콜릿 맛 시리얼이 담겨 있었다. 베이컨을 굽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웃었다.
“언니 좋아하는 메뉴 맞지?”
“어? 어.......”
나는 어색하게 긍정했다. 사실이었다. 아침을 차려 먹지 않은 지 오래 되었지만 해외에 여행을 갈 때만은 예외였다. 여행 때 편안한 숙소를 중요시하는 나는 무조건 호텔 조식 뷔페로 아침을 먹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고 그 때마다 반드시 베이컨과 초콜릿 시리얼을 뱃속에 채워 넣었다. 나는 뒤늦게야 예전에 그녀와 함께 3박 4일로 오키나와에 놀러갔던 일을 기억해 냈다. 아마도 그 때 내 아침 취향을 알았으리라.
내가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는지,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밥으로 차릴 걸 그랬나? 언니가 좋아하는 줄 알고.......”
“아, 아니야! 아니야.”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아냐. 나 베이컨 엄청 좋아해. 그냥 잠깐 딴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야.”
나는 일부러 활짝 웃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변명은 아니었다. 잠깐 딴 생각이 떠올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책망해야 했다.
그 때 그녀가 아침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평소보다 얼마나 일찍 일어났던지, 식사를 마치고 나서 모든 몸단장을 완전히 끝낸 후에도 여전히 삼십 분이나 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라디오에서는 80년대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좋은 커피향이 거실을 채우고 있었다. 난 그녀가 내민 커피를 받아든 후 꽃무늬에 금박 테두리로 장식된 잔을 노려보았다.
“우리 집에 이런 예쁜 잔이 있었다고?”
“저기 있던데?”
그녀가 찬장을 손가락질했다.
“아까 접시도 그렇고 다 저기 있었어.”
그녀가 쿡 하고 싱그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쓰기 전에 먼지부터 닦아내야 했지만.”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즐거운 기분이었다. 나는 웃으며 커피를 홀짝인 후 인상을 쓰며 잔을 내려놓았다.
“써.”
“커피는 원래 쓴 거야.”
나는 싱크대 아래를 뒤적이며 대꾸했다.
“내가 마시는 커피는 안 써.”
설탕을 찾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내가 밥숟가락으로 설탕을 퍼서 커피에다 왕창 집어넣는 꼴을 보며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허탈하게 말했다.
“그런 걸 마시고도 지금 몸무게가 유지돼?”
“제대로 안 먹는 게 다이어트 비결이거든. 밥을 안 먹으면 돼.”
나는 가슴팍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녀가 걱정스레 내 얼굴을 보았다.
“건강 나빠지면 어떡하려고. 밥은 잘 챙겨먹어야 해.”
나는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우리 둘의 모습은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꺽다리와 땅딸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몸은 날씬하다 못해 깡마른 편이었다. 덕분에 가슴에도 엉덩이에도 풍만한 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반면 그녀는 나보다 거의 15센티미터는 작았고, 살짝 통통하면서도 매력적인 몸을 지니고 있었다. 사이즈 큰 티셔츠에다 헐렁한 청바지 차림으로도 그녀의 몸매가 드러내는 아름다움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밥을 잘 먹으면 나도 너처럼 될 수 있는 거야?”
그녀가 의아해하는 기색을 띠자 나는 팔을 뻗어 집게손가락으로 그녀의 가슴을 꾸욱 눌렀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냐고.”
내 짓궂은 의도를 알아챈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쿡쿡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낯설었지만 아침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도 나쁘지 않았다. 아침에 황급히 출근하는 대신, 이렇게 잠시 허튼 소리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전의 감각은 여전히 나의 손끝에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