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고삼이 되자 어머님은 말 없이 가정교사를 붙여주셨습니다. 뭐, 과외 누나와 사랑에 빠지게 된 과정은 너무나도 진부해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성에 면역이 없던 사춘기의 남고생이 과외선생님에게 호감을 느끼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언제부턴가 과외시간이 기다려지고, 빨리 얼굴을 보고 싶고 뭐 그런거였습니다.
누나는 스물두살의 서강대를 다니던 평범한 대학생으로 연예인으로 치면 논스텁2에 나왔던 장나라와 비슷한 느낌이였습니다. 키는 160 남짓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머리. 얇은 테의 동그란 안경을 썼습니다. 호리호리한 체형이지만 몸에서 나오는 향수냄새는 어른의 향기가 물씬 느껴졌습니다.
과외 누나와 가까워지게 된 화제는 의외로 게임이였습니다. 하릴없이 엠겜 스타리그를 보고 있던 제게 누나가 '스타 좋아해?' 란 운을 띄운게 계기였습니다. 얘기를 나눠보니 누나는 의외로 스타를 좋아하며 직접 경기장에 가서 응원하는것을 즐기던 직관팬 중 한명이였습니다.
누나는 이윤열 선수를 좋아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수달처럼 생긴 모습이 귀여워서랍니다. 그래서 팬클럽 닉네임도 보노♥로 지었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최연성 선수와 박태민 선수를 싫어했습니다. 당시 스타리그에 그닥 관심이 없었던 저였지만 누나가 하는 스타리그 얘기는 즐거웠습니다.
누나는 5시 반부터 7시까지 약 한시간 반동안 1주일에 세 번씩 공부를 봐줬습니다. 여느 과외가 그렇듯 뽑아온 모의고사 기출을 풀이하며 개념을 보충하는 짧고 타이트한 과외였습니다. 과외가 끝나면 누나를 지하철까지 바래다주며 한 주 있었던 리그 얘기를 하는것이 즐거움이였습니다. 가끔씩 아이스크림도 얻어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저는 누나에게 점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만, 수험생으로서 성적을 높이고 좋은 대학을 들어가고 싶다는 열망 역시 컸기에, 마음속 '가상의 선'을 그으려고 노력했습니다. but 사춘기 고등학생이 노력한다 한들 당시의 저는 아직 어린아이였고, 다짐과는 달리 지나치게 애정스런 관심을 표했던것 같습니다. 그 중 하나는 SMS 문자였습니다.
'쌤 머해요?'
'쌤~ 내준 숙제 다했어요!'
'쌤 OOO(영화이름) 나왔는데 봤어요? 애들이 다 재밌다는데...'
'쌤 이윤열이랑 오영종이랑 붙는다는데요?'
뭐 이런 시시콜콜한 내용의 문자세례를 퍼부었습니다. 지금 카카오톡 같은 인터넷 메신저가 없었던 그 당시엔 메신저 역할을 하던 문자메세지에 요금 제한이 있었습니다. 제가 쓰던 TING 요금제는 한달 200통의 무료문자가 주어졌는데, 그 중 70% 이상을 보낼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과했단 생각이 듭니다. 당시의 전 민폐라는걸 자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생각이 어렸었고, 그저 꼬박꼬박 친절하게 답변해주는 누나의 답장이 좋았으니까요. 그렇게 하루 평균 5통정도의 문자를 몇달간 쏟아부었습니다.
'재현아(가명), 초코랑 바닐라중 뭐 좋아해?'
가끔 누나는 베스킨 라빈스, 던킨 도너츠, 조각케잌 같이 비싸서 차마 먹을 엄두도 나지 않던 고급음식들을 사 왔습니다. 누나가 먹을 것을 사올 때 문자로
[쌤 사랑해요♥] 를 칠까 말까 고민했던적도 있습니다. '사랑해' 라는 표현에서 제 감정이 너무 티나지 않을까 싶어,
[쌤 대박♥♥]으로 수정하였고, 5분정도 다시 생각한 뒤, 이내
[쌤 대박!!!^^] 으로 고쳐 보낸적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저에겐 나름의 선이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재밌는 영화를 본적있냐고 물어도 절대 같이 가고싶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절대 누나라 부르지 않고 선생님 호칭을 지킨다' 같이 눈가리고 아웅이지만 저만의 방식으로 선을 그어 그 이상을 넘보지는(?) 않았습니다. 뭐, 감정의 절제가 미숙했기에 제가 연심이 있다는걸 초등학생이 봐도 알았을 겁니다만.. 주인에게 꼬리치는 강아지마냥 끊임없이 관심을 구걸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나름 공부는 열심히 했습니다. 커져가는 연심과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커져갔고, 대학 입학후 당당하게 누나에게 고백하는 청사진이 머릿속에 아른거렸습니다.
"너 이게 뭐야?"
하지만 위기의 순간은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아들 몰래 문자메시지를 훔쳐본 어머님께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 휴대폰을 들고 방으로 뛰쳐 들어온겁니다. 화난 어머니를 보고 어떤연유로 화가 났는지 나름 예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름 선을 지켜 문자를 보냈다 생각한 저는 이내 변명할 생각이였으나, 눈앞에 들이민 휴대폰 액정화면을 보자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화면은 '받은 편지함'이 아니였습니다. 메시지 작성을 중간에 멈췄을때 자동으로 저장되는 '임시 보관함' 이었습니다.
'쌤 사랑해요♥'
'누나 보고싶다....'
'빨리와.....''xxx 하고싶다.........'여기서 'xxx'는 읽는 분들이 생각하시는 그거 맞습니다. 크크.
'공부하라고 과외 붙였더니 이따위 짓이나 하고있어?' 어머니의 잔소리는 한시간 넘게 계속 되었습니다. 예상도 못한 치부에 제 머릿속이 새하얘졌지만, 가장 걱정되는건 저에 대한 원망이 아니였습니다. 이로 인해 누나가 어머니의 불같은 질책을 받아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 컸습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누나에게 곧장 전화를 걸진 않았습니다만, 모레 누나가 오는 날을 벼루는 듯 했습니다. 혹여나 불똥이 튈까 저 역시 누나에게 따로 문자를 하진 않았습니다.
누나가 집에 오는 모레 사건이 터질거란 제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맞벌이신 부모님보다 제가 가장먼저 귀가하여 열쇠로 대문을 여는게 일상이였는데, 그날은 웬일로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현관엔 어머니와 누나의 신발이 보였습니다. 미리 연락을 한 듯, 어머니와 누나는 이미 안방에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 콩닥대는 가슴을 뒤로한채 조용히 문에 귀를 대어 두분의 이야기를 몰래 엿들었습니다.
문에 귀를 갖다대는 순간, 오만 잡생각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만약 누나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어머니의 불같은 질책을 받고 만약 울음을 터뜨린다면, 그 즉시 방문을 '쾅!' 열고!
'엄마, 선생님은 아무 잘못없어! 왜 선생님한테 그래!'하고 손잡고 둘이 뛰쳐나오는, 무슨 삼류 만화에 나올법한 장면을 상상하며 문 손잡이를 움켜잡고 우렁찬 목소리로 들이닥칠 준비를 했습니다. 작은 확률이지만 혹시라도, 누나도 저에게 마음을 가진게 맞고 울면서 잘못을 고할지 모른다는.. 그런 망상이 머릿속에 스쳤습니다. 말 그대로 근거 없는 자신감. 근자감이 충만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저는 참으로 철 없고 현실감 없는 고딩이였다 생각합니다. 진지했던 당시 제 심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밤마다 이불의 먼지를 털곤합니다. (쓰다보니 창피하네요)
하지만 현실은 예상과는 다른법. 들려오는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습니다.
'재현이가 제게 연심을 느낀 것은 제가 충분히 알고있다.'
'하지만 그 덕에 공부에 대한 열의도 함께 올랐고, 이는 재현이의 성적으로 증명되었다.'
'이대로 성적이 올라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다면 분명 어머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그저 귀여운 동생일뿐,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것은 전혀아니다.'
뭐, 지극히 당연한 대화가 둘 사이에 오갔지만, 훔쳐 듣던 저는 커다란 충격에 휩쌓였습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마치 예서 어머니를 설득하는 스카이캐슬의 주영쓰앵을 보는 듯한.. 누나의 목소리엔 순간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그렇게 담담하면서도 강하게 피력하는 목소리는 제 생에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똑부러지며 단호했습니다.
게다가 아들의 감정을 갖고 논 선생님에게 분노하긴 커녕, 심지어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당부까지 하시는게 아니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 역시 서울의대에 입학시킬수만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입시 코디네이터에게 부탁하는 영재엄마와 같은 마음이 아니였을까 생각됩니다만..
아무튼, 한 껏 격양됐던 당시의 제가 들어도 누나의 목소리는 누가 봐도 진심이란게 느껴질 정도로 명료했습니다. 상처를 받은 전 발소리를 훔치며 조용히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저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아이리버 mp3의 전원을 켰습니다. 줄창 듣던 FT아일랜드의
[사랑앓이]를 즐겨찾는 노래에서 삭제했습니다. 그리고 양파의
[사랑...그게 뭔데] 를 반복재생에 맞춰놓고 한강변에 쪼그려 앉아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전화가 왔습니다. 누납니다. 씹습니다. 5분후 어머니에게 전화가 옵니다. 씹습니다. 핸드폰 전원을 끄고 근방 피시방으로 발을 옮겼습니다. 자리에 앉은 전 싸이월드에 누나의 이름을 검색해 미니홈피를 찾았습니다. 그 전까지 누나의 미니홈피는 한번도 보지 않았었습니다. 이 역시 제 스스로 그었던 '선'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미니홈피 몇개를 물색하던 저는 '이윤열'을 닮은 남자와 그 옆에 누나가 있는 프로필 사진을 보고 이내 클릭을 멈췄습니다. 그제서야 지금까지의 착각과 제 자신이 잘난것 하나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란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새벽 한시즘 되서야 퉁퉁 부은 눈으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가는 길에 핸드폰을 켜보니 어머니, 누나, 친구들을 포함해 부재중 문자가 열통 넘게 와있었습니다. 제가 걱정되었는지 어머니가 친구들에게도 전화를 한듯 싶었습니다. 집 현관을 들어서자 오히려 마음은 차분해졌습니다. 안방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일어섰습니다. '괜찮아요.' 라 담담하게 한마디 하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머니께선 딱히 다른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제 자신을 자책하는것으로 마음은 정리되었고, 약 반년간의 짝사랑은 그렇게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달후.
수능이 끝나고 다음년 3월.
저는 누나와 같은 서강대에 입학하게 되었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누나에게 그때의 마음을 듣고자 학교 정문앞에 섰습니다.
..는 드라마 같은 얘기겠죠?
물론 그럴리 없으니까 드라마입니다.
현실은 녹록치 않으니까요.
적당히 수능을 치룬 저는 한계가 거기였던 탓에 인서울 끝자락 그저 그런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연이은 입대로 제대후 6년이 지난 현재까지 누나와의 접점은 없습니다. 전역 할때 즘 싸이월드의 시대가 지고 페이스북이 떠오를 때, 누나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지만 찾지 못했고 글을 쓰는 지금도 검색해봤습니다만... 없는걸 보니 딱히 SNS를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전역 후 지금까지 몇번의 이사를 하면서 어릴때의 추억, 초등학교 일기장, 심지어 졸업앨범까지 어디론가 소실되었지만, 제 고등학교 시절 피처폰만은 작은 상자에 담겨 보관되어 있습니다. 충전기까지 칭칭 감아 보관해뒀지만, 그 때를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기에 아직까지 켜본적은 없습니다만, 혹여나 다시 만날 날. '나 그때 누나땜에 많이 울었다? ' 하고 술한잔 할 날을 고대하며 어린시절 소중한 한 조각 삼아 보관하고 있습니다. 스타리그를 좋아했던걸 생각하면 이 글을 볼지도 모를거란 생각도 듭니다.
여기까지가 제 첫사랑
[가정]교사 누나 이야기 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글은 픽션입니다.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10-29 10:24)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