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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06/23 00:42:21
Name 신불해
Subject 강희제 이야기(9) ─ 뒤집히는 대세
요즘 그다지 시간이 나지 않아 문장을 손볼 짬이 없어서, 좀 글 퀄리티가 별로 일 수 있습니다. 삼번의 난을 더 질질 끄는것도 그리 좋지 않을 것 같기도 해서 좀 급작스럽게 전개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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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여러 전투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분명 최악의 시기를 넘어 희망적인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했던 서북 전역은 1676년 5월, 도해가 현지에 도착하자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도해는 도착하자마자 상벌을 분명히 하고, 군기를 바로잡아 병사들의 용기를 되살렸습니다. 용기를 되찾은 장수들이 나가서 싸우기를 원하자 도해는 거절했는데, 이는 이전의 지휘관들처럼 겁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도해가 걱정하는 다른 한가지 문제는, 만약 싸워서 성을 함락시키면 필연적으로 벌어질 약탈에 백성들이 수난을 당할것이 염려스러웠습니다.


도해는 우선 적의 식량 운반로를 끊어버리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왕보신이 주둔하는 평량성 북쪽에 호산돈이라는 언덕이 있었는데, 그곳은 성 아래를 전부 내려다 볼 수 있고 서북으로 통하는 식량 운반로의 길목이었습니다. 왕보신은 그곳에 1만의 병력을 주둔시켜 방비하고 있었습니다. 도해는 이쪽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반란군은 앞은 보병, 뒤는 기병을 배치하고 화기를 이용해 도해의 군대와 맞서 싸웠습니다. 도해는 관군을 지휘하며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진군을 시작했고 아침부터 엄청나게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오시가 되었을 무렵, 관군은 반란군을 대부분 살해하거나 절벽에 떨어뜨려 죽이고 승리했습니다. 


일단 호산돈을 점령하니, 평량성이 아래로 그대로 보이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도해는 언덕 위에서 대포를 마구 성 안에 발사했습니다. 실질적인 타격보다도, 성 안으로 포격이 가해지며 병사들이나 백성들에게 미치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대단했습니다.


이쯤 되자 왕보신도 상황이 어렵다는것을 느꼈습니다. 세력은 이미 많이 약해졌는데, 이전에 동액 등이 워낙 꾸물거려 그 틈을 이용해 재기를 노렸지만 도해가 워낙 단호하게 움직이고 무엇보다 식량 운반로가 끊기자 버틸 도리가 없었습니다. 도해는 적을 구석에 몰아넣은 다음, 바로 그 직후에 항복을 제안했습니다. 도해의 참모인 주창이라는 인물이 왕보신 휘하의 총병 황구주 사람과 동향인이라는 인연이 있었기에, 주창은 황구주를 이용해 왕보신의 투항을 권유했습니다.


"공은 이전에 폐하를 알현할 때 도해와 면식이 있었다. 일단 그를 볼 수 있으면, 일이 해결된다."


왕보신은 오랫동안 고민하더니,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가 와서 볼 수 있으면 가능하다."


정황을 전해들은 도해에게 주창은 스스로 자신이 나서서 성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했고, 용감하게 평량성 내로 들어가 왕보신을 설득했습니다. 마음을 정한 왕보신은 자신의 부장을 나가는길에 딸려보내 도해에게 엎드리게 해서 투항 의사를 보였습니다. 도해는 강희에게 이 일을 전했고, 모두 용서하라는 승락을 받은 후 성내에 식량을 지원했습니다. 평량의 군민들은 싸움이 이제 끝나게 되었음을 알고 모두 역적의 혐의를 벗은 일을 기뻐하면서, 서로 축하했습니다. 백성들의 잔칫분위기 속에 왕보신은 오삼계가 준 칙인을 도해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왕보신이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자, 도해는 자신의 조카를 성안으로 들여보냈고, 왕보신은 그때가 되서야 도해의 진심에 감동받아 의심을 풀고 직접 도해의 군영에 이르렀습니다. 도해는 왕보신을 보고 역적 행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얼굴이 이렇게 수척해지다니,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왕보신을 껴안고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왕보신도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도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국가를 저버렸는데, 조정이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도해는 즉각 칼을 꺼내 왕보신에게 상처를 내고,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를 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이전과 전혀 다름이 없음을 보장했습니다. 왕보신은 매우 기뻐해서 군영에서 머리를 잘라 변발을 했고,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왕보신이 항복함에 따라 서북에서 임약하던 다른 반란의 무리들도 자연스럽게 소속 군사를 이끌고 연이어 투항했습니다.


속터지는 이야기만 듣다가 이런 승전보를 들은 강희는 정말 뛸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는 입에 침이 마르게 도해를 칭찬했습니다.


"은혜와 위엄을 선포하고, 위무와 토벌을 함께 시행 했으며, 전략이 치밀하고 배치가 신속하여, 평량 일대를 단기간에 평정했다. 우대하여 관품을 수여하도록 하라. 왕보신은 죄를 뉘우치고 투항했으므로 원래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태자태보를 더하며, 정해 장군으로 임명하여 도해를 따라 한중에 주둔하고 공을 세워 속죄하라."


또한 오삼계가 징발하여 전쟁에 참여한 묘족의 소수민족 부대에 대해서도, 눈꼽만큼의 죄도 묻지 않고 오히려 하사금을 주어 가속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우선 위급했던 서북의 형세가 수습되었습니다.


서북의 전투를 보면 도해가 신속하게 행동하자 별다른 어려움도 없이 왕보신의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는 그러하지 못해 싸움이 길어졌습니다. 강희가 처음에 중임을 맡긴 일부 대장군 및 장군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편안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던 왕공 및 귀족들이었고, 그들은 어려운 환경에 대처할 만한 훈련을 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전쟁의 실제 경험조차 없었습니다. 오삼계 반란군이 맹렬하게 진격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들의 행동이란 대단히 지지부진했습니다.


강희는 삼번의 난 기간 초반 동안, 파견된 대장군들의 놀라울 정도의 무능과 어이가 없을 정도의 소심한 행태에 대하여 할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과 극도의 자제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강서에 나가 있는 간친왕 나포에게 문자 그대로 최후통첩을 날렸습니다.


"장사를 회복하고, 호남을 평정하며, 길안의 대군에 의존하여 대응해야 한다. 만일 이전처럼 지체하고, 관망하여 안친왕의 대군이 이탈하면, 나포 등은 군기를 어긴 예에 따라 중죄로 다스리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협박을 당한 나포 등은 비로소 군사를 이끌고 길안을 포위하려 했습니다. 당시 길안에는 고대절이라는 뛰어난 장수가 4,0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수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고대절이 워낙 용맹한 사람이고, 그 수하 부하도 대단한 정예벙이라 싸움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고대절은 고작 100여명의 기병으로 관군의 대군영과 격돌하여 사앧를 대파시켰습니다. 관군의 지휘관인 나포는 놀라서 도망쳤는데, 문제는 고대절의 동료인 한대임이 고대절을 시기해, 오삼계의 부하 중에 한명인 호국주 앞에서 고대절을 이간질 했던 것입니다. 핍박을 받은 고대절은 울화가 터져 죽었고, 한대임은 길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아 나포는 다시 길안을 포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오삼계는 길안이 위급하자 이를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오삼계와 대치하고 있던 관군의 장군 늑이금은 겁을 집어먹고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는 마음 놓고 왕서, 도모, 마보 등의 지휘관에게 각각 3,000여명, 즉 9,000여명의 병사를 주어 길안으로 진군시켰습니다.


 이 장수들의 기량을 보자면, 왕서는 용맹한데 반하여 마보는 겁이 많았습니다. 왕서는 마보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병사를 구원하려면, 뜨거운 불에서 구하고 끓는 물에서 꺼내 주는 것처럼 해야 한다. 대군은 응당 신속히 100리 떨어진 평향으로 가야 한다. 구원병이 모두 도착하면 길안의 포위는 곧 풀어진다."


 마보는 동의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군이 길안을 포위하고, 평향 일대에도 반드시 매복을 숨겨 놓았을 것이다. 그러니 잘못 진군하면 전멸한다. 형양을 도강하여 가면 적이 가로막는 바가 없다. 시일은 비록 늦어지지만 만전의 계책이 된다."


왕서는 서둘러 진군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마보는 천천히 가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왕서는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마보의 주장을 억지로 따랐습니다. 그렇게 보름을 진군하고 나서야 비로소 길안 경내에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에 도달하려면 중간에 강을 건너야 했는데 선박이 필요했습니다. 마보는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병이 도착했으니, 관군은 반드시 우리가 강을 건너기 전에 와서 저지 할 것이므로, 그들이 절반 정도를 건너오면 우리가 진격하자."


 잠시 후 관군이 와서 강을 건넜습니다. 왕서는 마보에게 어서 계획대로 하라고 재촉하였으나, 마보는 정작 나서야 할 때가 되자 겁을 먹고 머뭇거렸습니다. 왕서는 군사를 이끌고 빠르게 공격하여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마보는 병사를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왕서가 너무나 화가 나고 분해 싸우다 말고 마보의 군영 안으로 따지러 들어갔는데 마보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병사들에게 물어보자,


"장군은 지하 토굴에 숨었습니다."


라는 대답이 들어왔습니다. 왕서가 지하 토굴로 달려가 보니, 과연 마보가 쪼그리고 숨어 있었습니다. 왕서가 마보의 몸을 일으키자, 마보는,


"화포의 위력이 강해 잠시 몸을 숨겼소."


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서는 그런 억지로 마보를 끄집어서 밖으로 나왔습고, 마침 밤이 다 되어 전투는 종료되었습니다. 그러자 마보는 밤을 틈타 적군과 5리 정도 더 떨어져서 진영을 꾸미자고 제안했고, 왕서는 이에 동의했습니다. 


이 약속에 따라 마보는 앞장서서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습니다. 이제 적절한 지점에서 멈추어 진영을 꾸려야 했건만 그는 10리, 이어서 20여리, 더 나아가서 30여리를 물러나면서도 멈추려는 생각이 없고 오히려 이 틈에 줄행랑을 치자는 식의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왕서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병사들을 멈추게 했습니다. 하지만 마보는 기어코 10여리를 더 물러나서 겨우 군사를 멈추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왕서는 출진을 재촉하였으나, 마보는,


"병사들이 피로하오."


라고 하면서 이틀은 쉬어야 출전이 가능하다고 말 했고, 이틀 뒤에 왕서가 다시 전투를 재촉하자,


"쉬면서 힘을 기릅시다."


 하는 요지의 제안을 했습니다. 도저히 나가서 싸우려고 하질 않았기에 왕서는 큰 길에 자신의 군영을 세우고, 도모의 군사는 왼편 고개에, 마보의 군사는 오른쪽 고개에 군영을 세워 관군을 기다리면서 적이 오면 서로 도와주어 싸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자, 관군쪽에서도 오군이 위축되어 있는것을 눈치챘습니다. 그리하여 1만 부대를 공격하여 왕서를 공격하고, 다른 2개 군단으로 좌우 언덕의 적병을 막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왕서는 군사의 절반을 잃었고, 서둘러 마보에게 구원을 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마보는 또 겁을 내어 구원병을 보내지 않습니다. 참다 참다 못한 마보 휘하 총병, 나여백이라는 사람이 분노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왕 장군의 핍박이 이렇게 심한데도 어찌 보고만 있는가! 어서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해 주어야 한다!"


이리하여 마보의 군대가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자 관군은 후퇴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왕서의 군사는 태반이 죽었으나 마보나 도모는 전혀 피해가 없어서, 마보는 스스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여기면서 이를 틈타 군사를 귀환시켜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우리 세 명은 이 승리를 틈타 군사를 귀환시켜야 한다. 길안은 강으로 막혀 있으므로 이후 다시 대군을 정돈한 뒤 구원하기로 하자."


이렇게 어이없이 구원병은 되돌아갔고, 길안에서는 구원병이 온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포위가 200일 되자 길안은 양식이 떨어졌고, 결국 길안을 지키던 한대임은 어둠을 틈타 몰래 군사를 이끌고 남문으로 달아났습니다. 관군은 길안을 점령했고 도망간 한대임을 쫒으면서 강희의 명에 따라 그에게 용서해줄테니 투항하라고 권하였습니다. 당시 왕보신의 항복과, 또 복건과 광동 등지에서의 패전 소식이 들려오자 한대임은 고민하다가 관군에 항복합니다. 이렇게 서북에 이어 강서도 간신히 평정되었습니다.


이렇게 군사작전들이 점차 성공으로 향하고 있을때, 오삼계와 어중간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상지신은 1676년 12월 무렵 강희에게 항복을 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강희는 슬슬 답답하던 여러 전역의 상황이 호전되고 있었고, 오삼계를 고립시킬 요량으로 상지신을 칭찬하면서 이전의 죄를 전혀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상지신은 1677년 5월 무렵 정식으로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친왕의 직위를 인정받은 상지신은 군사력을 보존하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6월, 강희는 상지신에게 호남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상지신은 핑계를 대며 이를 무시했습니다. 7월, 오삼계 반란군 수만명이 호남으로 진격하여 이를 막으라는 명령을 내려도, 상지신은 여전히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오삼계 반란군이 소주 등에 공격을 퍼붓자, 강희는 연거푸 두 차례나 상지신에게 명령을 내려 구원을 하도록 했으나 상지신은 또 핑계를 대면서 빠졌고, 1678년 2월에도 비슷한 상황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상황은 계속 이어져, 강희는 상지신에게 직접 출정하지 않아도 되니 병사라도 보내라고 했지만, 상지신이 이를 전혀 듣지 않고 무시하는 모습이 계속 이어집니다. 


다만 이런 상지신의 온갖 기만 행위에도 전역은 분명히 역전되고 있었습니다. 치명적이었던 1674년과 1675년을 지난뒤, 1676년 등에 각지에서 반격이 시작되어 1677년 쯤이면 어느정도 성과를 내면서 여러 전역에서 강희의 군대가 오군을 상대로 제압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승리의 전조에 불을 밝히고, 성과가 훨씬 빨리 나타나게 만드는 대사건이 벌어집니다.



 오삼계가 사망했습니다. 




오삼계 


전역은 분명히 초반, 오삼계의 의도대로 전개되었습니다. 청조는 지배 영역 전체가 뒤흔들렸고 사방에서 난에 참가하여 판도도 대단히 넒어졌으며, 조정은 온갖 방면을 상대로 군대를 파견하여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삼계 본인의 약간의 소극적인 모습과 장수들의 무능, 무엇보다 천하가 모두 진동하는 상황에서도 침착했던 강희의 대응으로 인해 사태는 점점 진전국면이 되고 있었고, 각지에서 반란군에 동조했던 지역들이 제국군의 힘으로 수복이 되면서 오삼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립무원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오삼계는 섬서를 잃었고, 복건을 잃었으며, 광동의 상지신을 잃었고, 또한 강서를 상실했습니다. 강서가 무너지자 청군의 선박이 진군하여 악주 등도 공격했습니다.


지금껏 중국 역사상 오초칠국의 난, 정난의 변 등 창립 초기의 국가 전체를 뒤흔드는 조정과 지방 실력자의 양자 대결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삼번의 난 정도로 규모가 장대하며 시간이 오래 걸린 싸움은 없었습니다. 이는 바햐으로 저 북쪽 막북의 몽골 세력들부터, 최남단 대만의 해상 세력들까지 모두가 끼어들었으며, 심지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도 오삼계와 접촉하는듯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말, 코끼리, 해양 선박과 보병부대 등 당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사적 수단들이 동원된 삼번의 난은 청조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되었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오삼계 역시 똑같이 적용되는 부분입니다. 


오삼계는 이미 군대 파견과 재원의 힘이 거의 다했습니다. 끝도 없을것 같은 번영도 이미 쇠퇴하여 세금도 군량을 거두기엔 부족했습니다. 군량이 부족해지자 군사들의 원망이 심했고, 백성들은 멀리 피하여 세력이 위축되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오삼계는 내부 단속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흩어지는 반란 세력을 다시 한번 자신의 위망 아래 결집시켜 청조와 전면대결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수하 장수들도 오삼계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였습니다. 일은 이렇게 된 일입니다. 오삼계는 형주(衡州)로 옮겨가 그곳을 정천부(定天府)라고 이름을 삼았고, 단을 쌓고 저택 1만 칸을 조성하였습니다.


1678년 3월 초, 오삼계가 하늘에 제사하고 즉위한 그날, 아침에 갑자기 채색 구름이 환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오삼계는 이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하늘이 응대하는 좋은 조짐이다."


그는 황제의 관을 쓰고 황제의 옷을 입고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는, 황제에 즉위함을 선포했습니다. 나라 이름은 ‘주(周)’, 연호는‘소무(昭武)' 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오삼계 세력은 많이 위축되었고, 민심도 점차 변하였습니다. 형주의 백성들은 이런 노래를 지어서 부를 정도였습니다.


"누워도 2년이고, 서 있어도 2년이다. 소(昭) 자의 가로세로는 모두 두 획이기 때문이다."


오삼계 정권이 어떻게 해도 2년은 못 넘긴다는 늬앙스를 가지고 있는데, 오삼계 역시 계속되는 싸움에 지쳤습니다. 60세만 살아도 장수하였다고 축하를 해주던 시기. 아무리 역전의 무장이며 강골이라고 하여도, 오삼계는 이미 68세의 노인이었던 것입니다. 편안히 안락을 추구하며 근심없이 건강을 챙겨도 모자랄 시기에, 오삼계는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군을 지휘하며 수많은 전투와 보급,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매일 탄식했습니다.


 "왜 이렇게 힘드는가. 왜 이렇게 힘드는가."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개 한마리가 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보며 짖어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환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늙고 쇠약해진 오삼계는 깜짝 놀라 이는 상사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여겼고, 그로부터 매일 밤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형색이 초췌해지고 혈기가 크게 손상되어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기도는 막혔고, 가래가 넘어가지 않는 호흡기의 질환에 시달렸습니다. 인두 아래가 막혀서 먹을 때, 후두를 통해야 했습니다. 음식물이 잘 내려가지 않거나, 내려가도 설사를 했습니다.


결국 1678년 8월 17일, 개인의 힘으로 중국의 역사를 바꾸고, 삶이 끊임없는 투쟁과 선택의 연속이었던 이 무장은, 그러나 불안과 공포 속에서 떨면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67세의 고령으로, 오히려 지금까지 태연하게 군지휘를 계속 했던것이 신기한 나이입니다.


하국상 등의 부하들은 오삼계의 죽음을 숨기고, 식시와 의복을 가져다주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은밀히 전선에 나가 있는 병사들을 불러들였고, 운남에서 내부 준비를 하게 한 뒤에 이듬 해 오삼계의 손자 오세번(吳世藩)을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강희는 소식을 듣고, 승리의 기운을 느껴 말했습니다.


"두목이 죽으면 적은 반드시 내부에서 변란을 일으킨다. 이 좋은 시기를 틈타, 각 로의 장군들은 신속히 각기 대군을 통솔하여 길을 나누어 토벌하라."


 그리하여 제국군은 이제 승리의 기세를 높여 각 지에서 진격을 감행했고, 1679년, 기어코 악주를 함락시켰습니다. 이는 사실상 승패를 결정짓는 전투였습니다. 광서는 본래 손연령이 담당하였다가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을때 오삼계의 세력에 포함이 되었는데, 손연령의 부인 공사정은 손연령에게 청나라 조정의 은혜를 생각하여 귀순할것을 청했습니다. 1677년에 손연령이 대세가 심상찮음을 보고 조정에 투항했는데, 소식을 들은 오삼계가 즉시 증손 오세종의 부대를 보내 그를 죽이고 자신의 세력에 편입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제국군은 승리의 진격으로 오세종을 쫒아내어버렸고, 이로써 광서는 평정되었습니다.


섬서, 복건, 광동, 강서, 광서. 거의 모든 지역이 수복되었고, 이제 반란은 끝난것이라 다름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반란은 몇년 더 지속이 되지만, 이는 사실상 소탕전의 개념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최대한 디테일하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최후의 전개는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무능한 늑이금은 쫒겨나고 다른 사령관이 와서 운남, 귀주 등지로 진군을 시작했고, 서북의 도해는 한중을 점령하고 제국군은 사천으로 장대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오세번은 밀사를 보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게 도움을 구하려 했으나 관군에게 저지당했습니다. 


곤명성에서 반군은 최후의 저항을 했으나, 내부 배신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오세번은 자살했고, 그 목도 이후 진입한 관군에게 잘려서 구경 거리가 되었습니다. 관군은 곤명의 유골을 모두 파서 오삼계의 유골을 찾아내었고, 결국 오삼계의 유골을 담은 상자를 발견, 이를 깨부수고 각 성내의 저잣거리에 달아놓았습니다. 오삼계에 도움을 준 방광침과 그의 조카는 군중 앞에서 능지처참의 혹형을 당했고, 다른 장수들도 기둥에 묶어서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겁쟁이였던 마보는 여러 산을 넘나들며 달아났는데, 그 세력은 100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제독 상아가 항복을 권유하자, 마보는 짐짓 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나로 인해 연좌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았다. 1만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내 한 몸 죽어도 아깝지 않다."


그러면서 위풍 당당히 산에서 내려와 자신을 공경하면서 맞는 상아에게 항복을 했고, 상아의 태도를 본 마보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밤에 같이 조용히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마보가 술을 마시면서 어둠속에서 상아의 얼굴을 보자 의미심장했습니다. 


술잔이 세 번 돌아가자, 상아의 기색을 눈치챈 마보는 자기가 살아남긴 힘들겠다는 현실을 파악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비통했는지 눈물을 흘리다가 상아에게 말했습니다. 자신을 구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테니 다만, 자신의 아들을 보호해 달라고만 요청했습니다. 강희는 마보가 힘이 다하여 항복한것으로 죄가 매우 크니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고, 그는 북경으로 불려와 능지의 혹형을 말없이 받았습니다.


호국주와 용맹한 맹장 왕서, 참모 이광 등도 이제는 운남의 산에서 쫒기는 형편이었습니다. 호국주가 왕서와 이광에게 어찌해야 하는가 하고 묻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왕은 낙화를 보지 못했는가. 혹은 의자 위에 가득하고, 혹은 진흙 중에 무성하다."


호국주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머리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말이 옳다."


다음 날, 그는 자진했습니다. 왕서와 이광은 제사를 지내고, 그 애통함을 다하고 나선, 서로 몸에 불을 질러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오삼계의 모든 세력이 일소되는 동안, 계속해서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던 상지신은 끊임없이 청군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며 핑계를 대고 버텼습니다. 강희는 대세가 기울어졌을 무렵부터 차라리 방해나 안하면 다행이겠다라는 생각으로 상지신을 더 추궁하지는 않았지만, 오삼계 세력이 약해지자 그를 더욱 감시했습니다. 하지만 상지신은 전횡을 더욱 부리며 강희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겼습니다.


 "황제가 나에게 출병을 요구하면서도, 내 작위를 올려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황제의 명을 받고 현지에 온 관리들을 질책하며 망령되게 행동했습니다.


 "그대가 여기에 와서 하는 일마다 나와 부딫히게 되니, 내가 한 칼로 그대를 벤다고 해도 황제는 나를 어쩔 수 없다."


또 어느날엔 술에 만취해 순무 김준을 위협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온전히 돌아가지 못하는데 네가 어찌 광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일은 마땅히 나를 따라야 한다. 나도 오삼계가 순무 주국치를 살해한 것처럼 할 수 있다."


김준이 그를 질책했지만 대취한 상지신은 쓰러져버렸습니다. 깨어난 그에게 김준이 아들을 조정에 입조시키라고 권하자, 상지신은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 라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상지신은 강희에게 개별적으로 항복한 장수들을 죽였으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호위들을 활로 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자 내부에서도 그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현지의 상지신 부하들의 반응이 이러하자, 김준은 강희의 명령에 따라 일순간에 군사를 파견하여 상지신을 사로잡아 압송했습니다. 상지신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의 상소를 했지만, 의정왕대신회의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상지신의 어머니, 그 동생, 그 외 모든 공로자는 목을 베어 심문하고자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강희는 최후의 순간에 늙은 상가희의 충성심을 떠올리고는, 상지신에게는 고통스러운 능지형이나 참형 대신 사사(賜死)의 관용을 보이고는, 상지효 등은 모든 죄를 면제해주어습니다. 상지신의 늙은 어머니도 무죄를 선고받았고 가산 몰수도 면제 되었습니다. 상지신의 처는 북경으로 압송되었지만, 그 이상의 능욕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경정충이 복건에 있는것도 거추장 스러울 뿐입니다. 강희는 경정충을 북경으로 오게 하여 유인한 후에 그의 재산 등을 몰수했습니다. 본래 강희는 경정충에게 자비를 베풀 요량이었지만, 대학사 명주가 상소를 올려 반대했습니다.


 "경정충의 죄는, 상지신에 비해 막대합니다. 상지신은 행동이 횡포하고 망령된 말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경정충은 은혜를 저버리고 모반했으니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칙서를 내려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결국 경정충 등은 책형을 당해 머리가 걸려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재산은 몰수 되었습니다. 8년에 걸친 삼번의 난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싸움의 삽시간에 순식간에 종결이 되어버린것은, 분명히 오삼계의 사망이 가장 큰 원인 입니다. 그가 오삼계 반란군은 구심점을 잃었고, 오군이 무너지자 강희의 예상대로 다른 반란의 물결도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만일 오삼계가 더 젊었거나 활기가 넘쳐 오래 생존했다면, 저항은 좀 더 조직적이고 더욱 꾸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오삼계가 사망하기 전부터 강희의 대응때문에 전세는 분명하게 기울고 있었습니다. 오삼계가 싸움이 끝나지도 않은 마당에 칭제를 한것도, 분위기를 반전시켜보려는 요량이었으니 말입니다. 


삼번의 난은 그 규모가 서북, 대만 등 사방을 포함하였고, 몽골리아의 기마병들과 중국 최남단의 코끼리들이 전투에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가공할 화포의 위력과 강과 바다에서 벌어지는 함대전, 수십만의 군대와 제국 전역으로 운송, 이동되는 물자등 그 규모에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습니다. 준가르나 티베트, 건륭 시대에 벌어진 구르카나 베트남과의 격전으로도 대단한 분량의 글을 작성할 만 하나, 엄밀히 따지면 그 모든 전투들은, 삼번의 난에 비하면 외부에서 일어난, 주목받지 못할 사소한 다툼에 지나지 않을 수준입니다. 


모든 중국인들의 눈이 삼번의 난에 가 있었고, 엄청난 내전의 승리로 청조는 이제 드디어 진정한 제국으로서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희생과 격렬한 전투가 그 뒤에 있었습니다. 분명 삼번의 난은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지기 이전까지 청조 최대의 격전이었고, 청조의 역사에 지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강희는 이 모든 결과를 당초부터 예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상황을 낙관했으며, 반란의 가능성에도 큰 무게를 두지 않았고, 설사 반란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 결과 지금처럼 참혹하고 장엄한 서사시의 종류로 남을지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급한 판단으로 인해 재앙이 일어나자, 그는 예상밖의 상황에 눌려버리기보단 애써 침착함을 되찾고 모든 상황에 전면으로 맞섰습니다.


삼번의 난 기간 동안, 대부분의 군대가 전선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강희는 경산(景山)에 나가 사냥을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누군가는 길가에 격문을 붙여 비난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지금 삼번의 난이 일어났고, 차하르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모든 전선에서 전투가 치열하다. 이처럼 위험한 시기에 어떻게 정산에서 편히 쉴 기분이 나겠는가?"


하지만 이는 현실을 망각하고 놀기 위함이 아니라, 반란의 와중에 자신의 건재함을 보이려는 의도였습니다. 강희는 다른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스스로 겁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썻습니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재앙을, 다른 사람에게 핑계하여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켜 천하가 진동할때, 색액도는 강희에게 철번을 주장한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거절했습니다.


"오삼계를 철수시키는것은 짐의 뜻이었으니,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소. 짐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책임을 신하에게 전가 한 적이 없소. 그리고 관리들끼리 서로 탄핵하는 것은 명의 악습이오. 그런 구습은 절대로 오래 계속되어서는 안 되오."


강희는 전쟁이 일어나자 본래 오삼계의 수하였던 사람들을 발탁하여 각지로 파견하여 회유나 정탐 활동을 벌이게 했으며, 반란군에게 협력한 수많은 관리들의 사정을 하나하나씩 재점검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발적으로 가담하였고, 어떤 사람은 가족을 해치겠다는 위협 때문에 억지로 참여하였고, 어떤 사람은 가담하지 않아 피해를 당했습니다. 처자식이 운남에 있는 장수들에게는 비밀리에 충성을 맹세하게 첩보활동을 벌이고는, 반란군의 배후에서 자신을 돕도록 일을 꾸몄습니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하루에 혼자의 힘으로 삼백에서 사백건에 가까운 보고를 스스로 점검하고 답신을 보내어 각지의 전황과 일을 모두 처리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태연하게 있었지만, 스스로 가지고 있는 힘을 한계까지 끌어내어 각지의 전선에 집중했습니다. 1679년, 전세가 잠깐 악화되고 지진까지 나자, 그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모든 기력을 소진하여 병이 나고 음식을 먹지조차 못했습니다. 효장태후는 잠시 강희를 쉬게 하였습니다.


결국 삼번의 난이 마침내 끝이 나자, 신하들은 이를 축하하며, 업적을 부풀려 찬양하고 그에게 존호를 올렸지만, 강희는 이것이 실질적인 이익이 없는 허명일 뿐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존호를 받기는 커녕, 그는 승리가 결정되었던 그 해의 겨울, 자신의 계산 착오로 거대한 전쟁을 불러 일으킨 스스로의 잘못을 글로 적어, 대학사 레데훈에게 넘겨 주었고, 레데훈은 건청문 앞에서 모든 신하들에게 읽어 주도록 하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실수를 범하고 나서야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기분 좋게 승리자라고 일컫을 수 없으며, 신하들의 희생양을 만들어 스스로가 져야 할 책임을 그들에게 넘기고, 강희 본인에게는 승리자의 역할을 남겨두도록 묵과하지 않겠다는 점도 이야기 했습니다.


어찌되었건, 삼번의 난에 연류되었던 세력들은 모두 적절한 응분의 조치 혹은 관대한 대우를 받는식으로 처리가 되었습니다. 반란군의 관료였던 사람들을 모두 베이징으로 압송해야 한다거나, 그들의 자손은 앞으로 영원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두 강희의 손에 기각되었습니다. 상지신이나 경정충 휘하에서 벼슬을 살았던 일부 관료들은 오히려 팔기의 빈자리를 메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번의 난에 관여한 세력중에 관대함의 손길이건, 잔혹한 보복의 칼날이건,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한 단 하나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정성공, 정경. 대만의 정씨 왕조. 삼번의 난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강희는 이 까다로운 세력에 대하여 즉시 후속조치에 착수했습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7-3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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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모여재
13/06/23 00:4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13/06/23 01:09
수정 아이콘
댓글은 처음 남기지만 늘 기다리면서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양념반후라이
13/06/23 02:35
수정 아이콘
강희제는 능력뿐만 아니라 인격과 자기수양도 대단하네요. 내전에서 승리하고도 승리에 취하긴 커녕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고 책망하다니..
이게 사람인지 신인지.
나이트해머
13/06/23 12:23
수정 아이콘
천고일제(千古一帝)니까요.
Je ne sais quoi
13/06/23 12:2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3/06/23 13:47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고 있으며, 다음 내용도 기대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중국 역사중에서도 청나라 역사는 근대도 아닌 것이 뭔가 생소했는데... 오삼계와 강희제란 인물에 대해서도 많이 배워갑니다.
13/06/23 16:18
수정 아이콘
강희제가 중국 올타임 황제로 칭송되는 이유가 있네요.
펠릭스
13/06/23 18:04
수정 아이콘
잘 읽고 갑니다.
13/06/23 18:44
수정 아이콘
매일 언제 올라오나 기다리고 있어요.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13/06/24 00:23
수정 아이콘
선리플 후감상~ 제목이 어디서 봤나 싶었는데 이문열초한지에서 본거였군요 아무튼 진짜 좋은글 잘읽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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