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11/29 00:37:52
Name 꿀행성
Subject [일반] 감기 옮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소개를 받게 됐다.
사촌동생이 내게 사진을 보냈고,
나는 참하고 착하게 보인다고 했다.
사촌동생은 나에게 '예뻐서 착해보이는게 아니냐'며 놀렸고,
나는 딱히 부정하지 못했다.

본인이 키가 조금 있기 때문에,
이상형은 키가 컸으면 좋겠고 비흡연자였으면 한단다.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평균신장에 못미치는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그래도 미련이 남아 일단 물어보기라도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사람이 동의를 했고, 우리는 일주일 뒤에 만날수 있었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아주 간단한 조작 만으로 셀기꾼이 되는 시대가 아니던가.
그러나 실물로 본 그사람은 흔히 말하는 '셀고'였다.
당연히 빈말처럼 들릴거라는걸 알면서도,
나는 실물이 훨씬 예쁘시다는 말을 꺼냈다.
턱없이 진부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사람은 굉장히 밝고 잘 웃었다.
처음 만났을때도 웃었고, 내가 말할때도 웃었고, 혼자 말하다가도 웃고, 헤어질때도 웃었다.
처음에는 실물보다 나은 외모에 놀랐고,
말도 안되게 밝은 성격에 놀랐으며,
나중에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주말에 알바를 하는 생활력에 놀랐다.

서른살이 되고나서 변변한 연애를 못했던 나는 그때 확신했다.
드디어 오년간의 존버가 빛을 보는 날이 왔다고 말이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오랜시간을 이야기하면서,
그사람 또한 나에게 호감이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

감기기운이 있음에도 어렵사리 자리에 나온 그사람은,
혹시라도 감기에 걸리면 이걸 먹으라며 본인의 감기약을 나누어주었다.
나는 그걸 호주머니 안쪽에 간직하고, 버스를 바래다 주었다.

이제까지 만났던 소개팅중에서,
아니 지금까지 사귀었던 과거의 인연들을 떠올려봐도,
그사람처럼 마음에 쏙 들었던 적이 없었다.

그날은 수요일이었고, 나는 그자리에서 토요일날 만나고 싶다고 했다.
다음날, 또 다음날 톡을 하면서 전전긍긍하느니 만난 자리에서 에프터를 하고 싶었다.
이미 주도권은 상대방에게 넘어갔다는걸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보면 반 강요적인 제안이었고, 진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사람은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집에 가는길.

나는 으레 하는 인사치례처럼 오늘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고,
그사람은,


'감기가 옮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약을 챙겨준것도 모자라 감기를 신경써주는 그녀의 성품에 다시한번 감탄했다.
그 사람에게 올인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나는,
멍청하게도 그 말의 진위를 깨닫지 못했던 거다.

집에 돌아와 설렌 마음을 다스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 보면서 거절하기가 미안했다며, 좋은사람을 만나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시 생각해볼수 없겠냐'며 붙잡아봤지만,
될 턱이 있나.

그제서야,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아,
그래서 감기가 옮지 않았으면 했던건가.

내가 금사빠 기질이 있긴 하지만,
두세시간 남짓한 만남으로 좋아하면 얼마나 좋아했겠냐만,
정말 좋은 사람을 놓쳤다는 생각에 한동안 멍 하니 있을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밤, 나는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그사람이 순수한 선의로 이야기한 것이든,
아니면 마음을 받지 못한 미안함으로 이야기한 것이든,
어쨌거나 그사람의 바램대로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입에 담기 오글거리고 창피한 표현이지만,
그사람을 향한 열꽃은 오롯이 남아 지금도 내 몸속을 헤집고 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9/11/29 00:53
수정 아이콘
이렇게 경험치 쌓이다보면 좋은 인연 만나실거에요
서쪽으로가자
19/11/29 00:54
수정 아이콘
애뜻한글 잘읽었습니다
센터내꼬야
19/11/29 00:56
수정 아이콘
감기는 키스를 해야 옮기는거 아닌가요?
지니팅커벨여행
19/11/29 09:13
수정 아이콘
제목 보고 딱 이 생각이 들어서 읽어 봤는데, 어 그게 아닌가? 했는데 결국 맞네요 흑
감기 옮지 않았으면 = 당신이랑 키스 안 할 것임
두나미스
19/11/29 01:06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미안하지만 결말이 마음에 드네요. 힘내세요!
피터 파커
19/11/29 01:30
수정 아이콘
너무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특히 와닿네요.
송파사랑
19/11/29 07:21
수정 아이콘
(수정됨)
삭제, 회원 인신공격(벌점 4점)
신동엽
19/11/29 07:38
수정 아이콘
에휴...
이라세오날
19/11/29 08:35
수정 아이콘
간만에 활동하시네요
강동원
19/11/29 08:48
수정 아이콘
말씀 참 [칼] 같이 하시네요
Knightmare
19/11/29 09:03
수정 아이콘
이런 사람 운영진이 분란조장으로 규정상 자를 수 있는 거로 아는데 자르면 좋겠군요.
19/11/29 09:14
수정 아이콘
욕나오는 댓글 달고 계시네요.
아침부터 기분 더럽네...
李昇玗
19/11/29 09:25
수정 아이콘
아침 일곱시부터 참 할일 더럽게 없나봐요?
19/11/29 09:27
수정 아이콘
와 정말 이 댓글은...크크크크크 이렇게 사니까 어때요? 하긴 어차피 저희랑은 사고방식이 다르겠지만 크크
In The Long Run
19/11/29 09:40
수정 아이콘
참 위선적이네요..부끄러움이 없는 편이신가요?
19/11/29 09:53
수정 아이콘
위에 리플들 보면 왜 사람들이 속마음대로 얘기하지 않는지 느낌이 안오시나요?
하긴 지금까지도 배우지 못한 내용을 리플 몇 개로 배우긴 어렵겠네요.
도라귀염
19/11/29 09:41
수정 아이콘
좋은 사람하고 만나셨네요 누군가와 이뤄지고 상대방에 대해 전부 다 알게되는것 보다 적당히 모른채 미완으로 남겨두는게 아련하게 추억으로 남는법이죠
19/11/29 09:56
수정 아이콘
아 제목만 보고 키스로 엔딩이 있을 줄 알았는데..
19/11/29 15:52
수정 아이콘
제목이 스포!! 혹시나 했는데 씁쓸하고 안타깝네요. 나한테 예뻐보이는 사람은 누구나 예뻐하더라고요.
티모대위
19/11/29 16:04
수정 아이콘
정말 좋은 경험 하셨습니다. 정말 잡고 싶지만 잡을수 없었던 사람을 겪게 되면 많은걸 배우게 되지요...
어차피 내가 원하는 사람과 무조건 만날수 있었으면, 나는 TV속 연예인이랑 만나고 있을 테니까.. 그런 사람이 잠시 내 앞에 지나갔을 뿐이라고 생각해야겠지요.
19/11/29 16:52
수정 아이콘
아..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어요. 정말 놓치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는데.. 사람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3604 [일반] 운동 잡담 [18] 삭제됨7480 19/12/02 7480 5
83603 [정치] 이더리움 개발자, 북한에 암호화폐 기술제공 혐의로 체포 [15] LunaseA17792 19/12/01 17792 0
83602 [정치] [속보]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행정관 숨진채 발견 [201] castani31872 19/12/01 31872 0
83600 [정치] 피해자의 입장에 공감해줄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며 [168] coyner13094 19/12/01 13094 0
83599 [일반] 홍콩(HK)형 민주주의 [18] Aimyon9315 19/12/01 9315 21
83597 [일반] [팝송] 더 스크립트 새 앨범 "Sunsets & Full Moons" [4] 김치찌개6561 19/12/01 6561 3
83596 [정치] 우리정부가 "조용히 기다리라"는 동안 탈북민 14명, 베트남서 중국으로 추방  [97] 사악군16848 19/11/30 16848 0
83595 [일반] 바닥에 떨어진 pgr 추천게시판의 권위(소소한 이벤트 및 결과) [55] 2214199 19/11/30 14199 22
83594 [일반] 인생의 비결(2) [22] 성상우8928 19/11/30 8928 2
83593 [일반] 직장생활 상사라는 사람의 중요성 [66] 키노모토 사쿠라15269 19/11/30 15269 58
83592 [일반] 미성년 자녀의 부모에게 투표권을 추가로 부여하는 건 어떨까요? [50] 데브레첸11988 19/11/30 11988 3
83591 [정치] 요즘따라 민주주의에 회의감을 느끼네요. [169] green919117399 19/11/29 17399 0
83590 [일반] 꼰대가 되면서 경계하는 것들 [39] 센터내꼬야11190 19/11/29 11190 22
83589 [정치] 민주당 "예비후보자 혐오·젠더발언 검증TF 출범" [114] 삭제됨13334 19/11/29 13334 0
83588 [정치] 이번 민생법안 논란에 대한 한국당 논평 [147] 나디아 연대기14044 19/11/29 14044 0
83587 [일반] 한국(KOREA)형 주류모델(4) [7] 성상우6543 19/11/29 6543 2
83586 [일반] 애플의 시총이 한화 1400조를 돌파했습니다. [89] Leeka14536 19/11/29 14536 0
83585 [일반] 영화를 보는 방법 [8] ohfree8525 19/11/29 8525 10
83584 [일반] 연락을 해야 할때는 바로 지금! [37] Love&Hate18815 19/11/29 18815 13
83583 [일반] 솔거 노비 모집 중...(feat. 상주 휴게 시간) [80] 카미트리아15156 19/11/29 15156 1
83582 [일반] 저출산혁명위원회 혁명공약 발표 [77] 박정희13431 19/11/29 13431 9
83581 [일반] 감기 옮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1] 꿀행성8565 19/11/29 8565 21
83580 [정치] 중국 공산당: 서방의 이슬람 유화 정책은 실패 [19] 나디아 연대기10240 19/11/28 10240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