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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4/13 20:58:56
Name 이순
Subject [일반] 어찌 그 때를 잊으랴. ㅡ 사물탕. (수정됨)


햇수를 따져보니 .. 어언 45년 전 일이다.
흔히 쓰는 표현대로 엊그제 같달 수도 있지만,  
참...  오래 전 기억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막, 잠이 깰 똥 말 똥 하고 있는데 외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오신 걸 보니,
또 오리알을 갖고 오셨나 보다.

당시 중3이었던 여동생은 아무도 그리 하라 시킨 사람도 없건만,
공연시리 불철주야 공부에 매진한 탓으로 몸이 몹시 허약한 상태였다.
이에 외할아버지는 새벽에 갓 낳은 따끈한 오리알을 막내외손녀에게 먹이고 싶어 이렇게 달려 오시곤 했다.
우리 형제들이 얼마나 오리알을 싫어하는지 모르시고 말이다.
계란과는 확실히 다른.. ..그 비릿하고 맹한 맛.


근데 다른 때와는 달리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창고 옆 대추나무 아래에서 한참을 두런거리셨다.
나는 창문을 열고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는 한약 두 첩을 소중히 가슴에 안고 고개를 숙인 채,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계셨는데..   표정이 어두웠다.



날이 온제로 잡힜다캤노?

내달 스무하룻날입니더.

그라모 .. 달포 반 남았네..  지금 달여 먹이모 되것다.

두 첩 가지고 되겠심니꺼.

일단 멕이보고 효꽈가 없시모 다른 약재를 하나 더 넣어 차후에 또 지어주꾸마.

그럼 .. 초탕은 두 번 나눠 먹이고, 재탕은 한 번만 달일까예 ?

온냐.   약이 좀 독한께.
그라고 .. 무시(무)하고 닭괴기는 못 먹게 조심 시키라이..

뉘예...

외할버지와 어머니는 나지막한 어조로 사뭇 진지하셨고,  그리 보아 그런지 얼굴이 침통해 보였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하아... 이거.. 아무래도
언니가 무슨 말 못할 병이 생긴 모양인데...
결혼 날짜 받아놓고 이거 큰일 아이가..

이 일을 우짜노.  
참..  엄마도 답답하다.
그라모 큰병원에 데리고 갈 일이지..
정식 한약방도 아니고,  취미로 한약을 짓는 야매 한약업자 외할아버지께 부탁하모 우짜노 말이다.



당시 외할아버지께서는,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각종 한의약서를 탐독하시며
손수 집 옆 60여 평 밭에다가 온갖 약초를 재배하심은 물론,
벌꿀까지 치면서
기발한 한약 제조에 몰두하고 계셨다.
멀리 대구 약전에까지 가서 희귀 약재를 구해 오시기도 했다.


그래서
두 딸만 내리 낳은 큰며느리에겐  <아들 낳는 약>을,
생리불순인 막내이모와 언니에겐  <월경약>을,
안색이 늘 노라탱탱한 나에겐  <화색약>을,
늘 비실비실 기력이 없는 여동생에겐  <기력약>을,
심혈을 기울여 지어주시면서..  

자손들을 당신의 연구에 마루타로 이용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달여 먹는 한약 외에도 정체 모를 쥐똥 반만한 환까지 먹어야만 했다.

그 한약 덕분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 우쨌거나 !!
큰외숙모를 비롯하여 <외할아버지표 아들 낳는 약>을 먹은
집안 여인네들은 모두 아들을 낳았다. (물론 언니와 나도 포함)


첫딸을 낳고 5년 후 이들을 낳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외할아버지의 이.. 아들 낳는 약만큼은 불신하고 있는 터였다.
도무지 의학적이건 생물학적이건  납득할 수 없는 이치였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그런 약을 먹어서까지 아들을 낳으려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딸 낳는 약을 먹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언니에게 무슨 병이 있음을 감지한 나는,
아버지는 알고 계실 것 같아 조심스레 여쭈어 보았다.
근데 말씀으로 보아 전혀 모르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에 들었던 두 분의 대화를,  또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춰 보고했다.


아하... 그거 !!
사물탕인갑다.


예에 ?   사물탕이라꼬예 ???

뭐어..  느그 엄마가 그라는데  방구 삭쿠는 약이라카더라...

예에?    방구를 삭힌다꼬예  ??  

결혼날도 다가 오는데...  느 언가가  방구를 무시로 뀌어싸서 .. ..
느 엄마가 걱정해쌓더니만  결국,  빙장어른이 약을 지어오신는갑다.


헐 ~~~~~~~~~

참,,,,  
어찌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있으리요.


언니에게 효꽈가 있었는지 우쨌는지 물어보지는 못 했지만,
두 사람의 금슬로 미루어 보아 ...
그 이름도 희한한 약의 정체와 효능이 영... 엉터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요즘 들어 .. 그 원인을  모르겠는데.....
외할아버지의  사물탕이 생각날 만큼, 그 기능이 활성화 되고 있달까...
배출량이랄지...생산량이랄지.... 나날이 갱신 중에 있다.
뭐..긍정적인 현상이라 여기고 싶다.



편한 아줌마체 + 허접한 소재를 양해 바랍니다. 
가배얍게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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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3 21:44
수정 아이콘
크크 시리즈 잘보구 있습니다
19/04/13 22:38
수정 아이콘
아니 보살님도 피지알의 응가 정체성에 합류하시는 겁니까?
유쾌한보살
19/04/13 23:26
수정 아이콘
아, 눼에....그 방면으론 자격이 충분합쬬.
시리즈로 엮을 에피소드도 적지 아니 소장하고 있굽쇼.
10년째도피중
19/04/13 23:53
수정 아이콘
저희 집 노인네도 요새 동의보감이니 한국인이 알아야할 XX가지 약초니 하는 책들 읽고 자꾸 뭘하려 드는데 무섭대요.
요새는 한방불신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이 막고 있어서 노인네 실험대상은 당신 자신밖에 없더이다. 허허허. 그마저도 이젠 못하게 됐지만.

푸근한 이야기 잘 보고 있슴다.
소르바스의 약속
19/04/14 09:49
수정 아이콘
으잌! 재밌습니다. 으하하하
Hammuzzi
19/04/14 13:20
수정 아이콘
이야기 참 좋네요. 잘읽었습니다
Birdwall
19/04/14 14:42
수정 아이콘
이런 글이 한 번씩 올라올 때마다 확실히 피지알엔 제 나이의 두 배쯤 되는 분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smilererer
19/04/14 20:15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이런 글 올려주시면 좋겠어요.
괄하이드
19/04/14 21:06
수정 아이콘
삭쿠다 라는 표현 오랜만에 듣네요 크크
19/04/15 00:36
수정 아이콘
옛정서 너무 좋네요~글 읽을 때마다 힐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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