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는 해도."
존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의외로 그가 지닌 신념이다. 고향 아이우에서 쫓겨나 정처없이 우주를 방랑하면서도 우리 일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지닌 신념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 버티고 선 이 작고 연약한 인간마저도.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금 가면 너는 죽게 되겠지. 저그의 드론 한 기나마 죽일 수 있을까? 언덕 정상에 서 보기도 전에 네 몸은 성큰의 촉수에 맞아 갈가리 찢어질 것이다. 어쩌면 미리 밑으로 내려와 있던 저글링이나 히드라리스크의 먹이로 내던져질지도 모르지."
"......"
그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가, 그래도 갈 텐가? 네가 말한 그러한 이유가 내게 있고, 그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나는 본진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하겠다."
"이것 봐, 잘난 친구."
그는 일어섰다. 그의 라이플은 생각보다 꽤 긴 총신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긁히고 닳아있는 그 라이플은 이 나약한 인간이 얼마나 그것에 의존해 이 살벌한 전장을 누비고 다녔을지를 무언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가우스 건, 이거... 어떻게 보여? 당신의 동료들이 쓰는 무기나, 저기 버티고 있는 저그족의 공격기술에 대항할 수 있을 것 같은 무기로 보이나?"
"솔직히 말해도 된다면, 전혀."
"맞아. 전혀 상대가 되지 못해."
그는 웃었다. 서글프고 아련한 미소였다.
"이따위 낡은 라이플 하나를 믿고, 우리는 이 곳으로 왔다. 그리고 너희들이나 저기 저그족과 싸우고 있지.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연약한 인간이라고 무시하지 못한다. 두려워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끈질기고 성가신 놈들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을 거다. 너희 프로토스도, 저기 저그도 마찬가지야."
"......"
사실이 그랬다. 얼마전 멀티 정찰을 나갔다가 내 눈앞의 이 친구와 비슷한 전투복을 입은 일련의 테란 병사들이 한 무리의 럴커를 맞아 싸우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저주받은 오버마인드가 각별히 총애한다는 그 거대한 럴커들을 맞아, 테란의 병사들은 일렬로 진형을 펼쳐 전열을 가다듬더니,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병사의 신호에 따라 일제사격을 가해 차례로 적지 않은 수의 럴커를 모두 살상해 버리는 것이었다. 인간의 무기 중 가장 성가시다는 아크라이트 캐논도 아닌, 저 보잘것없는 라이플로 말이다.
"그게 인간이고, 테란이다 친구. 인간이 나약한 건 목숨에 집착하기 때문이지. 그 마지막 집착을 버린 인간은 무섭다. 놀랄 만큼 끈질기고 독하지."
"......"
할 말을 잃은 내가 그를 바라보는 사이,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돌아서고 있었다.
"개죽음 당하지 않게 도와주어 고마웠다...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지. 당신을 다시 볼 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다면."
인간 병사와의 짧은 대화는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가 미련없이 라이플을 챙겨 저편 12시 방향으로 사라져버린 지 한참 후, 나는 나도 모르게 칼집을 챙기며 일어서고 있었다. 신념, 믿음, 그리고 희생. 프로토스 족 중에서도 우리 어둠의 템플러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어왔던 저런 것들이, 저 나약하고 미개한 인간들 사이에서도 행해지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나는 그보다 키가 훨씬 컸고 속도도 빨랐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정말로 그는 12시 본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 너머에서 어떤 괴물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 길을. 아니, 지금 당장 이 근처 어딘가의 땅 밑에, 그 빌어먹을 럴커가 잠복해 있는지도 모른다.
"......"
저 멀리 위로, 12시 본진 입구가 보인다. 이렇게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또한 잠시 멈짓거리고 있었다. 비겁하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생명의 본능이리라.
순간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입으로 포장을 물어뜯어 벗겨냈다. 아까 스팀팩이라고 말하던 그것... 그는 주저없이 손가락 하나 정도 굵기의 그 주사기를 팔뚝에 찔렀다. 순간 그의 눈에 핏발이 올랐다. 일종의 마약이라고 하더니, 신경흥분제 계통의 약물인 모양이다.
"간다!"
그는 미친 듯한 걸음으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모하다... 황급히 그 뒤를 밟기 시작하는데 무언가 공기를 가르며 윙윙대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들어보니 무탈리스크 한 기가 날아들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그러나 순간, 아까 들은 것 같은 가우스 라이플의 총성이 귀가 따갑게 울려퍼졌다. 피를 흘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뮤탈리스크. 저 친구... 대공공격이 되는 모양이잖아.
"......"
그러나 순간, 땅밑이 가볍게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다. 저글링 떼였다. 인간 병사의 가우스 라이플은 연사력은 좋을지 몰라도 데미지 자체가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군. 나는 재빨리 달려들어 인간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내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검을 뽑았다. 하나, 둘, 셋, 넷... 저글링의 피가 내 얼굴과 망토 위로 튀었다.
"......"
반 수 가까운 저글링이 내 검의 먹이가 되었다. 남은 놈들은 무언가 수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꼬리를 감추며 몇 발 뒤로 물러섰다. 오버로드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오버로드가 도착해서 내 모습이 드러나기만 한다면, 아무리 내 검이 날카롭다고 한들 저놈들 또한 과히 녹록한 상대는 아닐 텐데.
"......"
타앙. 내 뒤에서, 다시 라이플의 총성이 울렸다. 귀가 따가울 정도의 총성이 울리고, 막 이리로 달려들려던 저글링들의 움직임이 다시 둔감해진다. 힐끗 고개를 돌려보니, 저 편에 죽어 나자빠진 괴물의 시체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다. 유난히 가늘고 긴 다리들. 오버로드의 시체다.
"이래뵈도..."
철컥. 그는 다시 비어버린 탄창에 총알을 장전했다.
"엔지니어링 베이에서 공격력 업그레이드 교육을 한번은 받은 마린이다. 저까짓 오버로드쯤은."
"훗."
재미있는 친구로군. 나는 다시 칼날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냈다. 흘끗 주위를 둘러보니, 부화를 기다리고 있는 에그가 상당수 보인다. 럴커 에그인 듯 하다.
"가 볼까... 시간을 끌어서 좋을 일이 없을 듯 하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는 유쾌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총의 방아쇠에 걸린 그의 손가락은 상당히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억지로 태연한 척 하려고 애쓰고는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스팀팩 부작용이다."
그는 말했다.
"말했지, 마약이라고. 메딕이 없이 몇 번을 거듭쓰면 이렇게 된다. 과용하면 죽는 수도 있지."
"그런 것 따위를 병사에게 지급하다니."
"말했지 않나... 윗대가리 놈들은 우리같은 쫄따구들은 죽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고."
"......"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나는 끊임없이 본진 안쪽 저글링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학습된 것 이상의 예민한 본능을 지닌 놈들은, 눈에 보이는 인간 병사 하나 이상의 위험이 그들 앞에 도사리고 있음을 이미 직감적으로 알아채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그래도... 계급이 좀 있겠지? 질럿...은 아닌 것 같으니."
"최말단은 아니다. 하지만, 신세는 너와 별로 다르지 않다."
캬악 소리를 내며 성급한 녀석 하나가 이리로 달려들었다. 그의 라이플과 내 검이 동시에 허공을 갈랐다. 내 발밑이 흥건히 피에 젖었다.
"우리 종족은 오래전에 고향에서 추방되었다. 힘겨운 전쟁을 맞아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긴 했지만, 아무도 우리를 동포로 대해주진 않지. 높으신 집정관들부터, 낮게는 질럿들까지도."
"......"
"덕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이란 혈혈단신으로 남의 본진에 잠입해 혼자 힘으로 싸울때까지 싸우다가 죽어가는 것 뿐이다.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진 않아. 다 아이우를 위해서니까."
"......"
인간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었다. 그것을 보느라 잠시 한 눈을 판 것이 실수였다, 아차하는 사이, 어느새 수가 아까만큼으로 불어난 저글링들이 다시 이리로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오버로드야!"
무어라 말릴 틈도 없이, 그는 다시 스팀팩을 팔뚝 위로 찔렀다. 욱. 그의 입 가로 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무어라 말을 걸어볼 틈도 없이, 그는 매섭게 허공으로 라이플을 갈겨댔다. 그러나... 오버로드는 두 마리였다.
"......"
오버로드의 사악한 기운 아래 내 모습을 감추고 있던 신성한 어둠이 걷혀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이리로 달려드는 저글링 떼들. 다리로, 팔로, 가슴으로 녀석들의 사나운 발톱이 덤벼왔다. 비틀대다 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으아아악..."
나는 눈을 감았다. 뒤를 돌아볼 여력도 없었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스팀팩 과용 상태에 있었던 그는, 공격다운 공격을 채 받아볼 틈도 없이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차라리 편한 죽음이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
넥서스에 기습 실패를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왜 하필 그때야 기억났는지 모를 일이다. 내게 남은 마지막 정신력을 끌어올려 정신 링크를 열었다. 나는 내 친구와 달라서 피 따위는 흘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의식은 많이도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D-템플러 247이 보고한다."
환영이었을까. 저 멀리서 캐리어의 황금빛 본체가 보인 듯도 했다. 그러나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는, 이미 그것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구분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기습은... 실패했다. 전원... 전...멸..."
힘이 빠진 다리가 부러지듯 내려앉으며 무릎이 꿇렸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나는 템플러다.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을 보았다. 눈 앞이... 점점 흐릿해진다...
-그게 인간이고, 테란이다 친구. 인간이 나약한 건 목숨에 집착하기 때문이지. 그 마지막 집착을 버린 인간은 무섭다. 놀랄 만큼 끈질기고 독하지.
마지막 순간 그가 생각난 건, 그의 말이 생각난 건 그와 내가 놀랄 만큼 닮아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안타깝군, 친구. 네가 프로토스 족이었다면, 아주 뛰어난 템플러가 되었을 텐데.
이상했다. 모르는 척 그를 외면했다면 나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도, 목전에 닥친 죽음이 하나도 두렵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 템플러의 일생에 가장 소중한 것은 셋... 검, 명예, 그리고 좋은 친구. 넌 멋진 친구였다, 인간이여. 나 또한 그랬기를 바란다...
"For... Aiur..."
-Apatheia, the Stable Spir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