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2/11/24 20:19:19
Name 알킬칼켈콜
Subject 치킨 유감
토요일 오후 6시.  어중간한 시각에 아점을 먹은 관계로 심히 배가 고팠다.

나의 소중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오붓한 식사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전성기를 맞이한 50대 신여성 답게 그녀는 저녁 약속이 이미 잡혀 있었다.  상냥한 목소리로 '저녁엔 컵라면'을 속삭이는 그 따뜻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맛있지 컵라면. 찬밥에 말아먹으면.  

 그러나 찬밥이 없는 관계로 배달음식을 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온 국민의 영양식 치킨. 그래 치킨이다. 무한도전이 방영하는 날이니, 유느님이 광고하는 네네 치킨을 시키자.  배에서는 천둥이 울리지만, 귀염둥이 티모로 LOL을 하고 있으면 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치킨의 미덕은 지난한 단일화를 이룩하지 않아도 좋다는 데 있다.

35분의 유쾌한 기다림이 지나갔다.  긴급점검 중인 LOL 화면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치킨집 배달원의 인상이 참 좋았다.  고용주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싹싹하고 성실하게 처신하는 알바생은 500만 자영업자의 보배다.

식지 않아 따끈따끈한 치킨의 온기를 느끼면서 황홀한 마음으로 뚜껑을 열자 고소한 튀김 냄새가 방에 번졌다.  친숙한 갈색의 프라이드가 나를 반겨주었다.  절반의 갈색.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빠알간...갈색.

프라이드는 혼자 몸이었다.  외톨이었다. 치킨은 침묵의 단일화를 이룬 것이다. 나의 동의도 없이. 작은 용기 안의 우아한 개인생활 , 그렇게도 탐이 났더냐, 기름진 자여.  당황스러운 마음에 손이 떨렸다.  네네치킨의 반반이란 혹여  매운프라이드와 그냥프라이드의 반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 검색도 해보았다.  누군가의 블로그에는 빛나는 은박지로 나뉘어 다소곳히 몸을 맞대고 있는 양념과 프라이드가 보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급작스러운 사태 변화를 예견하지 못한듯 이윽고 주인장의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  거듭되는 사과와 함께 양념을 다시 무쳐 보내리라 다짐을 주었다. 바빠서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 기다리겠노라 이야기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5분.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나를 찾았다.  주말 저녁이라 바쁠텐데 이리도 수습이 빠르다니, 주인장 재간도 좋으시지. 반품해야할 프라이드를 들고 부리나케 뛰어나가자 아까 그 배달원이 돌아와 있었다.  서글서글했던 그의 낯빛이 좋지 못했다.

"이걸로...찍어드시라던데요."

그의 손에는 치킨이 없었다. 그저 투명한 일회용 비닐 봉투에 양념 한 주걱이 덜렁 들어있었다. 나는 멍청이가 된 기분으로 그 봉지를 받아쥐고 반대 손에 품은 프라이드치킨을 보았다가 배달원 친구 얼굴을 또 바라보았다.  내 가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으나 어린 배달원의 얼굴도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 날이 많이 추웠지.  나는 허허 웃으며 빨간 양념봉지를 가슴 한 켠에 덜컥 내려놓았다. 배달원은 자기 잘못인냥 몇 번이고 사과를 하더니 다음에 꼭 1.5 리터 콜라를 챙겨드리겠노라 말하며 떠나갔다.  작은 스쿠터로 털털털 찬바람을 헤치며.

할 말을 못한 듯, 할 일이 있는 듯 방 한켠의 전화기가 덩그러니 눈에 띄었으나 나는 치킨집에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프라이드보다 반반이 천 원 더 비싼데.  이미 식어버린 프라이드에 차가운 양념을 부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닭다리를 맛없게 씹으면서 물끄러미 고개를 내리자니 치킨 용기 뚜껑에 웃고 있는 유재석의 얼굴이 들어왔다.  문득 잊고 있던 사실 한가지.  난 원래 무한도전 싫어하는데.

짜장면 시켜먹을 걸 그랬다. 호구 같으니.

========================================================================================================================

그래서 말인데, 치킨 양념 어디 써먹을 곳 없습니까?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12-05 15:15)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Paranoid Android
12/11/24 20:47
수정 아이콘
양념만 후라이팬에 뜨겁게 데워서 후라이드를.....
12/11/24 20:51
수정 아이콘
양념만 전자랜지에 뜨겁게 데워서 후라이드를.....
Hypnosis
12/11/24 21:00
수정 아이콘
네네치킨 점주입니다-_-;
보통 저런경우에는 다시해주는게 거의 원칙인데..
어지간히 많이 밀린 모양이네요. 위로의 말을 보냅니다.

양념 냉장보관하면 은근 유통기한 쎕니다. 날 추워서 안상할꺼에요.
다음에 쓰시면 됩니다-_-;
sprezzatura
12/11/25 03:32
수정 아이콘
점주라 하셔서 여쭤보는데, 지점마다 소스 만드는 방식이 다른가요?
네네 쇼킹핫 종종 시켜먹는데 어딘 엄청 맵고, 어딘 맵긴 커녕 달더군요.
Hypnosis
12/11/25 14:54
수정 아이콘
쪽지 드리겠습니다.
오스카
12/11/24 21:13
수정 아이콘
저는 오히려 찍어먹는 게 더 맛있더라구요. 크크 치킨 땡기네요
2막2장
12/11/24 22:11
수정 아이콘
저도 찍어먹는게 맛있던데,, 양념은 그냥도 먹어요... 으읭?
쎌라비
12/11/24 22:23
수정 아이콘
양념이 극적으로 사퇴했군요.
조폭블루
12/11/24 23:10
수정 아이콘
웃을일이 아니라 이건 본사에 클레임 걸어야 할 상황 아닌가요??

제대로 메뉴가 온것도 아닌 상황에서 전화로 다시 버무려? 양념을 묻혀? 보내주기로 해놓고서

양념 한봉지라니 -_-
알킬칼켈콜
12/11/25 00:40
수정 아이콘
엄청 당황한 목소리로 거듭 사과하면서 다시 묻혀 보내주겠다고 해놓고 이렇게 통수를 맞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죠. 클레임도 걸어볼까 했으나 바쁘고 당황한 나머지 어처구니 없는 수습을 시도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호구죠 호구
히히멘붕이
12/11/24 23:56
수정 아이콘
프라이드 단일화의 아픔을 해학으로 승화시킨 글이군요. (근데 저도 찍어먹는 게 맛있기는 합...)
12/11/25 00:08
수정 아이콘
글이 아주 재미지네요. 저는 양념도 좋아하고 후라이드도 좋아하지만, 후라이드를 양념에 따로 찍어먹는걸 제일 좋아합니다. 후라이드에 양념 따로 파는 곳이 없어서 아쉽지 말입니다. 흐흐
알킬칼켈콜
12/11/25 00:41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반응이 별로 없어서 내심 뻘줌했는데 재밌다고 해주시다니.
왜사냐건웃지요
12/11/25 11:18
수정 아이콘
아~ 너무 배잡고 웃었네요 크크크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네요 [m]
분홍돌고래
12/11/25 14:58
수정 아이콘
친구가 오랜만에 놀러와서 치킨 시켜놓고 기다리는 중에 이 글을 보니 신기하네요.
저도 반반 시켰는데!!!!!!
그나저나 그 점주....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12/11/26 10:16
수정 아이콘
프라이드는 혼자 몸이었다. 외톨이었다. 치킨은 침묵의 단일화를 이룬 것이다. 나의 동의도 없이. 작은 용기 안의 우아한 개인생활 , 그렇게도 탐이 났더냐, 기름진 자여. 당황스러운 마음에 손이 떨렸다.

추천드립니다-_-b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676 [연애학개론] 아직은 GG를 칠 때가 아닙니다 (부제 : 밀당과 한타이밍 쉬기) [38] Eternity26829 12/12/08 26829
1675 [후기] 끝났다! [47] 눈시BBbr11444 12/12/05 11444
1674 [LOL] 정글러 아이템의 효율 고찰(시작부터 첫 리콜까지) [60] RUNIUS12283 12/12/10 12283
1673 태양계 시리즈-화성(2) [7] K-DD8917 12/12/05 8917
1672 [LOL] 서포터 선택 가이드 [70] 아마돌이11227 12/12/03 11227
1671 여자가 벌거벗은 채로 말을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데... [38] Neandertal18572 12/12/03 18572
1670 [연애학개론] 거절의 트라우마 (부제 : 숙제를 내자) [19] Eternity11395 12/12/02 11395
1669 술 없이는 대화가 불가능한 한국 남자. [46] Realise15991 12/12/01 15991
1665 게임의 법칙 : 스타크래프트, 리그 오브 레전드, 축구 그리고 [10] bachistar9155 12/11/29 9155
1664 소닉TV 7차 BJ 스타리그 - 3/4위전 + 결승전 <현장 스케치> [4] kimbilly16700 12/12/02 16700
1663 Blizzard Community Party 2012 - "CLUB barCRAFT" 현장 스케치 [5] kimbilly9835 12/11/14 9835
1662 [LOL] 독특한 서포팅을 원하는 그대에게 - 트런들 서폿 [16] DEICIDE11740 12/12/03 11740
1661 안녕하세요. 이재균 감독입니다. [71] 이재균14532 12/12/07 14532
1660 화미 [3] tyro9611 12/11/28 9611
1659 아 쩐다 [27] 이명박11781 12/11/28 11781
1658 태양계 시리즈-화성(1) [11] K-DD12184 12/11/27 12184
1657 조선왕릉, 살아 숨쉬는 역사가 있는 곳 [23] 光海13772 12/11/25 13772
1656 치킨 유감 [16] 알킬칼켈콜12547 12/11/24 12547
1654 자살로 마라톤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35] 떴다!럭키맨13488 12/11/22 13488
1653 [LOL] 한국팀들이 제시한 LOL 뉴메타 20선 [64] 잊혀진꿈14576 12/11/28 14576
1652 스타크래프트2 프로게이머 - 그래프를 통해 보는 연대기(10.10.11~12.12.19) [12] 이카루스10435 12/11/20 10435
1651 다스릴 수 없는 강, 황하 [47] 눈시BBbr15476 12/11/20 15476
1650 연애에 앞서 크리티컬 찍으셨습니까? [30] Love&Hate14154 12/11/18 1415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