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본 글은 미괄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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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에게 있어 임진왜란은 너무 큰 투자였는데요, 대마불사라는 말이 있듯, 너무 많은 걸 쏟아부은 사업은 망할 것 같아도 망하게 냅둘 수 없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총 책임자는 그야말로 목이 달아나기 때문이죠.
임진왜란의 경우는 더 골치아팠던 게 히데요시 본인이 총 책임자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투자액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정유재란은 빼고 임란 때 조선 원정 병력의 규모가 17만 가량 됐는데요, 상륙작전의 규모만 놓고 말했을 때 이 기록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까지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고집을 부렸죠. 어떻게든 이겨보거나, 아니면 최소한 비겨(?)보려구요.
그러다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뜬금 없이 죽으면서 드디어 동아시아는 출구전략을 찾게 됩니다.
전후 일본에서는 전쟁의 실패로 인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도요토미 일파가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게 되죠.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의 출발은 불안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자기 아들에게조차 자리를 물려주는데 실패했는데 이에야스라고 성공하리란 보장이 없었죠.
왜 하필 이에야스여야만 하는가에대한 정통성도 매우 취약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버둥거리며 고안한 장치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중요한 장치 중 하나가 곧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였습니다.
외국 정부와 국가대 국가로 교섭하고 국교를 수립, 그 사절단이 우리 도쿠가와 쇼군들을 접견하러 오고, 그 퍼레이드를 많은 사람들, 특히 다이묘들이 목격하고.... 뭐 그런 예쁜 그림을 그린거죠.
이에야스는 자신이 임란 때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면서 집요하게 통신사 파견을 요청합니다.
조선 입장에서도 통신사 파견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북방에서의 군사적 압력이 증가하고 있었고, 일본의 정세가 매우 급하게 변하고 있는 마당에 새 정권의 정체를 파악하고 남쪽에서의 위협을 제거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요.
덤으로 일본에는 상당수 민간인 포로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송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면 아주 좋은 일이죠.
다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일단 조선은 교섭상대가 [일본국왕]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물론 이는 덴노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도쿠가와 쇼군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입장에서 덴노고 뭐고 하는 건 관심 없고 일단 교섭 상대자인 쇼군이 조선의 왕과 동일 레벨이어야 했습니다. 쇼군이 대체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명색이 조선의 왕이 편지를 주고 받는데 일본국 [장군]과 왕래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추가로 쇼군에게 [왕]이라는 타이틀을 강요하는 건 일본에게 패전 인정을 강요하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일단 [왕]이라고 타이틀을 붙이는 순간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 상징적으로 편입되기 때문이죠. 또 이는 명나라 대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강화교섭 당시 제시했던 조건인 [왕으로 책봉해줌 o o] 을 일본이 받아들였다는 의미가 되므로 역시 패전의 인정이 됩니다.
거기에 더해 조선에서는 선왕들의 무덤을 욕되게 한 책임자를 서울로 압송할 것까지 주문합니다.
물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조건들을 모두 들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급하게 된 건 쓰시마였습니다.
쓰시마는 대대로 반도와의 무역에 종사해왔으며 이를 통해 상당한 부를 얻어왔습니다.
그냥 부를 얻었다고 하면 뭔가 부족하니 다른 기준을 제시하자면, 당시 쓰시마에서 생산되는 식량만 가지고는 쓰시마 인구의 절반도 못먹였습니다.
쓰시마인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 아니라 반도에서 사온 쌀이었죠. 쓰시마는 무조건 무역을 해야만 했고, 이 무역에서 나온 부를 통해 밥을 [사먹는] 입장이었습니다. 얘들은 국교 회복이 안 되면 그냥 죽어요..
1606년, 조선 조정이 제시한 조건을 접수한 쓰시마도주 소 요시나리는 멘붕에 빠집니다.
이걸 막부에서 오케이 해 줄 리도 없고, 그런데 오케이 안해주면 쓰시마는 파 to the 멸에 빠질 상황입니다.
이양반은 고심 끝에 역사에 길이 남을 결단을 내립니다 -_-;;
[그냥 우리가 편지를 쓰면 안돼?]
하고 몇몇 최측근들과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지를 위조해버립니다.
어머나
이 편지는 그야말로 화끈하게 조선 쪽의 요구사항을 다 맞춰줬습니다.
자, 나 도쿠가와 이에야슨데, 일본 왕이야. 됐지? 그리고 올 해가 몇 년이지? 어 그래 아예 명나라 연호로 표기할께. 만력 몇 년. 됐지? 우리가 졌어. 임진왜란 우리가 진거야. 에 또 뭐냐, 왕릉을 모욕한 범인들? 자 여기 찾아서 동봉하니 첨부파일을 열어보길 바랄께. 이만 줄인다 안녕
--일본왕 이에야스--
흐흐... 이 편지를 받아본 선조의 표정은
o_O?
이게 상식적으로 이렇게 화끈하게 돌아올 요구가 아니었는데 너무 화끈하게 돌아온 바람에 오히려 큰 의심을 삽니다. 진짜 같지가 않다는 거죠. 게다가 쓰시마도주가 임란 당시 전범이라면서 보내온 애들은 그냥 쓰시마도주 감옥에 있던 청년 범죄자들이었습니다. 임란이 1592년에 발발했는데 1606년에 보내온 전범이 십대라니, 말 도 안됐죠.
그런데, 이 능구렁이 같은 조선 조정은 속아주는 척을 하기로 하고 전후 첫 번째 [국서]를 써서 정식 사절을 에도에까지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대신, 이 국서의 서두는 [조선국왕 모모가 일본국왕 모시기에게 답장합니다] 였습니다.
이게 우리가 먼저 보내는 국서가 아니라 너희 국서에 대한 [답장]이라는 걸 명확히 한 거죠.
1607년, 이 정식 사절단이 에도에 가기 위해 먼저 쓰시마에 도착했을 때 쓰시마도주는 피가 몸 밖으로 다 쏟아질 것 같은 공포를 느낍니다.
답서라니... 이게 에도에 도착해서 쇼군이 열어보는 날에 자기 목은 없는 겁니다.
아놔 편지 한 통 위조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일이 꼬일대로 꼬였습니다.
이에 쓰시마 도주는... 다시 일을 꾸밉니다.
조선 통신사가 쓰시마를 떠나기 전에 다시 위조된 편지로 기존 편지를 바꿔치기하는데 성공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수를 썼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습니다만, 대충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한 밤중에 닌자를 파견해서 조심스럽게 보관되어있는 편지를 스사삭!
이번에는 [답함] 부분만 [보냄] 정도로 살짝 바꿨죠.
됐어! 요시! 이제 된거야!
이 위조편지에 대한 답서를 쇼군이 썼는데
일본 연호를 써버리고 왕이라는 타이틀도 거부합니다.
당황한 통신사들은 실무자들과 협상을 벌였고
결국 연호는 빼버리는 데 성공하지만, 쇼군이 왕을 자임하게 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이렇게 어영부영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위조를 안 한 사람은 없어도 한 번 만 한 사람은 없다고
1615년 문제가 또 터집니다.
쓰시마의 존재 이유는 조선과의 관계에서 중재인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후 (물론 그 즉위는 한 참 전이었지만) 홀로 남겨진 후계자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쇼군직 상속의 정통성을 알리고 자신의 카리스마와 존재감을 널리 광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617년 교토 여행은 그래서 더 화려하고 더 대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쓰시마도주를 시켜 1617년에 맞추어 조선 통신사를 파견해줄 것을 조선 조정에 요청하게 했고
쓰시마도주는 엄청난 압박을 느낍니다.
그래서, 또 위조를...-_-;
이렇게 위조된 국서로 조선 통신사를 불러오는데 다시 성공합니다.
통신사는 히데타다가 교토에 있을 때 때맞춰 교토에 도착했고
수 많은 다이묘가 참관한 자리에서 히데타다는 통신사를 성공적으로 접견하며 자신의 국내외적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의 주요 목적은 국내정치?>
이렇게 잘 넘어간 줄 알았던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다시 터집니다.
쓰시마 도주 요시나리는 이 위조사건을 혼자 꾸민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최측근인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이 사건을 진두지휘 했었죠.
문제는 1631년 즈음 둘의 사이가 벌어진 겁니다. 야나가와 시게오키의 힘이 점점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쓰시마 도주 소 요시나리는 그를 압박했고,
이에 야나가와가 쇼군에게 모든 걸 꼬지르면서 대형 스캔들이 터집니다.
에도 막부의 최고 정책 결정자들이 지난 30여년간 국서가 지속적으로 위조되어왔다는 제보를 받았을 때의 표정을 상상해보세요.
자기들도 모르게 30년 간 쇼군은 일본국왕으로 표기되어왔고, 명나라 만력 연호를 써왔고, 조선 왕들이 그걸 받아서 읽고 있었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쓰시마 도주는 이제 죽은 목숨인 거죠.
그런데
하늘이 그에게 웃어줍니다.
1632년,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죽고, 그 아들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즉위합니다.
이제 다시, 정통성의 과시를 위해 대규모 조선 통신사가 필요해진 겁니다.
도쿠가와 조정은 조선으로부터 통신사 파견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양국 관계에 있어 오랫동안 노련하게 중재해온 쓰시마 도주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끈하게, 야나가와에게 위조죄를 다 몰아주고 죽여버립니다 ㅡ.,ㅡ;
내부고발자의 인권은 그 때나 지금이나 시궁창이군요.
소 요시나리는 그렇게 지옥에서 한 끝 차이로 살아나옵니다.
막부는 지난 국서들이 야나가와에 의해 위조되었으며 잘못된 것들임을 즉시 조선에 통보하고
요시나리의 중재행위를 감시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뒤, 다시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합니다.
자 이제, 이전에 보낸 국서들에 "왕"으로 표기했던 건 다 무효가 됐습니다.
1636년에 파견될 조선 통신사들에게 줄 답서에는 왕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쇼군이라고 밀어붙일 수도 없고, 뭔가 돌파구가 될 만한 표현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막부의 두뇌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해법은
[대군(大君)]이었습니다.
1635년, 요시나리가 국서위조사건을 조선의 예조에 보고하면서 처음 사용된 이 표현은 이래저래 양국의 관계자들을 만족시켰습니다.
일본 입장에서도 괜찮은 어감이었고, 조선 입장에서도 비록 상대에게
[왕]을 강요함으로써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에 끌고들어오는 데는 실패했지만, 수양대군 양녕대군 등등 왕보다 한 단계 낮은 어감을 갖고 있는
[대군]을 상대 수장에게 부과한 것은 (비록 상대는 전혀 그렇게 생각 안했을지라도) 기분 나쁜 결과는 아니었던 거죠.
이런 긴 과정을 거쳐 이 용어는 막부의 수장을 가리키는 점잖은 말로 널리 통용되게 됩니다.
이걸 당시 나가사키에 출입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일본식 발음인
[다이쿤]으로 유럽에 옮겨왔고
이 말이 영국에 전래되면서
[Tycoon]이라는 스펠링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게...
[롤러코스터 쇼군]이 되겠습니다.
참고문헌: Toby, Ronald P.,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 Asia in the Development of the Tokugawa Bakufu, Princeton Univ. Press, 1984.
Ps: 이거 저만 몰랐나요? 숙제로 위의 책 읽고 알았는데 엔하에도 저 타이쿤의 어원이 저 타이쿤이라고 적혀있네요. 정말 나만 몰랐나 -_-;;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4-05-09 15:59)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