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6/03/08 23:34:07
Name Bar Sur
Subject [잡담] 버스는 주장한다.
그러니까 종종 난 7727번 버스가 단순한 운송수단으로서의 사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일단 그는 하루중 아침 이른 시간 기분이 나빠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그 시간만 되면 늑장을 부릴만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가 성격 급한 좌석버스들이 약 20여대가 지나간 뒤에야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아, 오늘도 버스님이 참 불쾌하시구나.'라고 생각하며 그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라주어야 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우리를 한 곳에 몰아넣고 구겨넣고 찡겨 넣어서, 꽁꽁 옭아매고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저 끙끙대며 온 몸의 자유를 빼앗긴채 택배 포장 안의 물품처럼 한 방향으로 이송되어 간다. 그 과정을 몇 년 간 반복하는 사이 나는 깨달았다. 그러니까 버스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7727번은,

강력하게 어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버스는 주의, 주장 따위는 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나는 그분들에게도 아침 8-10시 사이의 시간 7727번을 타고 일산방면에서 신촌방향으로 향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떠한 매체보다도 버스가 지닌 강력한 호소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때때로 우리는 버스에게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버스에 귀를 기울여 그의 주의주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라도 이러한 버스의 호소력에 익숙하지 않은 이상, 일단 고개부터 내저으며 그저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에 휩싸여 신음을 내지를 뿐이다. 나 또한 그런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나는 대학을 다니기 전까지 12년의 학창시절을 걸어서 10분 거리로 통학을 했다. 그런 나에게 만원 버스 안에서 30-40분 거리를 부디끼며 학교로 향한다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었다. 처음 서울에 와서 겪은 그 체험은 사람과 사람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동시에 얼마나 서로 먼 곳에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내가 이제는 버스의 호소력을 이해하게 되었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내가 이해한 버스의 주장 또한 그런 것이다. 나는 이 7727번 버스가 우리의 삶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섣부른 기대와 환상, 시건방짐과 조급함만을 가지고 그 녀석을 대해서는 크게 손을 델 것이다. 그리하여, 이 거대한 밀폐공간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혼자서 살아간다. 이 인류의 용광로 같은 버스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가까이 밀착되어 있는데도 각자 한 명 한 명 외로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기도가 꽉 막힌 것처럼 해소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멀미를 느끼며 매일 같이 그 버스를 타고 있다. 내가 아는 한 그 멀미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든 그렇지 않든 언제든지,

삶은 저절로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급정거와 급발차를 거쳐 커브길을 도는 그 길을 매일 같이 반복할 수 있는 건 그래도 그 흔들리는 만원버스 안에서 내가(혹은 다른 누군가가) 넘어지려할 때 좋든 싫든 옆에서 나(우리)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덕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삶은,

그래도 살아갈만 했다.


* 천마도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3-09 19:50)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My name is J
06/03/08 23:40
수정 아이콘
택시를 자가용처럼-이 모토인 인간이라........퍼억-(이런 댓글이 악플인겐가요? 글썽-)

버스의 방식이란...
[오롯이 홀로 존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꿈꾸는 저같은 사람은 생각하기 힘든 생각입니다. 잘읽었어요.]..라는 식으로 삶을 지탱해 주는 걸까요? 으하하하-
김대선
06/03/08 23:47
수정 아이콘
제게는 버스 하면 떠오르는건.. 비오는날 젖은 갖가지 사람들에게서 나는 체취네요. 버스가, 한들한들 시원하게 탈 수 있을때도 많지만, 어떤날은 좀 힘들때도 있는데, 비올때가 딱 그런경우죠. 어릴때는 추적추적해서 참 싫어했는데, 자꾸 타고 다니다 보니 즐기게 되더라구요. 예전에 어떤 소설에서 읽은 말인데, 여행에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구 하더라구요. 제게 참 와닿은 말이었는데.. 전 버스 속에서도 그런걸 느낀답니다 ^^ 특히 비오는 날이면 더욱 그렇죠.
글루미선데이
06/03/09 00:17
수정 아이콘
얼마나 고통스러우신건지...-_-
06/03/09 00:19
수정 아이콘
중학교 이후로 계속 30분 이상 되는 거리를 통학했던 사람입니다.^^;;
서울의 도심은 너무 막히고 갑갑한 느낌을 주어서 너무 싫지만, 가끔 답답한 지하철에 비해 맑은 햇살과 아련한 빗줄기를 보여주는 버스의 창이 좋아 타곤 합니다. 가끔 시간이 아슬아슬해도 지하철보다 버스를 타는 건 그런 이유겠죠. 그래도 전 다행일까요? 선택의 여지라도 있으니.^^
Sulla-Felix
06/03/09 01:04
수정 아이콘
이런 문체가 바로 인터넷 문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줍지않게
이모티콘이나 남발하는 쓰레기들과는 격이 달라 보입니다.
종이와 모니터는 엄연히 가독성이 다르고 같은 내용을 읽어도
이후 남는 이미지가 다릅니다. 뭐랄까 윗 글은 인터넷으로
글을 읽는 맛을 느끼게 해 주는군요. 전체적인 길이나
띄워쓰기 같은 것 부터 문장의 호흡까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천마도사
06/03/09 01:36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 좋은글에 어울릴 만한 덧글을 달 수 없는 제 짧은 문장력을 탓하면서....
You.Sin.Young.
06/03/09 10:23
수정 아이콘
뭐랄까요, 상당히 와닿는 무엇이..

글 잘 쓰시네요. 이런 분들이 많으니 제가 먹고 살기 힘듭니다;
utopia0716
06/03/09 13:49
수정 아이콘
15년쯤 전에 학교를 다니느라고 행신리에서 신촌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만해도 일산 신도시가 개발되기 전이네요. 그때는 747번 좌석버스나 행신리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다녔었는데. 옛날기억 ^^
06/03/09 19:29
수정 아이콘
오랫만입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그렇게 우리 속의 버스는 주장합니다.
WhistleSky
06/03/09 21:32
수정 아이콘
저희 학교 근처에 7737이 다니는데요, 7737종점이 학교라 거의 스쿨버스처럼 이용하는데 7727도 있었군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659 [호미질] 인정받는 언론이 되라 esFORCE [14] homy5670 06/03/10 5670
658 스타리그 24강의 득과실... [39] 칼잡이발도제7972 06/03/10 7972
657 2006 강민선수 월페이퍼.. [22] estrolls7865 06/03/10 7865
656 Kespa..힘을 가져야만 하는 존재. [16] 루크레티아5279 06/03/09 5279
655 신한은행 결승전 신815에서 박성준 선수가 선택한 전략! [21] 체념토스8014 06/03/09 8014
654 [잡담] 버스는 주장한다. [10] Bar Sur5595 06/03/08 5595
653 저그...그 끝없는 변태 [11] 데카르트6736 06/03/08 6736
652 저그의 대테란전 새로운 패러다임, 방업히드라+ [39] Ase_Pain7940 06/03/07 7940
651 청춘을 위한 글 [10] kaka5560 06/03/06 5560
650 [2006 다섯번째 제안] 차륜전방식의 팀플레이 [22] 마술피리5254 06/03/06 5254
649 지극히 개인적인 2006년 스타 희망뉴스 8 [27] 버관위☆들쿠6047 06/03/06 6047
648 그렇다.. 난 그래서 'July'를 좋아한듯하다.. [10] 나무5574 06/03/06 5574
647 캐터배틱 마재윤,,,,토네이도 이윤열.. [8] yellinoe7633 06/03/05 7633
646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다!! - 개척시대 - [7] AttackDDang5136 06/03/05 5136
645 강민의 출사표 [19] legend7310 06/03/04 7310
644 바둑과 스타크래프트... [27] AhnGoon6266 06/03/02 6266
643 [yoRR의 토막수필.#18]Photo Essay [11] 윤여광5055 06/03/01 5055
642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58편 [36] unipolar6437 06/02/28 6437
641 랜덤맵은 과연 꿈인가? [40] 마술피리7317 06/02/28 7317
640 슈퍼패미콤에 재미난 게임들이 많네요. [67] SEIJI10795 06/02/28 10795
639 떨리는 손 - 그들의 애환 [15] 중년의 럴커6115 06/02/27 6115
638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57편 [20] unipolar6206 06/02/24 6206
637 OSL, MSL 스타리거의 차기리그 잔류가능성 시뮬레이션 [8] 마술피리6837 06/02/24 683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