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학창시절, '역사'란 숫자와 인물의 나열일 뿐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역사와 진실한 역사가 무엇인지 모른 채 나와 급우들은 연대표의 숫자와 영웅들의 이름만을 외우고 있었다.
이러한 교육 과정은 필연적으로 '영웅중심의 세계관'을 낳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배운 것이 연도와 사람 이름 뿐인데, 역사는 그들만의 것이라는 생각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가끔 열성적인 역사 선생님의 색다른 수업은 논외로 하고 말이다.
조금 머리가 크게 되고 제대로 된 공부를 하게 되면서 '영웅중심의 세계관'은 나에게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자리바꿈 하였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결코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신념이 확고 부동해지면서 이를 더더욱 부정하게 되었다.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소수의 영웅이다.' 라는 구태의연한 말에 오염된 세대들에게 '영웅주의'는 이상이기 보다는 타파해야 할 모순이다. 무언가 잘못되는 일이 있을 때 그 모든 이유를 리더쉽에 돌리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만연해 있다. 스스로 영웅이 되기 보다는 영웅의 부재를 아쉬워 하며 결국은 현실을 외면하곤 한다.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는 세계관을 꿈꾸며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무의식속에 내제되어 있는 영웅에 대한 갈망은 가끔 나도 모르는 새에 표출되곤 한다.
특히 게임은 그러한 우리에게 잠재되어있는 영웅주의를 깨우는 1등 공신이다. 무언가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는 힘을 갈망하는... 파괴적인 힘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그러한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게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워3는 정말로 '영웅주의적 세계관'을 만끽할 수 있는 게임이다. 저번주에 있었던 itv 중계에서 이정한님이 했던 '영웅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지적도 이러한 맥락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가끔 이정한님의 폭넓은 식견에 놀라곤 합니다. )
워3에서 기본 유닛들은 대부분 영웅의 시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일개 헌트리스가(나엘의 유닛, 저그의 히드라와 같은 강력함을 같고 있다.) 레벨업을 해서 영웅처럼 성장하는 일은 아쉽게도 볼 수가 없다. 영웅이 전사하면, 그쪽 유저의 분위기는 초상집이나 다름이 없다. 묘하게도 혼령이 하늘로 올라갈때의 기분이란,, 정말 친한 누군가가 다친 것과 같은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심지어 데스나이트와 리치(언데드의 영웅들)는 자신의 구울(언데드의 기본 유닛, 저글링과 비슷하다.)들을 식량으로 생각한다. 가끔 데스코일로 치료도 해주지만, 위급할 때는 영웅을 위해 기꺼이 식량으로 둔갑하곤 한다. 영웅들에게 유닛은 경험치를 올리기 위한 발판이며, 승리를 위한 디딤돌이다. 워3에서 영웅 없는 병력은 항상 대기 상태일 수 밖에 없다. 압도적인 숫자가 아닌 이상 상대 영웅의 경험치가 되기 때문에 이들 유닛은 대기 상태일 수 밖에 없다.
가끔 오크의 타우런(오크의 최강 밀리 유닛) 한마리가 상대 유닛을 다수 학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오크 유저들은 그 타우런을 기억하지 않는다.
'저넘 오늘 좀 무리하는 군' 이런 정도로 생각할 따름이다.
만일 스타크래프트에서 그러한 활약을 하는 유닛이 있었다면 해설자조차 칭송했을 것이다. '아! 저 타우런 영웅 타우런이지요!!' 워3에서 보기 힘든 해설이다.
영웅이 레벨 7이 넘어가면,, 정말이지 일당 백의 역할을 해낸다. 나이트 엘프와 나이트엘프의 대전은 '데몬 헌터'의 레벨업이 승리의 키포인트라고 할 정도로 영웅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가끔 메타모포시스(데몬헌터의 궁극 마법, 데몬으로 변신해서 상대방에게 지지를 치게 만든다.)로 변신한 데몬헌터를 보면 꿈에 나타날까 두렵기 까지 하다. 입에서 뿜어내는 가래와 같은 공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나가는 일반 유닛들을 보면서 스스로 탄식하곤 한다.
'역사는 영웅이 이끌어가는 것이야....'
아크메이지(휴먼의 마법사 영웅)가 레벨 6이 넘어가면 게릴라전의 괴수가 되곤 한다. 친한 친구는 아크 메이지를 쿠바 독립혁명을 이끈 게릴라전의 대가인 '체 게바라'에 비교하기도 한다. 매쓰 텔레포트(아군 지상 유닛이 있는 곳으로 어디든 텔레포트 가능)를 쓸 때마다 닭쫒던 개 지붕쳐다보는 격으로 하품하는 어보미(언데드 유닛)를 보면 속상하기까지 하다. 하늘 위의 신이 땅 밑의 인간을 조롱한다고나 할까,, 정말이지 계급의 차이가 너무나 극명하다.
스타크래프트의 경우는 조금은 다르다. 특수한 영웅이 없기 때문에 저글링이 대마왕이 될 수 있고, 마린이 황제가 될 수 있다. 신분 사회가 엄격한 중세 환타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워3가 영웅중심의 카스트 제도에 길들어져 있다면,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 스타크는 상대적으로 신분 상승의 기회가 많은 편이다.
특히 다템은 자주 영웅이 되곤 한다. 비록 레벨업은 않하지만, 그 다템의 킬수에 따라 수많은 시청자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해설자조차 한 마디씩 한다.
"저 다템 영웅 다템이죠? 예~~~!! 킬수가 무려 13이에요."
임요환 선수의 마린은 수시로 영웅이 되곤 한다. 디펜시브 매트릭스의 보호아래 러커의 가시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춤을 추는 마린은 분명 진정한 영웅이다. 만일 내가 그 마린이라면, 심장마비로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 것이다.
이따금 다수의 저글링이 게이머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때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온다. 작고 값싼 저글링들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것,,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고 힘없는 사람들이라도 모이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은 모두가 영웅이 된,, 진정한 역사의 주인일 수 있다.
하지만 지능이 낮은 머린들이 높은 지능의 하이템플러의 스톰 샤워에 몰살당하는 걸 보면 스타크래프트 역시 영웅주의적 세계관을 노골적으로 종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를 해치우는 식의 '남자의 로망'은 '영웅주의'의 변종이며 아류이다. 역시 게임과 영웅주의는 정말 땔레야 땔 수 없는 그런 관계인가 보다.
각설하고, 아쉬운 일이지만 지금 현재의 게임계는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없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영웅'을 필요로 하고 있다. 영웅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구조,, 불합리한 구조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수많은 지망생들이 프로게임계의 문을 두드리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체육관 무대에 서본 소수일 뿐이다. 그들 모두를 위해서 1등 상금을 줄이고 8강 진출자의 배당금을 올릴 수 있는 그러한 구조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1등이 빛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업계가 살아남을 수 있기에,, 관계자들도 가슴 아파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현실이 안타깝다.
얘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워3를 하더라도 너무 영웅중심의 세계관에 전염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한 유저로서의 바램입니다.. 역시 영웅이 짱이야.. 하는 생각이 무의식에 남으면,, 별로 좋지 않겠지요..
ps. 워3 정말 재미있으니까, 아직 해보지 않으신 분은 꼭 해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