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1/12/02 20:11:07
Name 리신OP
Subject 나는 차였다.
나는 두가지 차를 모두 좋아한다. 차(車)와 차(茶).


어렸을 때부터 차(車)는 앞모습만 보아도 차종을 알아맞출 정도로 달달 외웠고 명절날 시골에 내려가는 길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명절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차(車)들을 볼 수 있었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던 차는 소나타였다. 럭셔리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평범하지도 않은 디자인, 대중적인 이미지, 그리고 안정적인 승차감과 튼튼함. 신기하게도 오늘날 소나타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미국을 중심으로 많은 수출량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난 소나타를 좋아한다.


차(車)는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디자인, 새로운 특징, 새로운 옵션, 새로운 가격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전(前) 모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혹은 추억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녀에게 오래된 소나타 같은 존재였다. 나는 돈이 많은 집안의 자식도 아니고, 평범하다고 하기엔 세계관이 독특하며 많은 사람들과 두루 어울리고 나쁘지 않은 대학을 다닌다. 그녀에게 나와의 첫만남은 새로 나온 소나타를 보는 기분이었으리라. 다행히 그녀 또한 소나타를 매우 좋아하는 여자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졌다.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나에게 새로운 것을 요구했다. 마치 운전자가 새로운 소나타를 원하는 것처럼. 그녀는 내가 더 매력적이고 능력있는 남자가 되길 바랬다. 그녀의 주위에는 워낙 돈 많고 능력있는 남자들이 많았고 자연히 그녀는 더 럭셔리하고 더 예쁜 디자인의 차(車)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마음 한켠에는 자신의 집 앞 주차장에 있는 소나타가 걸렸지만 곧 벤츠, BMW, 렉서스 등 고급차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고, 소나타는 주인을 잃은 채 주차장에 방치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새로운 차(車)를 구입하였고 나는 자연스럽게 낡은 소나타가 되었다.

나는 그런 차(車)였다.


차(茶) 중에서도 나는 홍차를 매우 좋아한다. 나는 원래 지독하게 커피를 찬양하던 사람이었지만 어느날 우연히 마시게 된 홍차 한잔에 매료되었다. 나는 특히 홍차의 소박하지만 달콤하게 자극하는 향기를 좋아했다. 녹차가 편안함과 시원함을 상징한다면, 홍차는 열정적이지만 부드러움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그녀가 나에게 먼저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든 일에 열정적이려고 노력하는 남자였다. 비록 지금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나의 꿈을 위해, 나의 가족을 위해, 나의 친구들을 위해, 무엇보다 나의 그녀를 위해 시간을 기꺼이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마음에 작은 홍차 한 잔이 되길 간절히 바랬다. 나는 그녀에게 열정적이지만 부드러운 남자이길 노력했다.


차(茶)를 마실 때 우려내는 티백은 다 우려내면 버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잔의 바닥으로 갈수록 차의 맛은 더욱 쓰기 마련이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첫 잔의 향기와 부드러운 맛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잔이 비워질수록 처음의 그 향기는 없어진채 내 목으로 넘어가는 것은 술만큼이나, 차갑게 식어버린 평범한 차의 쓴맛 뿐이었다. 티백은 시간이 지나면 더이상 차의 향과 맛을 우려내는 역할을 하지 못한채 쓸쓸하게 버려진다.


처음의 나는 분명 그녀에게 홍차였다. 그녀는 나의 향기와 맛을 좋아했고 나는 그녀의 마음에 홍차 한잔이 되어 그녀의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는 그녀에게, 향기는 사라지고 쓴맛만을 품은 식어버린, 그냥 평범한 차 한잔일 뿐이었다. 나는 더이상 그녀의 차가워진 마음을 따뜻하게 되돌릴 수 없었고, 그녀 또한 더이상 차를 찾지 않았다. 나의 향기는 그저 겉멋에 젖은 가격만 비싼 향수의 향기일 뿐이었다. 나의 맛은 남들과 다르기를 거부하면서 그저 방관하는 것이 몸에 베어버린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고리타분한데다 매력도 없는 씁쓸한 남자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런 차(茶)였다.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2-06 09:35)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3롯데우승
11/12/02 20:15
수정 아이콘
글 쓰신 분 닉네임 때문에 추천 누르고 갑니다
메티스
11/12/02 20:15
수정 아이콘
좋은글입니다.
근데 기대했던 그건 아니네요
11/12/02 20:23
수정 아이콘
홍차와 소나타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또 생기시겠죠. 토닥토닥.
11/12/02 20:32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봤습니다
냉면처럼
11/12/02 20:34
수정 아이콘
비유가 좋은 멋진 글이네요! 역설적으로 내용은 씁쓸한 글이지만...
언젠가 더 좋은 주인(?)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힘내세요! 통닭통닭 [m]
델몬트콜드
11/12/02 20:3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2)..하아.ㅠㅠ
11/12/02 20:53
수정 아이콘
멋진 글이네요........진짜 오래간만에 추천누릅니다
구르는너구리
11/12/02 21:01
수정 아이콘
추천 누르기 위해 간만에 로그인 했습니다.
힘내세요!
곱창전골
11/12/02 21:15
수정 아이콘
흐흐... 댓글중에 '저는 레가시 오브 차' 입니다.' 이 글 자삭되었나봐요~
풋 하게 만드는 글이었는데..
11/12/02 21:18
수정 아이콘
리신 OP....
Abrasax_ :D
11/12/02 21:38
수정 아이콘
경험담이라면 먼저 위로를 드립니다.
근데 정말 정말 멋진 글이네요.
뺑덕어멈
11/12/02 22:01
수정 아이콘
홍차나 소나타는 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많은 차이니 마음만 먹으시면 금방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시겠네요.
힘내세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네오크로우
11/12/02 22:34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그리고 2렙 갱킹은 좀 자제 부탁드려요. ㅠ.ㅠ
12롯데우승
11/12/02 23:52
수정 아이콘
리신 칼밴!!!!!!!!!!!!!!!!!! 으하하하하
장풍도사 화이팅 ㅠㅠ

멋진차와 새로나온 차도 언젠가는 그 멋과 향을 잃습니다.
당신의 그리움에 그녀가 돌아오길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리신OP
11/12/03 06:30
수정 아이콘
헉.. 자고 일어났더니 추천수가...

실화는 아닙니다. 그냥 끄적여 본거에요, 허허... 1달 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지긴 했지만 전 애정남이 정해준 '진짜 나쁜X' 이기 때문에 그다지 후폭풍은 없었습니다. 연애기간도 그리 길지도 않았구요. 재밌게 읽은 분들이 많아서 다행이네요.
새강이
11/12/03 09:38
수정 아이콘
새삼 우리나라 말의 동음이의어를 이용하신 글에 감탄하고 갑니다.

차였고, 차였고, 차였다..캬 대박이에요
낭만토스
11/12/03 09:52
수정 아이콘
I was a car
진중권
11/12/04 09:42
수정 아이콘
멋진 글입니다! [m]
고요함
11/12/06 10:51
수정 아이콘
제차는 12년된 아주 작은 차입니다...
저에게는 첫차이지요... 그래서인지 요놈이...
너무 좋습니다... 말썽도 많이 부렸죠...
처음 차 값보다 더 많은 돈을 수리하느냐 소비했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좋습니다 이놈이...
제가 처음 미국와서 부터 슬픔도 기쁨도 같이 했으니까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낡아 빠져 버려도 그 안에 추억과 서로에 대한 사랑의 깊이가 더욱 깊어가는 그런 사람....
늘 새로운 것은 자극적인 무언가를 주지만... 오랜 연인 또는 친구는 식상할지 모르겠지만...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편안함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결론은 남자는 와인 여자는 꽃~~~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262 커피믹스를 원두커피로 바꿔보자. [15] epic9411 11/12/08 9411
1261 뿌리깊은나무와 정치외교학 [33] 사티레브7981 11/12/08 7981
1260 중복과 피드백 그리고 봇 [63] 김치찌개7775 11/12/08 7775
1259 커피메뉴 가이드라인 [87] nickyo12033 11/12/07 12033
1258 Scars into Stars [15] PoeticWolf7154 11/12/06 7154
1257 [해외축구] 첼시에게 불어닥친 대격변의 돌풍…과연 그 결과는? [38] 클로로 루실루플9556 11/12/06 9556
1256 오늘 프로리그를 보면서 드는 여러 생각들 [36] noknow11991 11/11/26 11991
1255 이공계의 길을 가려는 후배님들에게..11 미국 대학원 지원시 팁. [25] OrBef17619 11/12/05 17619
1254 윤관의 여진 정벌, 그리고 척준경 - (3) 9성 완성, 그리고 반환 [10] 눈시BBver.211337 11/12/04 11337
1253 교차로 '불'완전 정복 - 2 : 회전교차로 [10] Lilliput9224 11/12/03 9224
1252 나는 차였다. [24] 리신OP9926 11/12/02 9926
1251 올해 레지던트 지원율 - 우리나라 의료계의 문제 - [98] Timeless12031 11/12/02 12031
1250 개인 미디어의 시대 [15] 몽키.D.루피8640 11/12/01 8640
1249 근대사를 다루지 못 하는 이유 (추가 끝) [100] 눈시BBver.29192 11/11/30 9192
1248 다단계 피해 예방 혹은 Anti’를 위한 글(+링크 모음) : 結(결) 편 [11] 르웰린견습생6345 11/11/30 6345
1247 낙태의 왕국이었던 대한민국 [16] 凡人13302 11/11/29 13302
1246 광개토 - 외전. 백제의 요서경략설 [12] 눈시BBver.28303 11/11/29 8303
1245 [이벤트/경품] 주어진 단어로 오행시를 지어주세요~ - 마감 - [63] AraTa_JobsRIP8022 11/11/23 8022
1244 서른둘 즈음에 [26] madtree10854 11/07/05 10854
1243 결혼했더니 "아이고 나 죽네" [112] PoeticWolf15368 11/11/28 15368
1242 스타1유저가 스타2를 하지 않는 이유 [83] 김연우18104 11/05/15 18104
1241 '메카닉 vs 퀸드라' - 저그의 마지막 카드인가? (경기 리뷰) [102] 냥이풀21393 11/04/29 21393
1240 DSL 택꼼록 관전평 [25] fd테란14119 11/04/22 1411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