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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1/22 09:29:05
Name 트린
Subject [내왜미!] 2화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5)








슬슬 방 풍경에 눈이 익은 은실은 눈앞의 게임에 호기심이 생겼다.
덕후들이 하던 미니어처 게임은 그나마 익숙한 디앤디 미니어처가 아니었다. 플라스틱 본연의
색깔을 품은 회색 돌무더기와 종이로 만든 건물벽 들이 잔뜩 깔린 연두색 판 위에, 양 반대편
에 수많은 플라스틱 인형들이 진을 이루고 있었다.
2대2인지 sf적인 장비를 한 인형과 밀리터리적인 인형 들이 수성과 중호 앞에, 영화 에일리언
같은 괴물 집단과 깡통 같은 것을 뒤집어썼는데 묘하게 데스 메탈풍을 풍기는 장갑 군인 집단
이 원과 양익 앞에 자리했다. 괴물과 장갑 군인들은 열심히 앞으로 밀고 가는 형국인 반면, 수
성과 중호의 군대는 거의 전진하지 않은 채 양쪽으로 퍼져 있었다. 수성과 중호의 부대에는
포나 탱크 같은 차량이, 상대방은 괴물이나 큰 녀석들이 많았다.
잔디밭을 연상시키는 판 위의 장난감들을 유심히 보던 은실은 이 게임을 얼핏 미군 부대에서
접한 기억이 났다.
은실이 게임 이름을 물으려고, 가까이 앉은 원은 이를 눈치 채고 대답해 주려는 찰나 수성이
외쳤다.


“자자, 선물 선물.”


폴이 생일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가져온 상자를 건넸다. 수성은 굶주린 악어목 파충류강 학명
크로코딜루스 닐로티쿠스 통칭 나일악어가 육질 좋은 고기에 달려들 듯 성급한 손놀림으로
상자를 싼 포장지를 찢어발기며 물었다.


“춘리야?”
“춘리가 박스에 어떻게 들어가.”
“그럼 춘리 전화번호가 든 노트북.”


사람들이 웃는 동안 레고 7962 아나킨과 세불바의 포드 레이서 상자가 드러났다. 수성은 뜨거운
물건이라도 집은 것처럼 얼른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날 중독시키려고!”
“들켰네.”
“하지만 에피소드 1, 2가 백신이 되어서 스타워즈 중독을 막고 있으니 걱정 없어. 그게 뭐야. 4,
5, 6 잘 되니 1, 2, 3 만들고. 3편으로 장사 잘해 먹었으면 깨끗이 정리해야지.”


은실은 폴의 이마에 살짝 핏대가 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게 아니고 이미 조지 루카스는 에피소드 5에서……”


은실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이게 워해머 사만인가요?”
“네, 맞아요.”
“저 악의 혼령에 홀린 듯한 대게 비슷하게 생긴 놈은 뭐예요?”


30센티미터가 넘는 길이에, 로봇 같은 몸체, 양팔에는 거대한 포를 단 웅장하게 생긴 유닛을 그렇
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은실의 물음에 원은 약간 당황하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디파일러란 유닛이에요. 카오스 스페이스 마린이라는 진형의 중형 유닛이죠. 몸통 한가운데 달
린 배틀 캐논을 쏘면서 전선을 휘저을 생각이에요. 그러고 보니 게를 닮긴 했네요.”
“네, 야자 게. 금방이라도 야자열매 찾아서 까먹을 것처럼 보여요.”


원의 웃음이 더 커졌다.
웃음과 워해머 이야기가 두 사람의 말다툼을 멈추게 만들었다. 수성이 얼른 워해머 정리하고 같이
저녁 먹으면서 놀자고 제안했다.
은실이 물었다.


“다 끝내려면 얼마나 걸려요?”
“두어 시간 더 해야 해요.”
“네?”


그 시간쯤이면 슬슬 일어나야 할 판인데 저녁을 먹는다고? 자신도 그렇고 폴도 내내 심심할 텐데?
은실이 얼굴을 찡그리자 수성이 얼른 말을 바꿨다.


“바로 끝내겠습니다. 항복입니다. 주사위를 던집니다.”


은실이 만족해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번엔 게임하던 상대방이 야유했다.


“형 진짜 너무하네요. 우리 야자 게 손맛 좀 보셔야죠.”


양익도 혀를 차면서 거들었다.


“생일이라고 완전 맘대로 하네. 님아, 생일빵 한번 당해 볼래요?”


들어 보니 수성의 부대는 임페리얼 가드, 중호의 부대는 타우라고 사격에만 특화되어 있고 접근전
은 젬병인 친구들이었다.
양익이 약간 짜증난다는 얼굴로 설명했다.


“오늘 수성의 부대, 임페리얼 가드의 전략은 보병인 가드맨들이 앞에서 빵빵한 숫자를 무기로 죽
어주면서 시간을 끄는 동안 요기 요, 중포들이 저 디파일러 같은 카오스 터미네이터 스쿼드나 제
타이라니드 카니펙스를 조지려고 무진 애를 쓰는 식이었어요. 한 시간 반 내내 저희 팀이 한 일이
라곤 적 본진으로 뛰어가다가 사격 맞으면 터프니스, 그러니까 유닛이 가진 피부나 장갑을 뚫고
들어오나 안 오나 판정하고 죽으면 판에서 빼고, 도망가는 녀석들 사기체크해서 추스르는 게 고
작이었죠.”
“캬, 재밌었겠구먼.”
“조용히 하세요, 중공군 지휘관님.”
“맞아요. 원이 말대로 딱 중공군이었죠. 저 엄청난 머릿수를 보세요.”


수성이 이죽거렸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샤카 줄루의 아프리카 창병이 일렬로 선 씬레드라인시대 영국
군에게 뛰쳐 들어오는 식이었는데.”
“진짜 생일빵 해요?”
“그러니깐 내가 졌다니깐요. 항복한다니깐요.”


덕후들의 말싸움을 흘려들으며 은실은 방을 살피는 기회를 가졌다.
열 평 남짓한 원룸인 옥탑은 남향인 창문 쪽 벽을 제외하고 모든 벽과 모든 구석에 서가가 놓여
있었다.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보드게임은 창문 밑에 놓인 텔레비전 옆 서가 하나와 각
서가의 맨 윗 공간만 차지하고, 나머지는 모두 각종 책이 꽂혀 있었다. 그런 서가가 열네 개인데
대충 200권 꽂혀 있다 치면 2800권이었다.


‘의외네.’


한데 자세히 보니 책 종류가 극과 극이었다.  『무민 골짜기의 친구들』 같은 동화책 옆에 『공
항운영과 항공보안』, 『요리의 과학』 옆에 『알기 쉬운 사람 해부학』이 있는 식이었다.


‘꽂아놓은 꼴 보니 중구난방이네. 미니어처 게임하고 색칠하고 부대 짜느라 책 읽긴 했겠어. 그
냥 장식이겠지.’


책을 왜 이리 많이 샀는지 물어보려다가 은실의 시선이 옛날 양말 상자 크기에 2차세계대전과
관련 있을 법한 일러스트가 인쇄된, 서로의 관계를 증명이라도 하듯 일렬로 가지런히 꽂힌 물건
에 멈췄다.


“수성 씨, 저건 뭐예요? 옛날 박스형 패키지 컴퓨터 게임인가요?”


한참 말씨름을 하면서 장난기 어렸던 수성의 눈매가 금세 부드러워지더니 추억이 가득 담긴 것
으로 바뀌었다.


“아, 저거요. 밀리터리 보드 게임이에요. 저 녀석 때문에 희한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죠. 지금
은 다들 바빠서 못 만나고 있어요. 참, 좀 있음 저 게임 같이 하던 친구들 중 한 명이 와요. 되게
특이하고 재미난 친구예요. 아스 님이랑도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거예요.”




*



수성은 한숨과 함께 룰북 번역을 끝마쳤다. 1년여의 사투가 이루어 낸 영웅적 업적이었다. 책 맨
끝의 찾아보기가 남았지만 복잡다단한 규칙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동안 거의 모든 것을 외웠기에
그것까지 번역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제대 후 가져온 깔깔이 차림의 그는 한글 프로그램을 종료
하고, 그나마 보일러를 안 튼 방에서 가장 따뜻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뿌듯함은 온데간데 없고 피곤함과 함께 비관이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번역하면 뭐하냐고."


수성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의 멍청함을 비웃었다.
이번에 번역한 어드밴스드 스쿼드 리더(* Advanced Squad Leader. 이하 ASL.)란 게임은 2차 세계
대전을 다룬 분대 전투 보드 게임이었다. 이 게임을 설명하자면 글쎄...... 마소(마이크로 소프트)
가 낸 분대 전투 시뮬레이션 게임인 클로즈 컴뱃 시리즈와 닮았다고 해야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클로즈 컴뱃은 ASL의 직계 자손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ASL은 70년대 후반에 나온 게임이니까.  
ASL은 우리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봤던 그 모든 분대 단위 전술 행동
을 가능케 해 주는 게임이었다.
분대장(리더)과 분대가 게임의 기본 단위이며 가옥과 가옥을 넘나들며 적과 싸운다. 탱크 같은
중장비는 소대나 분대가 아닌 단 한 대 단위로 등장한다. 우수한 분대장은 사격, 육박전, 사격을
받았을 때의 괴멸 여부 체크 등에 도움을 준다. 게임은 시나리오를 거듭하면서 다른 상황과 다
른 유닛들을 제안한다.
수성은 우연히 외국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ASL을 발견했다. 그는 당장에 피가 끓어 지름신의
제단 앞에 자신의 신용 카드를 산제물로 바쳤다. 그리고 80만 원이라는 출혈을 감수하며 기본
팩과 역사 속의 유명 전장들을 시나리오 화한 확장팩들을 대부분 사 버렸다.
우여곡절도 무척 많았다. 이베이에서 소문이 나서 두 배를 줄 테니 자신에게 되팔라는 메일이
왔던 적도 있었고, 한 푼이라도 아껴 보겠다고 우체국 통관 쪽에 수입 가격의 근거로 제시해야
하는 서류를 위조한 적도 있었다.
보드 게임만 사서 방 안을 채운다고 부모님에게 듣는 소리가 싫어 ASL이 왔을 때는 싸구려 중고
컴퓨터 게임이라고 둘러대는가 하면 데이트 비용이 없어서 애인과 잠시나마 불화를 겪기도 했
다.
머릿속에서 휙휙 지나가던 과거의 쓰라린 기억들이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물에 잉크를 풀었을 때처럼 의식이 점차 아래로 확산되다가 하얗게 사라졌다.
수성은 잠이 들었다.




*



다음날부터 수성은 플레이어 구하기에 나섰다. 그는 곧 과학 기술의 발전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때만큼 하이텔이 사라진 것을 원망한 적도 없었다. 예전 같으면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천리안이 건재해서 거기에 플레이어 공지를 올리면 그만이었다. 그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알
아서 보고 연락을 했다. 그러나 인터넷이 활성화된 이후로 수많은 TRPG(*보드게임처럼 사람들
이 모여서 마스터란 심판 겸 감독이 만든 시나리오를 플레이어들이 탐험하는 오프라인 게임.
가장 유명한 시리즈로 던전 앤드 드래곤스가 있으며 작품 내 디앤디 미니어처를 같은 회사가
만들었다.) 플레이어와 보드 게임 플레이어가 자신들만의 사이트를 만들어 흩어졌다. 그러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단 성향 파악부터 시급한 일이었다. 경매 게임
을 좋아하는 팀 사이트에 워게임 공지를 올린다든지 하드코어 유저에게 카탄을 추천하면 어색
할 뿐더러 그야말로 헛짓이기에.
그는 검색기에서 보드 게임을 검색어로 지정하여 상위 순위 십 몇 개를 뽑았다.
그리고 사이트 안에서 게시물을 무작위로 수십 개 읽어 분위기를 파악한 뒤 그중 몇몇 군데에
다음과 같은 공지를 올렸다.


  제목 : 분대 전투 시뮬레이션 ASL 플레이어 모집합니다.
  
  본문 : 제목대로 ASL 플레이어를 모집합니다. ASL은 리더 중심의 (중략)
  토요일마다 시간이 나면서 잘 결석하지 않으실 분이면 좋겠고, 성별은
  상관없습니다. 구로에 있는 제 자택에서 플레이하니까 참고하십시오.
  2차 세계 대전사 해박한 분과 영어 가능자 우대이며, 제 일요일 TRPG 플
  레이까지 참가하실 수 있는 분은 대환영입니다. D20 모던을 플레이하는
  데 요즘 플레이어가 많이 사라져서 보강이 필요했거든요. ^^
  4인 마감이니 첨부한 메일 주소로 신청서 빨리 보내 주십시오.


공지를 올린 지 아흐레가 지났다. 새로운 플레이어와 세상사를 이야기하면서 게임을 즐기겠노
라는 희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동안 문의 편지는 딱 세 통 왔다. 고2인데 공부 때문에 3주
에 한 번 참가 가능하다는 편지, 본문에 길게 설명했는데 ASL이 무슨 약자인지 묻는 뜬금없는
편지, 중고 TRPG 서적과 보드 게임을 팔고 싶은데 생각 없냐는 편지.


'제약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던 거군.'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저런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본인이 재미를 즐기기 힘들었다. 2차 대전사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전혀 모르면 도로에서 노출되었을 때 분대를 깔아뭉개려 달려오는 티거에
게 얼마나 공포를 느끼겠는가? 스탈린 공방전에서 소련군은 하수도를 이용해 기습이 가능하고,
독일군은 이용하지 못하는 이유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영어 문제는 더욱 그랬다. 기본 팩은 자기가 번역을 해서 플레이에 지장이 없겠지만 이 ASL이
란 놈은 확장팩이 나올 때마다 또 새로운 규칙이 등장했다. 박격포가 나오면 박격포 규칙이, 하
천을 건너는 보트가 나오면 보트 규칙과 물살 흐름 규칙이 새로 나오는 식이었다. 규칙이라고
해 봐야 1 더하기 2는 3이다, 한 칸 움직이는 데 0.5가 든다, 주사위를 12이상 굴리면 고장이다
등이었지만 이런 것이 수백 개. 컴퓨터면 모르겠지만 사람은 결국 규칙 책을 참고해야만 했다.
확장팩도 번역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싫다.
모든 플레이어가 부분적으로 쫙 맡아서 한번에 했으면 하는 게 이제는 번역에 질린 수성의 솔
직한 심정이었다. 혼자 맡아서 완벽히 해 줄 사람이 있음 더 좋고.
상심한 수성은 실망한 나머지 다 때려치고, 요즘 유행하는 유희왕 카드 게임이나 구슬왕 게임
이나 해 볼까 하는 자폭적인 생각을 하였다. 플레이어가 아무도 없는 게임을 80만 원치나 사놓
고 마음 고생하는 것보다는 국민학생이나 중학생, 또는 유희왕 동인녀 사이에서 게임하는 것
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열이틀째가 지난 시점이었다. 수성은 습관처럼 메일함을 열어 보았다. 그러고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네 통의 편지가 있었는데 제목이 전부 보드 게임 모임 참가를 희망하는 것이었다.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두 명은 영어 강사이고, 한 명은 무역 관련업 종사자로서 바이어 접대
를 맡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마지막은 사진을 첨부한 미녀 플레이어로서 (이게 사실
왕 좋았다!)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하며 첫 워게임 플레이인만큼 이해해 달라고 적어 놓았다.
(당연히 이해하지! 에구, 귀여운 것!)
게다가 이 네 명 전부 일요일 TRPG 플레이에도 참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역시 마지막 여성 플
레이어만 TRPG 경험이 없을 뿐 나머지는 경력자였다.
웃음은 박장대소로 변했다. 수성은 이렇게 우수한 플레이어들을 한꺼번에 얻다니 자신의 행운
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장 답장을 적어 네 명에게 첫 모임을 이번주에 하자고 회신하였다. 플레이어들은 전
부 직장인이라서 토요일 일곱 시에나 가능하다고 말했다. 밤샘도 상관 없다는 이야기도 덧붙
였다.


"집안 반대 없이 밤샘까지 마음대로 가능한 플레이어라니 대박이군!"


수성은 무조건 OK였다. 그는 기분이 좋아 요 근래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



초겨울은 해가 빨리 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해는 6시 28분에 졌다. 주위가 어두컴컴했다.
새로운 플레이어들은 약속 시간에 정확히 맞춰 모두 도착했다. 수성이 크게만 놀라지 않았으면
이 점도 무척 좋아했을 것이었다. TRPG든 보드 게임이든 플레이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10분
에서 30분, 크게는 한 시간이나 아예 안 오는 등 약속을 쉽게 어기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는 왜 늦었는지 연락이나 해명을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비상식적인 인간도 만나 보았다.
각설하고 수성이 크게 놀란 이유는 플레이어들이 전원 외국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닉네임으
로 자신을 지칭했고, 사진 첨부한 여자는 동양인이었기에 이를 전혀 몰랐다.
자신을 다크 스폰이라고 칭했던 영어 강사 스티븐 발러는 미국인. 블러드스테인이라는 닉을 쓰
는 영어 강사 알프레드 슐츠는 독일계 미국인. 몰록이란 닉을 쓰고 무역업을 한다는 표트르 브
롬코프스끼 뻬이짜는 당근 러시아인. 마지막으로 혈해란 닉을 쓰는 대학원생 칭링은 대만인.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단 하나. 백옥같이 피부가 새하얗다는 점.


"대체……."


수성은 금발, 홍발, 은발, 벽안 등을 앞에 두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군대 복무 시절 UFO를 본 게
자신의 인생에 가장 놀라운 순간(언제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번 해 보겠다.)일 것이라고 확신
했지만 오늘 일은 그것을 뛰어넘었다. 수성은 문득 이 일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판단
을 했다. 특이점이 두 개도 아니고 네 개나 모였을 경우에는 서로간에 어떠한 연관 관계가 있다
고 생각해야 옳았다.
이 경우에는 추측은 단 하나뿐이다.
수성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네 명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서로 아는 사이시죠?"


슐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전라도 억양이 섞인 유창한 한국어 사용자였다.


"사실 야들허고 나가 친구랑깨요. 헌데 말이요. 우리 팀 마스터가 갑자기 잠적해 부러서요. 보드
게임허고 TRPG를 함께허는 팀을 구하고 싶어서 요로코럼 되었어요. 이해 좀 해 주쑈."


……누가 이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줬는지는 몰라도 장난기가 가득해서 아니면 사투리를 전파
해야 한다는 일념 아래 끊임없이 노력한 게 틀림없었다. 전라도에서도 저렇게 심하게 사투리 쓰
는 사람들은 50대 이상 또는 깡촌에 있는 사람 말고는 찾아보기 힘든데.
발러가 끼어들었다. 그는 약간 조심스러운 어투였다.


"본의 아니게 속여서 죄송합니다. 마음 상하셨나요?"
"아뇨, 아뇨. 같은 팀이셨다고 절 왕따만 안 시키신다면야."


사람들은 그의 재치 있는 농담에 폭소했다. 수성이 심적 충격을 조금만 덜 받았더라면 네 명 다
이상하게 송곳니가 길고 번뜩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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