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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21 10:57
계책이 간파되어 물러난적은 있었지만 처절하게 깨진적은 없죠.
항상 철저히 준비해서 자신이 이길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전투를 하는 스타일이라서..
17/02/21 11:00
음 이순신 장군 같은 스타일이려나요.. 개인적으로 저는 의미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오의 대도독들이 위의 인물이였다면 공격전에서도 대단히 성과를 냈을꺼라 생각합니다. 공격전을 할 줄 모른게 아니라 오나라 자체가 끝까지 방어선 완성만 염두에 두고 모든 프로세스를 거기에 맞춘 느낌이라..
17/02/21 11:43
근데 마냥 소국 얘기하기에는, 오나라가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압도적인 물량을 가지고 공격한 경우도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못 뚫었죠.
17/02/21 11:12
사실 육손의 단점은 전략적으로 우위를 가진 상황이 아니라 더 아쉽게 보인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군사적재능을 비교하는데 제갈량과 육손을 일반적인 사람들의 평가보다 많이 높게치는데 지지않을 상황을 만드는 것 자체가 전략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요건이라고 생각하고 전술적인 승리가 당장 화려해보일지언정 실제로 더 중요한건 큰그림을 보는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둘다 공격력이 부족해서 군재한정 종합평가로는 최고라고 단정지을순 없겠지만 전 높게 평가합니다!
17/02/21 11:18
솔직히 제갈량의 군재는 다른 명장들에 비해서는 높지는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제갈량의 재능이 역대급인 이유는 비슷한 처지의 한나라가 통일 할 때 키 퍼슨들인 서한삼걸의 역할을 혼자 다 했다는 점이 가장 대단했던 거죠.... 다만 올라운더다 보니 각자의 재능은 서한삼걸에 비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17/02/21 11:23
전술적인 측면에서 삼국지내에서 평가하더라도 상위 계층은 힘들꺼라고 보고
전략적인 측면만 따로 빼면 삼국지내에서 최상위일꺼라는 거죠. 그래서 둘을 합친 종합적인 측면에서 최고수준은 아니지만 그냥 순수하게 제 개인적인 호오로 좋게 평가한다는 얘기였습니다.
17/02/22 01:26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은 이미 당대에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당장 사마의가 그의 진채를 보고 천하의 기재라고 했고 거시적 계획을 수립하는 전략이나 각개 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전술의 측면에서는 당대에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죠. 당장 제갈량전의 평가만 해도 "진영이 잘 정돈되고 상벌이 분명하고 호령이 엄숙하다." 되어 있고 진양추(晉陽秋)에 "제갈량은 군사를 교묘하게 통솔하였고, 군령도 엄명하였다."라고 "원자에는 제갈량의 군대가 무장과 무기를 최고상태로 유지했으며 군대에서 쓰이는 물건들 모두 멋있고 정교하게 꾸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제갈량의 팔진도는 후일 서진의 마륭이 사용해 독발수기능을 격파했고 명나라의 용정(龍正)은 <팔진합변도설八陣合變圖說>을 지어 제갈팔진도를 연구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역시 성과를 거두었다 합니다.
17/02/21 11:14
유장이 촉을 먹고 있던 시절의 주유의 천하이분지계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전략이였으나 촉이 유비의 본진이 되어버린 후의 여몽의 전략은 문제점이 너무 많았죠... 여몽의 전략이 실체화 되려면 형주를 털었을때 번성도 먹어야 했고 형주 제압 후 최소 영안 까지는 먹어야 하는데 실제로 형주 제압할때도 통수로 먹은 상황에서 영안까지 밀고 들어 올 수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되는데 그런 상황에서 촉과의 사이는 최악으로 만들어 버렸죠... 실제로 오는 촉이 망한 이후에 촉 방향에서의 공격에 그냥 털렸구요....
17/02/21 11:19
여몽이 정면대결로 형주를 먹은거라면 높게 평가할수 있겠으나, 뒷치기+미방의 배신 등으로 먹은거라 과분한 공적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죠. 그뒤에 오나라가 양번을 제대로 제압한 것도 아니고...뭐 여몽이 형주 공격 과정에서 보여준 민심장악력은 꽤 좋은 편이지만요.
17/02/21 11:23
효율적인 면을 따지자면야 물론 그렇죠. 단지 정면대결을 했어도 그정도 공적을 올릴 수 있었을지가 의문이라는 거죠.
그리고 효율적인 것도 사실 형주 뒷치기와 관우를 죽인 것 때문에 이릉대전이라는 큰 전쟁이 터졌다는걸 생각하면...
17/02/21 11:28
뒷치기 아이디어는 좋은데 뒷치기 만으로는 여몽 본인의 구상의 반도 이룰 수 없는 상황이었죠... 주유의 천하이분지계를 이어 가는 거라면 촉을 다 먹었어야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본인 구상대로 형주를 통한 중원 진출을 하려고 했으면 촉을 막을 수 있는 영안과 중원 진출의 교두보라고도 볼 수 있는 번성은 먹었어야 했거든요... 여몽이 죽지 않았더라도 관우를 죽인거에 눈이 뒤집힌 유비를 확실하게 막을 수 있는 영안 확보도 실패한 상황이라 여몽이 살아 있었더라도 이릉대전 초반에 밀리는 건 못 막았을 겁니다...
17/02/21 12:07
당시에는 위나라도 독이 올라서 번성에 올스타를 총 출동시킨 상황이었죠, 결국 서황과 만총에게 격퇴당한 관우가 수군으로 면수를 틀어막고 양양을 더 굳건히 포위해 연락을 끊어버리고 일단 양양으로 몰려가서 거기라도 포위해 먹을 작정이었는데 손권의 습격으로 후퇴, 군이 와해됩니다. 이 상황에서 위나라 참모진 전체가 손권은 도무지 못 믿을 놈이니 번성에서 관우를 추격하지 말자라는 의견을 내고 다들 번성에 그대로 머무릅니다, 여기서 과연 여몽이 번성을 먹을 수 있겠느냐면...
17/02/21 12:14
서현님의 말씀대로 번성을 먹는 건 무리였을 겁니다... 그런데 여몽의 판짜기는 영안 및 번성을 먹어야지 작동하는 거였다는 점이 여몽이 고평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관우 통수 친 상황에서 여몽이 해야 할 최선의 선택은 좀 무리해서라도 영안까지 가서 영안을 먹던지 (이것도 힘들었긴 하겠습니다만...) 아니면 관우를 살려 보내고 노숙 시절에 쌓아 둔 명분으로 외교전으로 형주 통수를 무마하는 거였다고 봅니다.
17/02/21 11:42
저는 굳이 정면대결 하지 않고 모략과 뒷치기를 이용 수월하게 이기는게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더 뛰어난 공적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냥 대놓고 계속 돌진해서 정면승부로 이기는거보다 별동대를 동원 뒤를 쳐서 이기는게 더 뛰어난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여몽이 관우를 속이고 적의 배신을 이용해서 형주를 먹은게 폄하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렇게 이기는게 더 뛰어난 능력이라고 봐요. 계속 정면승부 안하고 그렇게 계략으로 이길수 있으면 그렇게 계속 이기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게 더 훌륭하다고 봅니다.
17/02/21 11:48
별동대 동원과는 얘기가 다르죠. 별동대 굴리는 것도 정면승부에 포함되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아군과 적군의 진형이 짜여진 상황에서 서로계책을 짜내서 맞붙는거니까요.
여몽의 형주 뒷치기는 어쨌거나 표면적인 동맹관계였던 촉과 오의 상황을 이용해서 관우가 위와 싸우는 사이에 대놓고 통수질을 했다는 점에서, 타이밍을 잘 노렸다고 평가받을 수는 있겠지만 정면으로 관우의 주력군과 붙어서 뺏을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말이 없게 되는거죠. 하긴 형주를 노리게 된 것부터가 오가 북쪽으로는 도저히 진출할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된거니... 그리고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것도 형주를 뺏을때만 그런거지, 유비가 복수를 위해 쳐들어올 당연한 수순까지 생각하면 영...최소한 관우는 죽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죽여버렸죠.
17/02/21 11:55
육손을 이용하여 관우를 방심시키고 미방 사인의 배신을 유도한건 다 여몽의 계책때문인거고
그렇게 해서 쉽게 형주를 뺐어낼수있는데 굳이 정면승부하는건 오히려 졸장에 불과하죠. 주력군과 붙어서 뺏을 자신이 없어서 그런게 아니라 굳이 그렇게 안하고도 쉽게 뺐을수가 있으니 그렇게 한거지 그게 폄하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력군과 대놓고 붙어서 피해를 극심하게 입는거 보다 이렇게 상대 빈틈을 노려서 계략으로 뺐는게 더 뛰어난 명장이죠.
17/02/21 12:01
이게 양국이 표면적으로 동맹관계가 아니면 전략적이라고 할만한 여지가 많은데 결국은 통수친거라...
여포가 유비 통수 쳐서 서주 점령한걸 가지고 여포의 군재를 고평가하지 않는것과 같은 이치죠. 단기적으로는 이익이 생기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그만큼의 신용을 잃어버리는 리스크가 생기는거라 이걸 전략이라고 하기도 애매한건 사실입니다.
17/02/21 12:03
[관우는 평소 용맹하여 그를 적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중략)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 육손전]
전 지금 여몽이 형주를 얻은 전공 자체를 부정하는게 아닙니다. 굳이 뒷치기 안하고 관우의 주력군과 맞붙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요. 단지 표면적인 동맹관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뒷치기를 한 이상 여몽이 다른 상황이어도 그정도의 공적을 올릴 수 있었을지 의문이 제기되는건 어쩔 수 없다는거고(위에서 미하라님이 예시로 들어준 여포의 경우처럼요),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것 또한 관우를 죽이고 이릉대전을 불러일으킨걸 생각하면 그리 높게 평가할수 없다는 겁니다.
17/02/21 12:20
형주 통수 후 피해 최소화를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일단 관우를 살려 보낸 뒤에 노숙이 대도독이던 시절에 쌓은 명분을 바탕으로 외교전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익양 대치때 노숙은 명분으로 관우를 제압했었죠...)
17/02/21 11:51
형주를 뒷치기 한것까지 그렇다쳐도 관우를 붙잡아놓고 죽여버린게 문제였죠. 여몽의 부족한 정치감각, 정치력 부재도 여기서 드러난다고 봅니다.
그 상황에서 관우를 죽여버리면 촉과의 전면전을 피할수가 없는건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고 아예 형주를 점령한 기세를 타서 서천을 모두 밀어버리고 촉한을 멸망시킬 생각이었다면 모를까. 그냥 형주 점령하고 눌러앉을 생각이었으면 관우를 죽인건 국익에 하나도 이득이 없는 짓이었죠. 형주를 빼앗긴 촉과의 외교적 협상카드로 쓸수 있었고 성공했을 경우에는 양국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위를 견제할수 있었는데 덕분에 둘이 치고 박고 열심히 싸우느라 양국 다 손해만 보고...(물론 촉의 피해가 훨씬 더 컸지만..) 결국 구경하던 위만 꿀빨았죠.
17/02/21 12:01
배송지는 촉기를 인용해서 붙잡은 관우를 손권이 참하라 명령했다고 합니다만, 곧이어 강릉이랑 임저랑 2~3백여리는 되는데 손권이 어느새에 거기까지 명령을 내렸겠느냐 의문을 제기합니다, 사실상 주체가 여몽 아니느냐는거죠. 뭐 손권이던 여몽이던 관우의 전사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불렀는지 생각하면...
17/02/21 12:18
관우전에 주석으로 달린 촉기에 따르면 손권이 관우를 살려주어 유비와 함께 조조에게 대적하려고 했으나 좌우에서 반대하며 말했다.
이리 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찌 그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손권은 좌우의 말을 듣고 결국 죽이기로 마음을 굳혀 이에 관우와 관평을 참수했다. 그래도 정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이상 배송지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을수는 없죠. 배송지가 항상 뭐 옳은것도 아니고... 결국은 아직은 정설은 손권이 관우를 참한거고 이를 여몽의 부족한 정치감각때문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는거죠.
17/02/21 12:24
뭐 손권이 참했을수도 있고 손권이 남중반란 사주하고 유장 아들 익주자사 임명하고 도발한거 생각하면 손권이 그냥 그랬다고 할 수 있긴 합니다만, 여기서 배송지의 의견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비판이라고 봅니다. 촉기 자체가 당대부터 기록을 이상하게 적어놨다고 워낙 말이 많은 사서기도 했고요.
17/02/21 12:36
배송지의 의견이 일리가 있는 비판이라고는 해도 그게 확실히 사실이라고 증명된것도 아니고 여몽이 관우를 직접 참수했다는 기록도 한줄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몽이 관우를 직접 참수한거라고 단언하고 관우의 죽음은 여몽탓이며 이는 여몽의 부족한 정치감각, 정치력 부재때문이다라고 단언하는건 잘못되었다는거죠. 손권이 신하들과 회의를 통해 관우 참수를 결정했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는거지 여몽이 손권 말 안듣고 관우를 멋대로 죽였다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17/02/21 12:42
오주전의 기록에는 12월,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임저)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붙잡았다가 끝이고 여기에 손권이 참했네 어쨌네 하는 기록은 없습니다. 손권이 관우를 붙잡아서 참할것인지 말것인지를 논했다고 나오는 기록은 주석 촉기인데 이때 손권이 관우를 살리는 명분이 손권이 관우를 살려 유비와 조조에게 대적하려 한다는 거였습니다. 근데 애시당초 관우가 어떤 사람인데 관우를 살려서 유비와 대적케 한다는건지 모를 일이죠. 이러니까 촉기 기록이 이상하다는겁니다. 관우전에 따르면 손권이 장수를 보내 거꾸로 관우를 공격케 하여, 관우 및 관우의 아들 관평(關平)을 임저(臨沮)에서 참수했다고 합니다. 즉 관우를 죽인건 손권이 보낸 장수들이 현장에서 그랬다는 것인데 여기에 관우를 사로잡아서 강릉에서 관우 죽일건지 말건지 몇백리 떨어진 곳에서 논했다는게 말이 되질 않지요.
17/02/21 13:33
하지만 주석 촉기에 손권이 관우를 참했다는 기록이 있고 여몽이 손권의 명을 듣지 않고 관우를 단독적으로 참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뭐 조조도 관우를 회유한적이 있으니 손권도 관우를 회유해 볼려고 한건데 다른 사람들이 관우와 유비의 끈끈한 관계를 이야기해주니 손권도 그제서야 안된다는걸 알아차리고 포기한것일테죠. 전 그게 그렇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손권도 한번 말 꺼냈다가 결국 포기한거니까요.
그리고 관우의 존재는 향후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를 중요한 문제인데 이걸 군주의 명령없이 장수가 독단적으로 참할수 있을거라고 생각되지도 않네요. 뭐 미리 손권이 여몽에게 관우를 사로잡으면 참해라 라고 명령을 내렸을수도 있고 관우를 사로잡기 이전에 이미 그러한 논의가 되어있을수도 있겠죠. 요지는 여몽이 관우를 참했다는게 독단적이라는것이라는 아무런 사료적 근거도 없는 마당에 그걸 여몽이 독단적으로 한거라고 정하고 이는 여몽의 정치력의 부재라고 평가 기준으로 삼는건 너무 무리한 해석이라는거죠.
17/02/21 12:24
배송지가 항상 옳은것도 아니니 믿을 수 없다면 정사도 마찬가지죠.
사서에 적혀있다는 이유로 다 믿을거면 유선 벤허설 같은 것도 믿어야 합니다. 배송지가 정사의 기록들을 무조건 무시한 것도 아니고, 아니다 싶은 기록은 [왜 아닌지] 이유를 붙여서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배송지는 저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근거로 강릉과 임저의 거리가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는걸 들었고 이걸 반박해야지 '정사에 쓰여있으니까 무조건 사실'이라 퉁치면 안되는거죠. 그리고 그 배송지부터가 정사에 주석을 단, 쉽게 말해서 정사 내용을 추가한 사람이나 다름없는데 정사는 믿으면서 배송지의 말은 못 믿겠다는건 좀...
17/02/21 12:28
그러니까 이게 여몽이 관우를 참수한건지 손권이 관우를 참수한건지 확실하지가 않잖아요.
오히려 기록을 보면 손권이 관우를 참수했다고 나와있고 배송지는 그 기록에 의문을 가진것일뿐 여몽이 관우를 참수했다라고 말하지를 않았습니다. 일단 정식 기록은 손권이 관우를 참수한거고 여기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는건데 갑자기 이를 여몽이 관우를 붙잡아놓고 죽여버린게 문제다라며 여몽의 정치감각, 정치력 부재 탓을 이야기하면 안되죠 여몽이 관우를 직접 참했다라는 어떠한 기록도 없지않습니까
17/02/21 12:05
서현님 설명대로 거리가 얼마인데 손권이 그 명령을 내렸을지가 의문이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여몽이 생각이 있다면 "관우를 죽여선 안됩니다." 하고 조언이라도 했어야죠. 애초에 형주를 치자고 아이디어를 낸 것부터가 여몽인데, 관우를 사로잡는다는 상황을 가정조차 안했던 걸까요?
17/02/21 12:13
그건 둘째치고, 솔직히 여몽도 그 당시에는 거의 뒷생각을 안하고 일단 저질러 본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최근 들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219년 당시 여몽은 페이크가 아니라 진짜 아팠고 관우를 죽인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쓰러져 죽었죠, 이 정도라면 여몽 스스로도 자신이 얼마 못 간다는걸 체감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회가 되니 무리해서라도 공을 세우려고 한게 219년 전장이 아닌가 싶거든요.
17/02/21 12:20
이미 손권이 관우를 살려주려고 했지만 오 조정 좌우에서 반대를 합니다. 여기서 여몽이 뭐 어떻게 해볼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여몽이 설령 조언을 한다고 해도 그게 기록에 실리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죠.
관우 죽이라고 좌우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도 다 기록에 없습니다. 이건 그냥 오조정에서 관우에 대한 반감이 커서 생긴 문제지 이걸 여몽의 정치감각의 부족탓으로 돌리는건 너무 과한 처사죠.
17/02/21 12:15
위에 분들이 이미 설명해주셔서 추가로 적자면 애초에 형주공략을 입안한게 여몽이고 동오의 군권을 맡고 있는 그가 대국적인 안목이 있었다면 설사 손권이 죽이려고 했어도 양국의 이해득실을 내세워서 간했어야 맞다고 보는거죠.
17/02/21 12:22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여몽이 간하지 않았다고 단언할수도 없는거고 여몽이 관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수가 없는거죠.
손권에게 관우 죽이라고 반발한 사람들도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 기록에 남아있지않습니다. 어차피 관우를 사로잡고 나서는 이후는 여몽의 손을 떠나 손권의 손에 또 오 조정의 손에 걸린 문제고 손권과 오 조정을 문제삼으면 문제삼았지 여몽에게 관우를 죽인 책임을 묻는건 과하죠.
17/02/21 12:46
글쎄요. 가장 큰 세력에 소국 둘이서 연합해서 견제해도 쉽지 않은 형세에서 표면적이기는 해도 화친을 깨고 침공한것치고는 여몽의 선택은 그 다음 플랜이 너무나도 없었죠.
결국은 이대로만 끝나면 위만 꿀빠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선택인데 여기서 아예 형주를 점령한 기세를 타서 촉을 멸망시키거나 아니면 사로잡은 관우를 외교적 협상카드로 이용해서 형주를 얻고 관우를 잡은 이익을 고스란히 자국의 이득으로 치환시켜야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전략이 되는건데 관우의 처분에 대해서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애초에 형주공략 플랜자체가 엄청난 문제가 되는거죠. 결국 그렇게 관우가 죽게 되면서 여몽의 선택은 국가적으로 대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는데 관우가 당시 촉에서 지니는 위상을 여몽이 몰랐을리도 없는데 그러한 관우 처분에 있어서 자기가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수 없었다면 이쯤되면 정치적인 역량을 의심할수밖에 없죠. 그럼 대체 왜 공격하자고 한건데? 라는 물음이 나올수밖에 없으니까요.
17/02/21 13:37
그러니까 여몽의 촉을 공격한 그 선택이 비판을 받을수는 있는데
여몽이 관우를 직접 죽였다라고 단언하고 이에 대해 이는 여몽의 정치감각의 부재, 정치력의 부재라고 평가를 내리는건 무리수라는거죠. 어디까지나 형주를 공략하는건 여몽의 소관인거고 관우의 생사에 대해선 그 위의 소관일텐데 이를 여몽이 어떻게 좌지우지 할수도 없는거라면 관우의 죽음을 여몽이 정치력이 부족해서 라고 하는건 잘못된 평가죠. 아무런 기록이 없기때문에 여몽이 간하지 않은게 되는거라면 마찬가지로 아무런 기록이 없기때문에 여몽이 적극적으로 말렸을수도 있는게 되는거 아니겠습니까 관우의 생사에 대해서 여몽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관우를 죽이는데 찬성했는지 반대했는지는 아무도 알수가 없고 따라서 관우를 죽인게 여몽이다. 즉 관우를 붙잡아놓고 죽여버린건 여몽의 부족한 정치감각, 정치력 부재다 라고 평가하는 건 무리한 해석인거죠. 그리고 여몽이 오나라 중신들이 하나같이 다 관우를 참하라고 하는데 그걸 막을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구요. 군주인 손권도 오 중신들을 설득을 못시켰는데 외지에 있는 여몽이 그걸 설득시킬 위치에 있었을까요? 차라리 손권보고 왜 여몽이 힘들게 잡은 관우를 멋대로 참하라고 명령을 내렸는가 하면 모를까... 저도 형주침공에 대해서 여몽의 대전략 부재를 문제삼을수 있다고는 보지만 관우를 죽인것에 대해선 여몽의 정치감각에 대해 책임을 묻는건 너무 무리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17/02/21 14:17
그래서 본인이 관우의 처분에 있어서 제로원님 말대로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애초에 형주공략 플랜자체가 문제니 그 또한 정치적 역량에 의구심을 가질만한 일이라는겁니다.
전쟁에서 승리해서 관우를 사로잡을 생각 자체를 아예 생각도 안하고 전쟁을 일으켰을까요? 그럴리가요. 그랬으면 이릉전투에서 패퇴하는 유비를 내버려둔 육손처럼 관우가 도망칠때 추격을 안했겠죠. 애초에 형주공략을 입안한게 여몽인데 형주점령후 형주를 어떻게 통치할것인지, 관우를 잡으면 어떻게 할것인지, 계속해서 촉을 밀어붙일 것인지, 말것인지에 대한 계획정도는 당연히 있었겠죠. 근데 여몽은 이미 형주를 공략할때 지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지병을 앓은 몸으로 형주를 점령한뒤 그 기세를 타고 보급이 어렵고 지세가 험한 서촉땅까지 진군해서 익주를 정벌한다? 그럴만한 몸상태도 아니었기에 거기까지 계획했으리라 보기엔 어렵죠. 그럼 결국 형주를 점령한뒤 외교관계를 어떻게 형성할것인지는 당연히 생각해봐야 되는거고 정치감각이 있는 인물이었다면 관우가 촉국에서 지니는 위상을 고려해본다면 형주공략을 입안했을때 당연히 관우를 어떻게 처분해서 형주공략후 촉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것인지에 대한 플랜이 존재했어야 된다고 보는거죠. 그런 계획없이 그런 고민도 한번 없이 그냥 형주 가서 어쩌다보니 관우 잡았는데 손권이 죽여버려서 어쩔수 없었다...하면 그것만으로도 정치적인 역량을 의심할만한 문제라는거죠. 형주공략을 주도한게 여몽이 아니라면 여몽탓만 하기도 뭣하겠지만 형주공략은 여몽이 적극적으로 주도해서 일어난 전쟁이었으니까요.
17/02/21 14:27
그러니까 제말은 형주공략 플랜자체를 문제삼을수 있지만
관우의 죽음까지 여몽의 탓으로 돌리고 여몽의 책임을 문제삼는건 곤란하다는겁니다. [그 상황에서 관우를 죽여버리면 촉과의 전면전을 피할수가 없는건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고 아예 형주를 점령한 기세를 타서 서천을 모두 밀어버리고 촉한을 멸망시킬 생각이었다면 모를까. 그냥 형주 점령하고 눌러앉을 생각이었으면 관우를 죽인건 국익에 하나도 이득이 없는 짓이었죠.] 라고 하셨는데 여몽의 형주플랜이 관우를 사로잡는다고 확실히 보장된것도 아니고 설령 사로잡는다고 해도 관우를 죽인다는거까지 결정된것도 확실치 않습니다. 그리고 관우를 어떻게 처분할지 죽이고 말지 하는건 상식적으로 일개 장수인 여몽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손권과 오 중신들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관우의 생사는 촉 오 두 양국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그걸 여몽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정하는게 사실상 말이 안되고 여몽의 입김이 미칠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그거까지 여몽이 플랜을 짤수도 없구요. 따라서 관우의 죽음을 여몽의 정치력 부재, 정치감각 부재로 몰아세우는건 부당합니다. 그리고 님의 글은 마치 여몽이 관우를 죽였을때의 문제점을 생각하지 않고 관우를 죽여버렸다고 단정하고 평가를 내리고 있잖아요. 여몽이 관우를 직접 결정해서 죽였다라고 할 어떠한 기록이 없는이상 여몽에게 관우 죽음의 책임을 묻고 여몽의 정치적 책임을 묻는건 곤란합니다. 여몽의 기록에서 책임질건 어디까지나 형주 뒷치기를 한 부분 까지만이고 관우 죽음은 손권이 져야 할 일이죠.
17/02/21 14:46
여몽은 일개 장수가 아니라 당시 오나라 군권 1인자의 위치였는데요.
관우가 우금의 칠군을 포로로 잡아 우금을 살려주고 방덕을 참수한것도 모두 관우가 결정한거지, 유비와 서촉의 중신들이 우금을 살려주기로 결정해서 우금이 목숨을 유지한게 아닙니다. 왜 관우는 가능한데 여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시 여몽의 오군내 영향력의 촉군내 관우의 영향력보다 못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게다가 님의 말대로 관우의 생사가 촉오관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데 거기에 있어서 본인이 전혀 컨트롤할수 없는 상황이면 거기에 대한 고민없이 주도적으로 전쟁을 추진한것 자체가 정치적인 안목의 문제라니까요. 그 뒤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생각을 안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실제로 여몽이 그렇게 일만 벌이고 병사한뒤 동오가 국가적 위기에 직면했던것도 사실이구요.
17/02/21 14:55
군권 1인자라고 해서 관우의 생사 여탈권을 다 가질수 있다라고 단언하는건 잘못된거죠.
우금과 방덕과 관우와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우금 방덕은 엄연히 적국의 장수이고 애시당초 촉이 위와 화친할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관우는 촉과 오의 앞으로의 동맹을 가름지을 중요한 장수인데 이걸 여몽이 군권 1인자라고 해서 마음대로 처단할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관우도 마찬가지로 우금, 방덕이 아닌 노숙이나 여몽이나 육손 제갈근을 포로로 잡았다면 혼자 마음대로 죽이지 못했을겁니다. 우금이나 방덕 위 장수를 사로잡은거니 죽인거지 오의 장수를 사로잡았다면 쉽게 죽이지 못했을겁니다. 전쟁을 추진한거 까지는 여몽의 책임이지만 그 전쟁을 통해 사로잡힌 장수를 어떻게 처단할것인가는 군주의 책임이지 그걸 장수의 책임으로 돌리지는 않습니다. 사서에서도 여몽이 관우를 참수했다고 나오지 않는데 이걸 어떻게 여몽의 책임이며 여몽의 정치감각 부재라고 단정할수 있을까요 형주를 공격한거 까지는 여몽의 책임이 맞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관우를 사로잡는것도 불분명할뿐더러 그 관우를 어떻게 처리할것인가는 여몽의 책임이 아니라 손권의 책임인거죠. 손권보고 정치감각 부재, 정치력의 부재를 탓한다면 모를까...
17/02/21 15:34
생사여탈권을 무조건 가질수 있다는게 아니라...
"관우를 어떻게 처분할지 죽이고 말지 하는건 상식적으로 일개 장수인 여몽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손권과 오 중신들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라고 한 부분에 대한 반박입니다. 외부에서 전투중인 지휘관이 적장을 사로잡아 즉결처분한 사례가 적은것도 아니고 거기다 여몽은 일개장수가 아니라 오나라 군권 1인자인데 상식적으로 일개장수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건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이야기죠. 노숙이나 여몽, 육손을 잡았으면 관우가 함부로 죽이지 못했을거다? 글쎄요. 그건 모르는 문제같은데요. 노숙은 동오내에서도 가장 친유비파에 가까웠던 사람이라 그럴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관우도 정치감각이 좋은편은 아니었다고 보는지라 여몽, 육손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는일이죠. 물론 사서에는 여몽이 관우를 참수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조조와의 전면전을 주장했던 주유, 유비와의 연합을 강조했던 노숙 등의 인물들을 봐도 그렇듯이 오나라의 군권 1인자는 그전까지 동오의 외교를 주도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숙이 구축한 촉오 연합관계를 파기하고 형주공략에 있어서 주도적이었던 여몽의 모습만 봐도 그가 그만한 영향력이 없었다고 판단되지는 않습니다. 그정도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만약 형주 점령까지만 목표로 하고 촉오관계를 개선시킬 의도가 여몽에게 만약 있었다면 관우의 처분에 있어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았다는건 분명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게다가 창업 공신으로 질병이 있을 때, 손권이 마음을 기울인 점에 있어서는 여몽과 능통에 대한 것이 가장 무거웠고, 주연은 그 다음이었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고 손권은 그를 위해 염려하고 근심했으며, 자주 그의 안색을 보고자 하나, 또한 고달프게 움직이게할까 두려워, 항상 벽을 뚫어 그를 바라봤고, 조금이라도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면 기뻐하며, 좌우를 돌아보고 웃었고, 그렇지 않으면 탄식하며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는 기록은 여몽에 대한 손권의 신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수 있는 기록입니다. 이런 평가들을 보면 여몽이 관우 처분에 대한 영향력이 없었을까...라고 생각하기가 어렵다는거죠. 제로원님 말대로 손권이 그냥 알아서 하게 냅뒀을수도 있었겠죠. 근데 그렇다면 여몽이 촉오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의지는 없었다고 볼수밖에 없는것이며 그래서 정치력을 지적하게 된겁니다.
17/02/21 12:58
기록을 더 뒤져봤는데 맥성에서 서쪽으로 관우가 후퇴했을때 병사들은 모두 흩어지고 오직 10여 명의 기병만이 관우를 따랐고 여몽은 반장, 주연에게 그 지름길을 끊게 했다고 나옵니다. 반장과 주연이 퇴로를 차단하고 마충이 관우를 사로잡고, 아울어 관우의 아들 관평(關平)과 그의 도독 조루(趙累) 등도 사로잡았다다고 하지요, 당시 현장에 있었던건 여몽이 맞습니다.
17/02/21 13:39
위에서 관우가 임저에서 참했다고 되어 있고 당시 여몽이 거기 있었다고 하는겁니다, 말씀을 듣고 생각해봤는데 아예 처음부터 손권이나 여몽이나 관우를 죽이기로 의견이 일치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17/02/21 13:41
여몽이 거기 있었지만 여몽의 명에 의해 관우를 참했다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손권의 명으로 참했다는 기록은 있지만요. 여몽이 관우 참살에 대해 어떤생각을 가졌는지는 아무도 모르는것이니 이에 대해 함부로 단정해서 평가를 내리는건 곤란합니다. 여몽의 책임은 일단 형주를 계략으로 뻇어오고 관우를 패하게 만든거까지 가지는거고 관우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일단 손권이 져야죠.
17/02/21 13:43
ZeroOne 님// 여몽이 거기 있었고 관우전에는 임저에서 참당했다고 되어 있으며 주석 촉기 기록은 배송지가 합리적인 의견으로 반박했습니다, 물론 함부로 단정하기엔 곤란하다고 저도 생각합니다만,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꽤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말한 뉘앙스가 너무 단정적으로 말한거 같네요.
17/02/21 13:46
배송지는
『손권은 장수 반장(潘璋)을 보내 관우의 달아나는 길을 가로막아 끊어 버렸다. 관우는 곧 죽게 되었다. 임저(臨沮)는 강릉에서 2∼3백리 떨어져 있는데, 불시에 관우를 죽였으니 어찌 생사(生死)를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했는데 이게 관우를 손권이 죽인게 아니고 여몽이 단독으로 죽인거다라고 단언할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는거죠. 미리 손권이 여몽에게 잡으면 죽여라라고 할수도 있고 미리 회의를 거치고 그렇게 전략을 다 짠 상황일수도 있습니다. 뭐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높다 정도면 모르겠다만 이걸 가지고 여몽이 관우를 죽인거다라고 하며 여몽의 정치감각 부재를 비판하는건 너무 나간 평가라고 봐요. 사실 상식적으로 보면 관우의 생사는 촉 오 양국에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여몽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할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구요.
17/02/21 13:50
ZeroOne 님// 예 그래서 여몽과 손권의 이해가 일치했다고 생각할수도 있다고 말한겁니다, 저도 여몽이 무조건 독단적으로 처리했다고 단정하진 않겠습니다.
17/02/21 13:51
뭐 일단 제가 반박한 부분은
여몽이 관우를 붙잡아놓고 죽여버린게 문제라며 여몽의 부족한 정치감각, 정치력 부재가 드러난다고 평가한 부분이니까요. 여몽이 관우를 죽이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는지 아니면 반대를 했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오조정에 맡기고 자신은 명만 따랐는지는 아무도 알수가 없어서요.
17/02/21 15:29
ZeroOne 님// 손권과 미리 입을 맞추고 죽인 것이었어도 여몽의 정치적인 능력 부재는 충분히 입증 된다고 봅니다만.. 그리고 저는 군권 1인자라는 양반이 관우 처형에 반대 한마디도 없었다는 게 문제라고 봅니다. 기록이 없다고 무조건 믿을거 아님 할거면 촉나라 장수들은 아예 평가 자체도 하면 안되죠. 누락된 게 장난이 아닐텐데..
미하라님의 주장은 충분히 제기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17/02/21 13:13
근데 이미 형주를 먹어버린 상황에서 설령 관우를 살려준다해도 그게 뭔 의미가 있었을지.... 아무리 복숭아 나무 아래서(포도였나)
고생한 의형제라지만 무장 하나가 그렇게까지 큰 비중을 가졌을지도 의문이고, 무엇보다 당시 유비는 조조를 맞상대해서 몰아내고 자기 군재에 극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때라 저 호족놈들이 뒷치기를 해? 오냐 정면으로 붙어도 그렇게 할 수 있나 한 번 해보자 이랬을 가능성이 더 크죠. 결국 이릉의 재현.
17/02/21 13:25
관우가 죽은 시기를 전후로 관우뿐만 아니라 장비, 황충, 마초등이 모두 사망. 그뿐만이 아니라 법정, 유파같은 핵심 문관들도 모두 귀신같이 그 타이밍에 죽어버리죠. 이쯤되면 촉나라의 남은 장수중 관우의 위상에 비견되는 인물은 없다고 봐도 될정도니 그깟 무장...하나 정도가 아닐수 있습니다.
촉의 인재난은 사실 이릉전투 이전부터 진행되기 시작했고 그 정도의 큰 규모의 전쟁을 벌이면서 촉의 대도독을 맡았던 자는 풍습이었는데 촉의 인재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수 있겠죠. 게다가 조정 내부에서도 제갈량과 조운을 비롯한 중신들이 반대했던 싸움이라 아무리 유비가 자신감 넘쳐도 관우가 협상카드로 쓰이게 되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부족해지는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이릉전투는 단순히 유비의 자신감, 형주 탈환이라는 가치를 넘어서서 관우의 복수전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촉나라 내부의 결속을 꾀한 목적도 컸다고 보거든요.
17/02/21 12:09
관우 통수를 치고 형주를 먹기로 한 이상 최소한 영안까지는 먹거나 아니면 통수 친 김에 한번 더 쳐서 양번 제압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다고 봅니다. 그 다음의 차선책으로는 관우는 무조건 살려 보내야 했구요... 관우의 통수를 치고 형주를 먹은 건 노숙 시절부터 내려오던 명분으로 무마 할 수 있었는데 관우를 죽임으로 인해 그 누구도 유비를 막을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는 이릉대전의 공멸이죠...
17/02/21 12:18
애시당초 익양대치 당시에 손권이 남부 3군을 먹고 유리한 상황에 있었을때 조조가 한중을 치자 유비가 형주를 나누자고 협약을 제시하고 손권이 상수를 경계로 형주를 분할하는 안을 받아들여 영릉을 돌려준 이후론 이때부터 형주를 빌렸네 뭐네 하는 얘기는 양측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거기서 영토 분할안은 종료된 거였죠. 노숙 입장에선 최소한의 형주 점령의 명분을 세우고 양측 동맹이 이 이상 갈라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마무리하는게 최선이라고 봤던 거라고 봅니다, 여기서 이전의 명분을 더 제시하긴 어렵죠.
17/02/21 12:20
여몽이야 형주 먹고 나서 얼마 안가 죽었으니 어쩔 수 없다쳐도 그후에 오나라의 행동을 보면 그냥 나라 전체가 대국적인 전략이 부족한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죠. 형주 먹고 관우 죽인것도 모자라서 옹개에게 반란을 사주하고, 유장 아들 유천을 익주자사로 삼고, 주태를 한중태수로 임명하고...이건 뭐 전쟁하자고 대놓고 도발하자는건데 이래놓고 막상 유비가 쳐들어오니까 화친을 청하고. 뭐하자는건지 이해가 안되는 움직임입니다.
그리고 이왕 형주를 먹었으면 양번까지 빼앗아서 방어라인을 굳힐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런 적극적인 움직임도 보여준적이 없죠. 육손이 양양에 찝적거리적은 있습니다만 합비에 꼴아박은 노력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죠.
17/02/21 13:26
형주 먹은 거 자체가 관우가 천재지변으로 7군 포로로 잡으면서 정작 본인들도 군량 부족해지고, 보급로는 비에 개판되고,
군량 안보내면 다 조지겠다고 밑에 사람들 쪼니까 군심 이반되면서 발생한 사건이라.... 우연에 우연이 거듭된 사건이죠. 그렇지 않았으면 관우는 적당히 7군과 투닥거리다 돌아가고 오나라는 맨날 하던대로 기회 엿보다가 아쉽네 어쩔 수 없지 하고 포기했을겁니다. 거기다 정작 전략 입안한 총대장까지 죽어버리니 촉을 상대할 생각에 오나라 조정은 패닉이었겠죠. 수급을 조조에게 보내질 않나, 어떻게든 침공시기를 미뤄보려고 옹개반란 사주.... 뭐 결국 이릉에서 이기긴 했습니다만. 그리고 양번 역시 지도상으로 먹어야 한다고 한거지 막상 성 보고 지키는 군사보고 자기들 군사보면 엄두가 안났을겁니다. -_- 더군다나 군세 파악하는데 있어서 육손은 타고난 인물이라. 기책 몇 번 내보고 안되면 미련없이 돌아가고를 반복했죠.
17/02/21 11:17
오의 인물들은 단순히 전공만으로 평가하기 보다 그들이 어떤 생각, 어떤 철학을 가지고 움직였느냐가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조조와 유비가 운명처럼 서로의 빛과 그림자가 되었던데 반해, 손권은 어느 쪽에도 붙을 수 있었거든요. 삼국지의 캐스팅 보트랄까요? 따라서 삼국지의 핵심 이라 할 수 있는 천하삼분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인물 평가의 중요한 변수가 되겠죠. 당시 위라는 대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어떤 가치를 가져야 하는 가 물었을 때, 천하삼분지계만큼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춘 전략은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주유, 노숙이 여몽, 육손보다 흔히 고평가 받는다고 보고요. 물론 촉 위주로 서술한 연의의 영향도 배재할 수 없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릉대전은 "결과적으로" 공멸의 전쟁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흔히 전쟁과 정치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쟁은 정치의 일부이죠. 삼국지에서 고평가받는 인물들은 대개 정치의 일부로써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물론 전쟁을 잘 하는 건 기본이고요) 조조, 제갈량, 주유가 대단한 이유도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17/02/21 11:41
이릉전투가 공멸의 전쟁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동감할것같습니다
정치의 일부로 전쟁을 일으킨자들은 말씀하신 인물들외에는 거의 나라의 권력승계를 막 이어받은 사람들이 일으키는게 많았죠... 전쟁의 승리로 인해 민심과 능력입증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견고히 하려는의도인데 대표적으로 조상의 낙곡대전, 사마사의 동흥제 전투, 제갈각의 합비신성 전투등이 있습니다만 정치적으로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일으킨 전쟁은 공통적으로 끝이 안좋았다는것도 흥미롭네요
17/02/21 12:04
내정의 불안을 전쟁으로 덮으려하니 결과가 좋을리 없겠죠. 제갈량이나 주유는 내정을 안정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의 균형이라는 외교 정치에 입각했다는 차이가 있겠네요.
17/02/21 22:58
여몽은 서주, 합비를 포기하자면서 지세의 불리를 논했지만 결국 형주에서도 지세를 못 이긴 꼴이죠. 그리고 여몽 이전이나 이후에나 오나라는 결코 합비, 수춘, 그리고 그 너머 서주, 예주를 포기할 수 없었으니 결국엔 지세를 논하는것도 향후 전략엔 맞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하다 못해서 노숙이 그랬고 후의 제갈각이 그랬듯이 상대적 약세인 촉오 둘이 연합해 위나라 병력의 세라도 분산하는게 나았을 겁니다. 더군다나 218년~219년 당시엔 반위 반란이 기승을 부렸고 한중 패배 이후엔 더더욱 사방에서 반위 반란이 들고 일어났는데 조조의 위세가 꺾이고 황제가 있던 허창까지 관우의 인수를 받은 반란군이 나돌 정도였던 이 시기가 진짜 손오가 북으로 진출하려면 가장 적절한 시점이었을겁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 있던 화하를 진동케 한 관우의 위세가 정리되고 그 기회는 수포로 돌아갔죠.
17/02/21 11:30
이건 동오의 지휘관의 능력 이전에 호족연합체와 같은 성격을 띄던 오나라 국가체제 자체의 한계가 더 크다고 봅니다.
자신들의 영지가 공격받았을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우지만 대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굳이 자신들이 인력과 물적 자원들을 소비하면서까지 원정해서 얻을 이득이 그들에겐 크지 않았거든요. 심지어 조휴와 싸워 이길때 과정을 봐도 자신들의 진영까지 끌어들여 싸우는 방식을 추구했습니다. 지리적인 이점을 귀신같이 이용해서 방어는 정말 기똥차게 하는데 공격은 형주공방전이나 석정전투처럼 처음부터 완전히 이기는 판을 짜놓고 싸우지 않으면 거의 다 패배만 했죠. 이런 동오의 국가체제 특성상 주유의 천하이분이나 여몽의 대전략등은 설령 그들이 더 살았다 하더라도 실현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17/02/21 12:26
저도 오나라의 특성은 이렇다고 알고있어서 이게 수성에는 쉬우나 삼국정립이후 진출에는 큰 어려움이 있는게 아닌가 싶네요. 형주를 가져간건 유일한 예외일런지...
17/02/21 13:10
전적으로 동의하는게 오나라는 대전략 이전에 전력 자체가 약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주유 시대처럼 남형주의 소군벌이나 유장 정도를
상대하는 거면 모를까 삼국체제가 정립된 이후엔 이게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인식되었을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육손은 냉정하게 방어로 일관했고 공격을 할 때에는 기책에 의지했으며 기책이 실패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죠. 그 결과 성공하든 실패하든 원정에서도 군사력을 보존했고요. 유일한 예외가 형주점령인데 윗분들도 말씀하셨지만 이 역시 철저하게 뒤를 계산하고 들어가는 대전략이라기보다는 관우가 대홍수로 인해 보급이 엉망이 되면서 빈틈이 너무 커졌고 조조와 동맹을 맺어서 배후도 지킨 김에 완전 공짠데 안먹을 이유가 없잖아 하면서 들어가는 식이었죠. 영안, 양번 얘기가 나옵니다만 거기까지 진출했다면 배후가 다시 뜨끔해졌을거고, 무엇보다 오가 조인-만총이 지키고 서황 장료와 조조 본군이 지척에 있던 번성을 친다고 해봐야 성공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관우가 하도 크게 거덜내버리는 바람에 결과물이 말도 안되게 크긴 했는데 그래봐야 본질은 철저하게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임한 거였죠.
17/02/21 11:42
아 근데 본문에 제갈각 이야기가 빠졌네요.
오가 위를 관광태운 동흥전투는 삼국지 내에서도 손꼽히는 전공 중에 하나지요. 문제는 그도 오나라의 무덤 합비를 끝내 못 넘었다는거지만...
17/02/21 12:18
오자서와 손무라는 불세출의 영웅 둘이서도 못해낸것이 형주 점유입니다(당시 초나라 수도인 영성의 위치가 강릉쯤 되고, 종묘사직이 있던 옛 근거지가 이릉이니까 초나라 = 형주라 봐도 무방하죠). 깃발은 꼽았으나 진나라 원군이 오자 병사를 돌리게 되죠. 주유의 군재가 과연 이들을 능가할 수 있는가, 저는 좀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17/02/21 12:30
오자서와 손무의 시대는 각지의 군왕들이 중국을 나누어 점령하던 분열기고 주유는 어느정도 군벌이 정리된 상황에서 조조의 올스타(서황, 악진, 문빙, 조인, 이통 등등...)을 상대한거니 약간 얘기가 다르다고 보긴합니다. 물론 여기엔 유비와 같이 전장을 지휘한 것도 있으니(주유가 직접 장비를 수하로 둔 적도 있습니다. 유비한테 임대받아서...) 온전히 주유만의 공은 아니겠습니다만...
17/02/21 13:56
보면 볼수록 여몽은 도독감은 아니네요...그냥 맹장1이지.
근시안적으로 행동해서 1강 2약을 고착화시키고 촉,오를 공멸시키는..
17/02/21 13:59
뭐 그렇게 해서 형주를 얻고 그 형주를 발판으로 위를 공격해서 큰 성과를 얻어냈다면 높게 평가될만하죠.
근데 문제는 여몽은 형주얻고 바로 사망했고 그뒤를 이은 오나라 대도독들은 방어전 특화라 형주를 바탕으로 위를 제대로 공략한적이 단 한번도 없어서...
17/02/21 14:01
위에도 나와 있지만 합비조차 못 뚫은 오가 양번을 뚫고 촉까지 방어해내기는 무리죠.
진짜 노숙이었으면 손권을 죽어라 말렸을건데 여몽은 좋다고 둘이서 짝짜꿍해서..
17/02/21 14:22
정사를 파고들 정도로 삼국지 매니아는 아니라서 끼어들기 부담스럽지만...
여몽의 판단은 아쉽긴 합니다. 형주를 취하고 관우를 죽이는 수순까지 갔다면 그 기세를 몰아서 촉을 계속 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죠. 형주를 얻고 관우를 죽이는데 성공은 했지만 결국 촉이 위를 향해 세웠던 창끝이 오로 향했고 이릉대전이라는 전투가 벌어진 것은 사실이니까요. 이릉대전에서 이겼다고는 하지만 국력 손실이 분명 있었고 그 과정에서 위는 강건너 불구경하면서 촉과 오가 국력이 소모되는 것을 보고 있었죠. 촉 + 오 vs 위 라는 구도에서 촉 vs 오 vs 위 라는 구도가 되면서 위가 웃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죠. 뭐 IF이기는 하지만 만약 형주를 얻는 것까지만 하고 관우를 살려보냈다면 관우와의 사이는 좋아질 수 없었겠지만 촉과의 사이는 최악까지 흘러가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위가 누렸던 강건너 불구경을 오가 누릴 수 있었겠죠. 그 당시 촉은 북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거든요.
17/02/21 14:28
여몽이 형주를 취하고 촉을 계속 칠수가 없었던게 형주를 취하고 바로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죠.
이후 여몽의 뒤를 이은 육손은 너무나 수비에 치중된 대도독이라...
17/02/21 14:40
위에서도 얘기가 나왔지만 여몽 본인이 본인 계획을 제대로 실행할수 있었다고 생각했을지나 의문입니다. 여몽이 병을 앓았다는게 꽤 오래전부터라는 증거가 있으니만큼 말이죠. 설령 그랬다고 해도 과연 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고.
17/02/21 14:54
여몽이 살아있었다 해도 영안까지 달릴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군이 관우 통수 친 걸 안 순간 촉도 긴장 했을거고 그런 상황에서 형주에서 촉으로 통하는 메인 루트인 영안을 그냥 놔둘리가 없죠... 그리고 촉이 망한 후에도 나헌에 막혀서 오는 영안을 뚫질 못했는데 촉이 멀쩡하던 유비 시절에 영안을 뚫기는 더더욱 어려웠을거라고 생각합니다.
17/02/21 16:19
저도 이와 비슷한 의견입니다.
형주를 수복하고 민심장악을 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방금 점령한 형주를 보급기지로 해서 영안루트 촉정벌을 수행 한다는건 리스크가 너무 커요. 적벽 이후 1차 합비침공부터 육전의 공세는 성공사례가 아예 없다고 무방한 수준의 오군의 수준을 가지고 불과 얼마 전 끝판대장 조조와 맞붙어서 하후연을 참살하고 한중을 따낸 (전력이 온존한)촉군을 상대로 육전을 벌여 이길 확률은 매우 낮아보입니다. 또 그렇게 거국적인 정벌이 된다면 정벌의 성공여부와 무관하게 끝내 번성을 지켜낸 조인 + 만총 + 서황 군세가 형주 인접해 머무르고 있는 것도 불안한 요소가 되고요. 촉정벌도 확신이 안서는 수준에 양방향의 군사 행동은 말도 안되니까요. 역사에 만약은 없다하지만 이릉대전의 장소가 이릉이었기 양자강 따라 건설된 7백리 촉영이 불타오를 수 있었다고 봅니다. 아마 그런 규모의 회전을 강을 낀 곳이 아니라 육전으로 했으면 아무리 육손이어도 유비가 그렇게 절망적으로 박살나진 않았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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