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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2/22 22:37:28
Name happyend
Subject (내용정정)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어제밤에 몸이 좀 피곤한 상태에서 썼더니....(이건 물론 변명이고요)
치명적 실수를 했습니다.(지금 읽어보고,깨달았습니다.)

법왕은 혜왕의 맏아들입니다. 따라서 위덕왕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입니다.
혼란을 드려서 죄송하고요,내용은 이에 맞춰 수정하겠습니다.(기조자체가 변할 것은 없어서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1.

2009년 1월 14일.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습니다. 탑이란 원래가 사리를 넣어두고 예배하기 위해 만든 것이니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들 그다지 놀랄 일은 못됩니다. 하지만 금으로 된 판자에 적힌 94개의 글자 속에는 엄청난 사실이 들어있었습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부인이 왕에게 졸라서 원래 못이었던 자리를 메워서 세운 절이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발굴 과정에서 연못 흔적까지 나왔기 때문에 이 사실을 기록한 <삼국유사>속의 설화가 단순한 창작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덕분에 <삼국유사>의 역사적 가치도 높아졌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뒤집어 버린 94개의 글자. 미륵사를 세운 백제 왕후가 사택덕적이라는 귀족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힌 이 글자는 커다란 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 왕후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과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도 대위기를 맞았습니다. 학계에선 연일 토론을 벌였고, 논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새로운 사실을 해석하기 위해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선화공주는 존재한다, 다만 왕후가 아닐뿐이라는 의견, 선화공주가 죽고 사택왕후는 그 뒤를 이은 왕후일 것이라는 의견, 그냥 가공의 인물이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선화공주가 실존인물이라고 해도 익산지역 유력귀족의 딸이라는 의견, 진평왕의 딸이라는 의견 등도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화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설화도 사실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것이 소설이나 전설과 다른 점입니다. 그렇다면 서동설화의 진실은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일까요? 서동이 사랑했던 선화공주는 누구일까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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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경주에 가서 노래를 지어 저잣거리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습니다. 그것이 서동요입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어 놓고
서동이를
밤마다 나와 안고 놀다가 돌아가네.

이 노래가 궁궐 담을 넘어 들어가자 진평왕은 노발대발해서 선화공주를 유배 보냈습니다. 서동이는 미리 기다리다 선화공주를 데리고 익산으로 돌아와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선화공주의 어머니는 딸을 유배 보내면서 금을 싸서 보냈습니다. 공주가 그 금덩이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려 하지 서동은 크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게 그리 귀한 것이란 말이오? 내가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흙처럼 쌓여 있소."

공주는 그 금을 아버지 진평왕에게 보내자 하였습니다. 서동이 사는 익산에는 용화산이 있고, 이곳 사자사에 지명법사란 스님이 신통력으로 이 금을 진평왕에게 하룻밤사이에 날라주었습니다. 이것을 본 진평왕은 신기한 조화를 기이하게 여기고 존경하여 편지를 자주 보내 안부를 물어왔습니다. 서동은 이 일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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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삼국유사>에 나온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이야기입니다. 신기한 것은 서동이와 금 얘기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서동이 살던 뒷산은 금덩이 다섯 개를 주웠다는 곳으로 이후 오금산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삼국유사속에서 서동은 서동은 금에 대해 중요한 표현을 합니다.
‘흙처럼 쌓여있소.’
우리가 생각하는 금은 보통 금덩이.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아마 이렇게 말해야 정상일 것입니다.
‘돌덩이처럼 쌓여있소.’
하지만 흙처럼 쌓여있다는 이 표현은 서동설화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서동이 말한 금이 나는 곳은 김제일대입니다. 김제란 지명이 ‘금과 벽골제의 마을’이란 뜻이거든요. 벽골제에서 벽골은 ‘볏골’의 한자식 다시 말해 이두식 표현입니다.
그런데 모든 고문헌에 보면 김제의 금은 돌과 같은 금괴나 금덩이가 아니라 모래와 같은 금인 ‘사금’입니다. 이 금맥은 꽤 유명했고, 오랫동안 채취가 가능했으니 매장량도 상당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 금맥이 다한 것은 일제 강점기시대 지독한 채취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흙처럼 쌓여 있었다는 말의 의미는 이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여기까지는 딱딱 들어맞습니다. 그러니까 서동설화의 진실은 '금'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선화공주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딱 하나있습니다. 그녀가 바로 금이 가치있는 존재란 것을 서동에게 말해주었고, 그래서 서동이 금을 장악하게 해준 사람그리고 그 금의 힘으로 왕권을 장악하게 해 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서동은 금의 가치를 정말 몰랐을까요?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일찍부터 금을 권위의 상징으로 써왔습니다. 하지만 사서에 보면 외부인의 눈에 비친 마한지방사람들은 금을 거의 돌덩이 취급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익산은 한때 마한의 도읍지인 금마로 알려지기도 했던 곳입니다. 따라서 익산에 사는 촌놈 서동은 금의 가치를 모르고 자랐습니다. 청동기나 옥구슬보다 못한 게 금이었으니까요. 여기까지도 역사는 ‘서동설화’편입니다.
( 7년전에 답사를 갔을 때만 해도 이곳은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일본 역사학자들의 관심이 더 많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백제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난 마한세력은 이곳 금마를 바탕으로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벌였기 때문이었지요.)

3.

설화의 내용은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금으로 진평왕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것이 다시 백제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 설화속 진실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금으로 ....왕위에 올랐다.'

금이 어떻게 익산 촌놈 서동을 왕으로 만든 것일까요? 이 진실을 찾기 위해 저는 다시 한 번 익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아, 물론 작년입니다만....그런데, 전 익산에 갈때마다 궁금한게 있었어요. 익산의 최고 명물이 왜 미륵사도 왕궁리도 아니고 보석박물관일까....이 궁금증도 이 답사에서 풀렸습니다.)

서동을 왕으로 올려놓은 금의 비밀. 그 비밀의 장소는 어디 있을까요? 그 장소를 찾아 백제 무왕이 지었다고 하는 왕궁리 유적을 찾아갔습니다. 이 유적은 이름 그대로 '왕궁'이 있었던 곳입니다. (정확하게는 왕궁리 유적 박물관^^)

확실히 이곳에는 백제 궁궐로서 손색이 없는 궁궐이 있었던 듯합니다. 규모도 배치도 완벽하게 임금의 거처였습니다. 인공 못을 만들거나 괴석을 이용하여 자연과 어울리게 만들어진 후원까지 과연 궁남지를 지었고, 왕흥사를 지었던 백제 무왕다운 미적감각이라 여겨집니다.

궁궐은 높은 담장에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한 사학자는 이 궁궐의 담벼락과 동일한 것을 일본에서 찾아냈습니다. 일본궁궐의 높디높은 담벼락은 경복궁이나 덕수궁과는 다른 뭔가 은밀한 느낌이 나는데요, 왕궁리 유적의 담벼락 유적을 바탕으로 복원해본 결과 두 담벼락은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하여간 담벼락도 어마어마하고 경계도 삼엄하게 만든 이 곳 안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려주는 유적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화장실입니다. 그냥 화장실이 아니라 공중 화장실. 이 화장실이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공중 화장실입니다. 규모로 보아선 꽤 큰 공중화장실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을 사용했던 사람이 왕일리 없습니다. 공중화장실이니까요.
아래 그림은 민망하겠지만, 박물관에서 촬영한 것이고요 그 아래그림은 복원도입니다.






궁중에 이런 대규모 공중화장실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 하나, 밖으로 나가선 안 되는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위해서였던 것이지요. 그들은 그만큼 비밀스럽고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그들이 거처는 화장실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방’. 지금으로 치면 ‘공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방이 ‘금제품을 만드는 공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단순한 공방이 아님은 유적에서 계속 드러납니다. 상인이 오갔던 흔적으로 남겨진 수레자국. 중국의 상인들이 무수히 드나들었던 흔적인 청자도자기까지. 국제무역상들은 이 은밀한 궁궐의 단골손님이었던 것이지요. 담이 그렇게 높아야 했던 이유도 이로서 설명이 되었습니다. 궁궐은 이 기술자를 보호하고 거래하던 곳이었던 것이지요. (익산이 보석의 고장이었던 것이 이때부터^^)

서동설화 속의 금의 진실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서동은 ‘선화공주의 조언을 바탕으로 금의 가치를 재발견’한 것입니다.


4.

아,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서동은 비록 익산 촌놈이었을지 모르나 어엿한 왕자였으니까요.

잠시 서동이 왕이 되기까지 상황을 보면 이렇습니다. 증조할아버지가 성왕이고 큰할아버지는 위덕왕, 할아버지는 혜왕, 아버지는 법왕입니다. 이 찬란한 왕실의 가계도가 삐끗한 것은 성왕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뒤부터였습니다. 바로 전 글에도 썼지만, 격동의 550년대에 백제 성왕은 나제동맹을 성립시키고 꿈에 그리던 고구려 침략을 성공,한강하류를 얻었으나 고구려의 묵인아래 신라의 진흥왕이 뒤통수를 칩니다.
이게 격분하여 3만연합군(백제-가야)을 모으고 왜에서도 지원군을 약속받아 신라를 치려던 순간에 성왕은 지금의 옥천에 있는 구진벼루란 곳에서 신라의 매복군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그리고 3만 연합군은 신라에 처참하게 패배, 단 500명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이 전투가 관산성전투입니다.

이것은 백제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자인 창, 즉 위덕왕이 밀어붙인터였고, 그는 성안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했으나 겨우 목숨만 건졌습니다. 신하들은 태자를 살리기 위해 수없이 목숨을 버려야 했고, 그렇게 도망쳐왔으니 아버지도 2만 9천 500명의 군사도 다 자기탓에 죽었다는 깊은 자괴감에 빠집니다.(그래서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것이 금동대향로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왕실의 권위 따위가 있을리 없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서동이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효순왕자. 위덕왕의 아들도 아니고 태자도 아닌 왕의 조카에 불과했습니다.
임금도 전전긍긍하는 마당에 왕도 태자도 아닌 왕실나부랭이 효순왕자가 익산 촌구석에서 시골여인과 정을 통해 낳은 서동을 궁궐로 데려갈 수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왕실에 가봐야 목숨만 위험하다고 생각한 효순왕자의 배려였을지도 모릅니다만.

인생역전이 벌어진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위덕왕이 세상을 떠난 후 백제는 요동쳤습니다. 태자인 아좌는 일본에서 돌아와 왕위를 잇지 못한 채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늙은 동생 혜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일 년을 못 버텼습니다. (아좌태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왜 그가 돌아와 왕위를 잇지 못했는지  아직은 다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위덕왕의 다른 아들은 일찍 죽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하여간 이렇게 해서 서동의 아버지 효순왕자가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으니 그가 법왕입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야심이 많았습니다.  이런 임금이 오래 갈 리 없었지요. 백제 왕실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결국 법왕마저 2년도 못되어서 죽었습니다. 598년, 599년, 그리고 600년 이렇게 3년간 매해 왕이 죽어나갔습니다. 이 어지러운 가운데 서동왕자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가 무왕이니 정말 자고 일어났더니 인생이 변한 셈입니다.


5.

촌놈 서동이 단지 왕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만으로 왕이 되었을까요? 여기서 무왕을 왕위에 오르게 한 두 번째 여인. 사택왕후가 등장합니다.

무왕의 부인은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비시대 백제 최고의 실력자인 사택가문의 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마 역사적 진실일 것입니다. 일개 익산촌놈이 왕위에 오른 것은 사택가문 정도의 힘을 등에 업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의 탄생연도는 무왕이 왕위에 오른 때인 600년보다 이른 시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택가문은 무왕-의자왕의 외척으로서 한시대를 풍미하게 되는데요, 사비의 주요세력인 이 가문은 성왕의 천도를 도우면서 급부상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익산 촌놈이 떠오르는 명문가 사택가문의 후원을 받아 결혼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는 열쇠는 백제의 왕 중에서 왜 유일하게 무왕만이 탄생신화가 있는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백제는 고구려,부여세력이 거듭 남하하면서 왕실을 구성했기 때문에 따로 건국신화가 필요없었습니다. 동명왕의 신화가 영향을 미쳤던 것이지요. 이후 성왕이 부여의 정통성을 내걸어,부여의 숫자인 5를 기반으로 한 체제개편에 나서기는 하지만 신화는 필요없었습니다.)

서동이 태어났을 무렵, 익산 사람들은 그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해왔습니다. 만경평야가 눈앞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귀족들에 의해 금의 수요량이 증가한 것이지요. 익산의 토착세력들은 마한시대 이래로 여전히 독립적인 성향이 강하였고, 과거 마한왕 시대의 영광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꿈을 꿨겠지요. 그리고 우연히 익산 마룡지 앞 오막살이에 왕자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왕자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꼬질꼬질한 모양새의 서동이었으나 익산토착부호들은 그 속에 깃든 야망과 능력을 알아차렸습니다. 서동설화는 그 야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화공주를 꼬셔낸 것은 서동이었지, 반대가 아니었으니까요.

시대가 그들을 도왔는지 사비에선 귀족들이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왕실의 힘이 약해지자 귀족들은 소위 정사암이란 바위에 모여서 나라를 좌지우지할 결정을 합니다. 이 귀족회의는 대성팔족이라 하여 8개 가문대표가 모여서 이루어졌는데요, 인사권을 직접 행사합니다.
(지난 편에 얘기했듯이 이때 고구려는 대대로, 신라는 상대등이 각각 귀족대표로 일종의 원로원 의장역할을 했던 것에 비해 정사암회의는 훨씬 더 힘이 컸습니다.)

이런 귀족정치시대다보니 갈등은 첨예해지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한성시대,웅진시대를 거치면서 백제는 수많은 마한세력들과 남하한 고구려-부여 세력들을 귀족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은 각지에 웅거하여 왕권을 장악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니까요.

바로 이때 은밀한 동맹이 이뤄집니다. 미래를 꿈꾸는 두 세력. 익산세력의 추대를 받은 서동과 떠오르는 실력자로 성왕을 도와 실권을 손에 쥐려다 주춤하고 있던 사택가문간의 동맹.그 렇게 해서 서동은 사택가문의 딸과 결혼하고 그 사이에 미래의 의자왕까지 태어납니다. 그리고 곧 법왕이 죽고(이 죽음은 역시 미스터리이고, 암살설도 있습니다.) 무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사택가문의 시대도 열립니다.

6.

서동설화의 진실이 금이라면 거짓의 열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당연해져버렸겠지만 미륵사입니다. 선화공주의 존재를 증명해줄 유적이었던 미륵사가 오히려 그녀의 존재를 부정해버리고 있으니까요.

미륵사는 미륵이라는 미래의 부처가 내려와 전쟁에 지친 백제인들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뜻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 공사에 필요한 천문학적 금액을 제공한 사람이 무왕의 왕후입니다. 왜 왕후는 아니, 사택가문은 이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미륵사를 지은 것일까요? 그리고 왜 삼국유사엔 미륵사를 지은 무왕의 부인을 선화공주라고 한 것일까요? 여기에 서동설화의 거짓이 말하고자 한 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미륵사는 이름부터 백성을 위한 사찰로 여겨지지만 여기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진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탑은 언제나 왕실의 영광을 위한 것, 아버지 법왕의 영혼을 위로하고 무왕과 왕실의 영원한 번창을 빌었습니다.

원래 사리장엄은 사리를 담은 병과 함 그리고 사리를 봉안한 이야기를 담은 봉안기 등을 일컫는 말입니다. 삼국시대까지 불교에서 예배대상은 사리가 봉안된 탑이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데서 유래하기 때문입니다. 석가는 자신을 위해 그 어떠한 성전이나 상징물도 짓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탑만은 허락했다고 합니다. 이후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은 예배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불교가 이웃 아시아로 퍼지면서 석가의 사리를 구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대신에 다른 사람의 사리나 불경, 작은 불탑이나 불상 등과 같이 불교를 상징하는 것들을 넣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법신사리라고 하는데 진짜 석가의 사리인 진신사리와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탑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 부속물인 절까지 만들었으니까 어지간한 경제력을 갖지 않는 한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삼국시대 절은 대부분 왕족들만이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탑 안에 자기 가족의 사리를 넣어 죽은 가족과 그 후손의 영원한 번영을 빌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사리는 특별한 혈통, 부처와 동급이거나 부처가 될 예정이거나 이미 그러했던 가문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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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사택가문이 미륵사를 지을 돈을 기부하면서 눈꼽만큼도 백성따윈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기록엔 이때 지은 절의 이름이 ‘미륵사’가 아니라 왕실이 번창하기를 바라면서 지은 절로서 ‘왕흥사’를 완성했다고 쓰여있기도 합니다. 저는 이두가지가 전부 사실이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미륵사의 양면성인 것이지요.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그래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왜 익산사람들은 미륵사를 필요로 했을까요?

7.

이전까지 모든 전쟁은 고구려와의 전쟁이었습니다. 경기도 충청도 백제인들이 고달팠지요. 익산을 중심으로 살고 있던 옛 마한인들은 평화롭게 농사짓고 살아왔습니다.

관산성전투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백제는 충청도 아래로 밀려내려 갔고, 동맹군이자 완충지대였던 대가야마저 신라에게 정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평화롭던 마한세력들 그중에서도 사비의 지척에있던 익산-김제세력에겐 새로운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궁궐의 필수품인 쌀과 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들은 무왕에게 꿈을 실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이곳 사람들에겐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무왕은 귀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전쟁이 필요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왕인 것도 이때문이었습니다. 무왕이 왕위에 오른 뒤 백제는 옛 가야 지역을 둘러싸고 신라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시기 신라가 백제를 공격한 것은 단 두차례인데 비해 백제는 무려 11번이나 신라를 침공했으니 전장의 배후지이자 전쟁의 후원자인 익산-김제지역 백성들의 고통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물론 이 전쟁은 왕실의 권위를 되찾아오는데 성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사택가문의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거듭되고, 귀족들을 완전히 내리누르기 전까지 무왕은 미륵신앙을 설파해서 익산사람들을 위로하고 왕궁리에 궁궐을 지어 그들의 영화가 곧 이루어질 것을 약속합니다. 하지만....왕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전쟁의 과실이 차고 넘치기 시작하자 왕은 더 이상 익산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사비에 더 화려한 궁궐을 중수하고 궁남지를 지어 환락에 빠졌습니다.

고통이 클수록 환타지는 더 강렬해지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설화는 진실을 숨기고 거짓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서동설화 속에 담겨진 이 환타지의 키플레이어는 삼장법사보다 더 신통방통한 지명법사입니다. 그에 의해 이야기는 시공간을 절단하여 환타지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신라와의 전쟁에 지긋지긋해진 백제인들은 당시 두나라 왕이었던 무왕과 진평왕의 화해를 꿈꿨습니다. 서동설화에서 백제인들이 만들어낸 환타지는 이렇게 요약됩니다.

'지명법사란 스님이 신통력으로 이 금을 진평왕에게 하룻밤사이에 날라주었다. 이것을 본 진평왕은 신기한 조화를 기이하게 여기고 존경하여 편지를 자주 보내 안부를 물어왔다. 서동은 이 일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지명법사의 신통력이 없이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이 거짓은 지명법사의 존재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거짓을 만들어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왕궁리에서 만들어진 금 세공품이 무왕의 힘이었다면 그 금을 채취한 사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왕으로 만들었으나 오히려 그 무왕의 전쟁으로 고달퍼진 사람. 그들이 지명법사를 하늘에서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선화공주도 태어납니다.선화공주는 제발 전쟁을 끝내자는 그들의 외침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공주님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을 견디게 하여주었던 옛 마한시대의 영광을 이루어줄 그들의 새로운 왕, 신화로서 경배하고 신화로서 고대하던 그들의 왕이 돌아와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탄생한 환타지였던 것입니다. 이 공주님이 무왕에게 금을 주어 왕이 되게 해주었던 그 공주님이었지요. 미륵사를 지어달라고 무왕에게 말했던 그 공주님이었습니다. 마치 동명신화속 유화부인처럼, 그리고 여성성을 강조하여 표현된 관세음보살처럼, 그리고 성모 마리아처럼. 선화공주는 익산 사람들의 마음을 무왕에게 전달해줄 공주님이었습니다.
(선화는 미륵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보통 미륵선화라고 합니다.)

그 마음을 외면하지 못했겠지요. 무왕은 자기가 꼬셔내고, 자기에게 금을 알려주고, 그 금으로 왕이 되게 해준 익산 사람들의 마음을 모른채 하지 못했겠지요. 그래서 부잣집 따님인 왕후의 도움을 받아 미륵사를 지었습니다. 익산사람들에겐 미륵사요, 왕후가문에겐 왕흥사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8.
서동과 선화공주는 정말 사랑했을까요?

물론 그렇다고 봅니다. 익산 사람들은 서동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제 유일의 신화가 나올 까닭이 없었지요. 그들의 사랑이 서동신화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서동도 선화공주, 아니 익산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미륵사를 지었습니다. 미륵사는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일본 기록에는 639년에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고 하는데, 이 사리장엄구에는 미륵사가 639년에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온 것은 무왕의 마음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무왕부부의 묘는 백제 왕실의 공식묘역인 능산리고분속이 아니라 익산에 있습니다.왕후만은 그 사랑을 이해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2-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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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신햇살
12/02/22 23:22
수정 아이콘
일단 추천부터 지긋이 누릅니다.

와...서동요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풀어내시다니요. 정말 놀랍습니다.
역사를 보는 그 혜안과 그 안목을 글로 풀어쓰시는 솜씨가 대단하십니다.

보는 내내 감탄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계속 써주시길 바랍니다.

수고하셨어요 ^^
몽키.D.루피
12/02/22 23:24
수정 아이콘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거슨 피지알 퀄리티..
무한낙천
12/02/22 23:26
수정 아이콘
선화공주 = 익산
정말 그럴듯 하네요
드라마 계백을 보니, 첫째 부인인 선화공주와의 아들이 의자이고
둘째 부인이 사택가문인 것으로 설정했더라구요
물여우
12/02/22 23:26
수정 아이콘
요즘 올려주신 글 잘보고 있습니다. ^^
이번 글도 서동요에서 미륵사까지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주 흥미진진하네요.
다음 글도 기대하며 추천 남기고 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전준우
12/02/22 23:27
수정 아이콘
글 퀄리티 죽이네요....
경의를 표합니다.
기미수
12/02/22 23:28
수정 아이콘
며칠 전 선화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보고 와서 그런지 글에 더 몰입이 됐습니다.
금이 쌓여있다는 표현에서 저렇게 이끌어 내다니.. 재밌군요.
승리의기쁨이��
12/02/22 23:39
수정 아이콘
일박이일을 보면서 경복궁에 대해 자세히 몰랐던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오늘 해피님의 글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역사에 무지했나한번더 느끼네요 익산을 한번 가바야겠습니다.
제목이 더 저에겐 느낌이 오네요
아틸라
12/02/22 23:59
수정 아이콘
교과서에서 이야기해주는 역사보다 더 생생하게 들어오네요~
(물론 국정교과서니 디테일함이나 추론적 내용에 대해선 다룰수 없겠지만요)

삼국시대중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영역이 벡제사인거 같아
책이나 자료들을 읽어보고 있는데 정말 벡제 사적지도 한번 꼭 가봐야 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헤르세
12/02/23 00:01
수정 아이콘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맨 처음 미륵사지 석탑에서 무왕의 왕비가 사택가문의 딸이라는 글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묘하게 실망감이 들었었는데....^^; 이런 관점으로 보니 정말 재미있네요~
12/02/23 00:20
수정 아이콘
와...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대단하십니다
글 올라때마다 잘 읽고 있어요~
너무 재밌네요
어린시절로망임창정용
12/02/23 00:37
수정 아이콘
디테일하게 파고 들어갈수록 어렵고 재밌는 게 역사이야기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Je ne sais quoi
12/02/23 00:40
수정 아이콘
아 완전 재미있어요 ㅜ.ㅜ 빠져듭니다~~
12/02/23 01:06
수정 아이콘
정신없이 읽어내려갔네요.
잘 읽었슺니다. 너무 재밌어요! [m]
화이트푸
12/02/23 01:36
수정 아이콘
선추천 후 리플!
행복한콩
12/02/23 02:02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오랫만에 역사이야기를 접하니 시간가는줄 몰랐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눈시BBver.2
12/02/23 02:04
수정 아이콘
요렇게 깜끔히 해석되는군요. 흥미는 가졌지만 대체 뭔가 하면서 머리 싸매고 있었는데요... 휴 ㅠ_ㅠ) 감사합니다~
나중에 견훤이 전주에 도읍한 이유도 이거랑 관련 있는 거 같아요. 오히려 충청도의 백제 출신들은 견훤 무시하는 느낌이 많이 나구요. 견훤이 신라를 너무 적대적으로 대한 것 역시 이거랑 관련 있지 않나 생각해 봤었습니다 ' 'a
세이시로
12/02/23 10:09
수정 아이콘
정말 잘 읽었습니다.
12/02/23 10:36
수정 아이콘
익산에 가면 왕궁리 유적-미륵사지-쌍릉-제석사 콤보 답사를 꼭 가봐야 하죠
요즘 익산천도설 쪽으로 공부하고 있는데 좋은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반 대중들을 위해서 이런 글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2/02/23 10:47
수정 아이콘
저기 팬..입니다.. 사인좀.. :)
그런데 이번글은 왠지 좀 슬프네요 날씨가 흐려서인가.
위정자와 민중의 엇갈린이야기..
12/02/23 11:45
수정 아이콘
[추게로] 버튼으로 자동으로 손이 가게 만드는 이 퀄리티... 아이디를 궂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이 퀄리티..;;
늘 느끼는 거지만.. 대단하십니다~
켈로그김
12/02/23 11:47
수정 아이콘
좋아요~;;
12/02/23 13:39
수정 아이콘
좋아요+
12/02/23 15:14
수정 아이콘
지루하고 지엽적일수도 있는 소재를 이리도 생생하고 흥미롭게 바꿔놓으실 수 있다니...
나중에 로마인이야기나 람세스 같은 역사소설 작가 되시는 거 아닐지...
12/02/23 20:19
수정 아이콘
추천 EE 채우고 갑니다. ^^
낭만토스
12/02/23 22:32
수정 아이콘
밖에서 스마트폰으로 읽고 집에와서 로그인해서 추천누릅니다

진짜 침 흘리면서 봤네요

대박입니다!
김연아이유리
12/02/28 14:32
수정 아이콘
역시 pgr의 보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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