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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2/08 18:38:04
Name PoeticWolf
Subject 퇴근 시간에 전화 한 통이 뭐 그리 어렵다고.
물은 위에서부터 맑아지고 불은 밑에서부터 데웁니다. 불이 아닌 전자 파동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 물과 정 반대 방향으로 타는 불을 귀뚜라미에서 정복하기 전까지(물론 이 기술이 조리에 적극 응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왔습니다. 뚝배기도, 마치 화장실 바닥에 엉거주춤 앉아 손빨래를 하시던 어머니들처럼 밑에서부터 와글와글 일을 하고, 보리차가 끓고 있는 아내들의 커다란 주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매 끼 새로운 요리를 하지 않는 평범한 식탁 차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데우기이고, 그래서 데우기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위와 아래를 한번씩 뒤집어 주는 타이밍과, 그 작업의 도구인 뒤집개(경우에 따라 국자, 주걱 등등)와의 혼연일체입니다. 물이 흥건한 요리는 슬슬 저어주거나 아예 뚜껑 닫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만... 하루 이틀 냉장고에서 묵힌 갈비는 골치입니다. 모듈화가 분명하고 각 유닛이 묵직하기 때문에 잘못 뒤집다간 양념이 바깥으로 튀기 일쑤고, 신경 쓰지 않으면 한 두 조각 차가운 채로 식탁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뚝배기 안 대류 현상을 돕는 보리차나 생수를 바닥에 약간 깔면 데우기가 쉬워집니다. 이렇게 하면 무엇보다 조금 타이밍을 놓쳐도 탈 위험이 줄어들어 좋습니다.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건 납작한 후라이팬에 한 면 한 면 공굴리기를 해야 하는 음식들입니다. 전 종류가 바로 그런 것들이죠. 한 두 식구 뚝딱 먹을 거라면 별 일 아니지만 이게 네 식구만 넘어가도, 혹은 먹성 좋은 입이 하나만 있어도 누군가 팬을 전담해야 될 정도로 집중을 요합니다. 게다가 한 번 식었던 녀석들을 덥히는 거라면 눈으로 얼른 봐서 따듯해 졌는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힘이 듭니다. 감에 의존하거나 어떤 면을 언제 뒤집었고, 언제 덜어내야 할지 기억하고 계산해야 합니다. 전 부치기는 이미 만들어지는 단계에서도 주부들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가지만 덥히는 과정에서도 만만치 않은 악명을 떨칩니다. 그래서 여름에 전을 부치거나 만두를 굽고 있는 아내나 어머니를 보면 절로 아이유의 <너와 나> 안무가 귀엽게 반복되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손 틈새로…’ 부분).

어제 남은 음식을 덥히는 것이든 새로 만드는 것이든 퇴근하는 창을 통해 들리는 부엌에서 지글지글거리는 소리, 참 좋습니다. 냄새보다 먼저 달려와 배고픈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방에 앉아 있다 냉장고에서 재료 담긴 봉지가 부스럭대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소리나 냄새보다 먼저 발생하는, 날 위해 요리를 준비하는 마음이 먼저 달려와 날 설레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건 대부분 내 마음이 그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이라는 마찰력 높은 마개에 그 마음을 감지해야 할 귀와 코가 다 막혀있습니다.

음식을 직접 덥혀보면 느껴집니다. 매일 면박을 들어가면서도 퇴근 무렵에 전화해 주눅든 목소리로 오늘은 몇 시에 끝나는지 물어보는 어머니나 아내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내 도착 시간에 대한 궁금증이요. 그리고 그 전에 이미 날 위해 꼼꼼하게 계획한 그들의 메뉴까지도요. 음식을 직접 덥혀보면, 날 아끼는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내 심드렁한 ‘어, 적당히 하다 들어갈께’라는 대답에서 받은 서운함 따위는 하루 저녁 식탁도 넘기지 못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엎드려 바닥을 닦고, 허리 굽혀 식탁을 닦는 어머니를 기억하고 아내를 봅니다. 밑에서부터 몇 번이고 위로 올리고 뒤집었을, 꼼꼼하게 따듯해진 갈비 조각들을 봅니다. 낮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와 정성을 둔한 남자의 마음으로 느껴보려 합니다. 해보지 않은 것이라, 어색한 뒤집개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양념이 튀듯 생각의 갈래가 튑니다. 그래도 분명히 감사의 마음으로도 미처 떠올리지 못한 조각들이 있을 겁니다.

또 퇴근 시간입니다. 오늘은 먼저 전화해서 지금 들어간다고 말해주렵니다. 그것은 작은 변화입니다. 어머니와 아내가 제 마음을 고루 익혀버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낮은 자세로 날 익힌 그들이야 말로 아래서부터 올라온 불입니다. 관계가 익어가고, 저는 여물어 갑니다.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2-1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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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08 18:43
수정 아이콘
소소한 일상글인데도, 잔잔한 감동이 밀려오네요.

잘 봤습니다. 추게로! 누르고 갑니다.
11/12/08 18:46
수정 아이콘
우아..글을 정말 잘쓰시는거 같아요 .. 짠한 감동이 샘솟는..

저도 추천!
11/12/08 18:48
수정 아이콘
뭐 할말이없네요
그저 이런필력이 부럽습니다^^
별로네
11/12/08 18:50
수정 아이콘
방금 사무실 밖 계단에서 집사람에게 전화하고, 자리에 돌아와서 보는 글이네요.
헌데 집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또 애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나 봅니다.
얼른 일 마무리하고 책상 정리하고 집으로 향해야겠습니다. 도착 예정시간 메세지로 날리고 말이죠.
오늘도 집 근처 골목길에 파는 붕어빵 6개를 사서 들어갈 예정입니다.
제꺼 팥하나, 집사람꺼 팥하나, 여덟살 큰딸 팥두개, 다섯살 작은딸 크림두개, 총 여섯마리 2000원.

모두 행복하고 포근한 저녁시간 되세요~ ^^
11/12/08 18:55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11/12/08 19:02
수정 아이콘
우와 이런 좋은글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잘 읽었습니다.
11/12/08 19:16
수정 아이콘
잘 읽고 갑니다. 그러게, 저녁 먹고 간다는 말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 건지...그땐 왜 그랬는지 하하

지난 주 남자의 자격에 이윤석씨 어머니가 나오셔서 요리를 가르쳐 주셨는데, 이윤석씨는 소고기국이 5분만에 되는 줄 알고 계셨더군요. 집에 와서 '엄마 밥줘~' 하면 5분만에 끓여주셨다고요. 그런데 알고보니 어머니는 아들이 저녁을 먹고 오나 안오나 이미 육수를 다 만들어 놓고 다시 데피고, 기다리다가 다시 데피고, 그러다 아무때고 와서 밥달라 5분만에 끓여서 내주었다고 합니다. 참 어머니는 위대하고도 위대하시죠...
사티레브
11/12/08 19:17
수정 아이콘
글을읽다 위아래로 고루익어버렷네요
전화해야겟다
냉면처럼
11/12/08 19:24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을 읽는 다는 건 정말 좋군요! 언제부턴가 글쓴이님이 쓴 글은 무조건 읽고 있네요~~ 매 번 잘 읽고 있습니다! [m]
11/12/08 20:39
수정 아이콘
감사히 읽었습니다. 추천버튼 꾸욱.. 고루한 실력임에도 자극해주셔서, 이달이 가기전에 두어편의 글을 쓰게 될 듯 싶네요. 흐흐
덧대어 말씀드리자면 뎁의 노래는 자주 들을만한 농도의 것은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두곡씩, 가능하다면 마뜩찮게 할일이 없는 날의 아침이나 저녁에 하릴없이 들어보면은, 참으로 좋습니다.
모아드림
11/12/08 21:0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 마음도 데워 지는 것 같아요. [m]
相変わらず
11/12/08 21:0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비오는거리
11/12/08 21:25
수정 아이콘
정말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Abrasax_ :D
11/12/08 21:40
수정 아이콘
8년전인가 PGR에 처음 왔을 때 어린 나이에도 '이런 글'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생각도 나는 정말 좋은 글이네요.
허스키
11/12/08 22:10
수정 아이콘
요시 하나둘셋이야!

오랜만에 피지알에서 필력터지네요!!

이런글 너무좋습니다 이따 컴터에서 꼭 프천할게요 [m]
쌀이없어요
11/12/08 22:11
수정 아이콘
아아아아..... 두번 읽었어요.
잔잔한 감동이 ㅠㅡㅠ
가장 좋아하는 장르가 수필이고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은 별날 것 없는 일상에서 얻게 되는 소소한 깨달음 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당장 부모님께 전화 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작은 변화를 일으켜 봐야 겠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__) 추천추천
11/12/08 22:34
수정 아이콘
언제 들어오냐는 전화에 밀린 일을 바라보면서 짜증이 좀 섞인 힘없는 목소리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었네요. 일이고 뭐고 집이 최고죠! 하하
빨려 들어가면서도 뭉클하면서도 나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m]
랄라슛
11/12/08 23:07
수정 아이콘
글이 잔잔하고 따뜻합니다* 감사해요
낮은 자세로 날 익힌 그들이야 말로 아래서부터 올라온 불입니다. 관계가 익어가고, 저는 여물어 갑니다.
-마지막 문장은 정말*_* 여러번 읽었어요
블루마린
11/12/08 23:23
수정 아이콘
뼛속까지 공돌이 체질인지 수필은 영 감흥이 오지 않는데, 이 글 여러 번 읽었습니다. 정말 좋네요, 추천 드립니다.
11/12/08 23:27
수정 아이콘
글이 너무 예뻐요. 제겐 요즘 자게에서 누구보다 반가운 분 입니다.
PatternBlack
11/12/09 00:01
수정 아이콘
요즘 잠잠한 날이 없지만, 이런 맛에 pgr오는거죠.
La Vie En Rose
11/12/09 04:38
수정 아이콘
마지막 구절이 참 와닿네요.
저도 쭉쩡이 말고 날알이 됐으면 좋겠네요!
잘 읽고 갑니다!
병아리
11/12/09 04:55
수정 아이콘
아...짱나...글 좀봐..아 질투나...나도 잘 쓸수 있는데...아...오...
SimonSays
11/12/09 08:45
수정 아이콘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켈로그김
11/12/09 09:59
수정 아이콘
사랑이 느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참 여러모로 풍성하신(의미불명..;;) 것 같아서 괜히 흐뭇하네요.
R U Happy ?
11/12/09 10:13
수정 아이콘
이런게 사랑이군요 ? 그저 단순히 주거나 받는게 아니라 서로 만들어 가는 것 ~ !!
농띠푸들
11/12/09 12:23
수정 아이콘
혼자 산지 7년에 넘어가는데
퇴근시간에 맞춰 차려져 있던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이 그리운 날이네요...
퇴근길에 전화한통 드려야겠어요~
추천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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