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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6/23 15:19:47
Name 두괴즐
Link #1 https://brunch.co.kr/@cisiwing/9
Subject [일반] 집 나간 적 없는 꿈을 찾습니다 上편 (꿈 찾는 에세이) (수정됨)
집 나간 적 없는 꿈을 찾습니다 上편
-내 마음속에 있다는 내 꿈을 찾습니다!



나는 꿈이랄 게 없었다. 태양 너머의 광활한 우주를 알고 나서 장래희망 칸에 ‘과학자’라고 쓰긴 했지만, 뭐든 써야 했기에, 쓴 것에 가까웠다. 물론 내가 수학이나 과학을 잘 해서 진짜 그것이 가능한 꿈이 됐다면, 전혀 다른 회고를 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꿈이랄 게 없었던 것으로 하는 편이 낫다.



여하튼 그 칸에 뭘 써도 달리 관심 가지던 사람이 없던 시기에는 그냥저냥 제출 용일뿐이었다. 뭐, 그래도 괜찮은 시절이었고, 나 역시 다른 친구들이 뭘 쓰든 관심 없었다. 우리를 맡은 담임선생님과 우리의 부모들은 달리 생각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꿈의 당사자들은 그랬다. 우리는 꿈보다는 매주 발매하는 아이큐점프(주간 만화 잡지)에 수록된 드래곤볼의 다음 내용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냥 그러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 좋던 시절이 끝나가고 있었다. 중학생 예비 학교에 가서 중학 교과서를 잔뜩 가지고 돌아오던 날, 엄마는 나의 보물 1호, 아니 우리의 보물 0호인 드래곤볼 단행본을 리어카에 실어 우주로 보냈다. ‘상의도 없이 이렇게 마음대로 해도 된단 말인가? 동지여 모여라! 침공이다! 내 유년기의 8할이여!’



그런데 친구들은,



“좀 너무하네.”

“돈 아깝다.”

“만화대여점에서 빌려보면 되지.”  



라는 태평한 소리 나 하는 것이 아닌가? 방을 뒹굴뒹굴하며 어른들 몰래 봤던 드래곤볼, 함께 모았던 드래곤볼 카드, 전투력을 따지며 밤을 지새우던 나날들은 다 어디로 갔나?  



엄마가 문제였지만, 친구들은 더 문제였다. 어떻게 드래곤볼을 그리 보낸단 말인가! 혁명의 동지라고 믿었던 친구들은 이미 반혁명의 세력이 되어 있었고, 몰래 왕정의 품에 안겼다. 나는 이런 반동을 참을 수 없어서 다시 동지를 모으려 했고, 십시일반 용돈을 거둬 새 아지트를 건설하려 했다. 그런데 애들은 “그러냐?” 할 뿐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시큰둥한 운동화가 된 친구들은 각자의 학원으로 흩어졌고, 나는 세상을 모르는 아이가 되어, 땡땡이를 쳤다. 다음 날 한 놈이 학원에서 했던 내용을 읊으며 “정신 차려라!”라고 했고, 나는 그놈이 왜 우리 엄마가 됐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동네에서 같은 교복을 맞췄고, 그날부터 꿈은 잘 때 꾸는 게 아니라, 깰 때 이루는 것임을 알아야 됐다.  



듣자 하니 그런 것이었고, 그러고 보니 문제는 나였다.



꼬꼬마 시절에 같이 뽑기를 하고 퐁퐁을 뛰고 살구를 하고 무궁화 꽃을 피우던 아이들이 하나 둘 현실의 꿈을 찾아갔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용신을 부르던 사성구 드래곤볼이 영원히 빛날 터였지만, 굳이 밖으로 꺼낼 이유는 없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새 나라가 아니었고, 우리 역시 더는 어린이가 아니었다. 문제는 나만의 그리움이었다. 아니, 그 그리움은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었지만, 시절의 문턱을 넘는 발에는 시차가 있었다. 나는 머물러 있었고, 뛰쳐나간 애들이 서운했다. 알아가니 그 시차는 꿈의 유무에 달려있었다.



구슬치기의 달인이던 녀석은 어느새 엔지니어를 꿈꾸며 자격증 수집에 혈안이 되어 갔고, 개발로 유명해서 편가를 때 기피 대상이던 약골이는 기자가 될 꿈에 빠져들었다. 골목길을 걷다가 알지만 모르는 형들에게 담뱃값을 상납했던 친구는 경찰이 될 참이었다. 그뿐 아니라, 누구는 수학 선생이 또 누구는 야구 선수가 또 누구는 ‘나는 마 그런 거는 모르겠고, 무조건 서울대!’를 꿈꿨다. 그런 선언들이 동네방네 떠들어질 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런 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만약 드래곤볼 다 모으면 무슨 소원을 빌 거야?”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다니며 봉창을 두드릴 따름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같이 야구 스티커 모으기에 혈안이었던 애들이 갑자기 지구의 중력을 느끼며 걷기 시작했다. 교복을 입은 형들은 무서웠고, 나도 그런 교복을 입고 있었다. 선생님은 이제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증명하는 것이라고 선언했고, 나는 그 꿈은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자고로 청소년의 꿈은 어린이의 꿈과는 체급이 달랐다. 나는 꿈도태아가 되어 골목을 서성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얼빠진 놈의 호주머니는 행님들도 털지 않았다. 꿈 선언은 자기 확신과 비례하여 강력해졌으므로 미친놈이 될수록 좋은 것이었다. “찾습니다! 나를 미치게 할 그런 꿈을 찾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다는 내 꿈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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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6 00:28
수정 아이콘
하편 보고 상편 보러 찾아왔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꿈이 바뀌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어느새 자면서도 꿈을 안 꾸게 되어버렸지만요!
두괴즐
23/06/26 14:16
수정 아이콘
꿈은 계속 꾼다고 하더라고요. 단지 기억을 못할 뿐.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기억하는 일상도 특별한 것만 기억하는 것 같기에, 꿈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악몽이나 신기한 꿈같은 걸 기억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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