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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9/18 21:15:29
Name 빼사스
File #1 장손_스틸_2.jpg (301.0 KB), Download : 2182
Subject [일반] [스포] '장손들의 연대' 영화 '장손'


사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자신이 원치 않게 장손이 된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저 또한 아버지가 차남이지만, 큰아버지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본의 아닌 장손 역할을 해야 했죠.
문제는 형제가 많은 아버지 집안이지만 할아버지가 꽤 오래 전에 먼저 돌아가시고, 할머니까지 제가
고등학교 때 돌아가시며 가족 자체가 해체된 수준이라 명절이든 뭐든 거의 모이질 않습니다.
덕분에 전 혼자 버스를 탈 수 있을 때부터 명절이든 제사 때든 이른 새벽이나 밤 늦은 시간에
부모님도 없이 혼자 큰집에 가야 했고, 큰어머니의 눈치와 구박을 잔뜩 받으면서 장손으로서 제사를 지내야 했죠.
그래서 제겐 '장손'이란 지위는 정말 끔찍한 단어였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제사 자체를 하지
않게 된 것도 그 이유였고요.

그러다 <장손>이라는 영화가 꽤 재미있다는 이야기에 동해서 덜컥 보러 갔습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장손'만 바라보는 어느 집안을 따라갑니다. 할머니는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임신한 손녀딸이 제사를 위해
전을 부치느라 고생하면서 불평하는데도 에어컨 대신 선풍기만 더 세게 틀어주더니만
손녀딸의 남동생인 '장손'이 서울에서 내려오자 어서 에어컨을 틀자고 닥달을 합니다.
할아버지도 장손의 말이라면 다른 가족들이 아무리 난리쳐도 절대 안 바꾸던 제사 시간을 앞당겨줍니다.
젊은 시절 법대까지 보냈지만, 운동권에 몸담은 관계로 고문 등의 이유인 듯 다리를 절고 낙향해
구박받으며 아버지의 두부공장을 잇게 된 장손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개가 됩니다.
장손을 자기 아들처럼 살뜰하게 살피던 큰고모는 전신마비 남편을 홀로 부양중이고
사업가와 결혼해 잘살며 이민을 가는 작은고모는 집안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어르신의 죽음,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의 씨앗이(언제나 그렇듯 돈 문제)
자라나고 결국 파국으로 향합니다.

영화는 중간중간 한국인이라면, 그리고 30대 이상의 남녀라면 누구라도 겪어봤을 한국의 문화에서 공감을 불러냄과 동시에
웃음을 유발시킵니다. 이게 꽤 타율이 좋습니다. 또한 그러면서도 사라진 '통장'이라는 하나의 소재로 미스터리를 담아냅니다.
게다가 몇 부분 깜짝 놀랄 반전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영화 자체가 상당히 흡인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장례식 문화'를 사실처럼 디테일하게 하나하나 담아냄으로써(곡, 염, 부의금 확인 등) 그것 자체만으로도
과거 임권택 감독의 <축제>처럼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아직 장례 문화를 겪어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영화를 보시는
것만으로도 장례의 분위기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영화의 가장 불편한 부분은,
영화가 의도했는지 몰라도  '장손'과 '장손의 아비' 그리고 '장손의 할아비'는 모두 한통속으로 보이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장손들의 연대랄까요.
한국인이라면 모두 너무나 뻔히 알고 있는 답이고 새삼스럽지 않아 보이는데도, 한 발짝 떨어져서 보게 된 현재엔 무척 기괴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럼에도 시대가 변하고 흐름이 깨질 것이라는 예견도 해보이기에, 마냥 불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롱테이크가 제법 많은 영화인데, 이게 시골 풍경과 함께 여운도 많이 남기고 극에 빨려들게 할 수 있게 만드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군더더기가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후반엔 좀 지루한 부분도 있고, 할아버지의 과거사나 운동권 아버지에 대한 부분은
개인적으로는 좀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극장에 제법 많은 관객이 있었는데 대부분 4~50대로 보이는 분들 같은데, 비슷한 동질감을 느꼈는지 많이들 탄복하고 또 웃고 매료되더군요.

많은 곳에서 개봉하진 않았지만 꽤 좋은 감상이 될 영화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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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둥이
24/09/18 21:29
수정 아이콘
제목부터가 장손이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제목인듯... 소재가 참 좋은것 같습니다.
무적LG오지환
24/09/19 01:15
수정 아이콘
이별하는 어르신을 고르는 선택도 탁월했습니다.
올해 한국 독립 영화들이 뭔가 다 나사가 한두개씩 빠진 느낌이었는데 이번 연휴때 본 장손과 그녀에게는 그런 느낌 받지 않아 좋았습니다.

둘 다 참 가족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묵직함도 갖췄고요.
파르셀
24/09/19 07:48
수정 아이콘
본문만 봐도 한국 집안에서 장손의 대우와 책임감, 그리고 장손이 아닌 사람들의 차별이 잘 느껴지는군요

이 영화는 10년, 20년 뒤에는 예전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 때는 이랬지 라는 문화기록이 될꺼 같습니다

코로나를 전후로 제사를 포함한 이런 문화가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으니까요
닉언급금지
24/09/19 12:45
수정 아이콘
보고 오신 분 평으로는 이야기가 재밌어 이야기를 보다가 어느덧 풍경만 보고 있더라....
풍경만으로도 표값했다...라고 하시더라구요.
답이머얌
24/09/19 19:14
수정 아이콘
요즘은 외동이 하도 많아서 또는 둘만 낳아도 딸이 나올 확률까지 감안하면 매우 높은 확률로 남자라면 장손!
제가 5대 장손인데 어르신들 가시고 나면 제사나 성묘를 없애야 하나 고민중입니다. 간소화는 하고 있는데, 없앨까 말까 고민하는 이유는 그나마 이런 핑계대고 친족이 모이는 거지(그것도 성묘에 모여야 10명 남짓이고 배우자는 참석 자체를 아예 안합니다. 제사는 직계로만 지내니까 최대 8명) 이걸 없애고 나면 1년에 한 번도 안보고 언제 밥한번 먹자 하는 그저그런 친구 사이가 되버릴 것 우려가 드네요. 그렇다고 재산 상속에 무슨 우대가 있는것도 아니고 집안 행사하면 죄다 저만 쳐다보는 형국이라 부담감만...
시대 바뀌면 장손이란게 단어 자체가 없어지지 않을까 싶네요.(앞서 얘기한대로 남자면 거의 자동으로 장손 당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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