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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2/23 14:33:10
Name TheLasid
Subject [일반] 간결한 글쓰기 - 생략 편

요즈음 '짧은 글이 곧 좋은 글'이라고 믿는 분들이 부쩍 늘어난 듯합니다. 이상한 생각입니다. 소설이 시보다 못하지 않고, 장편이 단편보다 격이 떨어지지는 않으니까요. 아마도 '간결한 문장이 좋은 문장'이라는 고수님들의 말씀이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다소 와전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각설하고, 간결한 문장을 쓰는 방법은 대단히 많습니다. 생략 및 축약, 적절한 조사 및 어휘 사용, 군더더기 표현 삭제, 명사적 표현을 부사적 표현으로 대체 등등 수도 없이 많아요. 일단 오늘은 생략에 관해 말해보려 합니다.  

     

--

     

한국어는 어순이 자유로운 언어입니다. 특정 문장 성분이 반드시 특정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제약이 거의 없습니다. 생략이 쉬운 언어라는 뜻입니다.

     

한국어는 조서와 어미 즉, 기능어가 잘 발달한 언어입니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는데 필요한 활자의 수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생략을 잘 활용하지 않으면 자칫 길고 지루한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어는 경제적이지 못한 언어입니다. '나 사랑 너'처럼은 못 합니다. 한국어는 혁신적인 언어입니다. '사랑해'면 충분합니다.

     

생략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조사 생략과 성분 생략입니다.  

     

조사는 다른 말과 관계를 맺게 하거나 특별한 뜻을 첨가해 주는 역할을 하는 품사입니다. /는 이/가 에/에게 을/-이다 등이 대표적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한국어는 기능어가 잘 발달한 언어입니다. 어찌나 잘 발달했는지 빼버려도 상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른바 조사 생략입니다.

     

() 누구야? 어디() ? () 먹었니?. 우리() . 여름() 바다, 나니아() 연대기

     

그렇지만, 조사를 생략해도 문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말이 곧, 생략하면 좋다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조사는 뺐을 때 더 어색하게 느껴지거든요. 또 빼면서 어떤 '특별한' 의미가 사라질 수 있거든요. 저는 일반인분들은 ''를 제외한 조사는 굳이 생략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두 글자 줄이려다가 문장 자체가 어색해질 위험이 커요. '' 역시 생략시 문장이 어색해질 위험이 있지만, 그 위험이 상대적으로 아주 작습니다. 게다가 생략했을 때 의미가 더 명료해질 때가 많습니다. ''는 먼저 생략해도 이상하지 않을 때는 과감히 생략하고, 생략할 수 없을 때는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없는지 고민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경제의 문제'에서 의를 고치려다가 '경제적 문제'로 가지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경제 문제면 충분합니다.

     

생략 욕심이 더 생기셨다면 을/를도 한번 생략해 보세요. 비교적 쉽습니다. 공부를 했다(->공부했다) 약속을 했다(->약속했다)처럼 고치시면 됩니다. 그래도 욕심이 나신다면 이/가를 생략해 보세요. 배가 고프다(->배고프다)처럼요. /는은 정말 신중하게 생략하셔야 합니다. /는은 보조사로 쓰일 때 주어나 주제어 뒤에 붙어 특별한뜻을 더합니다. 특별하다 = 국어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다는 이야기에요. 생략해도 되겠다 싶어서 생략하면 반드시 문장의 의미가 변합니다. 너 누구야? vs 너는 누구야?를 보시면 바로 이해하시게 될 겁니다.

     

조사 생략은 잘 하면 좋고 아님 말고라는 식으로 말씀드렸지만 성분 생략은 다릅니다. 성분 생략이 여러 문장에서 누적되면 그 효과가 대단합니다. 잘 쓰면 경쾌하고 리듬감이 있는 '보기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조금 어색하게 쓰더라도 읽어야 하는 텍스트의 양이 줄어들면서 '부담스럽지 않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분 생략은 언제 어떻게 쓰면 될까요? 남영선 선생님께서 <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에서 하신 말씀으로 갈음하겠습니다. (멋진 책이에요. 추천합니다!)

     

"한국어에서는 모든 성분이 생략될 수 있다. 하나씩 생략하는 것이 아니고 무더기로 생략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상대가 이미 알고 있는 기존 정보는 그것이 얼마나 많거나 길든지 개의하지 않고 과감하게 생략한다. 생략을 위해서 아예 문장의 구조까지 바꾸기도 한다."  


  

상대가 이미 알고 있는 '기존 정보'는 얼마든지 생략할 수 있다. + 때로는 생략을 위해서 문장 구조를 바꿔야 한다.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저번에 피지알에 올라온 글 '유려한 글쓰기'에서 저자 충달님은 독자에게 친절한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영양가 있는 댓글도 제법 달렸습니다. 댓글에 요지는 친절한 글이 꼭 좋은 글은 아니라는 점과 불친절한 글쓰기가 때로는 유효한 전략이라는 점이었지요. 본문도 댓글도 다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어떤 전략을 채택할지 정하기 전에 예상 독자가 어떤 사람들이고기존 정보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먼저 따져보세요!)

     

성분 생략에는 주어 생략, 서술어 생략, 기타 성분 생략이 있습니다. 성분 생략은 사실 글보다는 말에 적합합니다. 말은 글보다 사적이거든요. 업무 상대와는 메일로 소통을 해야 가슴 뛸 일이 적지만, 연인과는 전화 통화를 해야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가까운 사이일수록 글보다는 말로 소통을 하기 마련인데, 이런 사람들은 기존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생략이 아주 쉽습니다. 반면에 글에서 생략을 잘 활용하려면, 처음부터 생략에 적절한 구조로 글을 써야 합니다.

     

주어(혹은 주제어)를 생략하고 싶다면, 앞 문장과 뒤 문장의 주어가 반드시 일치하도록 글을 써야 합니다. 또 이왕이면 문장 앞머리에 주어를 배치하여 독자가 알아보기 쉬운 구조로 글을 쓰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어도 불평하지 않고 늘 온존하는 평화를 즐기며 소박함을 자랑으로 여기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온전히 스스로의 만족을 최선으로 여겼으며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은밀한 성취로 여겼다.”

     

누구겠소님이 쓰신 75897번 글의 일부입니다. (저는 누구겠소님의 글을 참 좋아합니다. 아침에 깨서 보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만약 이 문장에서 생략을 활용하고 싶다면 문장 구조를 이렇게 바꾸는 편이 낫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다고 문학성이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남자는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남자는) 늘 온존하는 평화를 즐기며 소박함을 자랑으로 여겼다. (남자는) 온전히 스스로의 만족을 최선으로 여겼으며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은밀한 성취로 여겼다.”

     

문장은 대개 무엇이 어떠함을 설명하는 형식입니다. 여기서 어떠함을 빼면 서술어 생략이 됩니다. 서술어 생략을 글에서 하기는 어렵습니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자칫 불구 문장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도 인용문에서는 쉽게 할 수 있으니 한 번씩 해보시길 바랍니다. 문장이 멋스러워져요 :)

     

과학자팀은 논문에서 자연계가 정해진 가변성의 범위 안에서만 변동한다는 가정은 이제 더는 안전한 가정이 아니다.”라고 했다.

(-> 과학자팀에 따르면 자연계가 정해진 가변성의 범위 안에서만 변동한다는 가정은 이제 더는 안전한 가정이 아니다.”)

     

논리나 정보를 전달하는 글에서는 아주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서술어를 굳이 생략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학적 글을 쓸 때는 불구 문장처럼 보인다는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서술어를 생략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열에 아홉은 욕만 먹고 실패하니 please, don’t try this at home.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유명한 표현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죠. 재미로 보세요.

     

I've seen things you people wouldn't believe.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 할 것들을 봤다.

Attack ships on fire off the shoulder of Orion.

오리온 성계의 어깨너머로 불타오르는 전투함들.

I watched C-beams glitter in the dark near the Tannhauser gate.

탄호이저 기지의 어둠 속에서 명멸하던 C-beam.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기억이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Time to die.

죽을 시간이다.

     

한국어의 자연스러운 어순을 고려하면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기억이 빗속의 눈물처럼 사라지겠지.”가 적절하겠지만, 굳이 문장을 둘로 나눈 후 뒤 문장에서 서술어를 생략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어순보다 이미지를 전달하는 타이밍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학성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상황에서 서술어 생략이 이루어진 극히 드문 케이스라고 봅니다. 사실 이런 행위를 과연 생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 문장이 둘로 쪼개졌을 뿐 더 짧아지진 않았잖아요? 암튼 문학적 글을 쓰시는 분들이라면, 여러 가지로 활용하실 수 있겠지요여러분이 원하는 바로 그 순간에 독자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세요!

     

대망의 기타 성분 생략은 목적어나 부사어 등 주어와 서술어를 제외한 부분을 생략하는 것입니다. 별로 어렵지도 않고, 이미 많이들 쓰고 계신 방법입니다. 역시나 글보다는 말로 하기가 더 쉽지만요. 목적어 생략은 최근 유행하는 가즈아아아아아아아!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어디에 가자는 건지 목적어가 없지만 척하면 척 알아듣잖아요? 우리는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너를) 사랑해등등 맥락을 봐야 알 수 있는 표현을 흔히 씁니다. 부사어 생략에는 흔히 이런/저런/그런 같은 말이 딸려오는데, “저런 애가 어쩌다 우리 회사에 들어왔대?”같은 문장을 보시면 바로 아실 겁니다. ‘저런이 뭔지는 단서가 없으면 알기 힘들잖아요? 숨은 부사어가 따로 있는 겁니다. 아무튼, 기타 성분 생략은 문장을 산뜻하게 해주는 효과가 큽니다. 여러분의 의도를 독자가 오해할 여지가 없다면 (중요!) 적극적으로 활용하세요. 혹은 독자가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일 때 현명하게 사용하세요. 기타 성분 생략은 강력한 반전 요소입니다. “언니, (언니를) 사랑해! (언니 남편을).” 두 괄호 중 어느 게 진짜일까요? :)


--


글이 생각보다 제법 길어졌네요. 막상 따져보면 생략만으로는 문장이 눈에 띄게 짧아지거나 하진 않습니다. 앞으로 다른 방법도 말씀드릴 예정이니 너무 실망하진 말아 주세요. 몇 가지 방법을 섞어서 쓰면 기대 이상으로 간결한 문장과 글이 나옵니다. 그럼 다음에 축약 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틀린 내용 지적은 언제라도 환영이에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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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말론
18/02/23 14:41
수정 아이콘
좋네요
TheLasid
18/02/23 15:09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
현직백수
18/02/23 14:41
수정 아이콘
쉬우면서도 엄청 어렵네요..,..춫현
TheLasid
18/02/23 14:56
수정 아이콘
나랏말싸미 쉬우면서도 엄청 어렵더라고요 :)
-안군-
18/02/23 14:49
수정 아이콘
어.. 그러니까, '주어는 없습니다.' 로군요? ...는 실패한 드립이고.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TheLasid
18/02/23 14:58
수정 아이콘
보고 있나 재중군...여기 지금 자네를 능가하는...!!! :)
BloodDarkFire
18/02/23 14:55
수정 아이콘
[“남자는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남자는) 늘 온존하는 평화를 즐기며 소박함을 자랑으로 여겼다. (남자는) 온전히 스스로의 만족을 최선으로 여겼으며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은밀한 성취로 여겼다.”]
상당히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알찬 문장이란 느낌.
TheLasid
18/02/23 15:07
수정 아이콘
사실 누구겠소님이 쓰시는 글은 제가 손을 댈 글은 아닌 듯해요. 편집자분들은 싫어할만한 글이지만, 분명 문학성이 뛰어난 글입니다. 저 문장이 마음에 들어서 빌려 왔어요. 바꿔야 한다는 의견은 절대 아니고, 굳이 생략을 하고 싶다면 저런 식으로 살짝 바꾸면 좋겠다 정도의 의견입니다 :)
세인트
18/02/23 14:56
수정 아이콘
저는 TheLasid님의 글을 참 좋아합니다. 오후에 일하다 잠시 숨돌리면서 보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근데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절대 (제가 TheLasid님께 가하는) 태클은 아닌데,
(다음에 혹시 시간 여유가 더 되신다면, 지난번 썼던 글에 이어서) 호러 관련 글도 더 써주세요...
(새롭게 쓰실 글을) 아내랑 (저) 둘 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헤헤.

...쓰고보니 역시 한글은 혁신적입니다. 사실 그때문에, 번역이 오히려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일할 때 한->영 혹은 영->한 공문이나 메일을 번역해야 할 때가 많은데
우리말은 정말 주어나 부사어를 생략할 때가 많아서 이걸 직역했다간 오류투성이가 될 때가 많더군요.
TheLasid
18/02/23 15:05
수정 아이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D
호러가...보는 것보단 쓰는게...호러더라고요. 사실 초안은 진작 다 썼는데...정리가 안 되서 못 올리고 있습니다 ( _ _
(죄송합니다. 제게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세요. 헤헷)
번역이 참 재밌어요.
저는 주로 영->한 책 번역을 하니까 생략을 해서 문장이 예뻐질수록 고료가 내려가는 매직이 일어납니다 :D
생략 잘못하면 바가지로 먹는 욕은 덤이고요. 번역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죠!
켈로그김
18/02/23 15:04
수정 아이콘
내용은 듬성듬성 봤지만, 좋은 기운은 느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흐흐;
TheLasid
18/02/23 15:08
수정 아이콘
으하하 감사합니다. 제 인품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
18/02/23 16:33
수정 아이콘
저는 번역이라는 것이 언어의 단어 묶음을 다른 언어의 단어 묶음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단어 묶음을 두 번 적는 것보다, 다른 언어의 것이라는 표현은 어때요? 아니요 그러면 운율이 없잖아요! 운율이 없다는 것은 끔찍한 문장이랍니다. Farce씨!)
그러나 사람은 뉘앙스를 찾는 동물인지 일본어로는 내키지 않는 피동을 영어로는 과거완료형을 스페인어로는 불완료동사를 그리고 저는 한국어로 수 많은 조사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타인의 문장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타인이 왜 다른 형태의 문법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추측이 말이 된다고 해서 타인에게 제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아닌 것이 되어버리겠지요? 저는 그래서 타인이 제 글을 어떻게 읽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두렵습니다. 제 두려움을 타고 을/를/도/뿐/굳이/하필/이런/같은이 증식합니다. 덕분에 마구잡이로 쓰는 것 같기도합니다. 저는 광인인가 봅니다. 하지만 이 광인은 이 글을 읽으며 잠시나마 미친듯이 날뛰고 건강을 좀먹는 들숨과 날숨의 광란을 멈추고 마음의 평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TheLasid
18/02/23 20:13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후한 평가에도, 좋은 댓글에도요 :)
번역은 단어 묶음을 단어 묶음으로 바꾸는 일이라는 말씀을 들으니 제가 예전에 한참 했던 고민이 떠올라 미소를 짓게 되네요.

어떤 언어의 단어를 다른 언어의 단어로(word for word)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번역이 아닙니다." 번역을 문장을 문장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한 차원 높은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문단을 문단으로 바꾸면? 더 높은 차원의 번역이 가능합니다. 텍스트를 텍스트로 바꾸면? 더 좋겠죠! 그렇게 차원을 계속 올리다 보면,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도달합니다. 결국, 시작점으로 돌아온 거죠. 멋지지만 비현실적인 이야기, 거창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Farce님이 생각하셨던 단어 묶음을 단어 묶음으로 바꾸는 번역은 상당히 수준 높은 번역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뉘앙스를 찾는 동물인지라
각 언어에 존재하는 collocation을 적절히 고려하지 않으면 단어 뭉치 단위로 번역할 수가 없지요. 그러면서도 현실성이 있는 번역입니다.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하니다 :)

저도 타인의 문장을 이해한다고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타인이 제 문장을 온전히 이해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이것이 글자로 적을 가치가 있기는 한 것인지 삐딱한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수한 언어라는 평가를 받는 이탈리아어나 그와 유사하다는 스페인어를 써서 의사소통하는 사람들을 봐도 딱히 사정이 다르진 않더라고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인간에게는 애초에 의미의 완벽한 이해나 의사의 온전한 소통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게 정말 필요하다면, 애초에 언어라는 조악한 장치를 쓰지 않게끔 진화했겠죠. 그렇게 생각하니 남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제가 한 말이 타인에게 닿지 않더라도 그게 정상이야!하고 속 편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써놓고 보니 신포도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거창하게 말했지만, 저 역시 두려움을 떨치지도 기대를 접지도 못했습니다 :(

황야의 광인은 숲의 현자를 달리 부르는 말이라 하더라고요. 계속 힘내시길 바랍니다 :))
마스터충달
18/02/23 16:52
수정 아이콘
(수정됨) 생략... 잘 쓰면 간결해지고, 잘못쓰면 오히려 복잡해지는 독약같은 처방전이랄까요;; 주어 생략은 특히 그렇더라고요. 이걸 빼도 되는데, 정말 빼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 글쓰기가 턱 막히면서 손 끝이 부들부들...

그나저나 이렇게 체계적으로 정리된 글이라니... 제 글이 넘모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ㅜㅜ 정말 잘 보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TheLasid
18/02/23 20:30
수정 아이콘
(수정됨) 피지알의 가장 핫한 작가님이신데,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

사실 충달님은...제가 쓴 글을 보실 레벨은 아닌 것 같아요. 저 같은 야매 말고 고수분들께 직접 배우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중간중간에 좋은 책을 소개해 드릴 터이니, 혹여 안 보신 책이라면 도서관에서 빌려 보시길 바랍니다 :)

말씀대로 주어 생략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채식주의자를 읽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데보라 선생님이 오역했다고 지적받은 부분의 상당수는 사실 한강 작가님이 (혹은 담당 편집자님이) 주어를 생략하면서 실수하신 부분이었죠. 재기가 넘치고 연륜이 쌓인 작가도 그러할진대, 재능은 있더라도 아직 젊은 충달님 같은 작가나 저같이 범용한 사람은 (심지어 경력도 짧음)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한 번씩 글에 독을 풀어보세요. 의외로(?)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안 죽어요! 가끔은 생각지도 못하게 끝내주는 맛이 납니다.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글에 자부심을 가지세요. 실수는 충달님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그러니 데뷔하시기 전에 실험이란 실험은 다 해보시고, 독이란 독은 다 풀어보세요 :)
마스터충달
18/02/23 20:35
수정 아이콘
그렇게 독 풀면 그 부분 이상하다는 댓글이 꼭 달리죠 ㅠ.ㅠ 나으 예술적 감성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넘모나 어려운 일 ㅠ.ㅠ (안 예술적이니깐 그렇겠...)

제가 글쓰기 팁을 이책, 저책, 인터넷 여기저기서 진짜 생각 없이 주워담아가지고;; 뭔가 정리가 안 된 상태인데, 진짜 이 글 덕에 머릿속이 정갈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혹시 이번 글을 쓰실 때 참고하신 책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TheLasid
18/02/23 21:02
수정 아이콘
요번 글은 주로 남영신 선생님의 <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를 참고했습니다. 좋은 책이에요. 기초부터 다지고 싶으시다면, 김남미 선생님의 <친절한 국어문법>을 보시길 바랍니다. 이 책을 추천하면 보통 의아한 눈으로 쳐다들 보시는데, 제게는 오히려 이런 기초적인 책이 도움이 될 때가 많았습니다.

충달님께 개인적으로 추천해 드리고 싶은 책이 있는데, 장하늘 선생님의 <글 고치기 전략>입니다. 충달님께서는 글쓰기를 '법'의 관점에서 보시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작법과 어법에 맞는 글을 추구하신다고 느껴져요. 요즈음 보기 힘든 훌륭한 태도이십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글쓰기를 '전략'의 측면에서 보실 필요도 있습니다. 가령, 충달님이 말씀하신 친절한 글쓰기에는 분명 훌륭한 당위가 있습니다. 대의와 명분이 모두 있지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충달님께 큰 부담을 지울 무거운 짐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이 상황에서 친절한 글쓰기가 적절한 전략인가?라고 생각해 보시면 조금이나마 그런 부담이 덜어지리라 봅니다. 그리고..그런 걸 떠나서 워낙 잘 쓰인 책이기도 하고요 :)

이오덕 선생님이 쓰신 책은 모두 훌륭하지만, 저는 <우리말 살려 쓰기>가 특히 좋았습니다. 작법이나 어법에 관한 이야기가 많으니 충달님과도 잘 맞을 거예요. 아직도 더 자신을 학대하고 싶으시다면, 우리말 배움터*에 가셔서 테마별로 정리된 읽어 볼 만한 책 목록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

http://urimal.cs.pusan.ac.kr/urimal_new/read/common/books/default.asp?field=1070402
마스터충달
18/02/23 21:07
수정 아이콘
아아... 좋은 학대다... 감사합니다.
TheLasid
18/02/23 21:12
수정 아이콘
그래서 저는 문학 텍스트에는 얼씬도 안 한답니다! 문학 번역은 하다 보면 가슴에 고구마가 차오르면서 넘모넘모 아파요 :(
아 물론 논리적인 글도 번역하다 보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픕니다. 골라 먹는 독약이라고나 할까요!
콜드플레이
18/02/23 17:02
수정 아이콘
PGR에서 스크랩한 열번째 글이로군요!
TheLasid
18/02/23 20:30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D
칼라미티
18/02/23 17:53
수정 아이콘
(수정됨)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누구겠소님 글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TheLasid
18/02/23 20:31
수정 아이콘
키야~ 글보다 더 좋은 경품을 받아가셨네요. 축하드립니다!
누구겠소
18/02/23 18:10
수정 아이콘
생략에 관해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인용해주셔서 영광입니다.
TheLasid
18/02/23 20:33
수정 아이콘
미처 말씀을 못 드리고 문장을 빌려왔는데, 너그러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영광이지요 :)
눈팅족이만만하냐
18/02/24 22:49
수정 아이콘
틀린내용 지적은 언제나 환영이라고 하셔서...

[업무 상대와는 메일로 소통을 해야 가슴 뛸 일이 적지만, 연인과는 전화 통화를 해야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 이 문장 조금 어색해요.

오탈자 3군데 발견했습니다.

정성스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실 글쓰기는 언어감각이 중요한데 언어감각도 타고 나는 게 큰 거 같아서, 시험준비 하듯이 이론을 공부하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게임같은 건 공략집을 읽고 그대로 따라하면 어느 정도 성과를 내는 게 어렵지 않은데, 문장론은 공부를 해서 이론을 숙지하고 있어도 그에 맞게 그대로 글을 뽑아내는 건 참 어려운 작업인 것 같아요.
TheLasid
18/02/24 23:55
수정 아이콘
오! 고맙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색한가요 ' '? 이왕 수고해주시는 김에 조금만 더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탈자도 알려주셨으면 좋겠고요.

그러게요...이론과 실제가 참 다릅니다. 이론이 도움이 되려면 결국에는 자기 글을 써 봐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이론 공부를 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다는 느낌이랄까요 하하.
Quantum21
18/03/01 04:40
수정 아이콘
이렇게 좋은글이 있었는데 지나쳤네요. 축약편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글 솜씨가 부족해서 고생이 많은데 많이 배워갑니다.
TheLasid
18/03/01 05:48
수정 아이콘
친절한 말씀 주셔서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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