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찢었다.
그냥 대놓고 찢어발겼다. 영화를 보고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사이에 잠시 멍해졌다. 이런 생각을 잠깐 했다.
'지금 이게 맞나? 그냥 미쳤는데?'
영화 리뷰를 몇년간 안써서 내가 감을 잃은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만큼 심각하게 재밌다. 영화는 차근차근 빌드업을 통해 어느 순간부턴 압도적으로 때려박는다. 근데 그 때려박는 기세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수준이다. 관객의 눈과 귀를 끌어당겨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고 생동감 있는 작화를, 웅장한 사운드를,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호쾌하고 박력있는 액션을 말 그대로 무자비하게 때려박는다. 원작 팬들이 가진 일말의 불안과 의심을 무장해제시킨다. 이를테면 이건 일방적인 폭행에 가깝다. 압도적인 쾌감과 순수재미로 절여진 영상 앞에, 일단 나는 무릎 꿇었다. 이정도 퀄과 기세로 꿇으라면 꿇어야지 뭐 어쩌겠나. 방법이 없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상처
<오징어 게임 시즌2>에서 성기훈(이정재 분)은 이렇게 소리친다.
"나는 이 게임을 해봤어요!!"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나는 98년작 퇴마록을 극장에서 봤어요!!"
부푼 기대를 안고 극장에 들어선 당시 관객들은, 영희를 앞에 두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던 참가자들처럼 전멸당했다. 그 당시 상영관을 나서며 내가 느낀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극장에서 개고기를 파는 모습을 그때 처음 봤다. 극장 입구에 양의 머리를 걸어두고, 상영관 안에서는 개고기를 팔고 있었다. 그렇게 극장에서 상한 개고기를 억지로 먹은지 30여년 가까이 지났다.
2025년에 등장한 애니메이션 <퇴마록>은 추억을 소환해주는 귀여운 고양이 정도인줄 알았다. 기대감을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 상태에서 극장으로 향했다. 더 솔직한 마음은 더이상 배신당하고 싶지 않았다. 비릿한 개고기의 역한 냄새가 싫었다. 아직 내겐 실사판 <퇴마록>의 트라우마가 남아있었다. 그렇게 기대를 내려놓고 추억 속 고양이를 쓰담쓰담 해주러 가벼운 맘으로 상영관에 들어갔다가 시베리아 호랑이를 만났다. 스크린에 펼쳐진, 예상과 다른 광경에 얼어붙었고 호쾌하고 묵직한 호랑이 싸다구에 정신이 얼얼해졌다. 이정도면 사건이다.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 남을 일대 사건. <퇴마록>은 무언가를 열어제쳤다. 한국 애니메이션 계의 분기점이 될 새로운 페이지가 열렸다는 느낌이다. 99년의 <쉬리>가 그러했듯이.
가슴이 웅장해진다
3D와 2D를 혼합시킨 듯한 이른바, 3D 카툰 렌더링 기법은 초반부에만(특히나 인물들이 걷거나 정적인 모습을 보일때만) 어색하게 느껴질뿐 시간이 지나면 아무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박력있는 액션 연출과 어우러져 작화 그 자체로 생동감을 뿜어낸다. 로커스 스튜디오의 선택이 옳았다. 그들이 녹여낸 피, 땀, 눈물과 한땀 한땀 공들인 노력이 고스란이 전해졌다. 정말 이렇게까지 잘만들 일이야?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제작진은 <퇴마록>에 진심이다. 작품에서 고스란히 전해지는 제작진의 집요한 태도와 노고에 찡한 고마움마저 들었다. '씨네21' 이자연 평론가의 평처럼, '마지막까지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운드도 미쳤다. 관객을 홀리고 압도한다는 표현이 적당할까. 사운드 하나로 관객을 쫄게 만들고 몰아부치는 힘을 이 작품은 가지고 있다. 국악과 오케스트라를 기가 막히게 사용한다. 오프닝씬부터 심상치 않았다. 시작부터 오컬트 영화의 교본과도 같은 사운드 활용이라고 느꼈다. 하이라이트 액션씬에 이르러서는 사운드도 함께 절정을 이룬다. 이정도면 귀호강이다. 누군진 몰라도 음향감독님이 정말 큰일 했다.
성우진은 국내 최고의 성우진을 캐스팅했으며 그들은 이름값을 한다. 이른바 캐스팅의 이유를 증명해낸다. 역시는 역시다. 액션은 한마디로 질감이 달랐다. 박력있고, 압도적이고, 호쾌하며, 화려하다. 요즘 말로 눈뽕 제대로다. 이걸 N차 관람하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다. 그동안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본 적 없는 화려한 액션으로 <퇴마록>은 관객들을 저 멀리 호강시켜준다. 액션으로 유명한 외국 애니메이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변주되었으되 훼손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작품은 퇴마록답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캐릭터의 등장 시점 등 소소한 부분들이 각색되고 변주되었으나 불편함을 주지 않으며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다. 원작 팬 중의 한명으로써 충분히 용인 가능한 수준의 변주라고 느꼈으며 오히려 극장판에 맞는 깔끔한 각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의외의 감동 코드로 관객들을 울컥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난 많이 울었다.
박신부의 오오라
현암의 태극기공
준후의 뇌전
서교주의 환술
모두가 이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우리가 알던 그들이다.
어찌보면 실사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 제작이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과장된 장면들도 실사 영화보다 더 사실감 있고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한국의 풍광을 그대로 옮겨놓은 배경들도 어마어마하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하나하나 합쳐져서 실사보다 더 실사같은 지독한 결과물이 나왔다. 돌이켜보니 말 그대로 집요하고 지독하다.
심지어 빌런도 미쳤다. 가장 인상깊은 캐릭터가 해동밀교의 서교주다. 서교주의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걸음걸이, 독특한 캐릭터성 때문에 극의 긴장이 끝까지 팽팽하게 유지된다. 이정도면 관객들 사이에 서교주빠가 생겨도 인정이다. 어깨 깡패 박신부는 여전히 멋지고, MZ스러운 말투를 장착한 현암은 극에 활력을 불어넣고, 총명한 귀염둥이 준후도 사랑스럽다. 그리고 역시나 승희도 반갑다. 이작품의 한가지 유일한 단점이자 아쉬움이 있다면 러닝타임이 짧다는 것 정도. 그리고 후속편을 바로 볼 수 없다는 점 정도다.
일해라, 로커스!
영화와 찰떡인 몬스타엑스의 '비스트모드'에 맞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영화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상처받은 퇴마록 팬들이여, 이제 그 무겁고 수고로운 짐 내려놓고 고이 잠드소서."
Rest in Peace.
30여년간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말만 들어도 짜증과 배신감이 치밀어 오르던 내 육신과 영혼도 그제서야 평안을 찾았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오랜 퇴마록 팬들이여, 이제 마음놓고 극장으로 달려가시라. 팝콘은 필요없으나 진성 팬이라면, 기저귀 착용은 필수다.
p.s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하늘이 불타던 날>-<초상화가 부르고 있다>-<초치검의 비밀>로 이어지는 국내편 3부작 시리즈를 기대한다.(극장판 <퇴마록> 시리즈에서 주기선생 상준의 12지신술을 꼭 한번 보고 싶다.)
그러니 로커스여, 흥행여부 고민하지 말고 어서 소처럼 일하라. 퇴마록의 긴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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