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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2/09/04 23:40:15 |
Name |
PoeticWolf |
Subject |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어. |
어느 밤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아내와 저녁을 먹고 집안을 대강 정리하고 쇼프로를 희희덕거리며 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옆에 누운 아내가 불쑥 내일 스케줄을 알려주었다.
"참, 나 내일 점심에 나가."
"누구 만나?"
"동네 부부 모임 사람들. 00이가 데릴러 온대."
근처 동네에 사는 나이가 비슷한 부부 다섯 쌍이 가끔 모이는데, 내일 또 모임이 있나보다.
"다 나온대?"
"여자들만."
눈꺼풀이 뻑뻑해 얼른 대화를 닫았다.
"재밌겠네.... 아함.... 점심..... 하움..... 맛있게 먹고 와......."
그리고 난 정신을 잃었다.
알람 소리에 맞춰 몸을 일으키니 아내가 같이 일어난다. 그러더니 주섬주섬 옷을 챙겨 주고 밥을 차리기 시작한다. 임신을 한 이후로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는 아내였는데, 유독 오늘 아침은 상쾌한걸까? 씻고 나와 상에 앉으니 아내가 맞은 편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아내 몫의 밥은 없다.
"왜? 같이 먹지않구?"
"오빠 가면 더 잘거야. 그리고 점심 약속 있다고 했잖아."
"아, 그렇구나.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
아아, 오랜만에 약속이 잡혀 신났구나. 아내를 부른 그 모임 아줌마들이 고마웠다.
오랜만에 배 든든한 남편이 되어 출근을 했다. 아내의 아침 대접에 상사병(상사를 피하게 되는 병)이 나을 지경이었다. 회사 건물로 들어서는데 아내가 이번엔 전화를 걸어왔다. 아내야말로 갑작스런 상사병(도시괴담 수준의,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는 전설의 병)을 앓게 된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응응. 어쩐 일이야?"
그러나 아내의 목소리엔 애교 대신 불안함과 초조함이 들어있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 듯한 주저주저함을 녀석의 하나밖에 없는 무촌인 난 느낄 수 있었다. 아, 상사병 맞구나. 녀석, 부끄러워 하기는.... 내쪽에서 용기를 내기로 했다.
"아하하. 나도 사랑해."
"아... 어.... 그게 아니라.... 알았어. 끊어."
찝찝하다.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 목소리를 언제 들었더라.
점심 시간에 습관처럼 아내에게 전화를 하려고 밖으로 나갔다. 전화벨이 울리기도 전에 아내가 여보세요 한다. 이 정도면 일상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상사병이.
"나도 연애할 땐 너처럼 아주 그냥 삼일 변비로 막힌 게 변기째 날려버릴 기세로 전화를 받….."
"오빠 안녕?"
내 말을 가로막는 녀석의 목소리 톤이 묘하게 올라가 있다. 아침 출근 때의 그 미적지근한 찝찝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아내의 밝은 목소리에 어쩐지 나는 채 마르지 않은, 그러나 더 말리기에는 당장 입을 것이 없어 걷어버린 빨랫줄 위 팬티를 입은 것처럼 불편한 눅눅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어.. 그래서 지금…”
“점심 맛있게 먹었어? 반찬이 부족하진 않았어?”
“어. 어. 맞다. 점심. 먹어야지 이제. 사람들 만났어?”
“응. 지금 나 데릴러 와서 차타고 가는 길이야.”
“아, 그럼 옆에 있겠네?”
“응. 오빠 점심 맛있게 먹어. 내일은 내가 더 잘 싸줄게.”
“응? 아니, 난 반찬 얘기는 꺼내지도…”
“그리고 나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오늘은 전화 조금만 해.”
전화 조금만 해. 전화 조금만 해. 전화 조금만 해. 머릿속이 왱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수수께끼가 모두 풀렸다.
왜 어제 저녁 내내 점심 약속 이야기를 미리 할 수 있었음에도 잠들기 직전에서야 하는 둥 마는 둥 살짝 들려주었는지, 왜 오늘따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아침을 챙겨주었는지, 왜 출근길에 재차 전화해서 머뭇머뭇거렸는지, 그리고 지금의 이 어색한 밝음의 출처는 무엇인지. 게다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수줍은 사내의 대찬 용기어린 고백에 이어진 그 찝찝한 반응은 다름 아니라 어느 오후엔가 TV에 정신이 팔려 아내가 긁어달라고 내민 등대신 어깨를 할퀴었을 때의 그 “거기 말고, 쫌!”과 같은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연애하느라 눈이 멀었던 시절, 아내는 친구와의 약속이 있다던 어느 날, ‘친구와 만날테니 할 얘기가 많겠지. 전화해서 쓸데 없이 방해하지 말고 이따 저녁에 데리러 가서 얼굴이나 봐야겠다.’는 나의 속깊은 배려를 “친구 남자친구는 점심 먹고 차 마실 때까지 15번 전화하드라! 오빠한테 나는 도대체 뭐야!?”라며 매몰차게 ‘메마른 감정’으로 내몰았었던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것을 깨달은 나는 “오빠한테 나는 도대체 뭐야?”라는 원망을 들었던 당시의 회사 복도가 내 주위 사방에 신기루처럼 떠오르는 환상까지 보게 되었다.
그리고 저녁이 된 지금까지 난 내가 어느 구멍으로 점심을 먹었고, 낮 동안 계속된 회의와 클라이언트 전화 사이사이에 어떻게 틈을 내어 전화를 했는지, 그리고 그 통화 때마다 아내의 전화기에 스피커폰 효과를 내려고 몇 데시벨로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애교를 떨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여자가 친구를 만날 때, 특히나 그 친구에게 남편이나 남자친구가 있을 때, 남자들이여 긴장하라. 그날 핸드폰 배터리를 세 번 이상 교체하지 않으면 차라리 감옥에 갇혀 하룻밤만에 천자문을 완성하는 편이 속 편할 것이다.
*사실 대부분 소설입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9-24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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