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9/11/03 10:02:10
Name kapH
Subject (09)라이터가 없다.
담배를 피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보니 라이터가 없다.

뾰로통한 얼굴로 라이터를 건네주던 그 아이는 이제 없다.
우리가 사귀게 된 건 어찌보면 나의 잘못이다. 내가 짝사랑했던 그녀에게 차이고 담배를 처음 배운 그 즈음일 게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남자 놈들에겐 차였다는 걸 알리기 싫어 그 아이를 붙잡곤 하소연했다.
그 아이는 앞에 채워진 소주잔을 비우지도 않고 혼자 술에 취한 나의 탄식을 들어주었다. 자기를 찬 남자에게 다시 붙어먹으니 좋더냐, 나쁜 년. 망할 년. 년년년.
그렇게 나의 찌질한 신세한탄을 한참을 들어주던 그 아이가 처음으로 나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했다.
이미 술이 머리 끝까지 올라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빠, 그렇게 아프면 내게 와. 나 오빠 좋아해, 정도였겠지. 그리곤 홧김에 나는 그녀에게 키스해버렸다.

그렇게 시작한 우리들은, 아니 나는 책임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아이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저 동생일 뿐이었다.
다만 그렇게 착하고 순진한 아이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개새끼! 그 끝이 뻔하디 뻔한 엔딩일 수 밖에 없는 흔한 이야기 중 하나였을 뿐.

어쨌거나 그런 나를 그 아이는 정말로 사랑해 주었다. 젠장, 언어의 객관성이란.
담배 피는 남잘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 아이는 가끔 라이터를 빼먹고 온 나를 보면 뾰로통한 표정으로 라이터를 꺼내주었다.
아니, 어쩌면 내게 있어 담배는 그녀의 잔상이기에 담배를 싫어했을지도 모르는 일었는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그런 식으로 날 사랑해 주었다.

보통은 남녀 관계에선 남자가 빨리 타오르고 여자가 늦게 타오른다고 하였던가.
하지만 우리는 반대였다. 아직 나에게 남아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그 아이는 점점 나에게 실망하게 되었고,
점차 털어내게 된 나는 그 아이를 점점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있었다.

뒤늦게 그 아이에게 매달리기 시작하였지만 그런 모습은 그 아이의 실망감을 더 해줄뿐,
결국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사이를 가르는 거대한 산불처럼 번져가 파국을 맞게 되었다.
고약하게도 그녀에게 차였던 늦여름에.

이제 라이터를 챙겨주던 그 아이가 없다.
그런 가을에 라이터가 없다.

그 아이가,
없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0-29 13:13)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growinow
09/11/03 10:29
수정 아이콘
어헣↗추게로!
peoples elbow
09/11/03 11:02
수정 아이콘
안그래도 쌀쌀한 가을에 어울리는(?) 글이네요..

라이터가 없다면... 성냥으로??
09/11/03 12:04
수정 아이콘
엘케인
09/11/03 12:10
수정 아이콘
글이 좋네요. 맘이 아려와서 문제지.
나두미키
09/11/03 12:11
수정 아이콘
에휴...
09/11/03 14:01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글쓰신 분은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했고, 여자 분은 안쓰러운 마음에 동정한 것을 오해하신 것이 아닐까요?
같이 담배를 태울 수 있는 여자친구를 구하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의 경우 저보다 담배를 더 많이 태워서 탈이었지만.....
시린 마음에 별로 도움이 안되는 리플이라 죄송합니다.
09/11/03 14:14
수정 아이콘
덜덜덜.. 추천이 댓글보다 많아;;
애잔하다고 해야하나.. 참 여운이 많이 남는 글이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533 왜 종교인가? [111] 글장6524 11/11/05 6524
1532 (10)이영호 vs 김윤환 관전평 [25] fd테란8831 10/01/03 8831
1531 (09)[인증해피] 피지알 2009년 활동을 정리하며... [28] 해피5932 09/12/28 5932
1530 (09)MSL을 위한 조언 [26] becker5937 09/12/11 5937
1529 적的은 가까이에... [32] 삭제됨5480 11/11/04 5480
1528 [영상] Dear. 이현주... [7] 염력의세계4898 11/10/29 4898
1527 경험자가 바라본 무상급식관련 의견입니다. [18] Kemicion4714 11/11/04 4714
1526 [야구] 2011 시즌 <프로야구> 팀별 성적 + 선수별 성적 총정리.. # 1 [17] k`3724 11/11/04 3724
1525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어야한다. 한국 홍보의 문제점. [15] sungsik4410 11/11/02 4410
1524 (09)고백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 [42] Love&Hate11362 09/12/09 11362
1523 (09)내가 진짜로 듣고 싶었던 말 [23] 키큰꼬마8086 09/12/04 8086
1522 (09)멀어지는 과정. [17] 50b5312 09/11/19 5312
1521 왕자의 난 - (1) 조선의 장량 [10] 눈시BBver.25042 11/11/02 5042
1520 다단계 피해 예방 혹은 ‘Anti’를 위한 글(+링크 모음) 本(본) 편 : 초대Ⅰ [4] 르웰린견습생5569 11/11/01 5569
1519 한미 FTA에 대해 알아봅시다. [92] Toppick8148 11/10/29 8148
1518 (09)[고발] 데일리e스포츠, 그들이 묻어버린 이름 '위메이드' [60] The xian12183 09/11/08 12183
1517 (09)라이터가 없다. [7] kapH4749 09/11/03 4749
1516 고려의 마지막 명장 - (5) 폐가입진, 해가 이미 저물었구나 [5] 눈시BBver.23935 11/10/26 3935
1515 꿈은 조금 멀어지고 죽음은 조금 가까워진. [19] 헥스밤6591 11/10/11 6591
1514 (09)Neo Kursk - By Flash & Firebathero, 경기 분석글. [14] I.O.S_Lucy5750 09/10/21 5750
1513 (09)옛날 옛날 어느 마을에 구두 만드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결혼도 안하던 초식남 구두장인이 있었습니다. [36] 양치기6996 09/10/19 6996
1512 (09)매혹적인 행성들 [30] 세린6569 09/10/13 6569
1511 windows 8 사용기 [31] 5976 11/10/25 597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