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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있었네.”
석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중언부언 덧붙이는 설명도, 그 어떠한 미사여구도 없었다.
“열여덟에 혼례를 치르고 계속해서 외지에서 살았지. 무림과 전혀 무관한 집안에 시집갔기에 매년 중추절에나 얼굴을 보는 게 전부였다네. 그런데 어느 날 비보가 날아왔어. 석호산 인근에서 산적을 만났다고. 재물을 빼앗기고, 겁탈당한 후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었지.”
“거짓말.”
한참 후에야 나는 쥐어짜듯 말했다.
“산채 사람들은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
“직접 죽였다고는 하지 않았네.”
석훈의 무덤덤한 목소리 뒤에서 굴곡진 감정이 느껴졌다.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진했네. 애비에게 유서를 남겼지. 원한을 갚아 달라고.”
원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생겨난 거대한 원한이 그곳에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워서 바닥을 측량할 수 없는 깊은 아가리를 벌리고서 사람들을 집어삼키려 드는 원한이.
“나는 딸아이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겠노라 맹세했네.”
그리고 맹세가 있었다. 마치 그날의 나처럼.
“혹시.......”
나는 말을 삼켰다. 어쩌면 다른 산적들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불행한 오해 때문에 나의 아버지와 삼촌들이 목숨을 잃게 된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쯤은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놈은, 석훈은 전후 사정조차 파악하지 않고 무턱대고 무기부터 휘두를 자가 아니었다.
석훈이 말을 이었다.
“산채로 들어가 질문했네. 모월 모시에 여인이 탄 가마를 습격한 일이 있느냐고. 그들은 시인했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내게 장신구를 흔들어 보이며 비웃었지. 이 귀고리를 되찾으러 온 것이냐고. 금방 알아볼 수 있었네. 내가 딸아이에게 혼인 선물로 준 것이었으니까.”
석훈은 양손을 펼친 채 묵묵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모두 죽였네. 내 손으로. 직접.”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빌어먹을 아침 햇살이 밝게 내려쬐고 있었다. 유유자적하게 떠가는 흰 구름 두어 점을 제외하면 하늘은 너무나 푸르고 맑았다.
‘염병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에게는 둘도 없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이 험난한 난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를 키워주고 돌봐준 삼촌들이었다. 그들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게 준 은혜는 평생이 걸리더라도 도저히 갚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은혜가 누군가에게는 원한이었음을 어째서 나는 모르고, 혹은 모른 척하고 있었던가.
오랜 침묵이 흐른 후 석훈은 내게 나무토막 하나를 내밀었다.
“내 신표(信標)네. 이걸 보여주면 우리 문파의 그 누구도 자네를 가로막지 않을 거네. 풀어야 할 은원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네.”
나는 멍하니 그 신표를 받아들었다.
석훈은 제자의 혈도 몇 곳을 찔러 고통을 풀어준 후 길을 떠났다. 제자는 몇 차례나 내 쪽을 쳐다보았지만 석훈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의 뒷모습이 점점 더 작아지다 마침내 점으로 화하여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나는 우두커니 선 채로 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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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훈의 말대로였다.
태청파의 정문을 지나 너른 마당을 거쳐 걸어가는 동안 그 누구도 나를 가로막지 않았다. 의심과 불신이 가득 담긴 시선이 나를 온통 꿰뚫었지만 실제로 막아서는 자는 없었다. 마침내 본당 앞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석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훈이 좌우를 물렸다. 등 뒤의 문이 닫히자 그곳에는 그와 나 둘뿐이었다. 담장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장문인의 엄명을 어기고 담 너머로 들여다볼 만큼 간덩이가 부은 자는 없었다. 나는 석훈과 일대일로 독대했다.
석훈은 지난번 입었던 검소한 푸른 색 도포를 입고 있었다. 무기는 지니고 있지 않았다. 태도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와 전혀 다름없었다. 표정은 엄격하고도 진지했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마침내 결심했다.
먼저 오른손에 든 대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뒤이어 품속에 있는 단검을 그 옆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왼손 주먹을 오른손으로 감싼 채 앞으로 들었다. 그런 후 고개를 숙이며 나는 말했다.
“생사객을 스승으로 모신 무림의 말예 정후입니다. 석 장문인께 감히 비무(比武)를 청하러 왔습니다. 제가 미처 준비하지 못하였으니 목도(木刀)와 목검(木劍)을 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나도 석훈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놀라움이었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나는 덧붙였다.
“머리 숙여 부탁드리건대, 모쪼록 전력을 다해 주십시오.”
“좋네.”
석훈이 대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청을 받아들이지. 내 최선을 다하겠네.”
석훈은 자신의 말을 완벽하게 지켰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나무로 만들어졌음에도 강철보다 단단했고 바위보다 무거웠으며 벽력처럼 번뜩였다. 그건 비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구타에 가까운 행위였다. 나는 정신없이 두들겨 맞으면서 가까스로 향 두 개를 태울 수 있는 시간을 버텨냈다.
그 이상은 무리였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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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좋소.”
소년이 낄낄댔다. 지난번 석훈이 데리고 왔던 제자였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소년의 놀림 때문은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자마자 격렬한 고통이 온몸을 엄습해 온 탓이었다. 성품이 고지식한 석훈은 마치 마교의 교주를 상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속을 전혀 두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그가 쥐고 있었던 무기가 목검이 아닌 진검이었다면, 나는 적어도 여섯 차례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나도 한 방은 먹였다. 단 한 방이었지만, 일단은 그걸로 충분했다.
단지 대접에 담긴 물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서 나는 단전에 두어 방울쯤 남은 내력마저 죄다 끌어다 써야만 했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오.”
소년의 말투에서는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중늙은이의 태가 났다. 아마도 그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리라고 나는 짐작했다.
“사형 네 분이 당신의 팔다리를 붙잡고 여기로 옮기셨소. 누군가가 실수해서 떨어뜨리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 말을 듣고서야 지독한 허기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미처 부탁하기도 전에 소년이 먼저 나섰다.
“배가 고플 거요. 뭘 좀 가져다주리다.”
대략 두 각이 지난 후에 소년이 부산을 떨며 돌아왔다. 작은 소반 위에 수저와 밥그릇, 그리고 세 가지 찬이 놓인 소박한 밥상이 내 앞에 놓였다. 나는 통증을 참으면서 천천히 한 입씩 먹어치웠다. 전부 먹고 나자 소년이 다시 물을 따라주었다. 물을 마신 후 나는 말했다.
“왠지 모르게 즐거워 보이는데.”
소년은 약간 당혹해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곧 솔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이 당신을 혼쭐내주셔서 기분이 좋소. 기왕이면 아예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패 주셨으면 더 좋았겠지만.”
“죽을 정도로 말인가?”
농담이었지만 소년은 뜻밖에도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마시오. 스승님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시는 분이 아니오.”
그런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도로 자리에 누웠다. 그런가.
염병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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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후 나는 조용히 태청파를 떠났다.
석훈과 작별인사를 나누지는 않았다. 내 아버지를 죽인 자와 마주하고 앉아서 서로 덕담을 건네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그는 내 아버지와 삼촌들을 죽였고, 원한이 남아있든 아니든 간에 나는 평생토록 그 사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미련은 없었다.
내가 작별을 고한 유일한 상대는 석훈의 제자인 그 소년이었다.
“이만 가마.”
나는 소년을 내려다보다 문득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은 내 손을 뿌리치며 투덜거렸다.
“꼬마 취급하지 마시오.”
“......이거 실례.”
나는 사과했다.
“너도 엄연한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잊었군. 미안하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잰체했다.
“괜찮소.”
나는 피식 웃은 후 몸을 돌렸다. 그때 녀석이 물었다.
“왜 그랬소?”
“뭘 말이냐?”
나는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았다. 녀석은 꽤나 모호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말했다.
“왜 스승님께 그 뭣이냐....... 손을 쓰지 않았소?”
어째서 석훈을 죽이지 않았는가. 그건 내가 수백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원했더라면 석훈을 죽일 수 있었다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그보다 뛰어나서는 아니었다. 단지 그는 내가 원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했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럴 기회가 있었음에도.
어째서일까.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나는 말했다.
“그때 내가 석 장문인을 죽였더라면, 내가 가지고 있던 원한은 사라졌겠지만 대신 네게 스승을 살해당한 원한이 생겼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그 원한을 갚기 위해 나를 찾아올 테고. 사람이 죽었는데도 원한은 해결되지 않고 똑같은 일이 여전히 반복되는 셈이니 뭔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솔직하게 토로했다.
“그렇게 어려운 건 잘 모르겠소.”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은 나도 마찬가지다.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알게 될 거다. 사부님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알게 될 것 같다고, 나는 그리 생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