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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9/12 21:56:16
Name 민머리요정
Subject [야구] 불멸의 철완 최동원, 세상에 작별을 고하다.
이제 14일이 되면, 최동원 감독님이 우리 곁을 떠난지 딱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제가 작년 14일에 썼던 글인데,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다시 작성해봤습니다.

이번 한일레전드 매치에서, 비어있는 두 이름.
장효조, 최동원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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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14일 2시, 한 시대를 지배했던 대투수,
최동원이 대장암으로 별세했다.

바로 전날이었던 13일, 한국 프로야구는 30년 역사 이래로, 최초로 600만 관중을 돌파하며,
프로야구 전성시대에 역사적인 순간을 온 야구팬들 및 야구 관계자들이 기뻐했다.

이 기쁜 소식도 잠시, 최동원이라는 투수의 별세는 야구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타격의 전설 장효조가 간암으로 별세한지 불과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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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세상에 나오기 어렵다고 해서 붙여진 그의 별명,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은 5학년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두각을 나타낸건, 경남고 2학년 시절, 라이벌인 경북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날 경기였던 선린상고와의 경기에서 8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
- 이 경기를 계기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동원이라는 이름 세글자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3학년 시절,청룡기 고교야구 승자결정전에서,
김성한이 버티고 있던 군산상고를 상대로, 9이닝동안 20탈삼진을 잡으며, 완봉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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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의 외인구단에 등장하는 마동탁,
        그 모델이 바로 최동원이었다.)

아마시절 최고스타로 군림한 최동원을 모델로 만화까지 나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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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에게는 2번의 해외진출의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77년 고교졸업 직후, 롯데 오리온스 (현재, 지바 롯데 마린스) 의 감독 가네다 마사이치는,
그의 투구를 보고, 일본으로 데려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양자로 들이는 조건으로 일본리그에 진출시키고자 하지만,
당시 주변 정서로, 일본인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허용될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어르신들이 많이 반대하였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 이 내용은, 최동원 선수의 개인 인터뷰에서 직접 말씀을 하셔서 화제가 되었었는데요,
작년 가네다 마사이치, 매거진S 인터뷰에서는 그렇게 얘기 한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가네다 마사이치는 안경낀 그 선수는 기억이 나지만, 양자의 얘기를 꺼낸적은 없다고 합니다. 어느쪽이 맞는 얘기인지....
더 신기한 건, 두 인터뷰 모두 박동희 기자의 인터뷰라는 점 )

두 번째는, 81년 캐나다 대륙간컵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8이닝 까지 퍼펙트게임.
그리고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는 여러 메이저리그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특히 토론토 블루제이스 측에서, 61만$에 계약을 맺었지만,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숫한 방법을 모색했지만,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후회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해외진출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낼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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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의 최동원의 투구모습)

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고, 서울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대표로 선출되어,
프로야구 데뷔가 1년이 유보가 되었다.
그리고 83년, 롯데 유니폼을 입고, 데뷔했다.
데뷔해의 성적은 9승 / 16패 / 208 2/3이닝 / ERA 2.89 를 기록했다.
아마야구 최고스타였던 최동원이라는 이름에 기대에는 크게 못미친 기록이었다.
팀 전력이 워낙 약했던 데다가, 프로야구 출범 1년만에, 타자들의 기량이 많이 발전한 것도 한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이닝 이상 투구했고,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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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시즌은 최동원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1984년의 최동원은
51 G / 27승 / 13패 / 6세이브 / 284 2/3inn / 223K / ERA 2.40

당시의 경기수는 100경기로 한 시즌이 치뤄지고 있었다.
최동원은 100경기 중에 무려 51경기에 등판했다.

현재 시즌을 기준으로 133 G로 환산하면, 더욱 더 놀라운 기록이 나타난다.
68 G / 36승 / 17패 / 8세이브 / 397inn / 287K / ERA 2.40

굳이 133경기로 환산하지 않더라도,
최동원의 27승은, 83년 장명부의 30승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
           284 2/3 inn 투구 기록도, 장명부의 427 1/3이닝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
           223 탈삼진이라는 기록은, 굳이 133경기로 환산하지 않더라도, 역대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2위는 96년에 주형광이 기록한 221K / 126G)

최고의 시즌을 기록한 최동원은
페넌트레이스 MVP로 선정되었고, 다승과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리고 골든글러브까지 차지하며, 최고의 영광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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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해 한국시리즈, 타격 3관왕에 빛나는 이만수와 타격천재 장효조가 버티는 삼성과의 가을의 전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한국시리즈의 역사가 바로, 84년에 쓰여진다.
  최동원은 7전 4선승제로 진행되는 한국시리즈에, 5경기에 출장했다.
4경기에서 완투했고, 1경기에서 완봉승, 2경기에서 완투승, 1경기에서 완투패했다.

한국시리즈에서 그가 던진 이닝은 40이닝이었고, 평균자책점은 1.80 이었으며,
홀로 4승을 거두어, 롯데 자이언츠에 창단 첫 우승을 안겨주었다.

1차전 선발등판 9 inn 6-0 완봉승
3차전 선발등판 9 inn 3-2 완투승
5차전 선발등판 8 inn 2-3 완투패
6차전 구원등판 5 inn 6-1 구원승
7차전 선발등판 9 inn 6-4 완투승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시리즈 MVP는 유두열이 차지했는데,
7차전까지 17타수 1안타에 그쳤던 유두열이,
7차전 3-4로 뒤지던 8회에, 결승 역전 쓰리런 홈런을 때려내면서,
홀로 한국시리즈 4승을 거둔 최동원에게 MVP 투표에서 이겨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이 사건은, 83년 신인왕 투표에서, 0.369를 기록한 장효조가, 0.312를 기록한 박종훈에게
신인왕 투표에 밀려 박종훈이 신인왕을 차지한 사건과 함께 타이틀 미스터리로 꼽힌다.


- 당시 삼성 선수로 뛰었던 김용국 수비코치(現 삼성 수비코치)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KS 기간에 합숙을 하면서, 최동원의 비디오만 끊임없이 돌려봤고, 또 돌려봤고, 또 돌려봤다.
그렇게 연구하고 연구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패배했다.
최동원 1명에게 패배한 한국시리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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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을 확정하고나서, 기쁨의 축하연에서, 최동원은 쌍코피를 쏟아,
코를 막고 축하연을 즐겼다는 너무나 유명한 일화도 있다.
84년 한국시리즈는 세계의 어느 나라의 야구역사에도 존재하지 않는 대기록이며,
또 당시의 에이스 투수의 운명이 어땠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혹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승 이후에도, 최동원의 질주는 계속됐다. 85년 20승을 달성해 20승을 기록했다.
2년 연속 20승은 89-90년 선동열과 84-85년 최동원이 유이하다.
20승은, 선동열이 3차례, 최동원과 김시진이 2차례를 기록하고,
그외에 그 어떤 투수로, 두차례이상 20승 달성하지 못했다.
19승을 달성한 86년, 시즌 마지막 경기 9회에 역전타를 맞음으로,
아쉽게 3년연속 20승의 문턱에서 좌절한다.

87년까지 해마다 10승이상, 200이닝 이상 책임지고 던지는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최동원은 큰 활약을 한다.

88년 최동원은 해태타이거즈의 김대현 선수가 교통사고로 숨지자, 선수협의회를 결성하고자 했다.
선수 복지의 문제점과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함께 운동했던 선수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할수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선수생활을 보장하는 복지제도를 갖춘 선수협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나섰다.

- 당시의 여론에서는 최동원이 명예욕이 생겨서 이러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말이 많았지만,
이에 최동원은 개의치 않았다.
1억이상의 연봉을 받는 선수가, 명예를 위해서 선수협회를 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단지 어려운 선수를 돕고 싶을 뿐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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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구단들의 강력한 반발로, 선수협 결성은 결렬되고,
시즌 종료 후 11월 삼성 김시진과 1대1 맞트레이드 되었다.

고향을 등지고 야구를 한다는 것은 최동원에게 더 이상 야구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한 의도가 왜곡되어 구단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했다.

90년까지, 2년을 삼성에서 뛰었고, 91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마운드를 떠났다.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아마와 프로야구 초기의 지나친 혹사가 조기은퇴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많지만,
최동원은 비겁하게 변명하지 않았다.
당시 투수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고, 최선을 다했으므로,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8시즌 / ERA 2.46 / 248 G / 103승 / 74패 / 1414 2/3 inn / 1019 K

5년연속 200이닝을 던진 선수는 30년 프로야구 역사에 단 2명, 최동원과 정민태
최동원이 뛰었던 시즌의 경기수는 100경기였고, 정민태가 뛰었던 시즌의 경기수는 126경기였다.
그렇게 전설은 마운드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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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후, 최동원은 야구인으로 남고 싶었지만, 그를 찾는 구단은 없었다.
팬들에 대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왜 야구선수가 야구는 안하고 TV에 나온다며 비난하는 여론이 많았다.

결국 1999년 방송활동을 접고 새롭게 지도자로써, 야구로의 복귀를 노렸다.
2001년 한화이글스의 투수코치로 새로운 야구인생을 시작했다.
한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2005년 다시 한화이글스의 투수코치를 맡았고,
2007년에는 한화이글스의 2군 감독을 맡아, 2년여 동안 유망주들을 길러내고, 지도했다.

한화이글스 2군감독 재임시절, 대장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과 치료 끝에, 병세가 호전되어,
KBO 경기감독위원으로 2009년에 다시 야구계로 복귀했다.
그러다가 2010년,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경기도 포천 등지에서 요양하며,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병마와 끊임없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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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22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경남상고와 군산상고간의 레전드 매치에서,
경남상고 대표로 뽑혀 경기에 참가했지만, 건강을 이유로, 등판하지 못하고, 벤치를 지켰다.
한눈에 보기에도, 병약한 모습이었지만,
"다이어트를 해서 살이 너무 빠졌다. 다시 살을 찌우는 중이다. 나는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
그는 이렇게 말하며, 투병을 숨겼다.

마지막까지도 병을 숨기며, 강인한 모습을 보인 최동원이었지만,
지난 9월 14일, 그는 영원한 나라로,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일주일 사이에, 한국 야구계는 역사에 영원토록 기억될 큰 인물, 둘을 잃었다. 장효조, 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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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프로야구의 모든 팬들은 그를 기억하며, 추모한다.
병마와 끝까지 싸워가면서도, 그는 당당했으며, 약한 모습을 결코 보이지 않았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야구공을 쥐고 있었으며,
병세가 나아지면 다시 야구장으로, 고향팀의 감독을 해보고 싶다고 그렇게 말한 그였기에....
더욱 아쉬움을 남긴다.

더 이상 선동열 투수와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최동원만큼 강렬했던 투수가 있었을까?
이 투수는 팀의 우승을 위해서, 그 한몸을 불살랐다.
그가 던졌던 공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던진 공이 아니라,
오로지 팀만을 생각하며, 팀을 위해서 던진 혼신의 불꽃과도 같았다.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은 선수가 또 있었을까,
홈런을 맞은 타자에게, 다시 불같은 강속구를 한가운데로 찔러넣던 배짱,
평소에는 한없이 부드럽던 사람이, 마운드에 올라가면 냉철한 승부사로 변했던 그 표정.
안경을 고쳐쓰며, 발을 크게 내딛으며 던졌던 역동적인 투구폼...

그리고 병마와 싸우며, 자신의 몸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고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의연하고 그리고, 강인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최후의 순간까지도...

최동원은 그렇게 한국 야구 역사에 큰 획을 긋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오늘날 한국프로야구가 600만 관중시대를 열었고, 최고의 흥행스포츠로 부상했으며,
9구단 10구단까지 추진하고 있는 이런 발전의 역사는,
한국 프로야구의 1세대, 장효조, 최동원, 박철순, 선동열과 같은 위대한 선수들이
그 초석을 깔았기 때문이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유난히 탈도 많고, 사건도 많고, 경조사가 많은 2011년의 한국프로야구는,
한국프로야구에 유난히도 크게 빛났던 두 별이 지는 해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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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당신의 미소, 잊지 않겠습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9-2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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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12 22:10
수정 아이콘
84롯데 기다리는 프야매 팬으로써 추천!
공상만화
12/09/12 22:12
수정 아이콘
문디야. 마 함해보지 와 그리 갔노.ㅜ.ㅜ
12/09/12 22:16
수정 아이콘
하아........ 롯팬이라면 무조건 숭배해야하는 최동원...
민머리요정
12/09/12 22:39
수정 아이콘
저는 한화팬이지만, 야구팬으로 최동원 감독님 정말 존경합니다...
시대의 아이콘이죠. 상징이기도 했고.....
나사못
12/09/12 22:29
수정 아이콘
최동원 선수 현역시절에는, 어린시절 삼성 팬이었는지라 좋아하기 힘들었지만,
그 기량에 대해서야 뭐....

시간이 지나서 이 선수에 대해 알면 알수록, 야구 선수로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써
존경할만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민머리요정
12/09/12 22:34
수정 아이콘
뭐, 기량에 대해서는 두말이 필요없죠.
한국시리즈 일정이 9일인데 4경기 완투에 1경기 구원등판에 4승.
10일동안 40이닝을 던진거면, 도대체 공은 몇개를 던질걸까요? -_-)?
키스도사
12/09/12 23:03
수정 아이콘
한창 민주화 투쟁이 벌어지던 80년대, 후반 훈련하러 가던 도중에 경찰과 대치중이었던 시위대에 참가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kbs에서 방영된 최동원 스페셜에서 들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선수로써도 그렇지만 인간적으로도 참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모두를 대변하기 위해 선수협회를 만들려고 노력했었고 그 대가는 가혹했죠. 그래서 선수협회 관련해서 벌어지는 삽질들을 볼때마다 참....
하누라기
12/09/12 22:35
수정 아이콘
저도 조용히 추천 누르고 갑니다...
윤대협
12/09/12 22:37
수정 아이콘
시간이라는게 참으로 무정하게 잘간다는게 벌써 일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린거군요...
그떄 비고를 듣고 개인적으로 많이 슬퍼하고 그 이후 여러채널에서 최동원이라는 사람의 삶을 되새기는 다큐들을 보면서
최동원을 잊어버리기 싫어서 아둥바둥거렸었는데 1년이라는 시간이...
사나이 최동원 잊지않겠습니다
비형머스마현
12/09/12 22:46
수정 아이콘
어디서 그런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고 최동원 감독님의 전성기 기량은 프로 때가 아니라, 아마 때였다고 .. 특히나 대학 떄는 연투를 밥먹듯이 하는데 또 나와서 연투를 했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롯데팬으로써 이 글을 다시 보니 가슴 한켠이 찡해지네요 ..
Dear Again
12/09/12 22:47
수정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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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한국시리즈는 세계의 어느 나라의 야구역사에도 존재하지 않는 대기록이며,
또 당시의 에이스 투수의 운명이 어땠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혹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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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이나오 사마.. 이나오 가즈히사가 일본 시리즈에서 4승 2패를 기록하며 우승을 했죠...

그리고 84년 한국시리즈의 안타까운 조연들.... 3승을 한 김일융 (의외로 삼성의 3승이 한 투수가 기록 한 건지 모르는 사람이 많더군요)과 한국시리즈에 약한... 김시진 ㅠ
12/09/12 23:12
수정 아이콘
난카이의 스기우라도 일본시리즈 4승을 홀로 이뤄냈죠.
메이저리그도 찾아보면 엇비슷한게 있지 않을까 싶네요. 사실 투구수 관리라는게 도입된지가 야구역사에 비춰봤을때는 짧은편이죠.
민머리요정
12/09/12 23:31
수정 아이콘
아? 있었군요.
그 시절 투수들은 그냥 몸관리고 뭐고 모르고,
그저 절대복종으로 던진게 아닌가...싶네요....

김일융의 3승은 묻혀버리고 말았죠....
12/09/12 23:46
수정 아이콘
절대 복종보다는 에이스의 자존심이죠
아마 세경우 모두 공통점이 상대팀보다 전력이 낮다라는 평가속에 치뤄진 시합들이고, 다만 불세출의 에이스가 그 약팀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고생하면 이길 수 있다. 이런 마인드가 굉장했죠.
최동원도 그랬었고, 스기우라도 난카이의 첫 우승이 걸린터라 이악물고 했을테고... 다만 이나오의 경우는 본인의 의지도 강했지만, 감독인 미하라가 요미우리에 앙금이 많아 이나오를 부려먹은 느낌이 없지않아 있네요.
키스도사
12/09/12 22:49
수정 아이콘
"그 때 감독님이 그러더라고, 동원아 우짜노...여까지 왔는데...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알겠심더. 마 한 번 해보입시더]"
- 스포츠 2.0 인터뷰 中

이선희, 장효조와 더불어 프로야구가 5년만 더 빨리 탄생했더라면 어땟을까? 의 떡밥의 주인공이시기도 합니다. 본인도 그렇고 주위 반응도 리즈시절이 고등학교 + 대학교 시절이었다고 했으니.

그리고 한국시리즈 4승과 더불어 정말 쩌는 기록이 하나 더있습니다. 81년 실업야구 코리아시리즈 6차전까지 모조리 등판,
1차전 9이닝 3실점 완투 [패]
2차전 7이닝 무실점 (2회부터 구원 등판) [패](이미 1회에 롯데가 5실점한 상황이라 패전은 아니었습니다.)
3차전 6이닝 3실점 (5회부터 구원 등판) [무]
4차전 7이닝 3실점(희대의 기록인 1경기 1승 1세이브를 기록) [승]
5차전 3이닝 무실점(7회 구원 등판)[승](구원등판)
6차전 9이닝 4실점 완투.[승]
코리아시리즈 6경기중 6경기 등판 42 1/3이닝 2승 1패.

특히 4차전땐 선발 7이닝 -> 8회초 1루수로 보직 변경 -> 8회말 2사 만루에서 구원등판 이라는 말도 안되는 모습도 보여줬고. 이때 상대팀이던 육군 경리단의 에이스는 바로 김시진이었죠. 또 1981년 롯데 자이언츠의 324이닝중 206이닝을 최동원이 소화했던 강철체력을 자랑했구요.

살아계실때 롯데에서 배려를 해줬다면 좋았을텐데 돌아가시고 나서 등에 떠밀려 영구결번이라니 그게 참 아쉽습니다.(실제로 롯데 유니폼을 벗고 사직구장 마운드에 올라선게 딱 1번 있었습니다. 2009년 7월 4일 송승준이 2경기 연속 완봉승을 거뒀던 날인데 그때 시구자였죠. 하지만 롯데가 초대한게 아니라 스폰서였던 마구마구에서 초대해서 시구했었다는게 함정. 본인은 롯데를 용서했지만 롯데는 그러지 않았죠. 그게 정말 화가 나는 부분입니다.)
민머리요정
12/09/12 23:32
수정 아이콘
와우..... 4차전 -_-) 실제로 기록 자체가 저렇게 남아있는건가요?
그럼 그 잠깐 1루에 있을때 나온 투수는 지금으로 따지면 홀드군요 -_-)
승 : 최동원, 홀드 : ---, 세이브 : 최동원 (응?)

그리고, 최동원 감독님이, 꼭 고향팀 감독 해보시고 싶다고 하셨었는데....
저는 그게 참 안타깝습니다...
민머리요정
12/09/12 23:34
수정 아이콘
원래 저 글을 쓸 당시에는, 영구결번도 되어있지 않았고,
많은 장례 절차도 한화측에서 했던 터라서....

마지막 영정사진 밑의 글귀를.

최동원이라는 그 큰 이름에,
끝내 고향팀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의 영정에 이 글을 올린다. / 이렇게 마무리 했었는데....
이렇게 적었어도 사실 무방했을 듯 싶군요.
Cherry Blossom
12/09/13 00:37
수정 아이콘
사족입니다만 승리투수는 세이브투수가 될 수 없다는 규정이 그때는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이라면 1승 1세이브르 한 경기에 올리는 건 불가능합니다만... (세이브 규정 중에 승리투수가 아닐 것이라는 조건이 있죠.)
여하간 (대학 2부리그 야구 같은 곳에서는 의외로 종종 보입니다만) 실업야구 KS에서 저 기록은 정말 대단한 거죠.
12/09/12 23:29
수정 아이콘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롯데팬은 아니지만 부산 사나이의 상징 최동원 형님은 늘 마음 속에 아련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나저나 프야매는 최동원 형님 카드 실명으로 돌려줄 생각 없을까요.
동생 계정으로 하는 부산경남 지역올스타에 신완수 카드는 볼 때마다 갈아버리고 싶습니다.
언제 최동원으로 돌아올지 몰라서 육성하고는 있는데..
ChojjAReacH
12/09/13 13:32
수정 아이콘
이름 라이센스를 못 따서 그러지 않나요?
신완수 신민수 신찬수 신병수 신철수 등...
방과후티타임
12/09/12 23:32
수정 아이콘
그 작년 고등학교 대결때 최동원님 모습보고 너무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그때 너무 충격이였어요....
민머리요정
12/09/1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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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말라있어서 많이 놀랬죠..... 다 완치되셨다고 그러셨고, 시구할 때도 참 좋아보였는데,
그렇게 되셨다니....
내사랑 복남
12/09/13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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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아빠따라 사직구장 가서 최동원이 나오는 날이면 그냥 소름과 함께 온몸에 전율이 쭈르르르르르
야간 경기때 1루관중석에서 보는 최동원의 공은 다른 투수들이 던지면 흰줄로 포수미트까지 공이 갔는데
최동원이 던지면 그게 점처럼 뚝뚝 끊어지면서 포수미트에 퍽! 하고 꽂히는걸 보면서 환호했던 그시절...

최동원이 삼성 간날 저녁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때는 선수협이니 뭐니 하는 영문도 모르고 대체 왜 그랬을까 하고
몇날몇일을 궁금해하기만 했는데...

동원이 형님. 하늘에서 편히 쉬고 계시죠?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살아계실때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보내버린 것을...
달리자달리자
12/09/13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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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3월 사직야구장 근처에 최동원 동상이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내년시즌 개막하면 한번 가보시는것도 좋을 것 같네요.
12/09/13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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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년이나 됐군요..
나두미키
12/09/13 09:52
수정 아이콘
롯데 하면 최동원 입니다. 롯데라는 팀을 설명하는데 그 이상 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머리요정
12/09/1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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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하면, 최동원이고, 박동희고, 임수혁이고, 염종석이죠..... 이제 올해에는 우승해서, 20년의 한을 풀었으면 합니다.
슬러거
12/09/13 15:58
수정 아이콘
장효조 선수의 1주기도 얼마전에 있었는데 제가 글을 한번 쓸껄 그랬네요..
그나저나 최동원 선수의 1주기도 어느덧 지나갔네요 참..
시지프스
12/09/2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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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사람을 모르는 사람중에 가장 좋아했던 두분중 한분이시죠. 돌아가셨을때 울기도 많이 했는데..다른 의미겠지만
ACE게시판에 딱 어울리는 분이죠
바람모리
12/09/28 14:22
수정 아이콘
환화에서 류현진을 데려간 후 김인식감독은 류현진을 불펜에서 굴릴;;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킬인식이라 불릴만큼 선수를 1~2년 짜내서 성적을 내는데는 능력있는? 감독이지요.
그걸 최동원코치가 류현진은 무조건 선발로 써야 한다고 결사적으로 반대했다고 하죠.
원래 로스터에서도 감독은 뺄 생각이었는데 최동원투코가 강력히 주장해서 넣었다고 합니다.
다른 기록도 그렇지만 통산K/BB 가 2.43 이라는 점이 멋진 선수라 생각하구요.
최동원선수가 한화투코로 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류현진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자갈치
12/09/28 23:31
수정 아이콘
예전에 갈마 게시판에 가서 최동원 선수 전성기 시절은 어땠습니까? 하고 질문을 던졌더니 이런 댓글이 기억납니다.
당시에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이야기 했던 노피어(NO FEAR)의 원조라고... 최동원 스페셜 보고 왜 그런말을 했는지 이해를 하겠더라구요... 그리고 송승준 삼연속 완봉의 시작이 바로 SK전에서 1대0으로 이김으로써 시작됐는데 당시 최동원 경기감독관이 파란색 롯데 유니폼 입고 시구를 했는데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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