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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5/22 22:41:22
Name 이치죠 호타루
Subject [일반] 작전과 작전 사이 (7) - 경적필패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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輕敵必敗
바둑 격언 중 하나.
적을 얕잡아 보면 반드시 패한다.
적을 상대할 때는 방심하지도 말 것이며 상대로부터 항서를 받아내기 전까지는 긴장을 풀지도 말라는 의미.



이번 연재에서 제가 지겹도록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말이 있는데, 그건 스탈린이 독일군을 가볍게 보아도 너무 가볍게 보았다는 말입니다. 지난번 글로 모스크바 전투가 뭔가 좀 애매하게, 문자 그대로 화장실에서 일 보고 뒤처리 안 한 것마냥 찝찝하게 끝났죠? 그렇게 어느 한쪽의 전술상 확실한 승리라고 보기에는 좀 애매한 - 물론 전략적으로는 소련군의 완승이라 할 만합니다 - 이유 중 하나가 오늘 이야기할 류반(Lyuban, Любань) 공세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벌써 1년 반 전이군요;) 바르바로사 작전을 연재하면서 북부 집단군의 진격을 이야기했었는데, 9월 8일에 실리셀부르크(또는 슐리셀부르크, Shlisselburg)가 함락되어 레닌그라드 포위망이 완성되어버린 이후 소련군은 이 레닌그라드를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 제2의 도시요, 공업도시요, 발트 해의 주도권을 쥘 도시요, 혁명의 발상지요... 명분으로 보나 실리로 보나 레닌그라드는 소련 입장에서는 반드시 '사수해야' 할 도시였거든요. 그러니 그 지독한 강추위에 라도가 호가 꽁꽁 얼자 얼음 위에 협궤철도를 깔아버리는, 지금 생각해도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방법까지 동원해 가면서 - 그도 그럴 것이 가뜩이나 물자 하나하나가 빠듯한데 자칫 기관차와 화물이 호수에 빠져버리기라도 하면 어쩔 것이며(호수에 빠진 양 자체는 적다쳐도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해당 위치까지 모아두게 될 화물을 다시 다른 전선으로 수송해야 한다면? 그것도 가뜩이나 전 전선에서 물자가 달려서 급해 죽겠는 판에?), 독일군이 또 얼음에다 대고 포격을 하면 어떻게 할 것이며(이거 실제로 했던 짓입니다), 그걸로 레닌그라드 포켓에 있는 수십 수백만 사람들의 목숨을 얼마나 구할 수 있겠냐 하는 의문이 없었을 리가 없거든요 - 하여간 레닌그라드를 필사적으로 지키기 위해 없는 머리 쥐어짜내 가면서 독일군을 밀어내려고 무진장 애를 썼습니다.

독일군이라고 이걸 넋놓고 볼 리는 없었고 그래서 태풍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레닌그라드 동쪽의 볼호프(Volkhov)로 소련군을 밀어내면서 어떻게든 카렐리야 일대에서 버티고 있는 핀란드군과 조우하여, 라도가 호를 둘러싸려고 했습니다. 아예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희망 자체를 끊어버릴 심산이었던 거죠. 실제로 이건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11월에 볼호프 인근까지 독일군이 들이닥치는 통에 볼호프 전선군이 도시에서 철수하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문자 그대로 인력을 갈아버리면서 피로 사수한 끝에 간신히 볼호프를 지켜냅니다. 그래서 핀란드군과 독일군의 조우는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죠. 이렇게 되자 북부 집단군 사령관이었던 빌헬름 폰 레프(Wilhelm von Leeb) 원수의 모가지가 날아가고 게오르그 폰 퀴흘러(Georg von Küchler)가 북부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취임합니다(단, 이건 1942년 1월 17일의 일).

북부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영전하기 전 퀴흘러는 제18군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이 제18군 입장이 참 골때리게 된 겁니다. 거 왜 오래 전에 카이사르가 한창 갈리아를 휩쓸 당시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성 내와 성 밖(구원군)을 노린 2중 포위망을 구사한 적이 있었는데, 제18군이 그렇게 해야 할 상황에 놓인 거거든요. 근데, 이게 말이 쉽죠. 알레시아 공방전이 역사에 남은 이유가 바로 그 지독한 난이도를 뚫고 끝끝내 갈리아군을 잡아내서 역사의 흐름을 바꿨기 때문에 역사에 남은 거거든요. 그 때보다 소련군은 훨씬 경험이 늘었고 사기도 여전히 충천했으며 이를 받아내야 하는 독일군은 추위와 보급 불량으로 인해 나날이 전투력을 갉아먹히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소련군의 필승지세로 보입니다. 스탈린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니 그렇게 생각했던 게 확실합니다. 이건 나중에 드러날 작전목표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데이비드 글랜츠를 위시하여 근래의 독소전 전문가들이 입을 모으는 것이 "소련군이 이 시기 독일군을 상대로 어느 한 구역에 올인했으면(아무래도 그 대상은 당연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중부 집단군이었겠죠) 전쟁은 훨씬 더 빨리 끝났다"거든요. 그 올인을 안 하고...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둘 다 치기로 스탈린은 결심한 겁니다. 상황을 대단히 낙관하면서...

아, 둘 다 공격할 수는 있어요. 실제로 앞 글에서도 보셨다시피 이렇게 갈라진 공세에도 불구하고 중부 집단군은 남쪽 일대가 갈가리 찢겨져나가서 모델 덕분에 겨우 전선을 유지해 가며 이긴 것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북쪽에서는 그런 성과를 거둘 만큼의 전략을 세웠냐, 올바로 적을 판단하고 알맞은 작전을 세웠냐... 그랬으면 제가 왜 이 글을 쓰고 있겠습니까?

간만에 연재를 해서 그런가 서두가 엄청 길었네요.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태풍 작전이 한창 벌어지던 11월 8일에 북부 집단군에서의 병진으로 인해 티흐빈(Tikhvin)이 날아가는데, 아까 이야기했던 볼호프 철수가 바로 이것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다가 소련군 제54군이 냅다 병력을 들이받아 가면서 12월 9일에 티흐빈을 탈환하고, 전선을 볼호프 강 쪽으로 옮겨두었습니다. 이렇게요...
645px-1941_Tikhvin.jpg

지도가 흑백이라서 좀 그러니, 티흐빈이라는 동네가 어디 붙은 도시인지 지도로 보겠습니다. 거기서부터 지도 가운데의 강, 즉 라도가 호에서 남쪽으로 빠지는 강까지 소련군이 독일군을 밀어붙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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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좋아요. 밀어붙인 건 좋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적, 즉 독일군의 배치를 보면, 실리셀부르크 회랑이 한 10 km 가량의 폭에서 제227보병사단 달랑 하나, 기껏해야 그 옆의 제223보병사단까지 해서 둘 정도만 버티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이 지역으로는 후방에서부터 볼호프와 티흐빈까지 철도 보급이 가능했고, 따라서 목표를 작게 잡고 레닌그라드의 포위망을 푸는 것을 우선으로 두었으면 라도가 호수 인근의 독일군을 집중 타격하여 회랑을 지우고 폭을 넓혀서 레닌그라드를 구원하는 게 사리에 맞는 일이거든요.

근데 소련군이 어디를 공격했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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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 지점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얕봐도 한참 얕보고 있었다는 증거가 드러나죠. 치기 쉬운 북쪽을 놔두고 치기 어려운 남쪽을 공략했습니다. 뭐 백 보를 양보해서, 그게 소련군의 전략, 그러니까 누가 봐도 공략이 쉬운 곳을 놓고 적이 거기에 방비를 하게끔 유도한 후 뒤통수를 빠악! 날리는 심리전이었다 칩시다. 근데 그런 심리전이 먹혀들어갈 환경이었냐 이겁니다. 이건 이 지역의 지형을 직접 보셔야 해요.

아까 그 라도가 호에서 가운데로 빠지는 강 있었잖습니까. 이게 볼호프 강(Volkhov River)이거든요. 강 길이 자체는 224 km밖에 안 되는데(사실 이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유역 면적이 낙동강의 3.5배에 달하는 꽤 큰 강입니다. 가뜩이나 좁은 하천도 교두보 없이 공략하기 빡센데 강을 사이에 끼고 있다? 공격자로서는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근데 그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거에요. 별다른 교두보도 없이.

뭐 이 일대가 교통의 요지라서 여기저기 도로나 철도가 깔려 있고 그래서 교두보 확보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편이라던가 하면 또 모릅니다. 근데 그것도 아니었거든요. 위 지도에서 보시면 두 방향에서 공격해 오죠. 북쪽에서 일부 병력이 밀고들어오고 남쪽에서도 병력이 밀고들어오고. 근데 골때리는 것은 이 강을 건너는 도로가 딱 하나, 그게 어디냐면 정확히 저 두 공격지점의 가운데 부분에 있었다는 겁니다. 애초에 공격 자체가 상당히 난이도가 있는 공세였다는 말입니다. 반면 북쪽의 실리셀부르크 쪽은 지류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지류의 크기도 작았고 무엇보다 지류 너머 교두보 및 철길이 확보되어 있어서 필요하면 부대의 보충 내지는 수송이 용이한 지점이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청색 작전 연재했을 때, 소련군이 대반격을 개시했을 때 교두보 두 개 내줘서 소련군이 대박쳤다고 했던 거 기억하시려나 모르겠습니다. 그런 교두보가 멀쩡히 있는데 그 쉬운 지점을 놔두고 가장 어려운 지점을 골라서 공격을 한 거죠.

여기에 두 가지 더 공격자의 뒷목을 잡게 만드는 요소가 들어갑니다. 이 일대의 지형은 숲도 숲이지만 강과 지류 및 호수가 워낙 지천에 깔린 관계로 숲보다 더 짜증나는 뻘밭(습지대)이 여기저기 깔려 있었습니다. 아무리 겨울이라 꽝꽝 얼었다고 해도(전에 말씀드렸지만 이 해의 추위는 20세기 백 년 동안 가장 심한 추위였습니다) 뻘은 뻘이죠. 기동력이라는 요소가 살아날 수가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근데 여기에 전차부대를 안 줬어요. 여기에 동원된 부대가 제2충격군이었는데, 전에 청색 작전 연재할 때 간단히 말씀드렸습니다만 충격군은 적에게 들이받아서 적의 발목을 붙잡고 틈을 만들어 전선을 열어제끼는 부대지 그 자체가 기동군이 아닙니다. 근데 그 기동군의 역할을 해야 할 전차부대를 안 주고 단순 충격군만 준 거에요. 뭐 기동부대 역할을 할 만한 부대가 있기는 했습니다. 바로 기병군단(제13기병군단)이었죠. 하지만 전차부대와 기병부대는 애초에 그 파괴력과 기동력부터가 다르지 않습니까. 하긴 이 일대가 앞서 말한 습지라 전차부대가 동원되었다 한들 큰 성과가 났을지는 좀 의문이긴 한 지형인데, 그렇다면 애초에 작전 설계부터 글러먹었다는 소리밖에 안 되죠.

이 상황에서 스타브카가 점령하라고 지시한 목표 지점이 어딘지 아십니까? 위의 지도에서 좌측에 1:10이라고 써진 부분 밑에, 잘린 이름 남동쪽으로 해서 Волосово(Volosovo)라고 되어 있는 부분 있죠? 거기까지 진군하라고 했습니다. 거의 서쪽으로 150 km를 뚫고 들어가서 레닌그라드의 포위망을 깨라. 이러니 경적필패라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스타브카(정확히는 스탈린)의 되도 않는 낙관을 까는 것은 이쯤하고, 일의 경과를 보시죠. 당연히 이런 환경에서 공세가 제대로 진행될 턱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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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지금 성과가 나고 있는 게 신기한 건데, 남쪽이 불룩 튀어나왔죠? 1월 13일에 소련군 제2충격군이 독일군 제126보병사단과 제215보병사단의 틈새를 찌르는 데 성공해서 교두보를 확보합니다. 북쪽에서도 잠깐 저 틈새를 만들어 뚫어버리는 데 성공하긴 했는데 독일군의 반격에 막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마치 쿠르스크 전투에서 모델이 북쪽에서 박살났듯이). 아, 그리고 보시다시피 공격의 방향이 한 도시로 집중되어 있는데요, 이 공략목표도시가 류반(Lyuban)입니다. 그래서 이 전투가 류반 공방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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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케도 뚫고 들어온 지점으로 제13기병군단과 다수 보병사단들이 틈새로 줄줄이 밀고들어오면서 강 북쪽의 추도보(Chudovo)와 남쪽의 일멘 호(Lake Ilmen)에 있는 중요 도시인 벨리키 노브고로드(Veliky Novgorod)의 철길 연결을 끊어버리는 데 성공합니다. 독일군으로서는 북쪽의 제18군과 남쪽의 제16군 사이의 연락이 끊긴 격이라 비상이 걸렸죠. 그만큼 방어하는 독일군 역시 생각보다 별 거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근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이렇게 밀고 들어갔는데도 이 당시 제2충격군과 레닌그라드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100 km가 넘었고, 뚫고 들어간 거리는 40 km 가량이었지만 그 폭이 고작 2.5 km 가량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소련군도 당연히 이 폭을 넓혀서 전선에 구멍을 뚫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습니다만 독일군의 고슴도치진 - 제가 참고하고 있는 책의 원문(영미권)에서는 독일어 단어인 igel로 표현하더군요 - 을 뚫지 못했습니다. 곧이어 이건 재앙이 되고 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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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이 되자 소련군은 엄청나게 깊숙하게 들어왔고 독일군의 류반도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 지역으로 각종 병력과 항공지원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죠(북부 집단군 대 레닌그라드 및 볼호프 전선군의 전투 구역에서 한정된 말이긴 합니다). 근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불리해지는 건 방어해야 하는 독일군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해야 하는 소련군이었습니다. 앞서 제가 한참 동안 이 지역의 지형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했었죠? 길이 없다는 건, 다시 말해서 보급로가 없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제대로 된 도로 하나 없는 곳에서 무슨 보급로를 찾는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탄약은 떨어져 가고, 줄어든 인원은 복구가 안 되고, 하늘에서는 적의 공중 근접항공지원부대(CAS, 소위 말하는 슈투카)가 마실 나오듯이 지원 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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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좀 지도가 거시기한데... 겉으로 보기에는 소련군이 공격의 피치를 최대한으로 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북쪽에서도 툭 튀어나온 벌지(Bulge, 아르덴 대공세 하면 꼭 튀어나오는 그 벌지 생각하시면 됩니다. 돌출부죠)가 독일군을 섬멸하고 류반을 접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근데 사실 이 시기에 벌어진 북쪽의 공세는, 제2충격군을 지원해서 류반을 접수하기 위한 공세가 아니라, 제2충격군을 구원하기 위한 공세였습니다. 제2충격군의 그 좁아터진 허리가 독일군 제58보병사단과 SS사단 폴리체이(Polizei, 경찰)에 의해서 끊어져버린 겁니다.

경찰사단이라는 이름에서 뭔가 느껴지시는 게 있나 모르겠는데 그게 정답입니다. 얘들은 아무리 SS, 즉 무장 친위대라지만 진짜 경찰들이었어요. 1942년에 정식으로 SS군단(Waffen-SS)에 이관되기 전까지는(이게 이 전투가 한창 진행되던 2월 24일의 일입니다) 경찰부대로 근무했기 때문에 당연히 전투력 등에서 차이가 날래야 날 수밖에 없는 부대들이었다는 겁니다. 이런 부대가 방어선을 지켜야 할 만큼 독일군의 상황도 어지간히 막장이었다는 것이고, 더불어 이런 부대를 배치할 만큼 독일군도 설마 남쪽에서 소련군이 쳐들어오겠어 하고 생각했다는 거죠.

하여간 그 허리가 끊어지면서 무려 13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포위망에 갇혔습니다. 거 저번에 제가 뱌지마 공략할 때였나, 아니면 하리코프 엎어치기 한판 이야기할 때(1943년) 이야기했었나... 아마 하리코프 때였던 것 같은데, 독일군의 포위망이 줄줄 새고 있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거든요. 이 때라고 별다를 건 없었습니다. 매일 1천 명 가량의 소련군 병사들이 포위망 탈출에 성공했다고 해요. 최종적으로 10만 명이 포위망에서 탈출했으니 꽤 병력을 온존한 셈이지만 지휘관을 포함한 3만 3천 명의 병력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리고 전선은 다시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원상태로 되돌아가버리고 말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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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독일군에게 잡혀들어간 제2충격군의 지휘관이 바로 이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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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블라소프. 모스크바 전투에서 제20군을 이끌고 모스크바 바로 북쪽의 솔네츠노고르스크(solnechnogorsk)를 탈환하는 대전과를 올리면서 프라우다(Pravda) 신문에 "모스크바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1월 24일에는 적기훈장까지 수여받은, 그야말로 소련군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 영웅이 대체 왜? 독일군에게 항복했는가?

당시 볼호프 전선군의 지휘를 맡았던 키릴 메레츠코프(K. Meretskov)를 위시한 사람들은 블라소프가 스탈린에게 견책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항복했다고 합니다. 일리 있어요. 당장 메레츠코프부터가 중부 전선군이 박살나고 그 지휘관인 파블로프가 총살당하자 파블로프의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끝까지 무죄를 주장한 끝에 간신히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으로 복귀한 인물이었던 터라, 스탈린의 견책이 의미하는 것이 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쉽게 말해 고문은 기본 옵션이고 재수없으면 문자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이겁니다. 두려움을 느낄 만하죠. 그만큼 대숙청이라는 게 얼마나 소련군에게 악영향을 미쳤는지 여기서 또 한 번 이야기를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거구요.

다른 주장으로는 블라소프의 아버지가 부농이었던데다가 대숙청 기간 동안 아버지가 탄압받아서 그렇다고 이야기해요. 이것도 일리있습니다. 2016년에 러시아 역사학자인 키릴 알렉산드로프(Kirill Alexandrov)가 블라소프의 자유 러시아군에 가담한 180명의 고위 장교들을 조사해본 결과 대부분이 대숙청 때 집안이 박살난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었거든요. 여담으로 이 역사학자, 이 주장으로 인해 FSB - 러시아 연방 보안국 - 에 "증오를 유발한다"고 러시아 국가주의자들에게 고발당한 경험이 있다는군요(...) 하여튼 진실은 본인만이 알겠죠. 이미 그는 1946년에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불명예라 할 수 있는 교수형을 당해서 목이 매달린 상태로 입이 닫혔지만... 지금도 이미지로 검색하면 교수대에 목이 매달린 안드레이 블라소프의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그냥 구글 이미지에 Andrey Vlassov 하고 치면 바로 나와요). 이 사진은 꽤나 중요한 사진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바로 소련 체제에서 마지막으로 교수형에 매달린 사람들이었거든요(그 이후는 총살형). 그래도 사람이 죽은 것이라 혐짤이니 따로 링크는 안 걸겠습니다.

하여튼 소련군은 이 류반 공세로 병력을 잃고, 뛰어난 지휘관도 잃고(물론 반역질을 했다는 점에서 - 항복했다고 반역이라는 게 아니라 자유 러시아군을 이끌고 아군에다 총질을 한 진짜 반역질을 했습니다 - 정상 참작의 여지 따위는 없는, 정치적으로는 멍청한 지휘관입니다), 레닌그라드 포위망도 못 뚫고, 그렇게 적을 얕본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 했습니다.

연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데미얀스크 포켓이 아직 남아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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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walker
18/05/23 00:28
수정 아이콘
블라소프라는 인물에 대해 방금 찾아봤는데... 참 뭐라고 말하기가 그렇네요.
이치죠 호타루
18/05/23 00:32
수정 아이콘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입니다. 하는 짓이 결과론적으로 이완용이 되긴 했는데... 무조건 좋다/나쁘다 콕 집어서 이야기할 수가 없는 인물이죠(결과가 나빴고 그 과정이 매우 나빠서 보통 굳이 따지자면 나쁜 인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아마 사극의 주인공으로 나와도 무리가 없는 인물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 그렇다고 무조건 나쁘게만 보기도 어려운 것이, 돌아가면 죽음이고 항복하면 조금이나마 살 기회가 있다면, 보통의 인간이라면 항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까요... 그래서 블라소프는 논쟁적 인물이죠. 러시아에서야 당연히 조국을 배신한, 살을 씹어먹어도 모자란 인물이겠습니다만...
미키맨틀
18/05/23 16:48
수정 아이콘
히틀러의 현지 무조건 사수 명령도 XX지만 스탈린의 근거없는 낙관도 앞에 못지 않는 XX네요.
그리고 전쟁 초반 소련공군의 모습은 그저 눈물만....
소련 그리고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대공무기에 전력을 쏟는 것이 독소전의 경험때문인가 봅니다.
대공포담당부대로만 사단을 만드는 군대가 있다니
쿠르스크 전투 소련군 편제보기 전까진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이치죠 호타루
18/05/23 19:02
수정 아이콘
이건 제 생각인데 스탈린이 현실만 제대로 봤어도 전쟁으로 죽은 2천만의 사망자 중 절반은 살았을 겁니다.
18/05/25 08:54
수정 아이콘
글 감사합니다. 종종 느끼는 거지만 포위된 13만...살아나온 10만...포로로 잡혀간 3만, 참 뭐랄까... 독소전쟁을 보면 숫자감각이 무감각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엄청난 규모의 처절한 전투가 있었던 거겠지만..
이치죠 호타루
18/05/27 00:59
수정 아이콘
타라와 전투 등으로 태평양에서 수천 명이 죽어서 해군참모총장이 유족들에게 사과편지를 쓴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로서는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죠. 자릿수부터가 두 자리나 다르니... 바르바로사 때 키예프에서 66만 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저건 진짜 어느 정도일지 전혀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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