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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07/31 19:17:32
Name 눈시BBbr
Subject 청일전쟁 - 시작

"조선은 동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 나라로서 영토는 3,000리에 불과하고 인구는 1,000만 명도 못되며 거두어들이는 부세도 200만 석이 못되고, 군사도 수천 명에 불과하니 모든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빈약한 나라입니다."

"조선은 본래 중국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 중국을 버리고 다른 데로 향하려 한다면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에게서 떨어져서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 고종 23년(1886년) 7월 29일, 위안스카이(원세개)

이른바 조선대국론(조선 정세를 논함)입니다만... 참 -_-a 간단히 줄이면 니네는 중국에 붙어살아야 되는데 왜 서양과 친해지려고 하느냐, 니들이 우리랑 붙으면 유리한 게 여섯 개고 해로운 게 네 개고 나라 부강하게 하려면 요렇게 저렇게 해야 되고... 뭐 이런 내용입니다.

... 이 때 그는 20대 중반이었더랬죠. 조선에게는 물론 외국 공사들에게도 오만했다 합니다.

갑신정변부터 동학이 일어나기까지 10여년간, 조선은 청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이 한 거에 비하면 참 가벼웠죠. 외국의 눈치를 봐야 했고, 청 자신도 그 정도의 여력이나 의지까진 없었던 것 같구요. 아무튼 아래에서 개화를 지속해 갔죠.

이 시기, 근대적인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국내외로 전신이 개통되고 크리스트교가 공인돼 외국 선교사들이 학당을 세우고 근대식 병원도 세워지고 하는 등 말이죠.

문제는 그 이후와 비교해서 너무 천천히였다는 거죠. 아니 겉은 조금씩 변하는 것 같은데 속에서 변한 게 있긴 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요. 뭐 이건 앞으로도 쭉 할 것 같네요. 결론을 낼 순 있으려나...

외교 쪽으로 본다면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고종은 러시아를 좀 다르게 봤습니다. 일본부터 청을 견제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말이죠. 이른바 인아(혹은 인로)책이었고, 이렇게 맺어진 게 조러밀약입니다. 이를 경계한 영국이 거문도를 점거했고 (1885년) 이홍장의 중재로 2년 후 철수합니다.

+) 러시아를 끌어들인다는 의미죠


묄렌도르프는 이 때문에 잘립니다. 청이 보냈으면서도 청에 반대하는 걸 주도했으니까요. 이후 그를 대신해서 온 미국인 데니도 2차 조러밀약을 한 걸 보면 참 재밌습니다. 조선이 마음에 들어서 조선을 위했던 건지, 아니면 자기가 뭘 주도하는 게 좋았던 건지... 아무튼 이게 고종의 뜻이라는 건 확실하겠죠.

이에 대한 평은 더 나중에... 다만 전체적인 평은 어떻든 민비에겐 자기 목숨을 잃는 결정이었겠죠.

이홍장은 조선에 대한 경고의 표시로 대원군을 보냅니다. 의미야 뻔했죠. 임오군란부터 해서 그와 손 잡지 않으려는 이가 없었으니까요. 심지어 갑신정변 때도 대원군의 귀국을 내걸었을 정도였습니다. 고종은 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며, 사실상 가택연금시킵니다.

자... 그럼 밑으로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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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최제우가 죽은 후에도 동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커져갔죠. 2대 교주 최시형의 리더십도 있었지만 당시의 불안도 컸죠. 외세는 외세대로 들어오고 탐관오리의 수탈은 수탈대로 계속됐습니다. 거기다 같이 탄압받던(-_-a) 서학은 이제 금지가 풀렸고 말이죠.


1892년, 교조신원운동이 시작됩니다. 충청도 공주를 시작으로 삼례를 거쳤고 아예 서울로 올라와 상소를 올리기에 이릅니다. 반응이야 참으로 뜨거웠죠. 안 좋은 쪽으로요. 곳곳에서 그들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올라옵니다.

"여러 상소를 가져다 보니, 취할 만한 점도 많이 있지만 또한 시행하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정학(正學)을 지키며 덕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바로잡는 방도에 이르러서는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처럼 똑같습니다. 대체로 하늘이 백성을 낳아 기르는 데에는 다 법칙이 있는데, 그것을 따르면 천명에 순응하는 것이고 어기면 천명을 거슬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 저 일종의 간사한 무리들이 자칭 동학이라고 하면서 함부로 주문과 부적을 만들어 사람을 꾀고 감히 참위설에 의탁하여 선동하고 현혹하니, 바로 음흉하고 요사스러우며 황당하고 괴이하며 법도에 어긋나는 말일 뿐입니다. 나라에서는 응당 금지하여야 할 것이고 법으로는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응당 직위에 구애되지 말고 논의하는 일과 법을 밝히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 고종 30년(1893년) 2월 28일 의정부

결론은 주동자는 처벌하고 나머지는 잘 타이르자... 뭐 이런 거였습니다. 왕에게, 사대부들에게 동학은 그런 거일 뿐이었죠. 그리고 이런 동학교도들의 집단행동에 더 거부감을 나타냈구요.

그리고 보은집회가 열립니다. 조정은 일단 어윤중을 보내 달래게 하면서 서울까지 올라온 것인지 걱정합니다. 얘기야 참 많았습니다만, 여기서 다룰 부분은 이거죠.

"심영과 기영의 군사를 우선 수원과 용인 등지에 나누어 주둔시키고 서울의 군사는 형편을 보아가며 조용(調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심순택

"서울의 군사는 아직 파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나라의 군사를 빌려 쓰는 것은 역시 각 나라마다 전례가 있는데, 어찌 군사를 빌려다 쓰지 않는가?"

이 말에 세 명이 반대했지만 고종은 계속 얘길 꺼냅니다. 중국에서 영국군을 빌린 것, 외국군이라 해도 청나라 군사만 빌린다는 거였죠. 결정되지는 않았고, 동학교도들도 어윤중의 말에 따라 해산합니다. 하지만 그 불씨가 꺼진 건 아니었죠.

동학도 뜻이 하나인 건 아니었습니다. 최시형의 법포와 서장옥의 서포가 있었고, 후자가 더 급진적이었죠. 그리고 전봉준 등이 이끄는 남접은 서포의 갈래에 있었습니다. 최시형 측은 북접이구요. 서장옥 쪽은 세력도 약하고 바로 잡혀서 - -a 그리고 이 남접도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으로 갈려 있었죠.

최시형의 북접이 최제우의 신원 및 믿음의 자유를 원했다면, 남접은 좀 더 큰 걸 꿈꿨습니다.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 말이죠.

거기에 불을 붙여준 것이 고부 군수 조병갑이었습니다. 참 별의별 짓을 다 했죠. 동학 같은 배경이 없었더라도 민란이 일어날 만 했고, 여기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전의 민란과는 달랐죠.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만들어 교도들에게 돌립니다. 조병갑을 죽이고 전주를, 넘어 서울로 간다는 내용이었죠. 이전의 민란은 그 지역으로 한정됐고, 왕이 임명한 거라 하여 수령 역시 손대지 않았습니다. 어떤 걸 바랬든, 조선이라는 나라를 바꾸겠다는 것이었죠.

1894년 갑오년 1월, 그들은 일어납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라 할 고부민란입니다. 관아는 쉽게 점령됐고 조병갑은 도망칩니다. 하지만 그 이상 나가기는 힘들었습니다. 호응이 없었으니까요.

그 문제는 안핵사로 그들을 달래러 간 이용태가 해결해 줍니다. 달래러 간 놈이 오히려 그들을 몰아붙였죠.


전봉준은 다른 접주인 손화중과 김개남을 설득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동학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죠.

+) 기본적으로 동학농민운동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사실 전쟁 수준이죠. 동학 농민 봉기, 동학 농민 전쟁 등으로도 불립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 토벌하게 합니다. 여기에 장위영 소속 8백명을 투입했죠. 한편 전라감사 김문현은 단독으로 출진했다가 패배합니다.

+) 임오군란 때 민비 구했고, 을미사변 때 민비 구하다 죽은 이입니다.

그리고 홍계훈이 토벌을 시도하자 남하, 각 지역을 점령하면서 관군을 유인합니다. 홍계훈이 이를 따라가자 이번엔 관군의 진로를 피해 북상했죠. 놀란 그는 동학군이 있는 장성으로 이학승이 이끄는 병력 300명을 급파했죠.

이 때 이들의 무기는 꽤나 좋은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서양식 무기를 받고, 나름대로 서양식 훈련도 받았죠. 여기에 개틀링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헌데 동학군은 장태를 앞세워 진격합니다. 수의 차이, 화력은 강했다 하나 미숙했던 중앙군, 이런 환경은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줬죠. 동학군의 승리였습니다. 이 날이 4월 23일, 동학군은 곧바로 진군해 빈 성이나 다름없는 전주성을 점령하니 4월 27일입니다.

이후 관군과 동학군은 전주성을 두고 전투를 계속합니다. 지금까지 승승장구했지만 미숙해도 관군은 관군이었습니다. 화력의 차이가 너무 컸죠. 성 밖의 관군을 치려던 동학군은 화력에 밀려 늘 후퇴합니다. 홍계훈은 공성전을 시도하진 못 했지만 지속적으로 화력을 과시하면서 회유를 시도합니다.

전투 속에 양쪽의 협상이 조금씩 진행됩니다. 아무래도 관군이 유리했겠죠. 당시 전라도 곳곳부터 김해까지도 호응하는 봉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주력이라 할 전주성의 동학군을 잡는다면 다른 곳도 곳 수그러들 것이었죠.

+) 한편 양반들은 나라를 위해 의병(-_-)을 일으켜 동학군에 맞섭니다. 이를 민보군이라 하죠. 이들의 활약은 이후에 펼쳐집니다.

하지만 뜻밖의 소식이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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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아산에 군함 두 척이 나타납니다. 청의 원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합니다. 톈진 조약에 의해 청이 통보를 했다지만 참 빨랐죠. 일본은 이를 준비해 왔고 조선의 일본인 보호라는 명분으로 들어온 겁니다. 아마 다시 나갈 생각은 안 했을 겁니다.

그 소식을 들은 홍계훈과 동학군은 빠르게 협상합니다. 홍계훈은 동학군의 요구가 최대한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하겠다고 했고, 동학군은 성을 나간 뒤 무기를 반납하겠다고 했죠. 5월 중순, 지원 온 청군이 뭘 할 필요 없이 상황은 정리됩니다.

상황이 정리됐으니 이제 청일 양군은 나갈 때였습니다. 청은 그럴 생각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럴 생각이 없었죠.

일본은 철군 요구를 거부합니다. 조선은 물론 청이, 다른 나라에서 중재를 해도 마찬가지였죠. 대신에 그들은 내정 개혁을 요구합니다.

"생각건대 우둔한 남도 백성들이 교화에 순종하지 않고 감히 해당 관리와 맞서 한때 창궐하였으므로 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크게 징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소멸하는 것이 아침밥 먹는 것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고 결국 이웃 나라의 원병을 청하는 조치가 있었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일이 비교적 중요하다고 여겨 천황 폐하의 논지를 받들어 사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폐하 앞에 돌아와 공사관과 우리 나라 상인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귀국의 안위와 관계된다는 점에서 요청한다면 겸하여 조금이라도 도와 이웃 나라의 우의를 두터이 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일본국과 귀국은 모두 동양 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토가 아주 가까워서 실로 서로 의지하고 견제하는 정도만이 아닌데 더구나 서로 신뢰하고 화목하게 지내면서 사신과 예물이 오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바 이것은 역사책을 보더라도 역력히 상고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법만 굳이 매달려 임시변통하거나 안목을 넓히기를 생각하지 않고 세력을 다투면서 자주권을 세우기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찌 모든 나라들이 둘러보는 가운데 서로 버티고 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또다시 사신에게 명하여 귀국 조정의 대신들과 회동하여 이에 대한 방도를 강구하여 밝히고 서로 권하게 하였습니다. 귀 정부에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실속 있는 정사에 힘쓴다면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는 의리가 여기서 시종일관하게 되고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도 여기서 유지되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밝은 안목으로 칙령을 내려 판리 교섭 대신이나 전임 대신에게 사신과 회동하여 충분히 의논하게 함으로써 우리 정부가 이웃 나라에 대한 의리를 깊이 생각하는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않게 한다면 대세를 위하여 다행스럽겠습니다."

-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

노골적인 내정간섭, 그걸 위해서 일본은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남산에 대포가 배치됐고, 궁 앞에서 무력시위를 했죠. 17일에는 최후통첩을 합니다. 청과의 관계를 모두 끊고 청군을 철수시키라는 거였죠. 조선은 자주국이니까요. 기한은 6월 20일...

그리고 21일 새벽, 일본군은 경복궁을 덮칩니다. 조선군이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죠.


이틀 후인 6월 3일, 풍도에서 일본 해군과 병력을 수송하던 청 북양함대가 충돌합니다.

양력으로 7월 25일, 청일전쟁의 시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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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본의 무력과 협박에 의해 시작된 것이 갑오개혁입니다. 갑신정변 때 이미 일본군이 동원되긴 했지만 그건 급진개화파의 요청이었죠. 여기서 일본은 아무런 명분 없이, 다른 나라의 견제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입니다. 네 뭐 지들은 10년간 기다렸을 겁니다. 진작에 먹을 수 있었는데 못 한 잃어버린 10년이었을까요?

동학농민운동, 그건 그들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습니다. 아니 뭐 동학군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일본군 오기 충분한데 청군 부른 고종 잘못이겠죠. 아 뭐 청도 국내 반란에 외국군 부르긴 했네요. 근데 그 외국군들이 일본군처럼 청 자체를 집어삼키려고 온 것도 아니었고 청이 그럴 수 있는 나라도 아니었네요. 반면 조선은... 참 어디까지 얘기해야 될까요.

뭐 일본이 잡을 끈이 아무것도 없이 그냥 밀어붙인 건 아니었습니다.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기 좋은 인물과 손을 잡았죠.


대원군은 이 일로 다시 전권을 잡습니다. 그게 일본의 요구였죠.

동학군이 일어났을 때 역시 그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강합니다. 정말 어디서나 빠지지 않죠. 전봉준이 그의 식객으로 살았었고, 관군에 대원군의 내정 개입을 요구했습니다. 이 때 대원군은 동학군을 이용, 고종을 내쫓고 이준용을 앉히려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 권력욕 때문일까요. 그는 여기서도 일본과 손을 잡습니다. 하지만 얼굴마담일 뿐이었죠. 그저 그의 높은 인기를 이용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 때문인지, 어쨌든 일본은 아니다 싶었는지 일본과 등을 돌리고 쫓겨납니다만, 또 다시 협조하죠. 그것도 바로 다음해에, 다시 일본이 궁을 범할 때에 말입니다.

그의 개혁과 물러난 후에 보인 모습들... 뭐 자세한 건 나중에 해야 되겠지만, 그냥 그가 왕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은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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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에선 참 많은 게 결정됩니다. 한국사에서 근대의 범위를 정할 때 절대 이 이후까지 미루진 않죠. 10년 전에 갑신정변에서 이루려 했던 것은 물론 일반 백성들이 원할만한 것도 많이 이루어졌죠. 여기다 노비제도 폐지됐구요. 빠른 시간내에 급진적인 개혁, 조선에선 꼭 필요했던 개혁입니다.

+) 그리고 과거제의 폐지로 양반들은 단체 멘붕 (...)

하지만 그건 일본에 의해 강요된 개혁이었죠.

근현대사가 다 그렇겠지만, 교과서에서 이런 걸 다룰 때 정말 난감할 것 같네요. 이제 좀 눈에 보일만한 근대적인 개혁인데 말이죠. 일본에 의해 강압으로 시작됐지만 그래도 근대적이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첫 부분으로 다뤄도 되려나요.

그 때 임명된 이들은 어땠을까요. 갑오개혁은 왕권은 약화되고 내각의 힘이 강화된 편입니다. 이후 광무개혁에 비교하면 입헌군주제로 가나 하는 느낌이 나죠. 물론 고종부터 얼굴마담으로 세운 대원군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서겠죠.

그들에게 조선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어느때보다 확실히 조선을 바꿔놨죠. 그런데 그 힘은 일본에서 나오는 거였습니다. 좀 해 볼만한 기회였지만, 그들에게 가해진 제한 역시 분명했죠.

참 멘붕할만한 때겠죠.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요.

자력으로 근대화 할 수 있었겠는가 하면 참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일본에게 먹히지 않는 것일테니 더 어렵겠죠. 어지간히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확실한 게 있다면, 이 때를 기점으로 조선이 뭘 할 수 있을 때는 지났다는 것이겠죠. 일본은 최소한의 눈치도 보지 않았고, 다음 해에는 더 경악할 짓을 저지릅니다.

청일전쟁의 시작, 그건 곧 조선에게는 망국의 시작이었습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8-2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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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31 23:03
수정 아이콘
참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크크..

근데 현재 학계 주류는 근대화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요?
일본에 의한 강제 근대화론? 혹은 자생적 근대화론?
예전에 이 문제로 교양과목 시간에 토론을 했던거 같은데 결론이 안났던거 같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자생적 근대화론으로 가르치지만..
아주 객관적으로 봤을때 식민지 근대화론도 나름 논리가 있다고 판단되었던 거 같습니다.
눈시BBbr
13/07/31 23:53
수정 아이콘
지금은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반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허수열 교수처럼 경제사의 입장에서 갑론을박하기도 하구요. 이 분은 원래 같은 길을 걷다 갈라선 쪽이기도 하고... 아무튼 아직 식근론 자체를 뒤엎을 정도의 공격은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쌓은 데이터로 싸우는 건데 식근론자 쪽을 능가할 데이터를 쌓고 그걸로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도출하지 않는 이상은 힘들겠죠. 그래서 저는 식근론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있구요.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전공시간에 교수님께 질문했을 때 이 부분은 동감하시더군요. "식근론을 아예 부정하는 쪽에서는 근대화라는 걸 너무 좋게만 본다"는 거요.
제가 아는 건 이 정도입니다 '-'a;
13/08/01 00:10
수정 아이콘
아무리 학자라 해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막 주장하기는 국민 정서를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어려운 부분이 있을테니..
역사학자들의 고충이 있을거 같습니다. 근대화 자체가 현대 민주주의 선행요소로 생각되니 아무래도 좋게보는부분이 많을 거 같네요..

어쨌든 비전공자라 항상 눈시BBbr 님의 글 너무 재밌게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나다라마법사
13/07/31 23:30
수정 아이콘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눈시BBbr
13/07/31 23:53
수정 아이콘
늘 감사합니다 ^^
Practice
13/08/01 10:34
수정 아이콘
조선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몇 십 년 전에 변화를 생각해야만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겠죠... 잘 읽었습니다.
13/08/01 14:02
수정 아이콘
종교개혁이후를 근세의 시작으로 본다면 근대는 자유주의 이후 신이 인간을 저멀리 초월한 시대인데 우린 그런 경험이 없어서 그냥 서구화 정도로 봅니다 무당도 벤쯔탈 수있죠 이것을 무당의 근대화로 볼 수도 안볼 수도 있지만 앞뒤의 근대화는 의미가 다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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