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손은 뒤에서 깍지를 끼고 있어야 하며, 두 다리와 머리는 삼각형의 균형을 잡으며 그 무거운 지구를 단단히 들고 있어야 해서 이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그때 난 온몸으로 체득했다, 내 몸이 지구의 무게보다 분명 더 나간다는 것을. 이때의 반동은 지구를 들고 있느라 우뚝 솟은 엉덩이밖엔, 달리 움직일 수 있는 여벌의 도구는 없다.
물론 여기 모인사람들은 거진 다 남자들이라서, 여벌의 도구가 없다기 보다는, 걸을 때 쓰는 다리 두 개 말고도 남는 다리 하나 더 씩 다들 쪼그라트려 꼬불쳐 놓고 있지만 그건 이럴 때 쓸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이걸 쓸 때는 각자 나름의 용도로 요긴하게 쓰긴 하지만, 숙식을 같이하며 지내는 이들의 평상시엔 “누적 배출수 방향통제장치” 또는 “배출수 정밀 유도 목적의 실외기”라는 것 이외엔 평시 별 용도가 없는 그냥 잉여부착물이다.
이런 방향통제 용도로의 사용은 이런 유니폼족들이 혹시라도 외출하여 양변기와 조우한다 해도 큰일을 치루기 위한 만남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서서쏴를 하지 쫀심 상하게 앉아쏴를 실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프라이드 강한 유니폼족이 “양변기에 앉아쏴는 유니폼 명예의 굴욕이며 ‘누적 배출수 방향통제장치’의 잘못사용 또는 부적절 활용이다“라고 주장하면. (나 페미로부터 고소당함?)
다들 알겠지만 원산폭격은 공군에서 하는 적진 침투 군사작전이 아니다. 이는 “대가리 박아”라는 순 우리말의 규정된 행동을 격식에 맞추어 제식화 한 품격 있는 군사용어이다.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 다들 아는 그 용어인데 누가 몰래 삭제 했는지 군사훈련 매뉴얼에는 없다.
이때는 박자만 맞으면 돼서 모두 노래실력이나 가사의 확실성 또는 발음의 정확성 등은 괘념치 않는다. 이는 발라드도 아니고 랩도 아니라 그렇다. 노래의 실력을 심사할 심사위원도 없다. 아무도 안 듣지만 같은 노래를 여러번 시키기도 한다. 그 바람에 머리 나쁜 나조차도 그 노랠 다 외웠다.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건, 그런 원산폭격 상태에서 코를 골던 놈이 있었다는 것이다. 좀 무디긴 해도 성실하고 착하던 그 녀석 기억이 난다. 서울의 특히 공부 잘하는 애들만 가는 어디 학교 통계학이라던가... 그건 가물가물 하지만 억지로 회상할 필요는 없다. 그는 같이 생활하는 동안 먹는 것을 제외하곤 한 번도 바빠하는 적도 서두르는 것도 본적이 없다. 당연히 큰 실수를 하는 것도 본적이 없다. 평생 속으론 쫑쫑 안달만 하고 살던 내가, 때론 그 생각의 여유로움과 주변 상황에 무딤이 부럽기도 했다.
내가 지구를 조금만 더 들고 있으면 우리 모두 곧 취침할 수 있다. 내가 지구를 들고 있는 동안 나는 모든 국내외 번민에서 자유롭다.
지금 내 옆을 오가며 뭐라고 소지 지르며 욱박지르기는 하지만, 늘 그렇듯이 별 내용은 없다. 오히려 지구를 들고 있는 내 머리에서 오는 압력으로 인하여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할 수밖에 없어 차츰 마음이 정화되고 근심거리나 부담이 없어진다. 이제 나는 새로운 아이디어들과 상상력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사회 분야를 경험한 동료 근무자들이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성실과 불성실의 급여 차이를 안 둔다. 물론 연말 상여금도 없지만 그 급여나 상여금을 바라보고 온 사람은 하나도 없다. 성실해야 될 유인 요인이 없다는 건 열심히 할 필요가 없으니, 그 조건이 내겐 여기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데 필요한 커다란 장점이기도 했다. 불성실해도 시간이 되면 꼭 진급은 된다.
그러니 이 원산폭격 중인 상태에서, 나는 마음을 가볍게 하고, 내일은 뭘 해서 하루의 즐거움을 채울까 하는 창조적인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일은 어떤 먹을 것이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하루의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땐 나와 내 동료들이 젊은 관계로 먹으면 바로 소화가 돼 항상 허기지니까 음식에 맛의 존재보다는 제공의 충분함에 의미를 더 두고 있어 맛이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주는 대로 먹어라, 그래서 음식을 남긴 적도 없다. 레알 진짜다. 알고 보니 그곳은 내게 맛이라는 것을 생각할 여유를 주지는 않았다. 아마 매일 배를 조금은 주리게끔 운동을 하고 먹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더 줘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독일계 미국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저술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책을 쓴 게 있다. 이 개념은 “악의 평범성이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데 난 그곳에서 “맛의 평범성”을 발견했다. 침식을 같이 하는 동업자 동료들이 함께 어울려 웃으며 수다 떨며 즐겁게 먹고 시간 보내고 있으니 평범한 음식이라도 당연히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왔노라 먹었노라 맛있었노라.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왜 그렇게 맛있었지”에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내가 무얼 하던 그때의 시간은 느리게 갔다. 그때의 시간은 지금과 단위는 같지만 실제론 노래방에서 30분씩 시간을 그냥 더 넣어주는 친절처럼 누가 자주 더 넣어주는 것 같았다. 내시간만 그런가 나중에 알고 보니 다행인 것은 그곳의 달력과 밖에서 쓰는 표준 달력의 날짜가 같더라는 것이다.
그 날들이 하루하루 모이고 오늘이 되어, 지금은 클라우드 팻을 사다 이 글을 쓰며 잔을 기울이고 있다. 오랜만에 짧은 시간여행을 했다.
P.S. : 음식을 먹고 한국인은 맛이 있다고 쓴다. 영어와 일본어는 Delicious おいしい/うまい로. 중국어는 중국어로 "好吃"로 “먹기 좋은”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각기 맛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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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따까리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를 몸으로 체득한 1인.
두피가 지면에 강한 압력으로 오랫동안 눌리면 진물이 나는데 나중에 피부각질과 덩어리져서 손가락 두 개 정도 되는 딱지가 떨어져 나옵니다. 군생활 하는동안 세 개 정도 만들어내고 나왔네요. 그러고보니 탈모가 제일 심한 부분이 그자리네 아오...
궁금해서 인공지능에 물어봤습니다. AI 3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MS Bing Copilot“도 Google Bard도 모른다고 해서, ChatGPT에 [형용동사의 개념정립]에 대하여 물어봤습니다. ChatGPT 대답 : 1980년대 이전은 삭제하였습니다.
Quote :
1980년대: 형용동사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깊어지면서, 형용동사 개념이 정립되고 발전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시기에는 형용동사의 문법적 역할과 의미적 특징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형용동사가 국어 교과과정에 적용되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1990년대: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형용동사에 대한 공동적인 이해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형용동사의 정의와 특징이 상대적으로 명확해지면서, 이를 기반으로한 문법 교육과 연구가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형용동사 개념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더욱 발전하면서, 형용동사의 특징과 사용법이 어문 교육자료나 교과서에 포함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2000년대 이후: 현대 한국어 교육에서는 형용동사 개념이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고 교육과정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이후의 교육자료와 교과서에서는 형용동사의 개념과 활용에 대한 학습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위의 추정은 대략적인 시기를 나타내며, 실제 교육 현장에서의 도입 시기는 학교, 교육 기관, 교과서에 따라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