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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0/06/10 08:53:01 |
Name |
happyend |
Subject |
(10)무엇이 그녀를 떠나게 했을까? |
1.
최근 한 회원분이 ‘지잡대 나와서 죄송합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탈퇴했습니다.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익명의 세계속에 살아가는 터라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분이었지만,최소한 제가 알고 있는 한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한 납세자이며 독립된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수준 높은 시민이었습니다. 그런 그분을 분노하게 만든 ‘학벌사회의 그늘’은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설마 이정도일까?(전 제가 세상을 너무 모른다는 것도 그날 알았습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모 대중가수(라고 해도 타블로라는 것은 다 아시겠지만)의 학력논쟁이 불붙었습니다. 물론 전 힙합도 즐기지 않고 한국의 대중음악에도 그다지 관심이 많지는 않습니다.(제 엠피쓰리에 유일한 힙합음악은 에미넴의 stan입니다. 가끔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싶을 때는 듣습니다. )
그래도 아이들에게 타블로가 누구냐고 물으면 ‘아이큐 150에 스탠포드 출신의 힙합가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타블로의 얼굴을 보면 영민해보여서 스스로 그 학벌을 떠벌이고 다니지 않아도(혹은 기획사의 의도였든지간에) 충분히 뭔가를 해낼 재주로 보였습니다만 사실 한국사회에서 그것보다 더 쉬운 마케팅 전략이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양날의 검 같은 것이겠지요. 실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마케팅이 없으면 쉽게 어필하기 어렵고 반대로 사람들은 타블로의 음악보다 다른 면만 더 보려할 것이니까요.
학벌사회....
2010년 한국은 어쩌면 이 네음절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학벌사회가 낯설지 않은 것은 이미 그동안 충분히 이런 일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과거제도’가 가지는 기회의 균등을 한 방에 날려버린 ‘파벌논쟁’ 즉 ‘당쟁’을 통해서 말이지요.
당쟁의 핵심은 조정의 인사권을 ‘이조 전랑’이라는 중급 공무원이 가진다는데서 출발했습니다.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 세 개의 언론기관과 이조전랑을 장악한 당파가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었기에 벌어졌던 묘한 파워게임이었습니다.
이때 이조전랑의 인사원칙은 정말 실력이었을까요? 관직은 조선의 미관말직까지 톨톨 털어도 만개도 안 되는 상황. 생산력이 뻔한 상황에서 관직외에는 출세도 부귀영화도 보장되지 않는 농업중심의 사회.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이만명으로 시작한 양반의 숫자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영정조시절을 거치면서는 무려 2백만명. 경쟁률 200대 1!
결국 이조전랑은 관직을 독점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같은 파벌끼리 뭉쳐서 다른 파벌을 쳐내야 했습니다.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정글에서 혼자 실력이 출중해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파벌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학벌. 즉 사립학교인 ‘서원’출신들이 공립학교인 학당출신들을 밀어냈습니다. 조선초기 한양중심, 학당중심의 공립학교는 일본이 근대화과정에서 ‘공립학교’를 통해서 국가통합을 이뤄내고 ‘국가주의자’를 만들어냈던 것과 동일한 역할들을 해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훈구파의 몰락과 함께 ‘출세주의자들이나 가는 직업학교’수준으로 격하되면서 ‘순수학문과 인격수양을 도모’하는 시골의 서원출신들에 의해 비하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말하자면 ‘한잡대’인 셈이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이런 파벌은 더욱 격화됩니다. 인구증가,양반수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직업’의 숫자 때문에 더욱 더 심해진 것이지요. 광해군의 인사정책이었던 균형정책은 기득권세력에겐 불만이었고, 신흥세력은 그런 기득권세력이 좋아보일리 없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이념전쟁으로 보였지만 결국은 자리싸움. 각 파벌은 더욱더 똘똘 뭉쳤습니다. 심지어 학당출신이라 중간지대를 형성하였던 ‘이수광’마저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몰렸습니다.
인조반정은 이렇게 해서 양반의 일부세력을 인사권에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만개의 일자리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벌이는 경쟁으로 경쟁률을 일시적으로 낮춰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오래갈리 없습니다. 곧 서인과 남인의 숫자는 불어났고,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이 되었습니다. 이제 둘 중 한쪽은 ‘지잡대’의 위치로 떨어져야 했습니다.
3.
과거제도는 지독한 평등성을 추구합니다. 귀족세력의 등살에 못이기고, 그래서 왕권이 약화되었을 때 최고의 해답은 그래서 ‘과거제도’인 것이죠. 고려시대에 최초로 중앙집권이 완성된 광종임금때 과거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그 반증입니다. 정치적 도구임과 동시에 신분적 변동을 초래하고, 이렇게 뽑힌 관리는 당연히 왕에게 충성합니다.
(지난번에도 썼지만, 과거제도는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중 하나였던 수나라 문제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려의 과거제도는 조선의 과거제보다는 후진적이었습니다.공무원시험보듯 시험을 통해서 관리를 뽑는 무차별적 평등주의가 아니라 파벌간 안배를 원칙으로 하였으니까요.
아시다시피 고려도 ‘사학’이 ‘관학’을 압도하였습니다. 훨씬 더 질 높은 스승들이 즐비한 9재학당은 최고의 사립학교였고, 공립학교인 ‘국자감’출신들은 여기에 낄 엄두가 안났습니다. (고려 말 이 국자감 출신이었던 ‘문익점’은 그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 ‘권력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시험을 뽑는 관리인 ‘지공거’는 보통 사립학교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은 당연히 자신의 제자들을 뽑았습니다. 대표적인 문신인 이승휴의 경우도 계속 낙방하다가 자신의 스승인 최자가 지공거일때 합격했으니 이시대 과거시험은 계파간 안배를 목표로 하는 셈이었고, 계파의 핵심을 이룬 사립학교가 공립학교를 ‘지잡대’취급하였던 것은 역시나 관직의 개수가 양반의 개수보다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4.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던 어린 이승만이 찾은 곳은 서당이었던 모양입니다.이미 대원군에 의해 서원은 문을 닫았고, 관리가 되려면 공부는 해야 할텐데 마땅한데가 있어야 말이죠. 하지만 동네 서당마저 이미 폐점해버린 뒤였습니다.
(대원군은 왜 이때 새로운 학교 정책을 쓰지 않았을까요?메이지 유신세력들은 학교를 통해 국가통합을 이루었습니다.와세다 대학은 고급 관리양성학교였고요. 1894년 갑오개혁때 폐지될때까지 과거시험과목이 ‘조선초기’와 다르지 않았으니, 그것이 한문공부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급변하는 세상을 이끌 관리의 자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과거제를 폐지하지 못한 대원군이 새로운 학교제도를 볼 능력을 갖지 못한것이 그의 한계겠지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국가시스템을 볼 안목은 없었으니까요.일본이나 중국이나 모두 유학파들이 이 개혁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면 대원군의 한계라고 보기도 그렇긴 합니다. )
결국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던 이승만이 갈 수 있었던 유일한 학교(그리고 당시 사람들을 보호했던 유일한 대체정부)는 선교사학교가 전부였고, 이때부터 한국은 선교사들이 세운 사립학교가 유일한 교육기관이 됩니다. 일제 강점기에 소학교가 만들어질때까지.
(일본도 선교사들이 만든 사립학교가 대세였고, 그들은 국가적 인재를 만들어내는데 공립학교와 경쟁해야 했다는 점에서 한국과 달랐습니다)
사립학교의 교육목표는 국가적 인재가 아니었고, 보편적 가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보편적 가치는 이승만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했고, 오죽하면 그가 훗날 미국에서 친일로 일관한 미국 외교관 스티븐슨을 암살한 재미유학생인 장인환, 전명운의 변호를 거부했겠습니까. 살인자를 변호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어찌되었든 이후 한국의 사립학교는 보편적 가치를 가진 인재들을 양성함으로써 독재와 싸우게 하는 힘이 되었고, 자유의 신봉자가 되게 했습니다. 적어도 국민의 OECD 최고수준의 대졸자 비율을 갖게 되기전까지는 그랬습니다.
(미국의 경우 25~34세 인구 중 대졸자 비율이 40.4%로 한국보다 10%포인트 이상 적고, 프랑스는 41.4%였으며, 영국은 37.1%, 독일은 22.6%.유럽연합(EU) 19개국으로 보면 25~34세 인구 중 대졸자 비율은 평균 31.0%)
자리싸움이 치열해지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해졌습니다. 저 수많은 대졸자들의 품격에 맞는 일자리가 얼마나 채워질까요? 결국 대졸자들끼리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연고’는 ‘서성한’을 배타시하고, ‘서성한’은 ‘중경외시’를....그렇게 서인과 남인은 북인과 동인을, 다시 ‘서인’은 ‘남인’을 , 그리고 서인의 피라미드에서도 소론과 노론이 만개의 일자리를 놓고 서로를 끌어내리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일자리가 풍부했던 8,9년대에는 이런 서열짓기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냥 대학배치표정도? 넌 공부해서 좋은데 가라, 난 그냥 여기 갈란다....이정도? 넌 좋은대학가서 좋겠다,그렇지만 나도 열심히 살고 있으니 불만은 없다,이정도? )
성호 이익에게는 천재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아들이 있었는데 서인(그것도 노론)천하인 영조시절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려고 하자 반대가 빗발쳤습니다.
“저 사람의 삼촌은 이잠입니다.”
하고 말이지요. 이잠은 과격파 남인으로 숙종이 직접 처형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신분세탁을 통해 소론이면서 노론에 낀 사람을 남인이면서 서인인척 하는 사람을 찾아내서 ‘저 사람은 까마귀요’하고 말함으로써 그들은 이 파벌사회의 피해의식을 조금이라도 보상받으려는 것일까요? 그래서 ‘타블로의 학력문제’가 아프게 아프게 가슴을 후벼팝니다. 타블로가 스탠포드 출신이라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도 그의 학력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들도 다 ‘만개의 관직을 놓고 싸웠던 2백만명의 양반’들이었기 때문이지요. 서글픈 2010, 취업난과 불경기의 단면입니다.
5.
지난달 기적이라 불릴만큼의 취업자수가 증가했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통계는 정직하니 믿겠습니다. 하지만, 58만개의 일자리를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영조는 서울 인구가 급격히 늘어 도시빈민이 증가하자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청계천 준설공사를 대대적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양반들에게 청계천 준설공사를 시키고 있습니다. 양반은 그러라고 서원을 졸업하고 학당을 나왔냐고 푸념할 것이고, 양반에게 일자리를 뺏겨버린 도시의 빈민들은 부랑자가 되어 다시 떠돌아다녀야 할 것입니다.
200만명의 양반과 만개의 관직. 박제가는 자신이 서얼이라 차별받는 이유를 여기서 찾았습니다. 양반도 다 차지하지 못할 관직이 서얼에게 올 까닭이 없지요.없는 차별조항까지 만들어가면서 서얼은 관직에서 밀려났습니다. 말그대로 박제가는 사색당파중에서도 남인나부랭이에다가 서얼. 게다가 성격도 모난 사람. 그러나 재주는 남달랐고, 꿈은 원대했던 사람.(지잡대 출신의 타블로?) 그가 200만명의 양반과 만개의 관직의 딜레마를 타개할 계책으로 준비한 것이 ‘북학론’입니다.
북학론은 성장론입니다.새로운 산업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농업생산력을 높여서 구매력을 끌어올리는 것, 무역을 통해서 물가를 안정시키고 그로인해 구매력을 창출하는 것, 그렇게 해서 상업을 발전되는 길을 열고, 기술개발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이렇게 되면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이렇게 되면 서얼이 차별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결코 사대부 노론 양반이 준설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지요. 다만 다양한 직업,다양한 행복을 말했을 뿐입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으니 사람에게 귀천이 없는 법, 그래서 박제가의 ‘신분해방론’은 멋스러웠습니다.
지난달 불어난 일자리는 어떤가요? 새로운 일자리를 포크레인에게 뺏기셨나요? 그리고는 지금 지잡대와 타블로에게 울분을 토한 것은 아닌가요?
* 이글은 사회적 표현으로 ‘지잡대’를 사용하였습니다. 오해없으시기 바랍니다.
**타블로에 대한 논쟁은 제가 꼼꼼하게 읽은 것이 아니라 얕은 제 소견일 뿐이라는 점 이해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단지 왜 그토록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는지에 대한 다른 시각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22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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