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드컵 3회 우승 및 1회 준우승, MSI 2회 우승 및 1회 준우승, LCK 7회 우승 및 1회 준우승, 2014 올스타전 전승 우승, 2016 IEM 월드 챔피언십 전승 우승, 역대 최고 승률의 롤드컵/MSI/LCK 우승... LOL씬의 메인스트림에 등장한 이래, 지난 7년간 쉴새없이 타이틀을 쟁취하고 갖가지 기록을 써내려가면서 명실상부 최고의 명문구단으로 자리잡은 팀. 그 SKT T1에게 지난 2018년은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한 해였습니다.
전무후무할 롤드컵 3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목전에 두고, 결국 힘이 다해 무너진 페이커가 흘린 눈물은, 마치 시즌 8의 고난을 예고하는 듯 했습니다. 적어도 당시의 저에게는 그렇게 다가왔고, 슬프게도 확신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죠. 말이 좋아 안식년이지... 예년에 비해서는 욕심을 줄였다고는 하나 여느 스포츠의 팬들이 그렇듯이 행복회로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모로 선수들에게나 팬들에게나 참으로 힘겨운 시간들이었죠. 시즌 초 스쿼드가 공개될 때부터 이미 기본 체급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왔던 차에, 팀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베테랑들마저 부진하거나 견고하지 못한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팀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꼬마는 감독 부임 첫해에 역대 최악의 부진이라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페이커 역시 번아웃 증상을 보이며 커리어 역사상 최악의 부진을 겪던 스프링 시즌과 회복의 과도기에 있던 서머 시즌까지 잇달아 기대를 한참 밑도는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그 자체였죠. 모든 면에서 예전 우리가 알던 SKT의 저력은 커녕 일말의 기색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고, 이는 쥐어짜내듯이 전력을 끌어올렸던 롤드컵 선발전에서도 결정적인 패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어느 때보다 힘겨웠던 SKT의 여섯번째 시즌은 4년만의 롤드컵 진출 실패라는 침통한 결과를 내며 씁쓸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젠 몰락의 흔적만 남은 폐허 위에서, 사람들은 SKT와 페이커의 황혼기를 논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13일, 스타1에서 시작된 SKT T1의 창단 15주년을 맞이한 바로 그날, 다시 일어난 SKT T1과 돌아온 불사대마왕은 통산 7번째 LCK 타이틀을 거머쥐며 또 한번 왕도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언제나처럼,
[부진은 있어도 몰락은 없다]는 듯이.
SKT T1 1.0 : The Fellowship of the Summoner's Cup
Revolutionary Appearancee스포츠판에 LOL의 입지가 세계구급으로 올라서기 시작한 2012년, LCK 역시 그 흐름에 발맞추어 첫 테이프를 끊었습니다. 각 지역 단위 리그들의 포맷과 구단 및 선수들의 전력이 차근차근 갖춰져 가면서, 비로소 리그 오브 레전드는 e스포츠의 중심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연하다는 듯 특유의 게임지능, 빈틈없는 팀워크, 운영의 최적화를 앞세운 LCK의 강력함이 LOL씬에서 점점 돋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초창기, 그 'LCK의 운영'에도 틈은 있었고, 강력한 라인전을 앞세운 대만의 TPA가 LCK 대표팀을 비롯 세계적인 강호들을 연파하며 사실상 첫번째 대권을 차지합니다. 이후 IPL 시즌 5에서는 LPL이 매우 강세를 보이는 등, 이때의 LCK는 아직 'The One'이 아닌 'One of them'이라는 위치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한편, 이즈음에 솔로랭크를 지배하며 프로들에게마저 경외의 대상이던 솔랭전사가 있었습니다. 고전파, 황소고집이라는 아이디를 1, 2위에 올려놓고 고인챔프로 천상계를 하드캐리하던 불가사의한 고딩. 그때만 해도 이 선수가 LOL씬의 헤게모니를 LCK로 가져오며 역대 최고의 LOL 플레이어가 될 것이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한 해의 막바지에 접어들던 2012년 겨울, 방출의 마법봉을 손에 쥔 채 귀농 계획을 짜는 것으로 알려졌던 리븐 주챔 정글러 kkoma가 솔랭전사들을 주축으로 한 새로운 팀을 구축했습니다. 제닉스 스톰 시절 서포터로 이름높던 임팩트, 자르반 장인 장병기마스터, 아마추어 원딜 고수 광진이야, 타 AOS게임에서 전설적인 선수였으며 NLB 하이머딩거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푸만두... 그리고 그중에는 입단테스트 없이 바로 스카웃 된, 팀의 중심 고전파가 있었죠. SKT T1 #2(이하 편의상 SKK)라는 팀명으로 등장한 이 신생팀은 뭇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후 다들 아시다시피 많은 이야기들이 시작되었고, 또 많은 것들이 극적으로 바뀌었죠.
아직은 완벽하지 않던 13 스프링의 SKK가 3위라는 성적을 거둘 무렵, 이미 LOL씬의 패권이 LCK로 향할 조짐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한층 가열된 경쟁이 만든 윈-윈 효과, 최적화를 향한 연구, 틀을 갖추고 시스템화 하는 역량... RTS게임에서도 여러 차례 증명된 바 있듯이, 이러한 한국인 특유의 게임지능과 열정은 LOL에서도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즈음에 IEM 월드 챔피언쉽에서 CJ 형제팀이 결승 내전을 치르고, 무려 롤드컵 추가 시드가 걸린 LOL 올스타전에서 LCK가 전승으로 우승한 것은 이미 대세가 LCK를 향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고로 SKT와 페이커의 등장이 LCK의 수준을 급격하게 끌어올리며 하드캐리한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할 겁니다. 리그 자체적으로 이미 세계 최정상급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고, 이미 시즌 3 초입 무렵부터 LCK 최상위팀이라면 세계 최정상급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으니까요. SKT와 페이커는 이처럼 나날이 리그 수준이 향상되어가던 LCK에서 경쟁하며 배우고 단련이 된 한편, 새로운 개념과 특기를 도입하면서 리그의 수준을 더욱 증진시키는데 일조하였고, 결국 최고의 위치까지 성장했습니다. 이런 논지를 이어가다보면, SKT가 아니더라도 결국 그 해 롤드컵 우승은 LCK가 했을 것이라는 말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이 일견 합리적이라고는 해도, 승부의 세계는 때때로 변덕스럽고, 그만큼 한 치 앞을 알 수 없습니다. 스프링 우승 이후 점점 전력이 내려가던 MVP 오존이 메타 부적응과 컨디션 난조 속에 롤드컵 조별예선 광탈이라는 충격적인 흑역사를 쓰게 되고,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기대를 한몸에 받던 SKK도 풀리그 초반 OMG에게 일격을 맞자, LCK팬들로서는 작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했습니다. 아직 롤드컵은 그리 만만치 않구나라는 생각을 다들 하게 되었죠. 허나 결과적으로는, 컨디션을 되찾은 SKK가 순항하여 4강 LCK 내전을 제외하고는 압도적이고 무난한 기량차이를 과시하며 우승하게 됩니다. 이로써 앞서 LCK 서머 결승에서 '류또죽'으로 LOL씬에 충격을 선사하며, 롤드컵 기간 내내 숱한 화제와 관심의 주역이 되었던 페이커는 첫 소환사의 컵을 들어올리는 동시에 LOL 정점의 위치까지 올라서게 되죠. 또한 이 롤드컵 우승을 기점으로 LCK는 명목상이 아닌 문자 그대로 전세계 최고의 리그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렇게 LCK에 '세계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가져온 첫번째 팀은 SKT가 되었고, 이 영예는 최초라는 임팩트와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격언 아래서 세월이 흘러갈 수록 더욱 선명하게 빛날 것입니다. 전국시대 진나라는 이미 전 세대인 소양왕의 시대에 통일을 할 수 있는 제반을 다 갖추어 놓았습니다만, 이를 제대로 활용해 통일을 이룩한 시황제가 대부분의 영광을 가져간 것처럼 말입니다. 꽃도 피어야 꽃이고, 열매도 맺혀야 열매이듯, 풍부한 가능성과 이루어낸 성공의 의미에는 그만큼 차이가 있다는 거겠죠.
최초의 롤챔스 2회 우승 및 2연속 우승, LCK 최초의 롤드컵 우승... 전인미답의 성취를 이어나가는 SKK는 흡사 번개같았고, 마른 숲에 바람을 타고 번지는 화마(火魔) 같았습니다. 전례가 없는 강력함을 뽐내며 라인전부터 터뜨리는 미드와 그를 보좌하면서 적재적소의 갱킹과 역갱으로 이득을 굴리는 정글러, 천재적인 센스를 가진 서포터와 팀의 후반캐리를 도맡는 막강한 피지컬의 원딜러, 2 대 1의 달인으로 팀의 주역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기여하던 탑까지. 서머 시즌부터 약 반년간 거침없이 질주하는 그들의 기세는 영원히 타오를 것만 같았습니다. 마지막 LCK 윈터에서 역대급 하드코어 대진표에도 불구하고 만나는 상대들을 모조리 압도하면서, LCK 전승우승으로 화룡점정을 찍게 됩니다.
'군대 가는 것 아니면 얘네가 다 해먹는다', '재미없다', '롤판 망한다'... 당시에 공공연히 커뮤니티에 떠도는 말이었고, SKK는 비교적 스토리나 캐릭터가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빠르게 역대급 커리어를 쌓아올린 팀이다보니, 기존의 인기팀들에 비해서는 아직 팬덤의 크기나 충성도도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윈터 시즌 이후로 최강팀에게 찾아오는 수순과도 같은 '악성팬'의 문제, 그에 대한 기존팀 팬덤의 반발이 심화되기 시작했고, 이는 '내전 주작 사건' 이라는 롤 팬덤 희대의 막장 쓰레기짓으로 이어지며 SKK의 몰락을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죠.
물론 SKK는 개인기량, 시쳇말로 체급 우위를 앞세운 단순화 된 패턴의 게임 스타일을 가진 팀이었기에, 쇠락의 시점이 그 내전 주작 사건이 아니더라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푸만두의 이탈이라는 요소도 꽤 컸다고 보구요. 하지만 저 사건이 선수들의 멘탈에 너무나 큰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에, 섣불리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초반 게임 플랜에서 페이커 의존도가 높았던 패턴을 가지고 있던지라 미드 캐리력이 하향된 메타에 더해 다른 미드들의 노력으로 페이커의 독주에 제동이 걸리면서, SKK의 시대는 저물기 시작합니다. 이에 더해 최강이라는 아우라가 사라지고 난 뒤 나타나기 시작한 기량 하락, 메타 부적응이 겹치며 몰락은 가속화되었죠. 그리고 이렇게 체급차이가 사라진 시점에 칼 같은 시야장악 운영+팀워크를 앞세워 치고나가기 시작한 삼성형제팀이 대권을 넘겨받게 됩니다. 그렇게 SKT 1.0, SKK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SKK와 그 중심에 위치한 페이커의 등장은 혁명 그 자체였습니다. 아직도 당시 프로 및 관계자들의 평가과 감상을 통해서, 페이커가 몰고 온 지각변동으로 인해 퍼져나간 충격파의 편린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종합적인 평가에서 한체미로 공인되던 앰비션을 데뷔전에서 압도한걸로도 모자라 그로 하여금
[상대가 안된다는 느낌]을 받게 한 페이커의 데뷔는 향후 미드라이너의 역량과 역할에 대한 전면적인 개념 수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페이커가 보여준 라인전, 한타, 운영, 챔프폭, 게임지식에서 비롯되는 갖가지 플레이들은 모든 면에서, 모든 미드라이너에게 텍스트북이 되었죠. 비유가 아닌, 의미 그대로 LOL씬의 마이클 조던의 등장이었던 셈입니다. 서머 시즌 MVP-롤드컵 MVP(비공식)-윈터 시즌 MVP까지 이 시기에 우승한 모든 대회의 MVP가 페이커였는데, 아마 두 번 다시는 나오기 힘든 기록이겠죠.
SKT T1 2.0 : The Empire Strikes Back - Two Summoner's Cups
Remakable Success페이커가 롤 씬에 가져온 파급효과를 일컬어 '기량 혁명'이라 한다면, 또 다른 축에서는 마타의 '시야 혁명'이 있을 겁니다. LCK가 세계 정상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두 축이 바로 페이커를 필두로 한 '개인 기량(피지컬+로지컬)의 종합적 향상'과 그 개인기량(보통 라인전 이득으로 나타나는)을 토대로 압도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만드는 마타의 스노우볼링, 오브젝트 운영의 기초가 되는 '시야 장악의 시스템화'라는데 아마 대부분 동의하실 겁니다. 이는 마치 스타1에서 임요환-이윤열-최연성의 계보와 그들이 제시한 방법론을 받아들여 종족 전쟁의 승자가 된 테란의 발전사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죠. 예전 아주부 형제팀들과 나진의 경쟁을 통해 발굴된 LCK의 라인스왑 운영이나 최적화된 오더 및 한타 등의 유산을 바탕으로 페이커와 마타가 각각 정립한 이러한 수단 내지는 문법들은, 이후 그 영향을 받은 선수들의 유입을 통해 LCK의 역량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바로 그 마타의 삼성화이트가 롤드컵 우승으로 시즌 4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을 때, 시즌 4 농사를 망친 SKT는 다음 시즌의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리그 개편이라는 변수와 팀 통합, 그리고 정들었던 주요 선수들과의 이별은 팬들에게도 아쉬움을 남겼죠. 롤드컵 직후부터 시작된 대규모 엑소더스는 뒤숭숭한 분위기를 한층 더 돋우는 듯 했습니다. 체급이 맞춰진 뒤로, 마타와 삼성화이트로 대표되는 바로 그 거시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응을 못하고 밀려난 SKT가 다시 왕좌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너무나 멀어보였습니다. 시즌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강력한 경쟁자들의 이탈과 분열은 분명 호재일 수도 있지만, '시베리아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 암사자가 왕 노릇' 하는 것은 유쾌하지도, 명예롭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시즌의 패자
(覇者)가 되려는 목표를 지닌 팀과 선수들에겐 그것을 호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치욕일 수도 있죠. 다시 복수를 염원할 지언정... 시즌 4가 끝난 직후 페이커의 인터뷰에서 그러한 투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시즌 5 초반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습니다. 벵기의 부진을 커버한 겁없는 신예 톰, 그리고 다시 톰톰벵벵벵을 통해 더 정글로 부활한 벵기, 여전한 캐리력을 보여줬지만 때때로 양날의 검이라는 평가를 받은 페이커와 그를 대신해 결승전에서 '슈리마 마스터'로서의 위엄을 뽐낸 이지훈, '마형'으로 거듭난 원조 '탑라인의 페이커' 마린, 일산 최고 원딜에서 '뱅윤발'로 각성해 한체원이 된 뱅, 매서운 이니시와 센스플레이로 팀원을 보좌한 울프까지... 많은 위기가 있었고, 뼈저린 패배들도 있었죠. 그러나 그 경험들을 고스란히 발전의 자양분으로 삼는데 성공했고, 끝내 다시 한번 LCK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MSI.
스프링 결승전과 MSI 첫 일정까지 채 1주일도 안되는 간격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한 시차 적응 문제 등으로 컨디션 난조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대회 준비 시간이 짧았던 점도 아쉬움으로 남았죠. 그 상황 속에서도 최대한 열심히 연습해서 간발의 차이로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렇지만 IEM 쇼크 이후 LCK의 위상을 되찾길 바라던 사람들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고, 당사자인 선수들과 SKT팬들에게도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결과였죠. 특히 4연솔킬의 굴욕을 딛고 폰에게 설욕을 노리던 페이커와 대회 내내 가장 안좋은 컨디션으로 팀의 구멍이 된 울프로서는 더욱 상심이 컸을 겁니다.
전화위복,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고루한 격언을 그 어느 팀보다 잘 입증하는 팀이 아마도 SKT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정도로 연습하고 열심히 하는데 다른 팀이 우승하면 말이 안된다]라는 뱅의 말처럼, 절치부심하여 뼈를 깎는 노력을 다한 끝에 SKT는 서머 시즌-롤드컵까지 무서운 기세로 독주할 수 있었고, 다시금 세계를 놀라게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마스터이, 이렐리아, 리븐, 라이즈 등으로 제2의 전성기를 알린 페이커와 MSI에서의 부진으로 생겨난 저평가를 극복하려는 듯 슈퍼플레이를 연발한 울프, 그리고 언터쳐블로 거듭난 팀의 주장인 마린의 기량이 두드러졌습니다.
LCK 서머 매치 18승 1패, 세트 38승 6패 우승, 롤드컵 15승 1패 우승. 개편 이후 LCK 최고 승률 + 역대 롤드컵 최고 승률 우승... 15 SKT는 지금까지도 역대 그 어떤 팀보다 시즌 그랜드슬램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팀이자, 시즌 승률 80%를 기록한 '역체팀'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소위 SKT의 강력함을 상징하는 수사들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시점도 바로 이때부터죠. 명목상이 아닌 의미 그대로의 전 포지션 세체에 가장 가까운 선수들의 기량, 최고에 다다른 선수들의 팀워크에서 발휘되는 환상적인 운영과 한타, 당시 프나틱 탑라이너였던 후니 피셜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막강한 라인전, 한번 승기를 포착하면 넥서스까지 굴려버리는 눈사태 스노우볼링, 수차례 보여준 중반 단계에 이미 7천-1만골드가 벌어진 게임을 뒤집는 대역전극, 프로씬의 고정관념을 깬 식스맨 활용의 성공까지. 전성기 기준 가장 파괴적인 팀이 13 SKK라면, 가장 길게 압도적 지배와 전지전능한 역량을 보여주며 흔히 말하는 '완전체'와 같은 면모를 보여준 팀은 15 SKT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어쩌다 흠집을 낼 순 있어도 결코 부서지거나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철벽에 둘러싸인 태산과도 같은 무게감은 도저히 넘볼 여지가 없었습니다. 다른 팀들이 상대하기 버거운 나머지 스크림을 꺼린다는 이야기마저 나왔을 정도니까요.
더없이 눈부셨던 역체 시즌을 뒤로 하고,
[텔포 이니시]의 선구자이자 '탑 캐리'의 교본을 남기며 시즌 MVP를 수상한 마린의 이탈이라는 팀 전력의 누수를, 나진에서 고통받으며 스프링 시즌 최고의 탑이라는 평가까지 받던 듀크를 영입함으로써 준수하게 보완한 SKT는 시즌 6도 무난히 순항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시즌 초반에는 작년보다 더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죠. 정글러의 성장-캐리라는 이질적인 메타에 벵기는 적응하지 못했고, 때문에 SKT는 부랴부랴 LPL 경험이 있으며 나름 솔랭 최상위랭커로 유명하던 블랭크를 영입해 대응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적절한 대처였죠. 악전고투를 거듭하며 한때 정규시즌 순위가 7위까지 떨어지기도 하는 등의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꾸준히 팀워크를 끌어올린 끝에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스프링 시즌 우승컵까지 들어올리며 극복해내는 위엄을 보였습니다.
[왕좌를 탈환하는 것보다, 그 지위를 지키는 것이 몇 배나 어렵다.] 사극이나 정치극에서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문구죠. 성취감과 함께 찾아오는 현자타임, 번아웃과 집중력의 상실, 동기부여의 부재, 최고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 이겨야 본전이라는 숨막히는 분위기, 많은 것을 이뤘지만 다시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고된 연습과 일상의 연속에서 오는 매너리즘... 통장에 찍히는 돈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게 뭐 대수냐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람이 꼭 그렇게 투입-산출의 정형화된 메커니즘을 기계마냥 늘 감당할 수 있진 않죠. 기계마저도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마모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개개인마다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내구도의 차이가 있으며, 돈은 멘탈 치유의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습니다. 프로라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당연한 것을 누구나 다 해내는 것은 아니죠. 인간은 그만큼 불완전한 존재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시즌 6까지는 팀의 주축이었던 페이커-뱅-울프 트로이카는 '기계처럼' 빈틈없는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2016년을 다시금 SKT의 해로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15 시즌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려간 총 전력, 예년에 비해 한층 더 전력이 상승한 강력한 라이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큰 무대의 페이커, 기복없이 항상 잘해주는 뱅울프, 결정적일 때 부활한 벵기, 스플릿과 한타에서 든든히 제몫을 다해준 듀크, 서머 시즌 후반을 제외하면 대체로 준수했던 블랭크까지 모두가 저력을 발휘해 정상을 지켜냈습니다. 다전제의 SKT, 절묘한 식스맨 활용 등 팀 운영의 노하우도 무르익었죠. 이를 통해 롤드컵 2연패를 달성하며 정점을 유지한 최초의, 그리고 아직까지 유일한 사례로 또 하나의 역사를 쓴 것입니다. 또한 15 서머-15 롤드컵-16 스프링-16 MSI라는 해를 넘긴 그랜드슬램(e.g. 타이거슬램, 세레나슬램 등)의 기록을 남겼고, 2016년 치러진 모든 국제대회를 우승하는 금자탑을 세웠습니다. 사람들은 롤드컵 3회 우승자가 된 페이커와 벵기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중에서도 페이커는 MSI-롤드컵 더블 MVP를 수상하며 영원히 지지 않을 태양처럼 빛났습니다.
화려한 축제와도 같던 시즌 6도 마무리 되고, 시즌 7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또다시 정들었던 선수들과의 이별과 새로운 동료의 합류가 이어졌습니다. 사실 이미 2년간 수많은 대회를 통해 최고 중의 최고임을 증명한 페이커-뱅-울프 이 96년생 트리오에게 팬덤은 엄청난 신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탑-정글에 어느 정도 레벨의 선수만 영입된다면 다시 한번 왕좌를 지켜낼 자신이 있었죠. 그리고 이때부터 SKT의 독주에 경외감을 느끼는 한편으로는 신물이 난 듯한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어찌보면 LOL씬의 거대 기득권(...)이 되어버린 SKT의 안티테제 연합체처럼 보이는 슈퍼팀, 17 KT가 등장하며 SKT는 또 한번 크나큰 도전을 맞닥뜨립니다. 이는 단순히 현재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서,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종의 논리로 SKT가 15-16 시즌에 세운 성과에 대해 재평가를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매치업이기도 했으니까요. 그 미묘하고도 첨예한 흐름은, 스프링 시즌 내내, 그리고 3월 2일과 3월 5일의 통신사 연전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지금 되짚어보면 참 씁쓸하고도 웃픈 점이, 시즌 내내 그 17 KT를 상대로 모든 매치업에서 승리하며, 폄하성 재평가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그 시즌을 지배하는데는 실패했다는 점입니다. 마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는 듯이. 구 삼화 이후 최고의 SKT 탈곡기였던 칸을 주축으로 한 킹존의 대두와 향로메타 최후의 승자가 된 신 삼성에게 완패하면서, 빛나는 상반기가 빛바랜 하반기로 가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견고하다 생각했던 삼각편대는 이미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지 오래였고, 알아차렸을 때는 늦었습니다.
[국가가 있어야 팀이 있다]는 코미디같은 비난까지 쏟아져 선수들의 멘탈을 부쉈던 리라 매국노 사건도 있었지만, 기실 팬덤이 분노했던 것은 더없이 신뢰를 주었던 바텀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죠. 끝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팀을 캐리하려던 페이커의 좌절과 함께, 2년간 철벽과도 같던 SKT 안진마의 핵심인 페뱅울 트로이카는 붕괴했습니다. 그리고 세 시즌 동안 롤드컵 2회, MSI 2회, LCK 4회에 달하는 우승 트로피를 쓸어담은 SKT 2.0 시대의 붕괴이기도 했죠. 과거의 영광을 온전하게 수성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영광의 시대를 연장하는데는 실패한 셈입니다.
붕괴의 여파 속에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맞이한 시즌 8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도 긴 겨울밤과도 같은 나날들이었습니다. 시즌 내내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는 팀을 보는 것은 그저 괴롭고 안타까울 뿐이었죠. 선수와 팬, 모두에게 안식이 아닌, 고행의 시간이었습니다. 무너진 기둥은 다시 세울 수 없었고, 결국 다시 한번 체제의 개혁은 필연처럼 다가왔습니다. 한편 다년간 LCK와 국제대회를 지배한 SKT의 몰락은, 마치 SKT가 대두되던 그 처음과 점대칭의 대비를 이루듯 LCK의 몰락과 절묘하게 겹치며 드라마틱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저는 SKT가 그 당시의 전력으로 롤드컵에 나가지 않았던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명예만 잃고, 얻는 것은 없는 롤드컵일 뿐이었을테니. 의외로 승부의 세계에는 이런 상징적인 상황들이 기점이 되곤 하거든요. 누구나 LCK 최후의 보루이자 상징이라면, 그래도 SKT를 꼽을테니까요.
SKT T1 3.0 : The Return of the Legends
Rebuild the Empire선발전이 끝난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SKT는 전면 쇄신에 돌입합니다. 붕괴한 잔해들을 모조리 걷어내고, 새롭게 기반을 다지고, 주춧돌을 다시 놓기 시작했습니다. 부임 첫 해 아주 값진 경험을 한 김정균 감독은 프런트와 유기적으로 교감해 폭넓은 영입 행보에 나섰고, 이를 통해 최선의 스쿼드를 갖추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모든 책임을 떠안을 기세로, 그리고 모든 대회를 다 우승하겠다고 밝힌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서. 프런트 역시 SKT의 무너진 자존심과 제국의 재건을 위해 전례없이 적극적인 스탠스를 취했습니다. 영입 물망에 오른 선수들에게 최선의 조건으로 지원할 의사를 내보이는 한편 명예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설득해나갔죠. 그리하여 마침내 현재의 스쿼드, 19 SKT T1이 완성되었습니다.
[출처: SKT갤러리]역대급 스토브리그가 진행되는 중에서도, 19 SKT의 스쿼드는 단연 화제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7위따리로 몰락한 명문팀에 무슨 메리트가 있어서 가겠냐는 회의적인 반응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로라하는 네임밸류를 가진 선수들과 최고의 유망주들이 합류했습니다. 그것도 사실상 싹쓸이 수준으로. 선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물질적 조건(연봉+환경)과 시즌 성적에 대한 비전(스쿼드, 코칭스탭과 팀 밸류)을 모두 최고로 충족할 수 있는 팀이라는 걸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죠. 또한 밴픽과 전략을 담당할 코칭스태프도 보강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시즌 준비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입전에서의 성과는 이 바닥 최고수준의 명문구단이 가지는 가치에 대한 입증이지, 그 자체로 어떤 결과가 보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밑천이 확실하다고 해서 장사가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모여든 선수들의 마음은 하나와도 같았습니다. 페이커와 김정균 감독에 못지 않게 최고를 향한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대개 이런 경우에는, 높은 확률로 성공합니다.
17 KT가 슈퍼팀이라 불렸듯이, 19 SKT는 드림팀이라는 별명이 주어졌습니다. 누군가는 17 KT의 전례를 밟아 안좋은 의미의 밈이 될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딱 그렇게 되길 바라면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드림팀이라는 별명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드림팀이든, 어벤져슼이든, 그만큼 네임밸류가 출중한 선수들의 연합이라는 의미니까요. 기본 체급이 부실하다는 느낌이 들던 18 SKT를 겪어보니 이건 뭐 선녀가 따로 없었습니다. 특히 합류한 선수들의 면면도 여러모로 의미도 있고, 개인적으로 매우 높게 평가하던 선수들이라 대만족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누적된 네임밸류와 당시 시점에서 가늠한 경쟁력의 잣대를 사이에 두고 뚜렷하게 갈렸습니다. 그럴만도 한 게, 18 시즌 기준으로 각각 리그 최고급이라 보기에는 의문인 선수들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정글러는 LPL 중상위권 선수로 활약한 경력이 있다고는 하나 LCK에서는 신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선수들의 폼이란 언제나 변하는 것이고, LOL이라는 게임의 특성상 클래스를 가진 선수들간의 시너지가 어떤식으로 발휘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라 봤기 때문에, 그 순간의 평가에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자신 있었죠. 무엇보다 아주 높은 수준에 도달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면이 반가웠습니다. 시즌 초반에는 조금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스프링 시즌부터 빠르게 합을 맞춰내면서 바로 우승이 가능한 스쿼드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주전 스쿼드를 구성하는 선수들 중에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좀 더 길게 봤을 지도 모르죠. 그정도로 이 주전 스쿼드가 가진 포텐셜과 완성도는 대단하니까요. 시즌 내내 교체없이 주전 멤버간 호흡을 맞추는데 주력한 것 역시 올바른 판단이었습니다.
[출처: SKT갤러리]스프링 시즌 우승에 이르는 과정 동안 경험과 노하우로 축적된 선수들이 합을 맞춰가면서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그 자체로 경이롭고,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그래서 시즌 후반부로 갈 수록 걱정보다는 기대가, 불안함보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코치진과 선수들로부터 느껴지는 기량 향상에 대한 열의, 더 나은 경기력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더없이 반가웠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높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의기투합하는 모습, 서로를 향한 탄탄한 신뢰 속에서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매진하는 그 자세가 예전 영광의 시대를 구가하던 SKT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마침내 제국을 재건하기 위한 전설들의 귀환이 시작되었습니다.
[출처: SKT갤러리]칸은 제가 마린 이후로 가장 높게 평가하는 탑라이너입니다. 예전 17 롱주 시절 당시에 '역체의 포텐셜'을 언급했을 정도니까요. 이후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그 높은 포텐셜에 대해서는 늘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아직 때가 찾아오지 않았었던 것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선수가 SKT에 오는 것은 그저 상상속의 바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스토브리그에서 그 기대가 현실이 되었을 때, 이 선수의 영입만으로도 저는 절반 이상 성공이라고 생각했던지라 너무나 기뻤습니다. 아직은 기대만큼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현재 시점에서 19 SKT에서는 대외적으로 가장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인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에 아랑곳 않고 이 선수에게 변함없이 신뢰를 보내는 이유는, 플레이 자체가 너무나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팀에 기여를 할 수 있는 선수, 또한 문자 그대로 폭발적인 캐리력을 지닌 선수. 최소한 플레이스타일에서 '탑 페이커'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선수가 저는 칸이라고 생각해왔고, 이건 2017년 이후로 단 한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MSI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는 선수이기도 합니다.
클리드는 저에겐 이상적인 정글러의 표본과도 같은 선수입니다. 무엇을 시켜도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코칭스탭의 지도하에 LPL물을 뺐다고 하는데, 현재의 스타일은 저에겐 댄디+벵기를 보는 듯 합니다. 피지컬과 순발력, 감각적인 변수 창출은 댄디처럼, 로지컬과 게임센스 및 유연함은 벵기처럼... 워낙에 스토브리그 초반부터 핫한 선수였고 정글 최고 매물로까지 평가되었지만, 해외리그를 챙겨보기 힘들었던지라 사람들의 말처럼 LPL식 정글러라는 소문만 듣던 정도였습니다. 다만 원체 톰이 높이 평가하는 선수라서 어느 정도 신뢰는 갔기에, 칸과 함께 오길 바랬지만요. 그러다가 영입 직후 솔로랭크를 관전해보았는데, 그 영리함에 정말 놀랐습니다. 왜 톰이 클리드의 악성개인팬인지 알게 되었죠. 제가 보기에는, 사실상 약점이 없는 스타일입니다. 뭐라 딱히 지적할게 없어요. 엄청난 밸런스를 가졌습니다. 기량과 멘탈 양쪽에서 모두. 그리고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 선을 지키는 능력이 너무도 탁월합니다. 그 와중에 기복마저 없다는 점이 어이없을 정도죠.
하루는 어떤 의미에서는 LCK 정글러들 중에서는 가장 LPL 정상급 정글러와 흡사한 스타일입니다. 솔로랭크를 봐도 초반에 터뜨리는 파괴력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면모를 보여주죠. 갱킹각이 정말 남다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작년 세체정 닝과 가장 유사한 스타일 같더군요. 팀이 원할 때면 언제든 그 막강한 캐리력을 보여줄 수 있을거라 봅니다. 분위기를 타면 그 어떤 정글러보다 막기 힘든 선수라고 보거든요.
테디는 이번 시즌을 보고 겪으면서 제일 인상이 바뀐 선수입니다. 강팀에서 합을 맞출 때 드러나는 플레이스타일이 어떨지 궁금했는데, 꽤 놀랐습니다. 개인적으로 15-16 상반기의 뱅만큼의 포지셔닝과 딜링 감각을 보여주는 원딜은 다시 보기 힘들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을 절묘하게 타는 능력이 특출났죠. 이건 뱅이 역대급으로 로지컬이 뛰어난 원딜이었다는 점도 한몫했을 겁니다. 그래서 테디에게는 다른 장점을 기대하는 편이었죠. 다소 과감하고 위험할지라도 하이리턴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라든지... 그런데 이번 시즌 지켜본 테디는 한마디로 말해 뭐든 다 잘합니다. 마치 어떤 원딜로도 화(化)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그 변화무쌍한 플레이를 보고 있다 보면, 스타일을 논하는 게 무의미하더군요. 게임마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플레이하고, 모두 캐리합니다. 동시에 어마어마하게 침착합니다. 황당할 정도의 캐리력과 날이 선 듯한 냉정함을 겸비한 이 선수의 진정한 기량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아직도 잘 가늠이 안됩니다. '이 선수가 같은 팀인데 지는 게 말이 안된다'는 칸의 말이 이러한 테디의 잠재력을 약간이나마 드러내는, 빙산의 일각일 듯 합니다.
마타는 명불허전 그 자체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이 선수의 최대강점은 '라인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선수 생활 내내 라인전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정점이 아닌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역대 모든 서폿을 통틀어서 이정도로 라인전 역량을 꾸준히 정상급으로 유지한 서포터는 없습니다. 이번 스프링 시즌에서도 팀워크를 맞춰가는 상황 동안 약간의 기복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매우 견고한 라인전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그냥 바텀이 어지간해서 지겠다는 느낌을 잘 안줍니다. 여기에 포지션 불문 역대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로지컬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고, 이젠 본인만의 전유물이 아닌 시야 장악에서도 때때로 원조의 맛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비전투 국면에서 마타가 보여주는 시야 장악은 확실히 남다를 때가 있습니다. 남들보다 와드를 두, 세개 더 가지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도 항상 적재적소에 와드가 있는 것을 보면... 이제 프로씬에서는 기본이 되어버린 부분이라곤 해도, 분명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는 듯 합니다. 여기다 더해 가장 리스펙트 하는 부분은, 시대에 뒤쳐지지 않게 후배들의 플레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등 자기 발전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마인드를 통해 오랜 시간 정상급 서포터로서 자리매김해 왔으면서도, 여전히 의욕적으로 발전하려는 그 마인드가 정말 대단한 선수죠.
저 캘리그래피처럼, 이렇게 재능과 의지가 가득한 선수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페이커가 해 주길 바랐습니다. 특출난 기량과 잠재력만큼 개성도 넘치기에 그 조화를 위해서는 인게임에서 조율하는 역할이 필요했고, 그에 가장 합당한 선수가 역시 페이커였다고 생각했으니까요. SKT의 중핵으로서, 다른 선수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기본으로, 어쩌다 필요하다면 본인이 캐리롤을 도맡는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항상 하드캐리의 주역으로서 페이커를 기억하고 또 기대하지만, 2017년의 그 눈물과 2018년의 시련을 목격한 탓인지 올해는 좀 편하게, 여유롭게 경기했으면 하는 바람이 컸습니다. 부담을 내려놓고, 팀원을 믿고 그들의 뒤를 봐주며 그렇게. 가능하다면 시즌 내내 버스만 탔으면 좋겠다고. 사실 팬이기에 할 수 있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나이브한 바람이었습니다. 치열하기 짝이 없는 프로들의 경쟁에서, 일찌감치 조연 전담을 자처한다는 것은, 심지어 게임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미드 포지션의 선수가 그런 마인드라면, 바로 그 순간부터 현상유지조차 못하고 뒷걸음질이 시작될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보아온 페이커는 애초부터 그런 생각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인 듯 합니다.
그런 제 바람과는 별개로, 어쨌든 시즌 초반 페이커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이상 캐리 챔프, 피지컬 챔프는 못하는게 아닐까' 라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특정 챔프-화력으로 캐리하기보다는 게임을 만들어주고 판을 깔아주는 챔피언들을 주력으로 사용했습니다. 여타 선수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도달해있는 커리어에서 엿볼 수 있듯이, 페이커는 어떠한 역할이 주어져도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전략적인 목적에 따라 딱히 이상할 게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미드 질리언, 미드 룰루, 미드 카르마로도 남다른 딜을 넣는 동시에 유틸성을 극대화해 팀을 서포팅하는 역할에도 독보적인 기량을 보여줬었고, 이미 유명하게 회자될 정도로 전례가 있었으니까요. 분명 새삼스러울게 없는 상황이었으나, 대중이 기억하는 페이커의 주된 이미지는 결국 하이퍼캐리 로망의 상징이었고, 시즌 초 그런 선택의 연속으로 말미암아 기대를 벗어나자 작년의 부진과 연관지어 보는 사람들의 조바심과 실망스러운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작년 여름에 그들이 언급하는 그 캐리 챔프들을 주력으로 쓰면서 솔로랭크 1위까지 찍었던 걸 본 입장에서는 매우 황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솔랭과 프로 게임은 또 다르다는 식으로 반박할 수 있었으니 굳이 대꾸하진 않았었습니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죠.
언제나 페이커는 승리를 향한 최선의 길을 탐구하는 선수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 선수입니다. 외부인의 시각과는 달리 1 대 1 승부에 집착하는 성격도 아니며, 이러한 면모들이 페이커의 시대를 만들고 인게임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마인드셋의 본질이죠. 페석대라는 재미있는 별칭으로 불리고는 있지만, 팀게임에서는 그 어떤 선수보다도 헌신적인 선수입니다. 그저 조연의 역할로도 주연 못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기에 특별한 것이고, 팀이 원한다면 언제든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영웅처럼 캐리를 해왔습니다. 그러한 활약들이 페이커의 명성을 하늘 높이 쌓아올렸죠. 그 페이커가 다시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챔피언을 꺼내기 시작한 순간이, 저에겐 SKT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느껴졌습니다. 팀원을 믿을 수 있기에, 본격적으로 하이리스크-하이리턴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아니, 강한 동료를 믿는 페이커에게 있어서 경기력의 증진을 도모하고 실수를 줄인다는 말은, 로우리스크-하이퍼리턴으로 가겠다는 선언입니다.
19 SKT T1의 주장은 페이커입니다. 그리고 그가 보여주는 리더쉽과 인게임에서의 거대한 영향력이, 어벤져슼 혹은 드림팀의 성공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겠죠.
Reborn the Unkillable Demon King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면, 많은 이야기들의 흐름 속에서 기시감을 느끼곤 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요. 앞으로도 또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겠지만, 같은 듯 또 다를 겁니다. 과연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그게 관건이지만 말입니다. 그 많은 이야기들 만큼이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셀 수 없지만, 오로지 페이커만이 빠짐없이 등장하고, 페이커만이 지금도 살아숨쉬고 있습니다. 또한 그 모든 순간들은 페이커의 기억 속 회랑에 걸린 모자이크의 조각들로 새겨져 있을 겁니다. 그리하여 강렬한 동기를 유발하는 의지의 화수분이 되고, 새로이 영광의 땅을 개척하기 위한 항해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등대가 되겠죠.
LOL에서 페이커만큼 많은 순간을 겪어본 선수가 있을까요. 페이커가 도달했던 그 경지를 과연 누가 가늠해볼 수 있을까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무협지에 나오는 외로이 패배를 갈구한다던 전설 속의 최고수처럼, 까마득하게 높은 성취를 이뤘음에도 끊임없이 자신과의 투쟁에 임하는 이 선수의 눈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요.
최근 페이커의 플레이와 여러 인터뷰를 보다 보면, 어떤 고요함이 느껴집니다. 폭발하듯이 터져나오던 재능으로 빛나던 시절도 있었고, 틈 하나 없이 철벽같은 위세를 자랑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찬란했던 시대가 지나고, 자존감마저 무너질만큼 강렬한 시련을 겪은 후, 이 선수는 다시 한번 거듭난 듯 합니다. 잔잔한 해수면 아래서 들끓는 마그마처럼, 초탈한 듯 담담한 모습 속, 인내심으로 거대한 투지를 갈무리한 채 새로운 길에 나선 페이커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SKT T1의 모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를 응원합니다. SKT T1 3.0의 시작에 더해, T1 1.0 시대의 성공을 기원하겠습니다.
Thumbs up, Faker!
Thumbs up, T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