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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8/31 15:34:43
Name 즈브
Subject [일반] 평범한 연구원 이야기 (수정됨)
안녕하세요 즈브 입니다.

저는 평범한 연구원입니다. 딱히 내세울 만한 연구 결과는 없지만 어찌저찌 연구를 업으로 삼고 살고 있습니다.

보통 연구원 하면 막 흰색 가운에 스포이드 들고 있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전 후드티에 키보드만 두드리는 nerd 이미지에 가깝네요...

사실 전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이과 과목은 죄다 미 가 였고 딱한번 우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부지런히 공부를 하면

성적이 잘 나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잘 안되더라구요..그래서 대학도 그냥 그런 학교를 갔습니다.

그래도 전공은 중학교 시절부터 무조건 컴퓨터를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RPG 게임만드는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었거든요.

제가 살던 동네가 시골 촌 동네라 프로그래밍을 배울만한 곳도 없고 독학을 해도 멀 배워야 될지 모르겠더라구요. 어찌저찌 C 언어 제어문 정도만

익혔고 (포인터, 구조체는 모르고.....) 자바라는 게 있구나 정도만 알고 대학을 갔습니다. 컴퓨터 공학과는 사실 이 정도만 알고 가도

1학년 때는 커리큘럼이 쉬워 보일수있습니다....그저 그런 대학에 코딩을 아주 쬐금하니 왠지 자존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가 되서

중2병이 한 번 더 옵니다...그 때 학교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군복무를 마치고 편입 준비를 합니다.

군 복무를 좀 특이하게 하게 되는데 해당 복무 경험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 첫 번째 운이 작용합니다.

복학하니 수업 난이도는 갑자기 확 올라가고 편입준비는 벅차고  휴학을 해야겠다 싶었는데 그냥 넣어본 학교에 덜컹 합격을 합니다.

일학년 때 성적빨이였죠... 그리고 그냥 넣어본 학교가 그리 명문대는 아니였지만 편입한 그해 성적은 바닥을 깝니다..(이쯤에서 중2병이 치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편입을 하니 아는 사람도 없고 동아리 들어가긴  편입생 아저씨고 해서 어쩌나 하다가 학부생을 받아주는 랩실로 들어갑니다.

근데 마침 그게..군 복무 시절 했던 업무와 연관성이 있는 연구를 하는 랩이라..랩 인원이 다 찼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이 받아 주셨습니다. 

지방에 있는 학교들은 대학생들이 많이 없어서 학부생들도  잘 받아주거든요. 이게 두 번째 운이 됩니다...

내 자리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프린터도 막 쓸수 있는 혜택에 간간히 교수님 프로젝트 간간히 도와드리면 용돈도 나왔거든요.

그렇게 정신 차리고 보니 그랩에서 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사실 원래 갈려던 대학원을 미끄러지고

석사 정도는 여기서 해도 된다는 교수님에 설득에 넘어간 거였는데 4학년 때 대학원 수업을 미리 들어 두고 3학기에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진로는 딱히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출연연구소를 동경하고 있어서 어떠한 형태라도 꼭 한번 근무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출연연구소

위탁과제를 하고 있어서 위촉연구원으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근데 위촉은 졸업자는 안된다길레...이미 졸업논문 디펜스도 다 끝난

상황이라 시간이 붕 뜹니다...근데 이게 나중에 세 번째 운이 됩니다...

놀면 뭐 하니? 라는 생각에 마침 K 대기업 연구소에서 인턴 뽑는다길레 썼는데 덜컥 합격합니다. 이때 사실 별로 가고 싶지도

붙을 거라생각치도 않아서 정장도 안 입고 면접을 간 데다가 면접 준비는 하나도 안 하고 대학원 세미나 하듯이 했지요..

막상 면접을 가니 K 대기업에 계열사(그래도 대기업이긴 하지만) 연구소 였고 면접은 전 이런 거했다고 이야기 하고 면접관 질문엔 모르는 건

모른다 하고 나왔습니다. 면접비 받고 집에가는데 그냥 면접비 받아서 좋더라구요 크크 그렇게 합격을 합니다. 나중에 부서 배치받으니 면접관

분들과 같은 부서에서 일을 했는데 사석에서 저 왜 뽑았냐고 물어보니 거짓말은 안 하는 것 같아서 였다더라구요...다른 지원자들이

스펙이 빵빵 했지만 전 그저 그런 학벌에 그저 그런 스펙이었는데 뽑아두면 안 도망갈것 같아서 였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하지만 인턴

끝나고 정직원까지 올라간 뒤에 넵... 일 년 만에 탈주합니다...여러 일이 있었는데 조직개편이 결정적이였지요. 인턴 때 까지만 해도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놀랍게도 출근이 기다려지기도 했었습니다만...신입교육 다녀오니 조직개편으로 연구소가 연구소가 아니게 되었더라구요.

때마침 출연연 연구소에 연락이 옵니다. 주변에 추천할만한 인재 없냐고 하기에 그냥 제가 간다고 했습니다. 계약직인데 괜찮냐고 하시길레

그땐 무슨 패기였는지 가겠다고 했지요. 그렇게 서울살이 정리하고 대전으로 내려옵니다. 어찌저찌 돌고 돌아 동경하던 연구소로 왔습니다.

과제가 전공이랑 상관 없는 과제라 한동안 엄청 고생했지요. 그래도 재직하는 동안 박사 따서다른 곳으로 가야지 하고 묵묵히 하다 보니

다시 선택지가 옵니다. 과제 기간이 굉장히 짧은 연구인데 아카데믹한 과제라 박사 졸업논문 쓰기에 딱 좋은 과제를 하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연구소 계약직은 재직기간 10년 or 계약 3번 이상은 할 수 없었기에 짧은 기간의 과제를 한다는 건 재직기간이 줄어드는 거라

나갈 준비를 서둘러야 했습니다. 사실 2번째 과제만 하고 퇴사를 할까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부담이 되진 않아서 내 멋대로 연구를 해보자

하는 2차 패기를 발동했습니다. 근데 또 이게 네 번째 운이 됩니다..

K대기업 인턴때 만큼 일을 잼나게 했던것 같네요. 그렇게 학위도 따고 슬슬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연구소에 급격한 고령화로...인건비 적고 일시키기 좋은 젊은 연구들을 노리는 과제들의 콜이 들어옵니다...아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내세울만한  연구성과가 없었습니다.....연구보단 개발을 더 많이 했었거든요..그렇다고 개발을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론을 위주로

연구하시는 분들에게 같이 하자는 제안이 들어와서 어찌저찌 더 재직하게 됩니다. 이게 또 다섯 번째 운이 됩니다..

그리곤 얼마 안돼서 정규직 전환 공고가 올라옵니다...과제를 2개한 사람에게 우선순위를 주겠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카데믹

한 연구를 한 상황이라 2개를 이미 채운 상황이었지요. 그리고 같이 일하시는 연구원 분들이 다들 계약직으로 계셔본 경험이 있으셔서 이런

저런 조언을 받을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같이 일하는 화려한 학벌의 박사님들이 계시는 곳에서 밥값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개발과 연구 사이에서 그냥 특정 스킬이

뛰어나진 않지만 능력치가 고만고만해서 어디 붙혀 놓아도 그럭저럭 쓸만한 간손미(물론 실제론 A급 인재들이지만)

같은 인재가 되자 하고 지금까지 왔네요.

살면서 운이 참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중2병 걸렸던 시절 빼곤 딱히 제가 띄어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실제로도 고등학교 성적이나

대학교 성적이 좋았던 적이 없고...막 SCI급 논문을 찍어내 본 적도 없습니다...

내가 할 수있는 건 남들이 더 잘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역하게 소소한 꿈들은 품고 살았던 거 같아요

처음엔 막 OS나 컴파일러 같은 걸 만들어야지!! 했다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이걸 추가/개선하면 좋을것 같네 식으로요.

운이 좋아 가진 재주보다 많은걸 얻고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우연히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제가 잘 모르는 제 장점이 더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품고 있으면 어떻게든 그 방향으로 삶이 흘러 간것 같아서 신기하네요.

일하다가 막혀서 다시 일에 시동도 걸어 볼 겸 주절주절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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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여삼추
20/08/31 15:40
수정 아이콘
훌륭하십니다. 운보다도 평소의 즈브님을 보고 이끌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느끼는 점이 많네요.
개구리농노
20/08/31 15:43
수정 아이콘
저도 즈브님이랑 비슷한 길로 가고 있는데. 연구원들이 하는 일의 종류가 참 다양하더라구요.
어렸을때 막연히 생각했던 연구원, 과학자의 모습은 현실에 거의 없는듯 ㅠㅠ
타마노코시
20/08/31 15:44
수정 아이콘
원래 이 바닥 살아남는 사람이 제일 대단한 것입니다.
운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결국 주어진 과제를 얼마나 잘 수행하고 성실히 이행하느냐. 이 부분은 연구원 신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인데 정말 대단하신 것 같네요..
20/08/31 15:4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이가 40을 넘고 하다보니까 삶의 분기점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답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의 누적된 경험치가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기에 삶의 분기, 분기를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니 그게 바른 결정이구나싶은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채식부꾸꼼
20/08/31 15:45
수정 아이콘
연구원님들 대단하십니다 저도 대학원에서 1년6개월을 보냈는데 못해먹겠다고 뛰쳐나왔거든요 그래서 더 부럽고 대단하십니다
20/08/31 15:46
수정 아이콘
(수정됨) 열심히 사셨네요. 의도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막연히 '이론적인 연구를 계속해야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보니 개발부터 시작해서 별걸 다 하고 있더라구요.
차라리꽉눌러붙을
20/08/31 15:49
수정 아이콘
진정성 있게 일을 열심히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네요!!!
20/08/31 16:04
수정 아이콘
진짜 열심히 사셨네요, 요새 직장10년차인데 학위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는데 이런글을 보니 대단하다고밖에 안보입니다.
진짜 살아남는게 강한거 같아요.
20/08/31 16:07
수정 아이콘
축하드립니다. 저도 어찌저찌 왔다갔다 하고있어서 좀 공감이 가네요. 대단하게 뭘 하는건 아니지만 주변에서 굶진 않게 해주고있어서 운이 좋단 생각이 생각이 들고요. 다만 일단은 안정된 직장에 일단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은 드네요. 앞으로도 건승하시길 기원드릴게요
그랜즈레미디
20/08/31 16:13
수정 아이콘
운도 실력입니다.

당연히 큰 운은 큰 실력이죠.
20/08/31 18:00
수정 아이콘
묵묵히 한 길만 쭉 가는것도 능력인것 같아요. 앞으로도 잘 되실거라 생각합니다.
20/08/31 18:21
수정 아이콘
담담하게 쓰셔서 오히려 더 대단해 보이네요. 멋지십니다.
초록옷이젤다
20/09/01 07:52
수정 아이콘
반갑네요. 저도 출연연 연구원입니다. 늘 서류작업에 쫓겨 연구하기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ㅠㅠ
지니팅커벨여행
20/09/01 08:40
수정 아이콘
연구원 하면 흰색 가운과 깔끔한 실험실... 을 떠올리기 마련이죠.
저도 연구 부서에서 일하는데 얼마전 홍보팀이 와서 부서 별 소개자료를 만든다고 사진 찍게 개발품 같은 거 들고 있으라더군요.
그러면서 하얀 가운 같은 거 없냐고, 있으면 입고 오라고...
근데 저희는 공학이고 쇳덩어리, 기계류를 다루는 곳이거든요.
작업복을 사제로 구입한 게 있지만 일반 공장에서 쓰는 그런 거다고 했더니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몇몇 부서에선 흰 가운에 고귀하게(?) 물건들을 다루고 있으니 이런 부서는 처음 보는 모양입니다.
사진 찍을 때 그거라도 입고 올까요? 겨울용인데? 라고 했더니 그냥 찍자고 해서 넘어 갔습니다.
이쪽 분야를 포함한 많은 공학계에선 뾰족한 것에 찔리고 기름 묻고, 감전 조심해야 하는 등의 시험들이 많은데 흰색 가운이라니... 공학도로서 좀 허탈하더라고요.
toheaven
21/07/30 13:24
수정 아이콘
'오래 품고 있으면 어떻게든 그 방향으로 삶이 흘러 간것 같아서 신기하네요.' 담아두고 싶은 문구네요. 글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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