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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10/25 13:34:41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단상] 근대 동아시아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수정됨)
우리가 익숙한 근대 이전 동아시아의 역사는 쇄국의 역사입니다.
조선과 기타 조공국은 중화왕조의 천하질서 안에 묶여있었고, 
그 중화왕조마저 자기만의 세계에 함몰된 [닫힌세계]였다고. 

하지만 실상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했다고 합니다. 

최근 역사학계는 몽골제국으로부터 시작되는 유라시아 통합의 역사를 조망하고 있으며 
러시아, 몽골, 위구르, 명, 여진, 조선 모두 [대몽골 울루스]의 후계국이었다고 말합니다. 
로마제국 멸망 후 프랑크왕국, 반달왕국, 고트왕국이 탄생한 것처럼 말이죠. 
유라시아 세계를 연결시켰던 대몽골울루스가 멸망하면서, 중세유럽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작은 소우주(little universe)가 탄생하고, 인적 교류가 뜸해졌습니다. 

로마시대 당시, 시리아인 장군이 브리타니아에 부임하는 일도 있었으나 로마멸망 이후 중동과 서유럽의 인적 교류는 거의 끊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몽골울루스 시대 당시 아랍인이 고려에까지 와서 교류하고, 또 페르시아인들이 중국의 수도에서 관직을 지냈습니다만, 
몽골울루스 멸망 이후 조선은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되었고, 명나라는 다시 몽골의 영향을 격퇴하고자 했습니다. 

명의 경우, 몽골과의 투쟁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했던 국수주의적 나라였으나
처음 수도를 남경에 둔 영향 때문인지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와도 적극적으로 교류했던 나라였습니다.
동양의 콜럼버스라는 수식어가 붙는 정화의 함대는 마다가스카르까지 갔었다고 합니다.
동남아 전역에 퍼진 화교의 역사는 이때부터 활발했다고 전해집니다.  
편견과는 달리 의외로 외국인에 대해서도 나름 개방된 측면이 있어 이탈리아인 신부 [마테오 리치]를 등용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결국 명은 신흥세력 만주족에게 멸망하고마는데,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버마로 망명한 명의 마지막 황족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유럽의 교황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물론 그의 요청은 완전히 무시당했고, 실현 가능성도 전혀 없었습니다. 

신흥세력인 만주족은 아주 진취적으로 적극적인 팽창을 도모했던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원을 정복하기 전, 징기스칸의 옥새를 확보하여 만주족의 한, 몽골울루스의 칸임을 선언했고
궁극적으로 계란의 노른자였던 중원을 전격적으로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명의 전통적인 국경을 넘어 준가르(현 신장 위구르)를 정복하고, 티벳 또한 정복합니다. 
만주족의 한은, 몽골의 칸이며, 중화의 천자이며 동시에 티벳불교의 보호자임을 자처하여 
대몽골 울루스의 [세계국가]를 재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샤를마뉴가 프랑크족의 왕(Rex Francorum)이며 동시에 로마의 황제(Imperator Romanum)이고 교황의 보호자(Defensor Fidei)를 자처한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대청제국의 중요 공식문서는 만주어, 몽골어, 한문, 티벳어를 모두 병기했었습니다.
 
대청제국은 본인들이 대몽골울루스의 후계국임을 확신하였고, 이러한 자기인식 하에 외부세계와 교류하였습니다. 
의외로 대청제국은 그닥 쇄국적인 국가가 아니었고, 서양의 상인들과 활발히 교류했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와도 일찍이 접촉하여 국경을 안정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의 각자의 세력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한 후 러시아가 오스만제국 공략에 힘쓰는 동안, 청은 신장 정복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청나라의 관할권 안에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들이 오래전부터 정착하여 교류했었고
영국인들도 인도인들을 중개로 하여 청나라와 이미 활발히 교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아시아 무대를 본격적으로 그리고 전격적으로 세계와 연결시킨 사건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아편전쟁]이었죠. 

아편무역의 역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정말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게임체인져]였기 때문입니다. 
Timothy Brook이라는 역사학자는 [Opium Regimes]라는 저서를 통해 아편무역이 근대세계체제를 탄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주장합니다. 아편무역은 대영제국의 연간 수입의 1/4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하며, 홍콩에 주재한 영국 총독은 정부 공무원이 아닌 광둥의 중국인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아편무역에 종사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의 시장이 열리자, 일확천금을 노린 서양의 상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동아시아에 진출합니다. 
듣도보도 못한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시장을 열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요즘으로 치면 비트코인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처럼
영국, 프랑스 등의 상인들이 너도나도 진출했습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고, 초기 미국 산업의 발달은 아편으로 벌어들인 자금을 종잣돈으로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FDR)의 외증조부(Warren Delano)는 중국에서 무역을 하던 사람이었고, 그 돈으로 사업을 확장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의 사업 파트너는 중국의 대부호 [오병감]이었습니다. 오병감의 또 다른 중요 고객은 Forbes 3 형제로, 미국 자본주의를 견인한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 역시 아편밀무역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일본을 개항시킨 이유도 당연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로써 동아시아의 전지역은 서양과 드디어 완전히 연결된 세계체제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 때부터 동아시아는 다시 서양과, 그리고 서로와 완전히 연결되었습니다. 서양인들이 중국에 대규모로 들어와 상하이나 홍콩에서 생활하였고, 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인 수 만명이 프랑스 전선에 파병되어 그들의 군수공장을 가동시켰고, 조선인 수천명이 일본에 유학을 갔으며, 이보다 더 많은 수만명은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노동자로 떠났습니다. 국경은 아주 유동적이었고, 도쿄에서 베트남인, 중국에서 미국인, 조선에서 일본인을 찾는 건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한편 조선인들은 만주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일부는 미국에서도 활약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하여 패권야욕을 드러냈고
중국인들은 러시아, 미국, 하와이, 프랑스 등 세계 전역에서 활동했습니다.
중국의 국부 손문은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고, 
중국 개혁개방의 아버지 등소평은 프랑스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동아시아는 진정 세계와 그리고 서로와 긴밀히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동아시아의 모습을 보면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디지털 만리장성으로 쇄국주의를 표방하는 중국, 자국우선주의와 신토사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일본
대원군의 쇄국을 방불케하는 지구상 마지막 은둔 국가 북조선, 그리고 사실상 섬나라로서 외부와의 교류가 물리적으로 제한된 대한민국
국경은 아주 견고하고, 인적 교류도 상대적으로 보면 오히려 19세기 말보다 못하며, 서로가 서로를 배척합니다. 

유럽이 비록 [국경과 영토를 근본으로 하는 근대국가]를 탄생시켰다고는 하나,
유럽은 항상 언제나 자유분방한 국경을 갖추고 있었고, 19세기 민족주의의 시대에서조차
러시아인들이 파리나 비엔나에서 활약하고, 영국인들이 이탈리아에 가며, 
또는 이탈리아 혁명가들인 런던에서 활약했었습니다. 
미술인들과 음악인 등은 유럽전역을 누비며 전시를 하고 공연을 했습니다. 
유럽은 언제나 항상 서로 연결되어있었고 서로를 지적으로, 문화적으로 자극시켰습니다. 

현대교통수단과 인터넷으로 어느때보다도 교류가 용이한 21세기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등지고 살아가는 동아시아를 보면 대단히 아쉽고 부러운 모습입니다.  

[추가]

동아시아 간의 교류가 끊긴 가장 주요한 이유는 역시 냉전인 거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과 일본은 서구세계에 편입되고 동남아를 포함한 대륙아시아는 공산권에 편입되어 분리되었습니다.
1990년대부터 드디어 서로 다시 만나고 접촉하기 시작했는데, 서로 관광객으로 만나는 수준을 넘어 
서로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피드백과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줄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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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19/10/25 13:43
수정 아이콘
영국은 지들이 적자 메꾸려고 아편전쟁을 일으킨 주제에, 저런식으로 이야기 하는게 웃기네요.
윤지호
19/10/25 14:01
수정 아이콘
내 말 알아듣겠나 김두한? 마약을 팔아서까지 해야 할 급한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닭장군
19/10/25 14:04
수정 아이콘
몰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눈물)
됍늅이
19/10/25 16:36
수정 아이콘
정보: 젊은 김두한은 와싱톤이 팔자고 한 아편을 태워버린 적이 있다.
여름별
19/10/25 13:55
수정 아이콘
몽골이 고려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겠지만 조선이 프랑크왕국처럼 파생국이 될 정도였을까요? 조선은 기존 정치세력이 개혁가들에 의해 완전히 뒤집어진 형태다 보니..
aurelius
19/10/25 15:30
수정 아이콘
(수정됨) 몽골세계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었던 고려는 도리어 그러한 연유로 두 지역의 왕에 봉해질 수 있었죠. 예컨대 충선왕은 고려의 왕이자 동시에 심양의 왕이었습니다. 심양왕에 봉해지기 전에는 대원제국의 승상직을 제안 받았습니다. 유럽 중세 시대 당시 여러 왕위를 겸직한 모습과 비슷합니다. 고려는 몽골세계의 일부였고, 그 안에서 성장했으나 몽골이 무너지는 틈을 타서 다시 재탄생했습니다.
happyend
19/10/26 05:06
수정 아이콘
충선왕은 쿠빌라이칸의 친손자니까 가능했던일이죠.정치투쟁에 참여할권리를 가졌고 자신이 지지한 무종이 황제가 되었으니.
그러나 다른 왕들은 황실의 끝자락 공주들의 부마여서 끝발도 없었죠
충선왕이 북경으로 데려가 키운 고려의 지식인들은 반원세력이 됩니다
화씨100도
19/10/25 14:07
수정 아이콘
지극히 서양적인 관점이네요
LOLULOLU
19/10/25 14:18
수정 아이콘
(수정됨) 인적 교류가 19세기 보다 못하다니요;;; 지금의 관점에서 근대 동아시아를 바라봐서 그렇지 그 어느때보다 동아시아 권역 내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합니다. 수많은 유학생, 무역인, 예술인, 정치인, 관광객들이 동아시아 각국 국경을 넘나들고 있는데 19세기보다 동아시아가 폐쇄적으로 바뀌었다니요;; 게다가 동아시아는 지금 그 어느때보다 전 세계에 잘 알려져 있고 잘 연결되어 있어요. 그리고 유럽의 상황을 그대로 동아시아에 적용시키면 많은 오류가 발생합니다. 애초에 국경이라는 것이 근현대에 접어들어서 형성된 유럽에서는 말씀하신 것 처럼 인적 교류가 활발하다고 평가를 딱히 하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게다가, 말씀하신 인적 교류라는 것은 엘리트 계층에 한정된 것이며, 유럽도 대규모의 인적 교류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또한 유럽도 냉전시대 동안 이동이 엄청나게 제한되어 있었고, 비교적 최근에 접어들어서야 EU의 탄생으로 권역 내 이동이 자유로워진 것 뿐입니다. 게다가 그 EU도 가맹국 끼리만 개방적이지 그 외의 국가에게는 꽤 폐쇄적입니다.
웅진프리
19/10/25 14:47
수정 아이콘
동의합니다 지금이 인적교류가 가장 활발한 시기라고 봐도 무방한데 인적교류가 적다는 설명은 동의하기 어렵네요
aurelius
19/10/25 15:10
수정 아이콘
(수정됨) 물론 양적으로 19세기와 비할 수 없을만큼 많은 교류가 있으나 그 시대의 기준으로 봤을 때 상대적으로 오늘날이 못하다는 이유는 과거 19세기 말 20 세기 초의 밀도에 비하면...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과거 한중일 엘리트 간의 교류가는 아주 농도가 짙었거든요. 손문이 일본에서 유학 중 동지들을 규합한다거나, 일본인이 신해혁명에 자원해서 의용병으로 나선다거나 또는 조선의 여운형은 일본에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했는데, 그의 연설에 감복한 일본관료도 있었지요. 아 물론 BTS는 과거 19세기 유럽 마네, 모네, 러시아 발레단 부럽지 않은 영향력을 자랑합니다.
LOLULOLU
19/10/25 15:40
수정 아이콘
(수정됨) 본문에는 양적인 부분을 강조하셨는데 댓글에서는 질적인 측면에서 과거가 더 나았다니 이상하네요... 무튼 그렇다 쳐도 질적이라는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정치적인 초국적 활동은 질적으로 우수한 것이고 일반 시민들이 타국에서 경제, 문화,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질적으로 열등한 초국적 활동인건 아니지요. 게다가 지금은 타국의 초 엘리트 정치 지도자에 감복하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국적을 바꿔서 타국에 귀화하거나 가족이 되어서 정착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과거의 인적 교류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몽골과 청으로 생각하시는 가상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상정하신 다음에 노스탤지어의 시각으로 동아시아 근대사를 바라보는 경우에 발생하는 오류입니다. 영화나 일부 역사책에서 근대를 대단히 매력적이고 초국경적인 유토피아로 묘사하는 경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데, 실상은 오늘날이 비교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양적, 질적으로 더 많은 국가간, 지역간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醉翁之意不在酒
19/10/25 15:40
수정 아이콘
그걸 다 감안해도 현재쪽이 압승일거 같은데요.
19/10/25 15:54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 내용은 앉아서 컴퓨터, 폰으로 무수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당장 sns로 우리는 홍콩에 지지를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교류는 양이나 질이나 압도적으로 지금이 활발합니다.
antidote
19/10/26 21:20
수정 아이콘
저는 20세기 초중반의 교류가 훨씬 더 대단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어차피 SNS라는게 총칼의 앞에서 별 의미가 없는 것이기도 하고... 기술의 발달에 따라 공기처럼 만연한 것에 싸구려 감정을 푸는것에 지나지 않죠. 오히려 당시에 해외로 한번 나가는 거 자체가 설사 기득권층이라고 하더라도 후진국 국민에게는 상당한 돈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고요.
차라리 당시 국경을 건너가 일본과 싸우기 위해 중국군벌에 투신했던 조선인이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국적을 버리고 러시아의 적군에 가담한 서유럽인, 남미 타국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국경을 넘어 전쟁을 벌였던 체 게바라로 대변되는 당대의 인물들이 오히려 지금보다 더 국제적으로 놀았다고 봅니다.
근래로 따지면 국경을 넘어 ISIS에 투신한 한국인은 단 두 명이었는데요 뭐. 절대 그때에 비해 지금이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은 풍족한걸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룰루vide
19/10/25 14:28
수정 아이콘
아편보다는 차(tea)를 조명하는게 더 옳은 방향이겠죠
애초에 아편전쟁 일어난 이유자체가 차로 인한 무역적자를 감당하지 못해서 일어난거였으니깐요
지금으로 따지자면 커피 그 이상의 물건이 차였죠..
서양의 도자기 산업자체가 차마시는 문화때문에 융성화된거라고 봐도될정도죠...
윤지호
19/10/25 14:32
수정 아이콘
차와 비단을 아편으로 되갚은..
그나저나 냉병기의 종언을 고한 화약은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는데 결국 중국이 서양의 군사력에 무릎을 꿇게된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룰루vide
19/10/25 14:36
수정 아이콘
인도도 선빵때린 영국이 청나라에게 선빵못때린 이유가 처음에 군사력이 청나라가 압도적이여서죠...
아편으로 초토화시켜서 만만해지니 전쟁터뜨린거죠..
윤지호
19/10/25 14:37
수정 아이콘
하긴 그렇겠네요..
antidote
19/10/26 21:10
수정 아이콘
아편으로 초토화되고 망한게 아니라 30년전쟁 쯤을 기점으로 서양의 군사기술과 동양의 군사기술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게 됩니다. 갈수록 차이가 벌어지고요. 아편이 없었어도 절대로 영국군을 청군이 못이겼어요. 단적으로 산해관을 끼고 청군을 막은 명나라의 대포, 청군이 남한산성을 깨트린 대포가 홍이포,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대포입니다. 이미 명나라 말부터 서양쪽의 군사기술이 월등했던 겁니다.
전열보병의 시대를 사람들이 우습게 아는데 전열보병 자체가 유럽에서 화약병기 가지고 이리저리 싸워보니 당대 기술수준에서 가장 효율적인 전술이라 유럽의 열강들이 다 그걸 쓴겁니다. 자체 개발은 원시적 총통, 대포에 머물렀고 간간히 필요한 수준을 수입해서 쓰던 조선이나 청, 일본 같은 나라가 수십배의 병력으로 깨트리려고 하지 않는한은 회전에서는 절대 못이깁니다.
청나라는 머릿수만 많았을 뿐 군사기술이 심각하게 딸렸고(에도 막부나 조선이라고 해도 나을건 없습니다.) 요새에서 방어전을 하는게 아닌 이상 영국군이 회전에서 이기는건 당연했어요.
룰루vide
19/10/26 22:26
수정 아이콘
그런 군사기술이 차이나는데 선빵안때리고 아편팔은 이유죠
아편은 영국에서도 중독성을 이미 알고있었고 청나라에 수출할때도 아편은 절대로 영국내부로 들어오지못하게 할정도로 심각하게 취급하는 물품이었죠
유념유상
19/10/25 16:09
수정 아이콘
그보다 면직물의 문제가 더 컸죠.
인도에서 기계로 만들어도 중국산이 더 저렴하고 더 품질이 좋은아서 중국에 수출할수가 없었죠.
HA클러스터
19/10/25 14:47
수정 아이콘
서양애들은 자기들을 제대로 두들겨 팬 유일한 동양권 국가라 그런지 몽골을 무슨 로마제국처럼 동양권의 정신적 뿌리처럼 높게 평가하는 모양인데, 일시적인 군사적 측면에서라면 모를까 정치, 문화면에서 몽골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 문화적으로 끼친 영향은 그닥 높게 생각되지가 않네요.
aurelius
19/10/25 15:17
수정 아이콘
정신적인 측면이 아닌 지정학적 측면입니다. 물론 몽골울루스는 로마의 ROMANITAS 같은 것을 창출한 바는 없습니다.
르블랑장인
19/10/25 14:49
수정 아이콘
아쉽고 부럽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오늘날의 동아시아가 '왜' 이렇게 되었나고 따지자 보면 이게 다 서양과 일본의 원죄라.....
이거는 '왜' 이렇게 되었나라는 근현대사를 고려하지 않은 서양과 일본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웅진프리
19/10/25 15:05
수정 아이콘
몇몇 부분을 보고 근대 동아시아의 역사를 폐쇄적인 역사로 보는것은 문제가 있지만 반대로 몇몇 부분을 보고 근대 동아시아의 역사가 개방적인 역사다
특히 현대에 비해 개방적인 역사라고 보는것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이 글에서 보면 대몽골 울루스의 문화교류를 지나치게 과도하게 평가하고 있는데
대몽골 울루스에서 이전에 비해 문화교류가 활발한편은 맞지만 그 문화교류는 소수 상인 및 인물에 한정되어 있었고 실제 각 지방은 여전히 독자적인 문화권을 유지하고 있었죠 대몽골 울루스 이전에도 실크로드를 통해 문화교류는 꾸준히 지속중이였습니다
따라서 서양의 문화적인 부분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로마와 몽골을 비교하는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청나라의 문화교류또한 몇몇부분은 개방적이였지만해금 정책이나 공행 무역정책등을 보면 폐쇄적인 면이 있죠
이를 봤을때 현대의 문화교류보다 과거가 더 활발했었다라고 말하기는 좀 힘들것같네요
플레스트린
19/10/25 15:07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저는 띠용? 하는 느낌 밖에 안드는 주장입니다. 로마시대에야 갈리아부터 시리아까지 로마의 속주고 팍스 로마나라는 공동체 의식이라도 있었지요. 로마 멸망 이후에는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기독교라는 구심점이 있었구요.

근데 러시아와 고려가 같은 몽골 울루스의 파생이라는건 좀 과장된 이야기 아닙니까. 교류는 커녕 서로를 인식도 못했을텐데요. 몽골 울루스로서 구성원간의 소속감이라던가 정신적 영향이라던가 이런게 아무 실체도 없잖아요. 몽골에게 똑같이 두들겨 맞은 공통점만 있을 뿐. 쿠릴타이 하던 칸국들이나 티무르, 청이야 유목국의 근본으로서 칸의 권위가 탐나니 후계를 자처했겠지만 다른 나라를 왜 도매금으로 묶는 걸까요. 충선왕은 심왕이라는 타이틀도 받고 지배층의 일원으로 대우를 잘 받았으니 몽골 세계관에 끼워줄 수도 있겠으나... 그건 고려 왕실에 해당되는 세계관이지 국가 전체에 해당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와 몽골! 와 실크로드 세계제국! 식의 오리엔탈리즘 딜레탕트 몽뽕이란 생각밖에 안들어요. 이런 식이면 나치나 일본제국에 얻어맞고 판도로 엮였다가 독립한 나라들도 후예겠지요.

해금령 내린 명에 비해 인적교류나 무역이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그걸 몽골 울루스 우주 같은걸로 포장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몽골 시대 정도의 문화, 기술 전파는 당송시대에도 있지 않았나 싶고요. 고구려 사신은 페르시아도 가고, 헬레니즘 양식은 신라로 전해지고... 거기에 탈라스 전투라던가 삼국시대에도 위나라 왕족이 건너가서 마미코니안 귀족이 되었다는 썰을 본 것 같군요.

최소한 동아시아의 폐쇄성에 대한 답을 몽골 OX여부라고 퉁치는건 너무 포카칩스러운 과대포장이라고 느낍니다. 마르코 폴로 같은 사람도 어느 시대에나 있었을 사람이고 몽골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봐요. 원래 상인은 돈이 되면 지옥이라도 가고, 그 사람들은 그냥 평소에 하던 일을 몽골 제국 시절에도 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몽골이 양치고 있었을 고려 현종 때도 아라비아 상인이 벽란도에 찾아왔지요. 이게 고려가 베네치아 마냥 무역왕국이라서, 조선과 근본적 시스템 차이가 있어서 그랬나?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이정도의 교류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는 게 더 맞지 않나 싶어요. 해금령이 있었던 명 시절이 흐름에서 좀 예외인거 같구요.
출입문옆사원
19/10/25 15:23
수정 아이콘
저는 이런식의 해석도 재밌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醉翁之意不在酒
19/10/25 15:41
수정 아이콘
그냥 서방의 로마에 억지로 몽골을 끼워맞춘다는 느낌이 드네요.
Le_Monde
19/10/25 15:47
수정 아이콘
너무 큰 주제를 너무 빨리 소화하시려 하다보니 탈이 나신 글이네요..
쓰신 댓글 중 하나를 꼽자면 '상대적으로 오늘날이 못하다는 이유는 과거 19세기 말 20 세기 초의 밀도에 비하면...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과거 한중일 엘리트 간의 교류가는 아주 농도가 짙었거든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이시라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많은 증거들을 제시하는게 필요합니다.

지적 교류, 문화 교류는 그 어느 때보다 한중일 연계가 활발합니다.
그냥 학계 콜라보 논문, 워크샵만 해도 동아시아끼리 뭉치는게 엄청 많습니다.
대중문화와 예술계에서도 연구와 협연, 큐레이팅에 있어서 긴밀하게 연계하고 있구요.

한중일 뿐이겠습니까 전 세계가 융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19/10/25 16:03
수정 아이콘
로마가 본격적으로 제국으로 성장하고 보다 선진문물인 오리엔트나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여 융합, 유럽 전체에 문명에 씨앗을 뿌린 것에 비해서 몽골은 기존의 중화,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등의 문명을 파괴하는 선에서 너무 일찍 역사가 끝나버렸죠. 솔직히 억지로 끼워맞춘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aurelius
19/10/25 16:14
수정 아이콘
몽골제국의 세계사적 영향은 김호동 교수의 견해를 참고하였습니다.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22/2019102200149.html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00565.html
그리고 김호동 교수의 저서 중에 제목이 아예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이란 책이 있습니다.
19/10/2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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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세요.. 제가보기에 이런시각은 '기존의 시각을 좀더 벗어나주겠어' 라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간.. 약간 억지성이 짙은 주장같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서구의 중심이었던 유럽이랑 동북아시아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죠

이걸 기본적으로 무시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미나
19/10/2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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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 추이는 몽골 이전에도 연계된 세계체제 자체가 존속하고 있었고(역사적인 관심에서 소외되어 있는 동남아시아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죠)
몽골의 급격한 팽창이 이를 촉진시키긴 했지만 정작 거기서 온 과부하가 오히려 쇠퇴와 단절을 이끌어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죠.

그리고 항상 생각하는 건데, 제발 현실 사례 좀 끌고 와서 역사랑 비교하지 마세요.
전체를 조망하고 싶다는 유혹이 강렬하다는 건 알지만, 이거 어설프게 하면 엄청 촌스러워요. 그 버릇만 고치셔도 글의 퀄이 한결 높아질텐데 아쉽네요.
8T truck
19/10/26 21:28
수정 아이콘
모든 글이 완벽할 필요는 없죠. 생각거리를 던져준 것만으로도 참 좋은 글이라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이 글과 댓글 모두 흥미롭고 유익하네요.
감사합니다.
antidote
19/10/27 08:3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몽골제국이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 의외로 사상적으로는 반란 일으키는 것만 아니면 원나라에서 상당히 관용적이었던 편이었죠. 유교식 통치의 정점이 들어서던 명, 조선, 청 등에 비해서 오히려 유연한 면이 없지 않았고요. 물론 이건 몽골의 후진성에서 기인한 것도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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