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愼勿輕速
위기십결 제7.
경솔하고 빠르게 두는 것을 삼가하라.
섣불리 함부로 나서다가 크게 깨지지 말고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행동하라는 뜻.
공백 기간이 워낙 길었으니 일단 이전의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해 봅시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종료된 이후 소련군은 대반격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1차적으로는 모스크바에 바짝 들어선 칼날을 제거하고, 2차적으로는 눈 앞의 적군을 섬멸함으로써 전쟁의 빠른 종결을 목표로 했죠. 그런데, 모스크바의 방어선을 굳건히 하고 버티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뒤가 문제였습니다. 마치 정교한 전쟁 기계와 같았던 독일군을 상대로 소련군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하는 엄청난 강추위로 인해 양군의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그래도 그런대로 추위에 내성이 있던 소련군이 밀어붙이는 데는 성공하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입은 손실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독일군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서 전 전선에서 구멍이 뚫리고 있는 판이었고 최전선의 뒤쪽에서 날뛰고 있는 게 소련군의 공수부대도 아니고 기병부대(즉, 지상군)라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는 판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양 독재자는 독재자답게 멍청한 판단을 하는데 스탈린은 독일군을 지나치게 얕보고 아예 전 전선에서의 전면적인 반격을 주문했고, 히틀러는 히틀러대로 후퇴하여 전력을 온존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임에도 불구하고 후퇴불가 현지사수를 남발해 대면서 독일군에게 필요 이상의 손실을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1941년 12월 5일에 바르바로사 작전이 종료되고 여기저기에서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된 이래 2월이 다 되도록 전선은 전혀 안정화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지도가 한 장도 없을 예정입니다... 딱히 쓸 만한 지도가 없더군요.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지난 1964년이었던가요. 니키타 흐루쇼프가 5시간짜리 스탈린 격하 연설을 하면서 스탈린 덕분에 전쟁에서 이긴 게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전쟁에서 이겼다고 연설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만, 그게 사실인지는 출처를 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발언의 사실 여부보다는... 실제로 이 때까지는 적어도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전투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이죠. 최소한 청색 작전 이전까지는 말입니다.
군부에 대숙청을 가한 스탈린은 철저하게 군권을 틀어쥐고 있었고, 때문에 스탈린은 무리한 명령을 내리면서도 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가 나온 지 벌써 한 20년 된 것 같은데, 그 때부터 지적되어 왔고 지금에 와서는 거의 확실한 것은 소련군이 전력을 중부 집단군의 섬멸에 집중했다면 독일군은 1942년경부터 제대로 무너졌을 거라는 이야기거든요. 까놓고 이야기해서 르제프에서 독일군이 버틴 게 기적이었지 다른 곳에서는, 특히 브랸스크와 뱌지마를 잇는 측선인 남부는 아예 방어선이 찢어발겨져 있는 수준이었다고 몇 차례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게다가 르제프도 르제프만 안정적이었지 르제프 서쪽의 큰 도시인 벨리키예 루키와 토로페츠에도 소련군 제4충격군이 밀어붙이고 있던 터라 르제프 자체가 삼면의 포위를 눈앞에 둔 상황이었고, 누가 봐도 중부 집단군은 박살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근데 여기서 스탈린이 딴죽을 제대로 건 겁니다. 그런대로 납득'은' 가는 판단 하나와, 그 납득조차 가지 않는 판단 하나로 중부 집단군을 모스크바 근교에서 밀어내는 게 실패한 것이죠.
우선 르제프 남쪽에서 소련군 제16군을 빼서 브랸스크 전선군 바로 북쪽, 다시 말해서 남쪽에 형성되어 있던 독일군의 엉성한 방어선을 공략하기 위해 재배치했는데, 이건 그런대로 납득이 갑니다. 몇 번이고 지적했습니다만 거의 강철과 같은 방어력을 과시하던 북쪽과는 달리 남쪽의 방어선은 그야말로 거칠게 칼질하는 사나이의 손에 놓인 고깃덩어리 신세였고, 남쪽의 구멍을 크게 뚫어서 소련군을 구멍으로 투입하여 독일군을 난감하게 만든다는 전략은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독일군이 이 지역에서 제한적인 반격을 가하면서 소련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르제프 북단에서 공격을 지휘하던 코네프의 손에서 제1충격군을 빼내서 레닌그라드로 돌렸는데, 레닌그라드 쪽의 상황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적어도 중부 집단군을 격멸한다는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는 최악의 한 수였습니다. 예비 부대를 싹 투입해도 잡을까말까한 상대를 얕보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한 소련군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전면적인 반격을 수행하기에는 물자와 병력과 전술이 부족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죠.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인한 몇 번의 대패에서 소련군은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한 셈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북쪽에서는 르제프가 철통같은 방어 태세를 갖추었고 남쪽에서는 구멍난 전선이 서서히 메워지면서 전선이 안정을 찾기 시작하니 가운데 부분, 즉 뱌지마 쪽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명의 명장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고트하르트 하인리치(Gotthard Heinrici). 전쟁 기간 내내 방어전의 명수로 불리게 되는 인물이죠. 이 하인리치와 제4기갑군을 지휘하던 리하르트 루오프에 의해서 방어선이 사수되면서 소련군의 공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르제프에서는 모델의 제9군이 제29군의 일부를 포위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죠. 2월 중순이 되자 초조해진 스타브카가 주코프를 닦달하기 시작했지만 어디 군사적인 성과가 장군을 밀어붙인다고 나온답니까? 도로상의 주요 결절점 중 하나인 유흐노프(Yukhnov)가 손바닥 뒤집듯이 주인이 바뀌고 스몰렌스크 바로 동쪽에 소련군 제4공수군단이 투입되는 격렬한 전투에서 스탈린은 끝끝내 중부 집단군을 섬멸하고자 노력했지만 그것은 이제는 한낱 꿈이 되어 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의 후방에서 날뛰던 제33군, 제1근위기병군단 및 제4공수군단은 이제 목표가 포위 섬멸망이 만들어질 때까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빠져나가는 것으로 바뀌었고, 결국 이 부대들은 그 지역의 파르티잔에 스며드는 식으로 지도상에서 지워지고 맙니다. 이렇게 3월이 되었고 라스푸티차가 도래하고 나서야 전선이 안정되었던 것이죠.
모스크바 전투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끝난 것 같지 않게 끝났고, 끝난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았죠. 더군다나 양군은 막심한 피해를 봤는데 독일군은 동계의 손실도 손실이었습니다만 쓸데없는 방어선 고수로 흘리지 않아도 될 피를 더 흘렸고, 소련군은 북쪽에서는 모델의 능란한 방어에 제대로 들이받는 모양새가 되어버렸고 이게 꼬이면서 전체적인 큰 그림이 박살나는 모양새가 되어 누구 말마따나 날이 바짝 선 칼이 아닌 둔탁한 몽둥이로 독일군을 때리는 그림이 되어 피해가 컸습니다. 전략적으로는 분명히, 명백히 소련 쪽의 승리였죠. 독일의 모스크바에 가하는 위협을 완전히는 아니지만(스몰렌스크가 독일 손에 있는 한 모스크바는 언제나 위험 상태에 있었다고 봐도 됩니다), 상당 부분, 아니 대부분 지워버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방어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전과가 확대되어야 하는데 전과 쪽에서 좀 시원찮은 결과가 나온 것일 뿐입니다. 이후 아시다시피 독일군은 다시는 모스크바 근교에 발을 못 들이게 되죠.
이 연재에서 아직 하지 못 한 이야기들이 좀더 있습니다. 애초에 모스크바만 이야기할 것이었으면 제목이 작전과 작전 사이가 되지 않았겠죠. 대체 빼돌려진 제1충격군은 뭘 했는가라는 의문도 해소되지 않았고(레닌그라드), 남쪽에서는 뭔 일이 있었길래 잠잠한 것처럼 보였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하리코프, 세바스토폴). 사실 잠잠하지도 않았지만...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작전과 작전 사이에서 모스크바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레닌그라드 반격 작전과 제2차 하리코프 전투는 비중이 좀 작죠.
장기간의 휴재에 사과드리며, 어떻게든 6월이 가기 전에는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