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민머리요정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야구글로 인사드립니다.
엊그제 박경완 선수의 은퇴식을 보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딱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선수가 박경완 선수였기 때문이죠.
박경완 선수가 은퇴식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주목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은퇴하는 박경완 선수 못지않게 주목받은 한 사람의 이름이 있었으니,
그 분의 이름은 김원형 코치입니다.
영혼의 배터리,
영혼의 배터리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배터리가
김원형 - 박경완 배터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은, 김원형 - 박경완, 이 두 선수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원래 박경완 선수는 군산 금광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포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전주 중앙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됩니다.
박경완, 김원형 선수는 전주 중앙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 함께 야구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전주 동중학교 -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전주 연고의 쌍방울 레이더스에도 함께 입단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이 둘의 쌍방울 입단 스토리를 아시겠지만,
김원형 선수는 당시, 쌍방울과 고려대학교가 치열한 영입전을 펼친 끝에 입단시켰을 정도로,
상당히 기대가 컸던 선수였습니다. 신인시절 구단에서는 일찌감치 에이스로 점찍어두고 관리했을 정도였죠.
이에 비해 박경완 선수는 큰 기대를 받지 못한 선수였습니다.
프로무대에서 통할 수 있을만한 수비적 기량이나, 타격능력 등 많은 것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더군다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기량저하까지 겹치게 되면서 당시 신인지명에서 지명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박경완 선수는 원광대학교에 입학하려는 준비를 했었다고 합니다.
대학 진학을 준비하던 중, 이마저도 원하는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김원형의 도움으로 쌍방울에 신고선수로 입단할 수 있었습니다.
박경완 선수의 쌍방울 입단 비하인드 스토리로는,
김원형이라는 팀 내 최고 유망주의 친구라서 볼도 같이 받아주고,
함께 운동도 하며, 말동무도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구단의 뜻이 컸다고 합니다.
이렇게 같이 입단하게 됨으로, 이 둘은 함께 프로야구사에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함께 입단은 했지만, 먼저 두각을 나타낸 건 김원형 선수입니다.
창단 2년차인데다가, 선수층이 너무 얇았던 쌍방울은, 고졸 신인이었던 김원형을 바로 1군에 투입시킵니다.
시즌 초반 부진한 모습을 계속해서 보였던 김원형 선수는,
당시 감독이었던 김인식 감독에게 2군에 보내줄 것을 꾸준히 요청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습니다.
이후, 이 어린 투수에 크게 깨달음을 줬던 경기가 있으니,
1991년 8월 14일 광주 해태전 / 당시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 선수와의 맞대결이었습니다.
이 맞대결에서 선동열을 상대로 1:0 완봉승을 거두게 되었는데,
이 당시 김원형 선수의 나이는 19세 1개월 10일로 당시 최연소 완봉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후, 1년 뒤 염종석 선수가 19세 1개월 12일로 기록 갱신에 실패했고,
다시 1년 뒤 주형광 선수가 18세 1개월 18일로 최연소 완봉승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 불멸의 기록으로 남게될 기록)
이후, 2년차 징크스없이 꾸준히 성장하던 김원형 선수는,
3년차였던 93년에 또 한번 큰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1993년 4월 30일 전주 OB전에서 20살 9개월 25일로 최연소 노히트 노런(1사사구)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 노히트노런은, 전주구장에서 나온 처음이자 마지막 노히트 노런으로 남아있으며,
이후에도, 절대 깨지지않을 최연소 노히트노런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에 비해 박경완 선수의 시작은 초라했습니다.
연봉 600만원짜리 신고선수, 이 때문에 쌍방울 선수들은 박경완의 사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던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쌍방울 시절, 조범현 감독의 사진을 구할 수가 없어서,
충암고 시절, 김성근 감독과 함께 있는 사진으로 대체했습니다.)
일찌감치 박경완의 재능을 알아본 당시 쌍방울의 배터리코치였던 조범현 코치는,
아예 박경완 선수의 옆집으로 이사를 와서, 함께 훈련을 시켰다고 합니다.
박경완 선수는 이 훈련을 회상하기를, 너무 힘들어서 바로 앞에서 면전에 대고 욕을 했을 정도였다고....
결국 이 훈련을 모두 소화해낸 박경완 선수는 그때부터 빛을 보기 시작합니다.
이런 혹독한 훈련 끝에 94년 주전 포수로 뛰기 시작한 박경완은,
그해 0.433의 도루저지율을 기록하며, 도루저지율 부문 1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에도, 팀의 주전포수로 계속 팀을 이끌었고,
96년에는 0.475의 놀라운 도루저지율을 기록하며, 포도대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후, 쌍방울에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2차례 포스트시즌에도 진출하기도 했던 쌍방울 레이더스.
하지만 IMF와 무리한 무주 동계유니버시아드에 큰 자금을 쓰게 된 쌍방울은,
98년 외국인선수 도입과 더불어 더 큰 재정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급기야, 선수들을 타팀에 현금트레이드로 팔아, 재정을 충당하기에 이르죠.
김기태, 김현욱, 박경완, 조규제 등 팀의 중심이 되는 선수들이 현대, 삼성등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쌍방울은 급격하게 흔들리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박경완도 현금트레이드에 대상이 되었습니다.
포수가 필요했던 현대의 사정과 맞물렸던 지라,
이근엽 + 김형남 + 9억 ↔ 박경완 의 트레이드가 성사되고, 박경완은 현대로 이적합니다.
* 이적 이후, 박경완이 타석에 들어섰을 때,
김원형 선수에게 빈볼 사인이 났었던 일화는, 이 둘의 우정이 얼마나 두터왔나 보여줍니다.
당시 빈볼을 던지라는 사인을 받은 김원형 선수는, 친구를 맞춰야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차마 친구를 맞추지 못하고, 위협구만 몇개 던지다가 퇴장을 당한 사건은,
이들의 우정이 얼마나 깊은가를 나타냅니다.
(경기가 끝난 이후, 박경완 선수가 김원형 선수에게 전화를 걸어,
다 이해한다고 먼저 전화도 걸어주었다고 합니다. - 불타는 그라운드 中)
현대로 트레이드된 박경완 선수는, 이적 첫해였던 98년에 첫 우승반지도 거머쥐게 됩니다.
이후, 현대에서 박경완 선수의 기량이 만개하게 되는데요.
그 정점이었던 00년에는, 4연타석 홈런, 시즌 40홈런으로 홈런왕, 시즌 MVP까지 차지하는 등,
타격에서 최정점을 찍고, 팀을 우승으로도 이끌게 됩니다.
4홈런을 쳤던 대전 경기 당시에, 5연타석 홈런의 기회도 있었지만,
김재박 감독이 선수를 교체함으로 5연타석 홈런의 기회는 그렇게 날아갔습니다. ㅠㅠ
이후, 00년 MVP를 수상한 이후, 내년에는 20-20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고,
실제로 01년 박경완 선수는 포수 최초로 20-20에 성공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박경완이 트레이드 이후, 리그 전체를 뒤흔드며 활약하는 동안,
김원형 선수는 혹독한 쌍방울의 마지막을 함께했습니다.
98년 방콕 아시안게임의 멤버로 참가하여, 병역면제의 혜택을 받았습니다만,
정작 팀에서는, 주축멤버들이 줄줄히 빠져나간 상황에서 겨우 등판하여 지키는 정도의 투구.
99년 7월 김원형 선수는 뼈아픈 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제가 이전 장종훈 선수글에서도 말씀드렸던 타구 안면 강타 사건이었는데요.
장종훈 선수의 타구를 얼굴에 직격으로 맞아, 코뼈, 광대뼈가 함몰되는 중상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전년도의 20%정도밖에 안되는 정도의 경기를 소화했고 그대로 시즌 아웃됩니다.
99년을 끝으로 쌍방울 레이더스가 해체되고, SK 와이번스에 그대로 인수되면서,
김원형 선수는 자신의 고향인 전주에서 더이상 공을 던질 수 없게 됩니다.
이후, 부상을 잘 이겨내고, 다시 마운드에 오른 김원형 선수.
하지만, SK 와이번스의 초창기는 너무나 약했습니다.
어려운 팀 조건속에서도 꾸준히 등판하지만, 2승 13패 5세이브, ERA 5.81 의 커리어로우를 기록합니다.
이러한 김원형의 부진에는 얼굴에 공을 맞은 후유증이 결정적이었다고 하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구속이 떨어지고, 고질적인 어깨부상으로 부진에 시달리던 김원형 선수는,
구속을 포기하고 기교파 투수로 변신에 성공하며, 03년 한국시리즈 무대를 처음으로 밟을 수 있게 됩니다.
02년을 끝으로 현대 유니콘스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FA자격을 얻은 박경완 선수는, SK 와이번스로 팀을 이적합니다.
당시 조범현 감독이 새로 SK와이번스로 부임함에 따라,
옛 스승의 뜻에 따라 SK로 이적했다고 말하며, 조범현 감독이 아니었다면, 계속 현대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말하죠.
이렇게 두 친구는 다시, 한팀에서 뛰게 되었습니다.
박경완이 SK로 이적함으로, SK는 강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해 처음으로 SK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준우승을 차지하게 되며, 신흥 강팀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후에도, 04년 박경완 선수는 핵심 거포로 활약하며, 홈런왕을 차지하기도 했고,
변신에 성공한 김원형 선수는 05년 171.2이닝을 던지고 14승을 기록하며 팀의 3위에 큰 공헌을 합니다.
07년 새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 그 해 투수로 주장을 맡게 된 선수는 김원형 선수입니다.
비록 시즌 중에는 부진으로 선발에서 중간계투로 밀려 주로 던졌으며, 다시 한국시리즈에 진출.
접전의 한국시리즈 끝에, 2패 뒤 4연승. 리버스 스윕으로 생애 첫 우승반지를 차지하게 됩니다.
당시, 김원형 선수는 구위가 좋지 못한 탓에, 한국시리즈에서는 한경기도 등판하지 못합니다.
김성근 감독님의 말에 따르면, 6차전 9회 5점차 이상이면 김원형 선수에게 마운드를 맡기려 했다고 하는데,
경기 양상이 워낙 접전으로 치달은 탓에, 등판하지 못한 채 첫 우승을 차지합니다.
당시 우승 소감이 참 기억에 남는데요.
같이 쌍방울에서 뛰었고 SK에서도 같이 뛰었는데, 우승을 경험하지 못한, 김기태, 조원우 선수가 생각난다는 인터뷰는
그가 얼마나 쌍방울 시절 동료들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박경완 선수는 말할 필요가 없는 핵심으로 인정받으며,
김성근 감독이 웬만한 싸인은 모두 박경완 포수에 맡긴다고 할 정도로 두터운 신뢰를 받았으며,
투수들을 좋은 리드로 이끌었고, 그 결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되죠.
08년에 김원형 선수는, 주로 롱 릴리프 요원으로 활약하며, 74이닝을 투구했는데,
당시 규정이닝 미달 투수로는 최다승인 12승을 거두며, 팀의 2년연속 우승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이후, 09년 시즌 이후, 팔꿈치 수술을 받게된 김원형 선수는,
2010년 말에야 다시 팀에 복귀하게 되었는데, 세월의 흐름을 이기기에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2011년 내내 플레잉코치 신분으로 팀과 함께했던 김원형 선수는,
2011년 9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고, 준플레이오프 1차전 시구에도 나섰으며,
2012년 개막전에 은퇴식을 가지며, 현역에서 은퇴를 하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김원형 선수가 은퇴를 하게 된 이유가, 마지막으로 당한 부상으로,
자신의 전매특허인 커브를 던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원형 선수의 은퇴식에, 마지막 김원형 선수의 공을 받은 선수는,
그와 함께한 친구, 박경완 선수. 박경완 선수가 마지막 김원형 선수의 공을 받아줌으로,
김원형 선수는 그렇게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고, 지도자로 다시 제 2의 인생을 시작합니다.
아직까지도, 김원형 선수의 등번호 영구결번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쌍방울을 거쳐, SK와이번스로, 한번도 팀을 떠난적이 없는 프랜차이즈 스타.
그리고 통산 다승 5위에 해당하는 성적 등, 여러가지 상징성을 가지는 선수가 김원형 선수인데,
안타깝게도 김원형 선수의 영구결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박경완 선수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상을 당하면, 회복이 더뎌졌고, 조인성 선수 영입과 더불어, 포수자원이 많아짐에 따라서
경쟁구도가 팀에서도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습니다.
결국 2010년 이후, 부상과 복귀, 거기에 감독이 교체됨에 따라서, 계속 2군을 왔다갔다하는 생활.
2013년 10월,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공식적인 은퇴를 선언했고,
적지않은 나이와, 팀내에서 입지가 좁아지기도 했고, 적잖은 압박을 받은 박경완 선수는,
"이젠 지쳤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더욱 박경완 선수의 은퇴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은,
5타점을 더 기록했으면, 1000타점을 기록할 수 있던 상황이었고,
포수로써 10경기만 더 등판하면, 포수 최초 2000경기 등판이라는 대기록을 쓸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박경완 선수는 바로 SK 2군 감독에 부임하면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2014년 4월 5일, 박경완 선수의 영구결번식 겸 은퇴식이 거행될 인천문학구장.
시구에 김원형, 시포에 박경완 선수가 나서게 되며,
21년차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장수 배터리는 서로에게 마지막 공이 될,
단 1개의 공을 주고 받으며, 프로 20여년 힘이 되주었던 서로에게 감사한 마음을 나타내며,
성대하게 친구의 마무리를 함께 했습니다.
박경완 선수와 김원형 코치의 마지막 마운드에서의 대화.
박경완:"원형아!" / 김원형:"이게 마지막 공이다"
박경완:"그래,고맙다" / 김원형:"수고했다" / 박경완:"어...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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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완 선수는 어제를 끝으로, 프로를 떠나게 되었고,
그의 등번호 26번은 SK 와이번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영구결번됩니다.
"70%의 몸 컨디션으로도 100%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게 프로다."
박경완 선수가 은퇴식 인터뷰에서 남긴 말입니다.
항상 최고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박경완 선수가 남긴 저 한마디에서 박경완 선수가 23년간 프로생활을 하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프로생활을 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최고의 포수는 그렇게, 그라운드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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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시절 7년, 프로선수로 15년, 지도자로 3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배터리가 한국프로야구에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혼의 배터리라는 말, 김원형 - 박경완 배터리가 진정한 영혼의 배터리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제 SK의 마운드, 홈플레이트에는, 어린 왕자도, 포도대장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그라운드가 아닌, 덕아웃에서 함께 합니다.
비록 SK가 많이 힘든 상태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지만,
이들이 있기에, SK의 향후 10년이 더욱 기대되는 것이 아닐까요?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코치와 감독.
김원형 코치와, 박경완 2군 감독을 응원합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4-05-19 18:41)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