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 교회 (Ecclesia Catholica Romana)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조직입니다. 수많은 왕국들이 흥하고 망했지만, 수많은 공화국들도 흥하고 망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계속 생존했습니다. 교회는 로마제국 멸망을 버텼고, 종교전쟁의 시대도 버텼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 때도 살아남았고 1차 및 2차 세계대전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로마교회는 정말 "서바이버(Survivor)"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수많은 풍파에도 불구 끈질기게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으니 말이죠.
2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하나의 글로 요약하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중요 에피소드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중세시대의 권력자로 군림하고, 또 어떻게 현대사회에 적응하게 되었는지, 주요 테마로 한 번 나누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시도일 것입니다.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가 왜 로마제국의 후계자인지, 또 현대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1. 로마 교황이란?
흔히 초대 로마 교황은 성 베드로라고 알려져있습니다. 예수는 시몬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는 베드로이이다(Tu es Petrus).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지옥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첫번째 제자로 그 이름은 원래 시몬이었고, 예수는 그에게 베드로(Petrus = 반석)라는 이름을 지어 제자들을 리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전도를 위해 당시 세계의 수도 로마에 직접 건너가 그곳에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제국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습니다. 그 결과 역대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를 자처하였으며, 예수가 베드로에게 건냈다는 말에 따라 스스로 기독교 세계의 지도임을 천명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될 무렵, 로마의 위상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와는 달랐습니다. 제국의 수도는 이미 동방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갔고, 수도 로마의 인구와 영향력을 급감하여 서로마제국의 황제들도 본거지를 밀라노나 라벤나로 삼았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전통적인 무역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나 안티오키아의 경우 로마보다 더 큰 부를 자랑했고, 또 예루살렘의 경우 그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다른 도시 못지 않게 기독교의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이에 로마제국은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을 5개 총대주교좌로 삼았고, 비록 로마의 상징적 우위는 인정되었으나 이 5개 도시의 주교는 실질적으로는 동등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로마의 상징적 우위가 인정된 것은 로마가 본래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 아니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순교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두 명의 사도가 순교한 도시로 이른바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으로 공인된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국가를 건국했다면, 베드로와 바오로가 로마교회를 창립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의 주교들은 이와 같은 자기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주교들과 소통하였고, 다른 지역의 주교들을 동등한 주교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인(도시 로마의 시민)들은 그런 로마주교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제국이 저물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위치한 동방의 황제는 사실상 로마를 포기해버렸고, 훈족이나 게르만족의 침공으로부터 로마의 방위와 시민의 안전을 책임진 것은 로마주교였기 때문입니다. 훗날 레오 대교황(Leo the Great)이라고 알려진 교황의 경우 훈족의 아틸라와 직접 교섭하여 로마를 지켜낸 바 있습니다. 그는 로마시민을 대표하여 야만족들과 교섭하였고, 로마시민들의 안전을 지켰고, 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황제에게 앞서 언급한 베드로와 바오로의 권위를 근거로 로마의 우위를 설파했습니다. 황제에게 거들먹거리면서 직접 로마의 우위를 주장하고 또 이를 근거로 로마시에 대한 주권을 행사한 교황은 레오가 최초이므로 어쩌면 실질적 의미의 교황은 레오가 최초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2. 로마교황은 서유럽을 어떻게 탄생시켰나?
중세라고 해서 로마교황이 언제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것은 아닙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이탈리아를 재정복한 이래 교황은 동로마 황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심지어 마르티누스라는 교황은 감히 황제의 정책에 반기를 들어 제국군에 의해 폐위되고 크림반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제국의 부상으로 동로마제국이 위축되고 이탈리아 중북부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로마주교로서는 어떻게 보면 행운이었던 게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도 모두 이슬람에 의해 정복되어 라이벌 세력은 오직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로마주교는 서유럽의 강자 프랑크왕국과 동맹을 맺고, 이들과 함께 서유럽의 신질서를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와 프랑크왕국은 함께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불리는 학문과 예술의 부흥을 주도했고, 로마제국의 언어였던 라틴어 보급과 고전문학의 필사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또 교회의 축복을 통해 프랑크왕국은 로마제국이 한번도 정복한 적이 없었던 게르마니아 지역 깊숙히 진출하여 가톨릭 신앙을 확산시켰습니다. 프랑크왕국의 권위로 이제 교회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갈리아(프랑스), 게르마니아(독일), 브리타니아(영국)을 아우르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로마교황의 주 관심사와 활동무대는 지중해세계가 아닌 이탈리아와 알프스 이북으로 넘어가게 되고 이들 지역의 정치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남기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서유럽을 만든 것은 가톨릭 교회와 프랑크왕국 그리고 (레반트,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과의 연결을 끊어버린) 이슬람 세력이라고 볼 수 있씁니다.
여담이지만 프랑스가 "교회의 맏딸(La Fille ainee de l'eglise)"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 프랑크왕국의 건국자 클로비스가 게르만왕국 중 최초로 가톨릭으로 개종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3. 로마교황은 중세유럽을 어떻게 지배했나?
인사권
그런데 서유럽의 질서를 지탱하던 카롤링거 제국도 와해되자 서유럽의 기둥이 된 것은 결국 교회였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은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이었고, 이들은 행정의 언어인 라틴어를 구사하며 신학과 법학에도 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관료제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사실상의 관료이자 지방행정관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들 주교였고, 이들 주교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이가 바로 로마주교, 즉 교황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군주들이 이처럼 중요한 인사권을 교황에게 무작정 맡길리가 없습니다. 서임권 투쟁이란 주교의 인사권을 둘러싼 군주와 교황의 다툼이었는데 이를 다루기에는 또 너무 긴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단 당시에는 잠정적으로 교황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군사력
교황이 군대를 보유했다고? 엄밀히 말하면 교황이 직접 보유한 군대는 아니었지만, 로마교황의 권위를 드높이고 교황의 뜻에 따라 움직이던 이들이 있습니다.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입니다.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탄생한 이 두 조직은 세속군주가 아닌 교황에게 충성서약을 했고, 이들의 임무는 교황의 봉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군국가의 보호, 그리고 이교도와의 전쟁이었습니다. 이들 기사단은 다국적 군대로 각지의 헌금과 모금활동으로 스스로 재원을 충당하였고 또 기증 등으로 확보한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또 부유해졌습니다. 성전기사단의 경우 레반트지역(오늘날의 이스라엘 및 시리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독일 등 각지에 지부가 있어 방대한 금융네트워크까지 형성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교황의 아주 든든한 우군이었습니다.
경제력
십자군전쟁은 로마교황의 재정능력에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입니다. 그동안 로마교황의 주 수입원은 로마시 주변 이탈리아 중부지역에서 나오는 토지수입이 거의 전부였는데,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서유럽 전역에서 자발적 헌금이 활발해졌습니다. 십자군전쟁에 떠나는 영주들과 기사들은 재산을 교회에 담보로 제공하여 교회의 네트워크를 통해 현지에서 이를 현금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사망할 시 그 재산은 교회에 귀속되는 형태에 계약도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모기지(Mortgage)의 어원입니다. Mort는 죽음을 뜻하고, Gage는 계약을 의미하는데, 사망 시 재산을 교회에 양도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비프가쥬(Vifgage)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는 교회에 재산을 양도하지 않고 대신 기사 또는 영주가 십자군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기간 동안 그 재산(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교회가 이용해도 좋다는 형태의 계약이었습니다. 또한 십자군 출정을 명목으로 교회는 유럽전역에서 특별세금을 거둘 수 있었는데, 이는 훗날 세속군주들과 충돌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문화력
또한 12~13세기에 이르면 수도원과 수도회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습니다. 특히 성 프란치스코로 유명한 프란치스코회, 그리고 도미니코회가 창설되었는데 이들은 청빈검약을 모토로 삼아 영주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높은 주교들과 달리 일반대중 곁으로 스며들어 그들의 눈높이에서 설교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남부 프랑스에서 카타르파 등 초기 교회의 순수함으로 돌아가자는 일종의 종교개혁운동이 횡행했는데 로마교황은 이에 맞서기 위한 조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위 중세시대의 이단을 제압하기 위해 무력만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를 통해 종교적 순수함에 대한 열망를 흡수하는 등 투트랙 전략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교황은 중세대학의 설립을 주도하여 세속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교육기관 설치에 열심이었습니다. 유럽의 명문대들은 모두 이 시기에 설립되었는데, "헌장"을 통해 현지의 군주와 교황의 인가를 받아 자유로운 학문의 장을 만들었고 이렇게 인가된 대학에서 "학위"를 받으면 유럽 다른 대학에서도 강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교양인의 언어는 라틴어였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학위를 받은 자가 이탈리아나 독일 또는 영국에서 강의를 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또한 다른 지역 출신의 학생들이 고향을 떠나 프랑스 또는 이탈리아에서 수학하는 데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대학은 교황의 필요에 부합했는데, 서기 12-13세기는 교회법 발전의 절정에 이르러 교회의 권위를 신학적 근거와 더불어 법적 근거에 기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황의 권위는 성경과 사도전승 그리고 로마법을 통해 정당화된다는 발상이었습니다.
4. 르네상스 교황들은 무엇이었나? 이탈리아의 군주들이었던 교황
역사 시대극에서 르네상스 교황들은 단골소재입니다. 이와 같은 막장드라마가 또 없기 때문이죠. 특히 알렉산데르 6세를 필두로 하는 보르지아 가문이 가장 유명합니다. 부정부패, 쾌락, 탐욕 등 온갖 종류의 악덕을 총집합한 인물들이 교황좌에 올라 기독교 세계의 지배자랍시고 행패를 부린 시대로 유명합니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이 시기에 활동했었죠. 그런데 인문주의와 고전문학에 대한 열풍이 절정에 이르렀던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어떻게 이러한 교황들이 탄생할 수 있었나? 이들은 왜 이렇게 권력에 집착했었던 것인가? 이에 대해 약간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먼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르네상스 교황들은 물론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이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애국자(?) 였다는 것입니다.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교황령 국가의 세속군주이기도 했습니다. 흑사병 이후의 경제성장, 상업의 발전 등 여러 이유로 14~15세기를 거치면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서유럽의 왕국들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교황령 국가는 이들과 경쟁을 하던 세속국가 중 하나였고, 점점 교황령 국가가 위축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다른 세속군주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암투에 달인이 되어야 했고, 군대를 이끌면서 전쟁을 해야했으며 또 이를 위한 재원을 계속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타락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 시대 교황들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황은 도시 로마를 과거 로마제국 시대만큼이나 찬란하고 화려한 도시로 만들고자 했으며, 또 심지어 본인이 고대 로마의 영웅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컨대 당시 활약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교황명 율리우스를 과거의 교황 율리우스 1세를 기리기 위해서 택한 것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기리기 위해 택했습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외세(프랑스 세력이나 스페인 세력)를 몰아내고자 했고, 본인이 순수 이탈리아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보르지아 가문은 스페인에서 건너온 가문). 그는 직접 갑옷을 입고 전쟁을 지휘한 교황이었으며 때문에 "두려운 교황(Il Papa Terribile)"라고 불렸으며 그와 동시대 활약했던 마키아벨리의 경우, 율리우스를 이탈리아에 평화를 가져다줄 영웅으로 보고 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세속국가들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교황은 그 스스로 세속군주가 되어 전투를 치르고 외교를 했으나 그 종착지는 결국 더욱 거대한 세속군주들에 의해 압도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1527년 스페인왕국의 지배자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카를5세의 군대에 의해 로마가 점령되고 약탈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카를 5세 본인은 가톨릭교도였지만, 로마 점령을 위해 파견된 군대는 대부분 독일지방의 개신교도들로, 이들은 로마를 철저히 파괴하고 방화하고 약탈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강간하고 살인했다고 전해집니다. 소위 사코 디 로마(Il Sacco di Roma)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교황들은 깊은 트라우마에 빠져 두 번 다시 세속군주의 권력을 위협하지 못했습니다.
4. 루터 이후의 교황은 어떻게 되었나? 현대 로마의 탄생과 최초의 세계포교
16세기에 이르면 유럽은 이제 거대왕국 또는 국가들로 재편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토스카나 대공국 등... 교황은 비록 이탈리아 중부를 유지했으나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또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영국은 아예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였고 가톨릭으로 남은 국가들마저 교황을 뒷방 늙은이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17세기 유럽 최대의 전쟁 소위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에 초대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과거 교황은 중세시대 서임권 투쟁으로 주교들에 대한 인사권을 공고히하였지만, 소위 교회의 맏딸이라 불린 프랑스마저 교황을 배신하고 "갈리아주의"를 내세워 프랑스 국왕이 프랑스 왕국 내의 주교 인사권을 독점하였습니다.
한편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루터 등 개혁가들이 지적한 폐단 중 일부를 시정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버렸고, 교황은 유럽에서 과거와 같은 권위를 다시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무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황은 현실에서 잃어버린 권력을 로마의 "미화작업"으로 보완하고자 했고, 또 새로 창설한 예수회를 통해 지금까지 기독교가 닿지 않았던 지역에 포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 군인 출신이었던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가 창설한 예수회는 교황청의 오른팔이 되어 열정과 학문 그리고 포교를 통해 가톨릭의 권위를 다시 높이고자 했으며 이들은 신대륙 포교활동에 중추가 되었고 또 다른 한편 원주민 권리 보호에 앞장 서기도 했습니다. 또 중국까지 건너가 명나라에도 포교를 하였고 그 중 마테오 리치나 아담 샬과 같은 유명한 학자들도 배출했습니다. 이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네트워크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진출하여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하여 유럽에서 잃어버린 신자들을 미지의 땅에서의 포교로 충당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교황은 1527년 파괴되고 약탈된 로마를 복구하였고 더욱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바로크 시대라 불리는 새로운 조류가 탄생한 시기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압도적인 웅장함을 자랑한 성베드로대성당이 완성되고 그 유명한 열쇠모양의 기둥 광장이 완성된 것 모두 이 시기의 일이었습니다. 베르니니 등 유명 예술가들이 활동하였고,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스페인 계단이나 스페인 광장, 트레비 분수 등 이 시기에 건축되었으며 오늘날 로마 시내를 장식하고 있는 많은 돔들과 성당들 또한 이 시기에 그 모습을 완성했습니다. 당시 교황들은 비록 과거와 같은 세속권력은 상실했으나 사람들이 로마를 방문하여 그 웅장함에 감화되기를 바랐고 이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로마시를 아름답게 하는 많은 것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훗날 18~19세기 영국귀족과 프랑스 귀족들을 매료시킨 그랜드투어로 이어졌으며 또한 오늘날에도 전세계 관광객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으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5. 교황청이 한 때 아예 멸망할 뻔했다고?
1789년 유럽의 최대강국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발합니다. 프랑스 대혁명.
혁명기의 프랑스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공포정치가 횡행했고 성직자들이 살해당하고 수녀들이 강간당했다고 전해집니다. 로베스피에르는 가톨릭 교회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유서 깊은 노트르담 대성당을 "이성의 신전"으로 개칭하였고, 가톨릭 교회를 거의 불법화에 가까운 수준으로 탄압했습니다. 교회의 맏딸이라 불린 프랑스는 어쩌면 인류 최초의 무신론 혁명정부라고 할 수 있는 국가로 변모하였고, 이 국가를 계승한 것이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톨릭 교회의 법적 지위를 회복시켰으나 교황청을 인정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를 침공하였고, 로마를 점령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부관은 로마에서 로마공화국을 선포하였고 교황의 퇴위를 요구했습니다. 훈족 아틸라가 로마제국을 침공한 이래 로마교황은 역사상 최초로 교황령을 상실할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교황 비오 6세는 퇴위를 거부하였고 그 결과 그는 프랑스군에 압송되어 프랑스 땅에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국내의 가톨릭 신도들을 만족시키는 동시 교황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기 위해 1801년 협약을 맺어 가톨릭 교도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대신 성직자는 국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도록 하였고또 주교에 대한 서임권은 국가가 갖는 대신 교황에게 주교를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해줍니다. 물론 국가가 교회 재산과 토지를 모두 몰수한 것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 이후 나폴레옹은 후임 교황 비오 7세를 본인의 대관식에 이용하고 했으나 비오 7세도 한 성격했던 인물이었던지 그 협상 과정이 지지부진했고, 가까스로 비오 7세를 파리에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는 정치적 실수였습니다. 교황이 프랑스 땅을 밟아 파리까지 오는 도중 많은 군중들이 교황을 보러 나왔고, 그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파리에 입성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나폴레옹은 "전에 아무도 교황을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자가 파리에 오니 마치 대단한 인물인 것마냥 되어버렸다"고 후회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반나폴레옹 연합군에 의해 프랑스가 패배한 이후 비엔나 회의를 통해 나폴레옹이 폐지한 교황령이 복원되었으나, 그 권위는 역시 더욱 취약했고 세속군주들의 앞에서는 더욱 작은 존재가 되었으나 한 때 나폴레옹 앞에서 당당히 맞선 모습에 많은 가톨릭 교도들을 감동시켜 영적인 권위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6. 교황은 혁명의 시대, 근대와 어떻게 조우했나?
19세기는 혁명의 시대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래 1848년의 혁명, 1860년대의 리소르지멘토, 그리고 1871년의 파리코뮌 등. 유럽의 지도는 소수의 강대국으로로 재편되는 와중 물밑에서는 시민사회와 노동자가 급성장하여 새로운 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아울러 철도와 전기의 발명으로 유럽은 전례없는 변화를 맞이했고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이 천지개벽하는 수준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은 이와 같은 변화의 물결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먼저 언급해야할 것은 혁명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이 대부분 반기독교였다는 사실입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성직자들에 대한 학살과 토지 및 재산몰수의 기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어 교황은 혁명이나 자유주의세력을 모두 사탄의 자식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 운동에 가담한 세력들도 대부분 자유주의 세력이었고 이들 또한 교황령 국가를 인정할 마음이 없었고, 교황령을 폐지하고 이탈리아 통일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리소르지멘토 지지 세력 중 아주 일부 세력은 교황을 정점으로 이탈리아 연방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목소리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나마 교황을 비호해주는 최대세력이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이었는데, 이탈리아 통일운동 세력은 오스트리아를 적대시했기 때문에 교황으로서는 이들을 축복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태동한 또 다른 혁명세력으로 공산주의가 있었는데 이들은 애초에 종교 그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교황은 당시 민중 사이에 파고들고 있었던 노조운동 등에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결국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 운동이 성공하여 새로 생긴 이탈리아 왕국은 1870년 로마를 점거하고 교황령 국가를 폐지했습니다. 국가로서의 교황령이 천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뒤로 하고 멸망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에 대한 대접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오늘날 바티칸 시국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교황은 넉넉한 보상금과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황은 스스로 바티칸의 수인(囚人)을 자처하면서 바티칸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이탈리아 왕국을 승인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교황은 세속국가가 교황령을 폐지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또 교회의 자유(Libertas Ecclesiae)를 침해하는 세속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속권력의 상실은 교황에게 사실 축복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에게 이탈리아 내 모든 주교를 임명할 권한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는 중세시대 교황들도 이룩하지 못한 업적이었습니다. 사실 중세 당시에는 이런저런 예외조항들과 관습 등의 한계로 주교 서임권이 완벽하게 행사되지 못했지만, 교황령 국가를 상실한 바로 그 때 교황은 주교를 완전히 자유롭게 서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교황령 국가를 상실한 교황들은 대부분 고집불통의 수구 보수주의자였으나, 교황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청빈했으며 신실한 진실된 신앙인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근대의 흐름, 가령 민주주의적 이상과 자유, 종교의 축소에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약자에 대한 연민과 평화에 대한 관심 등은 어느 때보다 진실되었습니다. 빈자들을 위한 많은 구호단체가 탄생하였고, 교황은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성명을 내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아울러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진 교황들은 국왕과 귀족들이 아닌 일반 개인들의 신앙심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기울였으며 오늘날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많은 세부적 교리와 매뉴얼 등이 이 때 제작되었습니다.
7. 제2 바티칸 공의회: 교황청, 현대사회와 화해하다
1929년 이탈리아 정부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한 이후 교황령은 바티칸 시국의 모습으로 부황했습니다. 비록 작지만 국제법으로 인정받는 국가로 다시 탄생하였고, 교황의 외교사절들은 이를 통해 외교적 면책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속국가로 인정받는 게 무척 중요한 이유는 세속국가라는 법적 테두리 없이는 교회의 자유(Libertas Ecclesiae)가 보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국에서 제 아무리 존경받는 단체라고 하더라도 해당 국가의 주권자에 의해 마음대로 처분될 수 있다면, 그 조직은 진정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바티칸 시국이라는 모습으로 다시 주권국가의 비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역대 교황들이 세속국가로서의 교황령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기도 합니다.
물론 다시 부활했다고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교황령은 무력했고, 전쟁을 막지 못했으며 또 중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나치독일에 맞서 독일 가톨릭 신자들에게 "Mit Brennender Sorge" (불타오르는 우려) 라는 제목으로 나치독일의 우생학적 가르침과 국가에 대한 숭배에 반대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는 교황이 현지언어로 평신도들에게 보내는 최초의 편지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각 지방의 주교들은 이 내용을 강론 중 읽었으나 이 때문에 한 때 독일에서 가톨릭교도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어, 교황은 그 이후 나치정권과 직접 대립하는 것을 피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교황들은 평화와 연대의 메시지를 설파하며 특히 유럽의 통합 및 연대를 역설했습니다. 데 가스페리, 드골, 아데나우더 등 현대 유럽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독실한 가톨릭 교도들이었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들 덕분에 다시 한 번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이 현대사회와 화해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62년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많은 모습은 바로 이 공의회를 통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서민 출신이었던 요한 23세 교황의 주도 하에 개최된 이 공의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1. 라틴어로 집전된 미사가 현지어로 봉헌될 수 있게 하였고,
2. 현지의 각종 전통을 인정하였으며,
3. 개신교 신자들을 형제로 인정하였고,
4. 다른 종교에도 배울 점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고,
5. 사회적 불의에 맞서야 하는 교회의 책임을 강조하였고,
6. 신자가 아닌 자에게도 구원이 열려있음을 인정하였고,
7. 각종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긍정하였으며
8. 개신교와 가톨릭의 공동번역 성경도 인정하였습니다.
물론 이외에도 너무도 많은 사항들이 결정되어 이를 다루는 전문서적만해도 수백권이 넘습니다.
이와 같은 파격적인 변화 뒤에는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와 독일 등의 개혁적 성향의 주교들의 공이 컸다고 하는데, 한 프랑스 학자는 이를 두고 마치 일종의 "카롤링거 모임"처럼 보였다고 서술했습니다.
8.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교황청의 모습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은 요한 바오로 2세입니다. 본명은 카롤 보이티와. 폴란드 사람인데, 그는 교황 역사상 최초의 슬라브 출신 인물이었으며 非 이탈리아인으로서는 400년만에 나타난 외국인 교황이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8년 젊은 나이에 즉위해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고 그는 현대기술을 십분이용해 전 세계를 누비면서 복음을 설파했습니다. 그는 비행기와 철도를 통해 유럽 전역을 순방하였고 또 아메리카 대륙, 인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아프리카 등 지구 곳곳을 방문했습니다. 그처럼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 교황은 교황 역사 2천년 동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연설은 언제나 현대 매스미디어를 통해 중계되었으며, 그는 가는 곳마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개인적 카리스마와 실재하는 권력으로 세계를 압도한 교황은 중세시대 교황권력 절정기를 대표하던 이노첸시오 3세 이후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이었습니다.
소련의 경우 요한 바오로 2세의 당선은 미국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같은 시기 미국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이자 대소련정책을 담당했던 인물은 지브그뉴 브레진스키였는데, 그 또한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와 그의 가족은 소련군이 폴란드를 점령할 당시 도망쳐 캐나다 그리고 그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인물입니다. 이에 소련은 브레진스키가 CIA를 동원하여 추기경 선거에 영향을 주었다고 의심했는데, 브레진스키는 훗날 인터뷰에서 그런 의혹에 대해 자기도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웃으면서 회고한 바가 있습니다.
소련이 의심할 법도 했던 이유는 요한 바오로 2세가 모국 폴란드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비록 폴란드는 소련침공 이후 공산국가가 되었지만 국민이 압도적 다수가 진지하게 믿고 있는 가톨릭 교회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폴란드인 교황이 1979년 국빈으로 폴란드에 방문하자 수많은 폴란드인들이 거리에 나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와 같은 군중의 모습은 당시 폴란드 정부를 두려움에 떨게 하였으며, 교황의 방문을 허가한 것에 대해 깊게 후회했습니다. 교황의 방문에 고무된 폴란드의 시민단체 솔리다리노스크(연대)는 그 이후 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였고, 훗날 이들이 폴란드의 공산당을 붕괴시키게 됩니다.
한편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는데, 그는 당시 군사독재 국가였던 대한민국의 전두환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당시 사형수 김대중을 구한 바 있었고, 1984년 한국에 국빈으로 방문했을 때 광주를 방문하여 군사정부가 꺼려했던 전남도청과 금남로를 순방했습니다. 이와 같은 방문일정은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강력한 요구로 성사되었다고 합니다.
9. 교황청의 오늘
교황은 전 세계 12억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수장이며 동시에 바티칸 시국의 군주이기도 합니다. 그는 전세계 주교들의 인사에 개입할 수 있으며 또 전세계 주교들의 활동을 보고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교황의 외교단은 18세기 유럽 최초의 외교관 아카데미라고 할 수 있는 교황교회아카데미(Pontifical Ecclesiastical Academy)를 졸업한 인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은 유럽의 가장 오래된 직업 외교관이기도 합니다.
비록 교황은 과거와 같은 세속권력을 행사할 수 없지만,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자선단체의 수장이며 또 가장 부유한 단일 종교세력이기도 합니다. 그 영향력을 통해 세계에 일정한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미디어가 발달한 오늘날, 교황의 편지나 칙령 등을 통해 세계에 자신의 뜻을 알릴 수 있습니다.
지난 10월 3일 교황은 Fratelli Tutti라는 제목의 교황회칙을 반포하였는데, 이 문서를 통해 오늘날 SNS의 폐단, 포퓰리즘 정권의 선동과 증오,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세계화, 약자를 생각하지는 않는 경제, 인종차별 등의 문제,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지구환경문제와 노인소외와 같은 문제 등을 지적하였습니다. 해당 문서는 교황의 권위로 발간되는 공식문서로 전세계 주교들에게 회람되며 따라서 가톨릭 신도들은 이러한 내용을 인지하고 이에 따라 사회문제에 참여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지난 2천년 간의 풍파를 거친 교황청과 로마 가톨릭 교회가 향후 천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지금까지 줄곧 "생존자"였던 교회는 앞으로 어떤 미래를 준비하고 있을지,
무척 주목되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