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11/21 02:56:13
Name 이사무
Subject 환갑의 소녀
어릴 때 우리 집엔 큰 전축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음악 듣는 걸 싫어하시고 이명 때문에 시끄러운 걸 못 견디시는
아버지 때문에 그 전축에서 음악이 나오는 날은 그리 자주 있진 않았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결혼 후, 고향이던 부산에 친구와 가족을 모두 두고 타향살이를
하시게 된 엄마는 남편과 자식 말고는 딱히 따로 즐길만한 일들이 없으셨으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 누나를 임신 했을 때, 하나뿐인 언니를 보러 이모가 서울에 다녀가시다 돌아가신 이후  더욱 외롭고 힘드셨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집에 당시에 유명했던 조용필이나 몇몇 가수들의 레코드판이 있었지만
집안 일과  할머니 수발 및 병원을 모시고 다녀야 했던 엄마가  가끔이나마 틀며
제일 좋아하는 가수라고 말하신 것은 언제나 송창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부터 송창식의 노래는 꽤나 많이 듣고 자랐다. 하지만 레코드판의 표지(?) 말고는 그 사람을 티비에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까,  엄마가 그토록 좋아하신다는 송창식이  티비에 나온 다는 방송 편성표의  신문기사를 보고 엄마는 사용할 줄도 모르시는 비디오를 가지고 녹화를 누나와 형에게 부탁하며  기다리고 기다리셨다.

그리고 마침내 송창식이 티비에 나왔다.  
그런데 어릴 때 부터 그토록 많이 듣던  목소리와 다르게(?) 티비에 모습을 드러낸 그의 모습은
살찐 얼굴에, 탈모가 진행되는 산발, 게다가 기괴하게 생긴 한복을 입고
노래를 부를 때, 눈을 감고 입술을 떠는 기인의 모습이었다.
누나와 형, 그리고 나는 엄마가 그리 좋아하시는 가수를 티비로 처음 보시는 순간임에도
어렸기 때문일까  ,  계속 그 모습을 비웃으며 깔깔거리고 웃어댔다.
엄마는 난처해 하시면서도 그래도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야 라고 하시며

' 한 번도 노래하는 걸 직접 본 적이 없네...' 라고 조용히 되네이셨던 것은
학교도 가기 전의어린 내게도 뚜렷이 각인 되었다.


그리고 어느 덧, 그렇게 철없이 웃어대던 삼남매는 30대를 훌쩍 넘었다.

서른 살이 되기 훨씬 전부터, 나는 틈틈이 인터넷으로 송창식의 공연을 찾아보았으나
공연은 커녕 어디 외딴 무인도에서 콘서트를 했다는 기사나 가끔 나올 뿐이었다.
그래도 가끔 트윈폴리오나  다른 가수들과의 협연이 있었지만
그 때 마다 엄마는  티켓 값이 비싸다고 거절을 하셨고,
나 역시 쉽게 티켓값을 낼 경제력이 없어서 그냥 한번 묻고 넘기는 식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놀러와 란 프로그램에서 세시봉 특집을 방송했다.
엄마는 그 때도 바쁘셔서 못 보신 걸 케이블  VOD 구매를 해서 앉혀놓고 보여드렸더니 너무나도 좋아하시더라.

그 방송 뒤로, 엄청난 열풍이 불어서 티비에도 공연으로도 송창식은 예전에 비해서 훨씬 자주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안 좋았던 집안 일들과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시고 있던 엄마는 수 차례 내가하는 권유를 계속 거절하셨다.

재작년 쯤이었던가.....
집안 문제로 우울증(이었다고 생각한다)처럼 보이는 엄마의 모습에 또 다시 콘서트를 가보라고 말을 했다.
안 좋은 일들로 항상 날카로워져있던 엄마는 내가 그런 류의 얘기만 꺼내도 항상 화를 바로 내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했다.

"엄마 송창식도 이제 곧 70이 다 되고, 엄마도 60 중반이 돼,  그 사람이 언제까지 노래할 지 아무도 모르고
엄마가 언제까지 공연을 보러 갈 수 있을 지도 몰라"

라고 혼날 각오로 말을  했더니, 의외로 선뜻 그럼 예약해보라고 하신다. 그래서 제일 비싼 자리로 두 장을 끊고,
같이 갈 사람들을 물색했다. 아버지야 당연히 귀가 아프시다느니 라고 거절하실 테고
만에 하나 같이 가시더라도 평생 엄마가 좋아하시는 것들을 무시하곤 하셔서, 같이 가도 엄마가 스트레스를 받으실 건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막내아들인 나는 엄마랑 같이 있으면 서로 들쑤시는 지라 결국, 엄마가 가장 편안히 여기는 누나에게 부탁을 해서
조카는 내가 대신 보고 둘이서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40년.....


엄마가 그토록 좋아하는 가수가 데뷔한 지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엄마는 40여년 동안 한 번도 그 가수의 공연을 본 적이 없으셨다.


그 날 밤, 11시가 다 돼서야 엄마는 집에 돌아오셨고
나는 평생 엄마의 그런 표정을 본 기억이 없었다.

환갑이 넘으셔서 그렇게 설레고 상기된 표정이라니...
엄마는 너무 벅차서 소감도 제대로 말을 못 하셨고
새벽까지 흥분하셔서 잠을 못 이루셨다.

어려서는 외증조부, 외조부님들 때문에 집에서도 노래를 못 부르고 들으시고
결혼 후에는 남편 때문에 맘껏 음악도 제대로 못 들으시더니
마침내 환갑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가신 게 안타까워서
나도 그 날은 잠을 못 이뤘다.


예전에 한창 음원이 불법으로 다운받는 게 당연시(?) 되던 시절에도
엄마가 원하는 곡들은 돈주고 받아야 한다며 거절했던 일도 기억이 나서 더 그랬다.
한곡에 고작 몇 백원 하는 걸 그 때는 왜그랬는지....

그래서 이제는 엄마가 차에서도 들으시라고 유료로 usb 에 다운받아 맘껏 좋아하는 음악을 듣게 해드렸다.
그 사소한 것들인데도 엄마는 너무 행복해하신다.
어릴 때 내가 듣던 송창식의 노래를 이제는  조카가 듣고 따라 부른다.



오늘은  엄마가 좋아하시는 송창식을 두 번째로  보러 가시는 날이다.
그리고 이 번엔 엄마와 둘이 가는 것은 나다.

나도 아버지처럼 음악에 그리 관심이 없어서
공연이란 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얼마전까진 공황장애 때문에 극장이나 공연장 같은 건
더욱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엔 같이 갈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나도  엄마가 그리 좋아하시는 공간에 한 번은 같이 있고 싶었다.



10시가 넘어서야 공연이 끝났다.




엄마는 오늘도 잠을 못 이루신다.

그리고 나도 잠을 못 이룬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12-17 15:27)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기아트윈스
13/11/21 03:02
수정 아이콘
아이 참...
저희 아버지도 송창식 참 좋아하시는데
놀러와에 나왔다는 이야기 듣고 무려 MBC에서 유료결제해서 다운받아드렸던 기억이 나네요
이사무
13/11/21 03:14
수정 아이콘
아마 그 때는 수 많은 부모님 세대 분들이 다 좋아하셨을 거 같아요.
13/11/21 03:09
수정 아이콘
어머님께서 남은 여생동안 많이 많이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사무
13/11/21 03:15
수정 아이콘
흐흐 여생이라고 하시기엔 아직 수십년(?)은 더 있어야 하지만 엄마도 계속 건강하시고, 송창식 씨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노래 부르셨음 합니다.
모든 어머니들은 행복하실 권리가 있지요.
오렌지 캬라멜
13/11/21 04:03
수정 아이콘
5년전쯤 어머니랑 같이 조용필 콘서트 보러 간 기억이 나네요
처음으로 직접 본다고 좋아하셨지만 정작 보고오시더니 사람만 많고 조용필 얼굴도 안 보인다고 별로라고 하신 기억이..
축구장에서 콘서트하는 조용필의 위엄이랄까.. 정말 사람은 개미만하게 보이는 자리였어요.;
그 뒤로는 그냥 CD로 음악만 들으시네요
이사무
13/11/21 13:04
수정 아이콘
저도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예전에 예매할 때도 다른 분들이
돈 조금 더 들이더라도 꼭 좋은 자리를 가라고 하시더라구요.
다음 번엔 좀 더 좋은 자리로 가보시는 거도 좋을 거 같아요.
강가의 물안개
13/11/21 08:56
수정 아이콘
너무 잘하셨네요....멋진 아들이세요~~최고시다~!!!
이사무
13/11/21 13:15
수정 아이콘
아닙니다;; 자식은 평생 죄인이란 말을 요새 절감하면서 사는 중입니다 흑
강가의 물안개
13/11/21 13:20
수정 아이콘
철드셨네요...그런 아들님을 보시며 어머님은 밥안드셔도 행복하실것 같아요.
세상의빛
13/11/21 09:17
수정 아이콘
멋집니다!!
이사무
13/11/21 13:15
수정 아이콘
멋질리가요.... 오늘 다시 보니 좀 오그라 들기도 하네요 흐흐
밀물썰물
13/11/21 10:57
수정 아이콘
흐믓한 이야기네요.
요즘 집사람이 자기 어렸을 때 듣던 음악이라면 조용필 이선희 음악을 핸드폰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부엌에서 설걷이 하면서도 듣는데 너무 행복해 보입니다. 행복이란 참으로 어찌보면 쉬운 것인데, 남들 행복만 따라다니다 보니 내가 뭘하면 행복한지 잘 모르고 살게 되지요.
이사무
13/11/21 13:16
수정 아이콘
어제 공연장을 가보니 부부동반으로 참 많이들 오셨더라고요. 나중에 아내분과 함께 가보시는 거도 좋으실 거 같아요
아타튀르크
13/11/21 13:42
수정 아이콘
명문에 효 또한 지극하여 관작이나 비단을 내림이 마땅하나
시대가 달라 마땅한 상급이 없으니 어이해야 한단 말이오.

우리모두 영자께 청원하여 혹 이사무공이 실언을 하더라도
렙따 집행유예권을 드림이 어떨는지요?
이사무
13/11/21 17:01
수정 아이콘
참형이나 안 당하면 다행입니다 흐흐
가만히 손을 잡으
13/11/21 14:11
수정 아이콘
아. 좋네요.
제가 로또되면 송창식 콘서트표 보내 드릴게요.
이사무
13/11/21 17:02
수정 아이콘
넵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13/11/21 16:52
수정 아이콘
멋진 아드님이시네요.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사무
13/11/21 17:02
수정 아이콘
안 멋지니까 죄송한 거지요 흐흐
13/11/21 23:09
수정 아이콘
제가 로또가 되든지 돈을 오지게 벌든지 하면
까짓거 송창식씨에게 돈을 엄청 드리든 가서 빌든
어머님과 단독공연 해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빈털털이라 추천박고 가니 꼭 기억해 주세요.
감동받고 갑니다.
이사무
13/11/22 01:52
수정 아이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IntiFadA
13/11/25 11:14
수정 아이콘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동시에 뭔가 슬퍼지는 글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머님과 글쓰신 분 모두 내내 행복하시길 ^^
13/11/25 18:52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불건전한소환사명
13/12/17 15:59
수정 아이콘
이야 이게 텍스트를 통한 간접경헙인가요.
정말 마음속에서 뭐가 느껴지면서 제가 다 어머니께 효도드린 느낌이네요.
이제 마음놓고 집에서 빈둥대도 괜찮겠어요.
곧내려갈게요
13/12/17 16:17
수정 아이콘
으악 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곧내려갈게요
13/12/17 15:59
수정 아이콘
멋지십니다.
가야로
13/12/17 16:10
수정 아이콘
저도 어머님께서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러 같이 가려고(어머니 : 서태지만 듣지말고 이것도 좀 들어봐~ 이 가수가 진짜 좋다니까.)
내키지는 않았지만 준비하고 있었는데 공연 일주일전에 자살로 세상을 떠났죠.

그렇게 어머니는 처녀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좋아하는 그 가수의 공연을 끝내 보지 못한걸 내심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는 왜 그런 느리고 재미없는 노래를 굳이 현장에서 들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보니 내 평생 그 가수의 공연과 목소리를 듣지 못한게 가장 아까운 기억으로 남습니다.

김광석...........조금만 더 오래 사시지......
무감어수
13/12/17 22:12
수정 아이콘
당신은 이미 효자 가운데 효자 입니다. 그 중간 역할은 송창식씨가 해 줬구요.
흐믓한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13/12/17 23:07
수정 아이콘
대단하십니다. 어머님한테 정말 평생 남은 좋은 기억이 되었을것 같네요.
이런거하기가 참 쉽지가 않은데..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476 [리뷰] 변호인 - 보고싶다, 노무현 (스포있음) [30] Eternity11739 13/12/21 11739
2475 2013 한국 프로야구 타격부문 팀별 총결산. [23] 凡人7605 13/12/19 7605
2474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을 구하고 왔습니다. [36] 저 신경쓰여요14117 13/12/18 14117
2473 피지알하면 모다? [54] 연필깎이11359 13/12/17 11359
2472 휴대폰 싸게 사기 가이드 1. 용어 설명 + 왜 그들은 무료라고 하는가? [61] 계피14905 13/12/17 14905
2471 [스타2] End가 될지.. And가 될지.. [191] 크고사나운너굴이18301 13/12/13 18301
2470 병원에서 미녀 만난 이야기 [55] 알킬칼켈콜19089 13/12/07 19089
2469 스피커에서는 심장 박동 소리가, 제 입에선 웃음이, 제눈에는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101] Red Key16086 13/12/06 16086
2468 짝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직업에 대하여. [39] 헥스밤23984 13/12/04 23984
2467 황제 폐하는 피곤하십니다. [24] 신불해22707 13/12/04 22707
2466 자취생의 식단, 고등어를 구워보자. [36] 저글링아빠15043 13/12/03 15043
2465 죽은 남자가 바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망자에겐 평온을. [26] 헥스밤12165 13/12/03 12165
2464 13시즌 기아 타이거즈의 몰락 원인 분석과 스토브리그 평가. [98] 凡人12722 13/11/29 12722
2463 어머니와 삼겹살에 관한 추억 [32] 고구마줄기무��10525 13/11/21 10525
2462 환갑의 소녀 [29] 이사무13874 13/11/21 13874
2461 한국의 97년 외환위기 [21] endogeneity16040 13/11/21 16040
2460 세이버메트릭스-야구 스탯 살펴보기(타율부터 XR까지) [38] 밤의멜로디12765 13/11/20 12765
2459 [우주이야기] 챌린저호 우주왕복선 대참사 사건 [15] AraTa_Higgs17114 13/11/16 17114
2458 업로더 김치찌개 [111] 김치찌개14450 13/11/14 14450
2457 [패러디] 운수좋은 날 [29] 감모여재10825 13/11/06 10825
2455 어디든지 가고 싶을 때 - 2-1. 별밤열차 V-Train [35] ComeAgain8716 13/11/04 8716
2454 '외로움' 권하는 사회 [53] Abrasax_ :D15643 13/11/04 15643
2452 간암수술 후기 [97] 2018.1022563 13/10/29 2256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