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1/11/07 00:10:01
Name 글곰
Link #1 https://brunch.co.kr/@gorgom/149
Subject [일반]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5)
-1998-2000 : It's Alright / 매미의 꿈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 민물장어의 꿈 / Friends



중간에 있었던 다른 가수와의 협업 앨범이나 싱글 등을 제외하면, 지금껏 다루어 왔던 솔로 앨범 2개와 N.EX.T의 앨범 4개를 통해 신해철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일차적으로 완결 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과정은 신해철이라는 소년이 마침내 어른이 되는 여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나긴 여정이 완결됨과 동시에 밴드 N.EX.T는 파탄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과정을 겪으면서 말 그대로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의 열정 자체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N.EX.T의 해체 과정이 그에게 끼친 영향 또한 분명해 보인다. 신해철에게 있어 밴드라는 건 삶의 목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밴드 해체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간 신해철은 불과 반 년 만에 자신의 앨범을 내놓는데, 지금까지의 패기 넘치던 모습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움츠러든 모습을 보인다. 이 앨범의 타이틀곡이자 가장 사랑받는 노래는 단연 [일상으로의 초대]겠지만 그걸 제외하면 앨범 전체의 분위기는 쓸쓸하고 자조적이다.



지금껏 쌓아온 게 모두 사라진 것 같아요
괜찮아요 금세 다시 일어날 거예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 누구도 내일 일을 알 수 없어요

-신해철, [It's Alright]


선생님 제게 가르쳐 주신 건 모두 거짓말이었나요
책에서 본 것과 세상은 달라요
그때도 알고 계셨었나요
어른이 될 때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 했었죠
지금은 그게 습관이 됐어요
아무런 생각이 없이

-신해철, [매미의 꿈 Part 4 매미의 꿈]



언제나 소년이기를 바라는 신해철이었지만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곁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음악적 동지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오히려 떠나버리고 혼자 남은 신해철은 자신의 삶 자체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말로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내 선택은 처음부터 어긋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영웅이 되고 싶었건만 지금의 내 모습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는 유례없이 강한 어조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신해철,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머야]



이제 신해철은 더 이상 [Here I stand for you]에서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을 믿는다고 읊조리던 그 소년이 아니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둘러싸인 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설픈 어른일 뿐이다. 그렇기에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노래다. 수십 차례에 걸쳐 끊임없이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신해철은 자신의 내면을 끝까지 파고 들어간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1999년의 마지막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그는 마침내 자신이 다시 한 번 도출한 대답을 내놓는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 뿐
(...)
저 강들이 모여 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생전 자신이 죽는다면 묘비에 노랫말을 새겨주길 바란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큰 애정을 보였던 노래인 [민물장어의 꿈]은, 어른이 된 신해철이 끝내 세상과 맞서 싸운 끝에 내놓은 해답에 해당한다. 스스로를 깎고 자르면서, 그렇게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포기해 가면서까지 그가 추구한 것은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를 향한 발걸음이었다. 그것을 도전이라 칭하든, 혹은 변화라 표현하든 간에, 그는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한 여행을 떠나겠노라 말한다. 그건 본질적으로 소년 신해철의 자아 확립을 위한 여정일 것이었다.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이후 영국에서 또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신해철은 길지 않았던 솔로 생활을 청산하고 현지에서 밴드를 결성한다. 철학자의 이름을 딴 새로운 밴드의 이름은 비트겐슈타인. 이전 앨범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결론을 내린 신해철은 다시금 본래의 경쾌하고 긍정적인 노랫말로 되돌아간다. 이 시절 그는 스스로가 소년이 아닌 어른임을 완전히 인식하고,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일정부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미래를 착실히 그려 나갔다. N.EX.T 4집이 신해철의 음악 인생 제1장의 화려한 마무리였다면, 비트겐슈타인 1집은 인생 제2장의 차분한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이 맘에 드는 모습은 아니지만
하지만 나 지금 이대로 우리 다 이대로
그냥들 열심히 사는 게 내겐 너무 좋아만 보여
옛 동네 어느새 변해 버리고
우리도 딱 그만큼 변해 버렸지만
죽는 날까지 가져갈 우리 기억들
또 약속들

-신해철, [Friends]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새 시작과 함께, 그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던 신해철의 음악적 삶은 점차 내리막길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개미먹이
21/11/07 00:24
수정 아이콘
비트겐슈타인 1집은 매니악한 앨범이긴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가사들은 예전 넥스트 시절 못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새 2030 들이 주요한 주제로 삼고 있는 남녀 갈등에 관한 선견지명도 일부 있지요.
수컷의 몰락 part 1, part 2가 그것입니다.
21/11/07 00:27
수정 아이콘
비트겐슈타인 앨범하면 이게 항상 먼저 떠오릅니다.

아 김밥, 아 순대, 아 박카~~쓰
김동연
21/11/07 10:55
수정 아이콘
에로틱이 뭐여? 싸우는거~
벤자민비올레이
21/11/07 00:51
수정 아이콘
(수정됨) 신해철의 전체 디스코그래피 맥락을 고려할때 모노크롬 앨범이 제일 아쉬운 것 같아요. 이 앨범을 작업할 당시, 넥스트 4집 이후 신해철의 음악적 역량과 집중력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죠. 실제로 이때 신해철은 실력있는 영국 뮤지션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음악의 방향을 모색했고, 그 결과물로 실험적이고 완성도 높은 앨범을 만들어 내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 앨범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신해철은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을 다시 틀게 되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모노크롬 앨범의 시장에서의 실패로 인해, 그간 쌓아온 그의 음악 커리어에서의 좋은 흐름을 잃게 된 것 같아요
세인트루이스
21/11/07 08:24
수정 아이콘
뮤지션 신해철의 가장 큰 장점은 공감가면서도 깊은 성찰이 담긴 작사능력 + 따라 부르고 싶은 멜로디작곡 능력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모노크롬 앨범에 담긴 헤비메탈 음악들은 그 장점들이 잘 발휘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사운드적으로 완성도는 제일 높았을지 몰라도, 한국에서 대중적인 성공은 신해철 본인도 기대하지 않았겠죠. 그럼에도 콘서트를 가득 채운 능력은 정말 대단했고, 헤비메탈 공연으로 큰 공연장을 가득채운 밴드는 신해철, 서태지 이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세인트루이스
21/11/07 23:13
수정 아이콘
이 글읽고 간만에 유튜부에 신해철 검색해보니 히든싱어 신해철편이 나오더군요. 한소절만 들어도 다 맞추겠더라고요. 강헌씨는 신해철 음악의 가장 큰 약점은 신해철의 보컬이라고 말했지만, 담백한 매력이 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정치] [공지] 정치카테고리 운영 규칙을 변경합니다. [허들 적용 완료] [126] 오호 20/12/30 274821 0
공지 [일반] 자유게시판 글 작성시의 표현 사용에 대해 다시 공지드립니다. [16] empty 19/02/25 341087 10
공지 [일반] [필독] 성인 정보를 포함하는 글에 대한 공지입니다 [51] OrBef 16/05/03 463022 29
공지 [일반] 통합 규정(2019.11.8. 개정) [2] jjohny=쿠마 19/11/08 337215 3
102674 [정치] 트럼프는 한국에게 방위비 13조를 내야 한다 [46] 번개맞은씨앗6141 24/11/15 6141 0
102673 [일반] 소리로 찾아가는 한자 50. 대 죽(竹)에서 파생된 한자들 [4] 계층방정1249 24/11/15 1249 2
102672 [정치] 상법개정안과 재벌해체 [14] 헤일로3150 24/11/15 3150 0
102671 [일반] 삼성전자, “10조원 자사주 매입”…3조원은 3개월 내 소각 [35] Leeka7169 24/11/15 7169 0
102670 [일반] 간만에 읽어본 책 [한국인의 기원] [10] a-ha2157 24/11/15 2157 8
102669 [일반]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독서 후기 [3] 천연딸기쨈2026 24/11/15 2026 4
102668 [일반] 연세대 논술 시험 무효 가처분이 승인되었습니다. [19] Leeka3293 24/11/15 3293 0
102667 [정치] 이재명 1심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743] wonang23759 24/11/15 23759 0
102666 [일반] 100년전 사회과부도 속의 미국과 호주 [5] 식별2547 24/11/15 2547 10
102665 [일반] 흑인남성들은 왜 해리스에서 트럼프로 옮겨갔는가 [48] 뭉땡쓰5199 24/11/15 5199 9
102664 [일반] 100년전 겪었던 일들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미국 [44] 예루리5542 24/11/15 5542 7
102663 [정치] 민주당, 상법 개정안 당론 채택. + 왜 그렇게 반발하는가? [49] 깃털달린뱀5023 24/11/15 5023 0
102662 [정치] 수능 지문에 나온 링크에 정치적 메세지를 삽입한 건 [33] 설탕물9467 24/11/14 9467 0
102661 [일반] 4만전자가 실화가 됐네요 [184] This-Plus11447 24/11/14 11447 4
102660 [정치] 이준석 : "기억이 나지 않는다" [424] 하이퍼나이프19890 24/11/14 19890 0
102659 [일반] 100년 전 사회과부도 속의 유럽을 알아보자 [26] 식별5522 24/11/14 5522 17
102658 [일반] 올해 수능 필적 확인란 시: "하나뿐인 예쁜 딸아" [26] 해바라기6131 24/11/14 6131 34
102657 [일반] PGR게시판의 역사(2002년~지금까지) [13] 오타니1734 24/11/14 1734 12
102655 [일반] 우리나라는 서비스를 수출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34] 깃털달린뱀4021 24/11/14 4021 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