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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2/15 19:49:31
Name 돈보스꼬
Subject 역사가 끊긴 학문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것에 대한 탄식
하버마스가 방한했을 때의 일이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둘러보고 난 이후, 그는 한국의 훌륭한 문화유산에 대한 감탄과 함께 왜 한국에서 자신만의 지적 유산을 토대로 학문을 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아함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에게 좋은 답변을 해 준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이 질문을 들었을 때 한국 인문학자들의 머릿속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가득찼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인문학으로 분류되는 전공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그리고 수 년 째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여 스스로에게, 혹은 동료들에게 던지고 있다. 우리의 공부 내용은 서양의 저명한 학자들 텍스트를 가져와서 읽는 것 이상이 될 수 있을까. ‘지금’ ‘이곳’의 뿌리를 둔 학문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럼 대체 ‘지금’과 ‘이곳’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과 ‘이곳’만을 특별하게 규정하는 어떤 역사성이나 공간성이 있을까.

사실 새로울 것 없는 질문이다. 학문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경제 등 거의 모든 중요영역들이 서양, 더 정확히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는 이곳의 현실에서 소위 식민지화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다룬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담론 역시 꽤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으며, 이에 관련된 책들과 글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가령 90년대 초에 나온 조한혜정 교수의 <글 읽기와 삶 읽기>) 그리고 사회 전체가 문화적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학문만 쏙 빠져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기를 기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울 것 없는 질문이 던져진 지 오래건만, 아직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은 더 비참하다. 이 비참함은 내가 공부하는 인문학이라는 분야의 특수성으로 인해 두드러진다. 자연과학과 공학은 이미 지역적/시대적 특수성을 넘어서는 보편언어를 획득했다. 수학공식이나 과학적 원리들은 특정 시공간에 국한되는 타당성을 갖지 않는다. 때문에 천조국에서 공부했든 마더 러시아에서 공부했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빛에 대한 물리학적인 설명을 줄 수 있는지, 혹은 생명현상에 대해 어떤 해명을 제공하는지 여부이다. 반면 인문학은 섣불리 자신의 보편성을 주장하기가 조심스럽다. 여전히 인문학적 탐구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혹은 어떤 역사성을 갖는지 등은 중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 문학을 구글 번역기로 돌려서 다른 언어 이용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세계대전 이후의 문학이나 사상들을 그 배경에 대한 지식 없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보편학문의 지위를 요구하는 사회과학이나 철학 등은 이런 국지성을 항상 뛰어넘고자 했다. 베버나 뒤르켐, 아담 스미스나 리카르도, 데카르트와 칸트는 자신의 이론들이 ‘영국의 경제학’이나 ‘프랑스 철학’ 또는 ‘독일 사회학’이라고 주장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들이 제시했던 것은 언제나 일반 이론이었다. 베버의 사회학은 독일 사회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사회학 이론이었고, 데카르트의 철학은 당대 프랑스인들의 인식이론이 아니라 인식이론 일반이었듯이 말이다. 하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보편적인 대상 일반을 다루는 이론을 정립하려고 할 때에도,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이론적 자원은 언제나 그들 주변에 있었다는 점이다. 학문은 결코 무(無)로부터 자라난 적이 없으며 언제나 어떤 토양들을 필요로 했다. 종교적 이유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적 방법론이었던 해석학은 하이데거나 가다머, 그리고 하버마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구조주의 전통이 그러한 학문적 토양을 이루고 있었다. 레비스트로스, 알튀세르와 푸코가 구조주의가 아닌 다른 토양에서 자라났다면 그들의 이론은 어떤 다른 방식으로 성립되었을까? 한편 영국 학자들에게는 경험주의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유명론에서부터 근현대 언어철학에 이르기까지, 영국 학자들에게는 거대한 개념과 설명들을 조심스러워하고 항상 하나씩 뜯어보려는 전통이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전통들은 항상 일방적인 영향을 주는 것들만은 아니었다. 개성충만한 학자들은 때때로 그에 반기를 들고 완전히 다른 길을 주창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새로운 길’조차 사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며 언제나 전통과의 접점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정이었다. 헤겔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처럼 보였던 마르크스조차 사실은 헤겔의 가장 충실한 제자 중 하나였으며, 그의 이론적 유산 가운데 유물론이라는 새로운 관점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이처럼 안티테제 역시 테제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에게 사유 전통은 절대적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모든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자는 완전한 영점(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야 한다. 적어도 인간과 문화, 사회에 대해 연구하려는 이들은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문학 또는 사회과학이라고 해서 단지 특정 시대나 영역에 국한되는 이론만을 제시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위치한 맥락을 무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대단히 특수한 역설을 갖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작업이 한정적인 것임을 알면서도 보편적인 대상을 다루고자 한다. 혹은 이처럼 제한적인 타당성만이 인문/사회과학의 성과라고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서양의 학자들에게 상황은 좀 더 처절하다. 그들은 ‘제한적인 보편성’같은 한가한 소리를 하기에 앞서, 애초에 자신들이 참고할 수 있는 텍스트의 전통이 끊어져버렸음을 본다. 18-19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시대는 미국과 유럽 이외의 대부분 영역들을 식민지화했고 그곳에서 삶의 형식들을 근본적으로 변형시켰다. 에도 막부 때부터 꾸준히 서양 국가들과 교류하던 일본은 그나마 서양 문물을 학문에 꾸준히 편입시키며 이미 학문 전통 자체가 조금씩 변형되고 있었다. 그 결과 난학과 같은 독특한 학문이 등장했으며, 이로부터 전통과의 연결고리를 희미하게나마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조선 신분체제와 연결되어 있던 기존 학문공동체는 급작스럽게 해체되었고, 이는 텍스트의 전승을 단절시켰다. 식민지 경험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서야 지금의 한국 학계는 비로소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한국의 학문은 고작 60년 남짓의 역사밖에 갖지 못하며 이는 인문학자에게는 마치 페름기 대멸종과 같은 재앙적 상황이다. 자신이 다룰 수 있는 텍스트라는 게 고작 60년 정도밖에 안 되는 좁은 범위에 그친다는 것은 말이다. (미국의 경우 200년 남짓의 짧은 역사밖에 갖지 못하지만, 미국은 유럽의 학문적 자산들을 그대로 넘겨받아 발전시키는 방식을 통해 동질적인 학문적 전통을 성립시켜왔다.) 물론 수학이나 과학에서도 이처럼 짧은 역사는 불편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연구 자체의 가능성을 막아버리지는 않는다. 수학이라는 보편언어는 이 제약성을 완화시켜주기 때문이다. 지독히 근시안적인 학문적 투자는 자연과학자들의 한숨을 자아내긴 하지만, 어쨌든 ‘좋은 학자’는 꾸준히 나올 수 있다.
  반면 한국의 인문학 및 사회과학자들은 거의 다시 태어난 신생아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들에게 있어 전승된 텍스트들, 다시 말해서 유교나 불교의 텍스트는 사실상 고고학적인 발굴 대상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가령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헌법은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바이마르 헌법에서 영향을 받았다.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몽테스키외의 정치이론(삼권분립)이 자연스럽게 법과 국가의 뿌리를 이루었던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한국은 완전히 이질적인 뿌리들을 자신의 토대로 깔아야만 했다. 물론 과도한 민족적 자부심에 젖어 있는 학자들은 종종 유학 또는 불교 사상에서 현대 사회의 뿌리를 찾으려 들거나(가령 ‘윤리와 사상’ 수업에서는 맹자의 역성혁명 이론을 인민주권 이론과 연결짓는다) 혹은 문제에 대한 모든 답변을 찾으려고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비개연성 내지는 부자연스러움을 보여줄 뿐이며, 나아가 우리의 학문적 전통과 사회 제도들 사이에 간극이 존재함을 분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점은, 나는 결코 근대 이전의 한국 학문의 수준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다만 언급하는 점은, 고려 시대의 불교나 조선 시대의 유학이 이룬성취의 정도가, 지금의 우리를 이해하는 과제와 왜 동떨어지게 된 것처럼 보이는지에 대한 한 가지 가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인문학은, 극소수의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모두 서유럽과 미국의 학문공동체로 눈을 돌린다. 유학 경험은 학자가 되려는 이들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한국에 전해지는 텍스트란 모두 복제되고 변형된 모사품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어떤 텍스트가 생겨나는지, 혹은 텍스트가 사회의 무슨 문제들에 기반해 있는지, 그리고 그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등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멀리에서 가져온 원전 문헌들로부터 해석해 낸 이론들을 토대로 이곳의 문제를 분석해내는 것 뿐이다. 이들이 바로 앞서 얘기했던 소위 탈식민지주의/포스트콜로니얼 담론이 주목하는 현상들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앞서 현대사회의 여러 측면들이 서유럽의 지적 전통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이 밝혀진 이상, 그러한 이론들에 대한 연구는 문제될 것이 없지 않은가? 가령 바이마르 헌법을 참고하여 대한민국의 헌법의 틀을 짰다면, 전자를 연구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나는 이러한 지적이 한편으로는 적절하지만,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텍스트가 어디에 위치하게 되는가는 그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이.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유의 기원을 갖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수용되는지에 대한 관찰, 그리고 이에 대한 텍스트의 재생산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이러한 2차 텍스트 생산이 단절되거나 매우 파편적으로만 이루어진다. 학자들은 자신이 몸담았던 머나먼 학문 공동체와의 연결만을 생각하지, 지금 처해 있는 곳에서의 고찰에 대해서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는다.
  혹은 지금까지 서술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문학이 가능하지는 않을까? 가령 철학에서 논리학, 수리철학, 심리철학, 과학철학 등을 보라. 여기에서 지역성이나 시대성 등 맥락성은 불필요해 보인다. 크게 분석철학으로 묶이곤 하는 이러한 학적 조류들은, 어떤 의미로는 과학이나 수학과 같은 보편언어의 지위를 추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논리학의 언어는 무맥락적이다. 모순율이 지역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듯이. 이 관점에서 본다면, 학문적인 번역불가능성은 주술적인 개념이다. 만약 번역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해당 개념에 미신을 주입했기 때문이지 정말 그러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보편적 인문/사회과학’ 학문들은 점점 더 규모에 있어서나 영향력에 있어서나 확대되고 있다. 이들은 내 전공분야가 아니어서, 깊이 공부해 보거나 혹은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보편화되는 언어 속에서 무언가 놓치는 게 있지는 않나, 하고 짧은 의문을 가져볼 뿐이다.

  역사가 끊긴 학문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은, 사실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처지이다. 이렇게 뭔가 적으면서도 잘 설명된 것 같지가 않은데, 이는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피지배자의 한계’일 수도 있고 혹은 내 고민이 아직 충분히 가다듬어지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오해에 미리 대답하자면, 단지 외부의 텍스트를 받아들인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세계화-국제화는 연결 가능성의 범위를 극적으로 확장시켰기에, 새로운 전통과 접촉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울뿐더러 어떤 의미로는 긍정적이기도 하다. 새로운 해석들은 긴장을 제공할 테니까. 하지만 우리처럼 포스트 식민지 시대/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섣불리 과거의 단절된 전통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할 수 없다. 아직 과거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확립된 의미론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의 학자들, 가령 푸코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형성된 텍스트의 자산들을 활용하여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것과 같은 시도를 우리는 섣불리 할 수가 없다. 과거의 텍스트 전통들은 단절되어 있고 화석화되어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짧은 역사를 지닌 학계로부터 생산된 인문학 텍스트들은 종종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보인다. 그것은 분명 가치있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치절하된 것이다. 사람들은 달러나 유로처럼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화폐를 갖고 싶어하지 즈워티(zloty: 폴란드 화폐)를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망명정부의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중세에 쓰이던 화폐를 가져와서 사용할 수도 없다. 그들은 옛날옛적에 이미 화폐가치를 잃어버린 채다. 식민지 망명정부의 화폐들이 완전히 무가치하지 않으면서도 무가치하듯, 역사없는 공동체의 텍스트는 애매한 위상만을 갖는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05-0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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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15 20:16
수정 아이콘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란 문구가 반어적으로 와 닿는군요...
우리나라의 현행지폐엔 동아시아의 巨儒 두 분이 자리하고 계시지만 현시대 한국 대학의 '기호학파'라고 할 것 같으면 유교정치철학을 강하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니 말이죠.
근래들어 해외의 연구자들이 한국의 유학, 아니 유학 뿐만이 아니라 불교 및 여타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비정상회담의 타일러가 그 때문에 한국에 왔죠- 정작 우리 사회 내에서 가부장제와 당파주의가 한국을 좀먹고 공자를 죽이니 살리니, 인문학 따위를 왜 공부하냐는 주장들이 팽배한 상황이라 돈보스꼬님의 탄식에 저도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신세계에서
15/02/15 20:17
수정 아이콘
스스로 버린 건 아닌가요?
마스터충달
15/02/15 20:1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교에 대한 폄하가 너무 아쉽습니다. 한 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유행하기도 했죠. 사실 우리 사회에 비뚤어진 유교 사상이 팽배하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문제이지 공자님의 사상 자체는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죠. 더불어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이황과 이이 선생님들은 칸트에 버금가는 철학가셨습니다. 하지만 대중에겐 훌륭한 철학자 이전에 훌륭한 재상이나 천재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죠. 이 글을 보니, 유교에 대한 아쉬운 인식도 결국 텍스트의 단절과 그로 인한 왜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오강호
15/05/0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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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근거로 이황/이이를 칸트에 견주는지 궁금하네요. 성리학의 겉모습은 과학적 토대를 찾기 힘든 뜬구름입니다.
마스터충달
15/05/0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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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무 동양철학을 평가절하 하시는게 아닐까요? 성리학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추구하는 상당히 합리적인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집대성한 것이 중국도 아닌 조선의 이황과 이이였으니 칸트가 근대 철학을 집대성한 것과 비슷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이들은 철학자지 과학자는 아니었습니다. 칸트의 철학도 딱히 과학적으로 엄밀하지 않습니다. 그는 선험적 존재의 증명에 있어 신(神)의 개념을 다시 끌고와 비판을 받기도 했죠.
소오강호
15/05/05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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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철학은 경험적이란 의미의 과학입니다. 성리학에 경험적인 내용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마스터충달
15/05/05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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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경험주의라는 것은 내용의 근거가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 즉, 실험이나 통계를 바탕으로 하고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만... 과학에서 말하는 경험적이라는 것과 인식에 있어 경험을 중시한다는 경험주의는 서로 치환하여 쓸수있는 말이 아닙니다.

더불어 칸트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동양의 칸트라 칭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을 집대성한 부분에서 칸트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집대성 한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말한 겁니다. 이는 윗 댓글에 명시했을텐데요 -_-
소오강호
15/05/05 23:34
수정 아이콘
과학이란 단어는 학문으로서의 과학만 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적'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리학이 경험적이지 않아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 뭘 집대성했는지에는 관심 없습니다.
마스터충달
15/05/05 23:53
수정 아이콘
그럼 제가 무엇을 기준으로 칸트에 견주었는지는 이제 아시겠네요. 집대성하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Shandris
15/02/15 20:20
수정 아이콘
말도 잠식되어 들어가는 형편인데 인문학이야 뭐...
꾹꾹이
15/02/1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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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인문학 전공자로서 아직 어렵고 막연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를 알고 갑니다. 스크랩해놓고 나중에 정독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우려나요 핳...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돈보스꼬
15/02/15 22:05
수정 아이콘
예비 인문학 전공자라 하시니 반갑네요. 밑에 로베르토 클레멘테에 관한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꾹꾹이
15/02/15 23:00
수정 아이콘
말은 거창하지만 그저 인문계열 15학번 신입생일 뿐예요 아하하... 조용히 밑에 제 글도 읽고 가셨군요>_< 고등학교 2학년 때 동양사상에 조예가 깊으신 문학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빡세게 구른 덕에(...) 제게는 동양의 사상과 철학이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흥미롭고 알고 싶은 것이 되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더라구요. 동양사상은 그래도 요새 재조명을 받고 있지만 님께서 글에 쓰신 것처럼 지금 한국을 만든 기반과 사상에 대해서는 다들 무관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문학도로서 계속 공부한다면 이런 부분에 대해 연구해 보고 싶고 또 그래야 하지 않나는 생각이 드네요:-)
15/02/15 20:45
수정 아이콘
예전에 어떤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18세기 당시 서양의 엘리트들은 유교경전을 읽고
유교국가를 하나의 이상향으로서 생각했다고 하네요.
유교와 민주주의, 자유, 평등 등의 가치들과 얼마나 잘 맞는지는 다른 문제지만,
(우선 저도 잘 유교를 모르기 때문에)
앞에 분 댓글처럼 당시 철학자들이 빨았던 유교를 한국사람들이 꼭 폄하할 필요는 있을까 ?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밀복검
15/02/15 20:47
수정 아이콘
추천 박고 갑니다. PGR에서 보기 드문 명문이네요. 최근 수 년 간 PGR에서 읽은 인문학 관련 담론 중 가장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그나마 문예의 경우에는 탈식민주의적인 관점에서 세계적/서구적 담론 및 양식과 충돌과 갈등을 일으키는 전통 서사양식을 현대적으로 복원하고 재해석 하는 시도들이 종종 있었고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군담문학의 형식)]라든가 하일지의 [누나(민담의 형식)] 같은 것들을 보면 그야말로 한국적인 문체와 한국적인 소재와 한국적인 구성으로 서구적 제국주의에 잠식당한 한국의 문제를 주제로서 다루죠.

...뭘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 사람을 두고 흔히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하고 핀잔 주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까마귀 고기 먹는다고 기억력이 없어진다고 믿는 것은 미신이다. 학교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과학적인 생각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것은 까마귀 고기를 먹지 못하게 주의를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인데 까마귀 고기를 먹다가 자칫 눈알까지 먹게 되면 귀신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까마귀 고기는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박노마의 할머니는 까마귀 눈알을 먹었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 하일지, <누나> 中



"이 무슨 괴이한 소리요?"
황제가 잠에서 깨어나며 변약유에게 물었다. 황제의 측근 중에서 비교적 대처 출입이 잦은 변약유는 읽던 책을 덮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더니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잡인들이 금지禁地를 범한 것 같습니다. 양인들에게서 묻어온 전축이라는 것에서 나는 소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전축이라...그럼 그 눈알 파란 물건들이 전기로 장난질을 치는 것이겠구려. 그런데 그것이 내는 소리가 언제나 저러하오?"
"매양 같은 소리가 아닙니다. 여러가지가 있는데, 지금 들리는 저 음은 자지(재즈)라던가 뭔가 하는 양이의 음악입니다."
"저 음이 어찌 이리 잡상스럽소?"
"저것은 원래 양이의 음이 아니고, 그것들이 아불리가(아프리카)에서 잡아온 곤륜노(흑인 노예)들의 음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저희끼리만 부르다가 차츰 주인의 음을 누르고, 급기야는 이곳에까지 울려퍼지게 된 것입니다."

"네 이놈들!"
황제는 벽력같은 호통과 함께 다짜고짜로 휴대용 축음기부터 걷어찼다. 발길질이 힘이 없었던지 판 긁히는 소리와 함께 전축이 한 뼘 쯤 옆으로 밀렸을 뿐 요사스런 소리는 그대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서슬에 춤을 멈춘 젊은이들 중 하나가 약간 성가신 표정을 지으며 황제 앞에 나섰다.
"할아버지, 왜 이러세요?"
"왜 이러세요라니? 도대체 너희들은 무엇하는 연놈들이관대 나라의 금지禁地도 몰라보고 대낮부터 이 발광들이냐?"
"저희들은 대학생들입니다. 일요일이라, 친구들끼리 이곳으로 놀러왔습니다만, 나라의 금지라니, 왜, 여기서 놀면 안 됩니까?"
"어허, 참으로 한심하구나. 장차 이 나라의 식자識者들을 이룰 태학생太學生들이 이 모양이라니...그래, 이놈들. 네 놈들은 이곳이 짐의 후원인 줄도 몰랐더냐? 감히 어디서 발광들을 하고 있느냐?"
"네에?"
"얼른 저 요망한 소리부터 그치지 못할까?"

그러자 음악이 그쳤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나머지 학생들도 황제가 호통을 계속하자 드디어 전축을 끄고 황제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야, 무슨 일이냐?"
그중의 하나가 황제와 말을 주고받는 대학생에게 물었다.
"글쎄, 나도 지금 오락가락한다."
맨 처음 황제에게 말을 건 학생이 일행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여학생 가운데 하나가 뾰루퉁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옮기긴 어디로 옮기니? 여기만한 데가 어딨어?"
다른 남학생 하나도 경망스레 그녀에게 동조했다.
"맞아, 미친 늙은이니까 상대하지 말고 여기서 그냥 놀자. 이만큼 준수한 장소를 또 어디서 구하냐?"

그 조심성 없는 말에 드디어 황제의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황제는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그 경망스런 녀석의 등짝을 힘껏 후려치며 노호했다.
"이놈! 이 무엄한 놈! 미친 늙은이라니? 네 감히 어디다 대고 하는 말이냐?"
물푸레 나무로 된 지팡이인데다 분김에 힘을 다해 내리친 것이니 아프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서 성이 난 그 학생은 뜻밖의 매질에서 온 충격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어린애 손목 비틀 듯 황제의 손에서 지팡이를 빼앗아 멀이 팽개치고 말았다.
"이 영감이 - 정신차려요, 영감. 여기는 국립공원이란 말요. 우리가 자연 경관을 해치거나 음란 퇴폐 행위만 안 하면 얼마든지 놀고 갈 수 있는 곳이란 말요. 알아듣겠소 영감? 후원은 무슨 말라죽은 후원이야..."
이쯤 되면 일은 벌어져도 크게 벌어진 셈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이놈들, 네놈들은 아직 왕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구나! 내 금군을 풀어 너희 죄를 다스리리라."

...그러나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라, 그들이 비록 철없고 어렸지만 안목을 지닌 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유난히 두 눈이 빛나고 이마가 넓은 젊은이 하나가 먼저 황제를 알아보았다.
"우리가 높고 귀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아. 야, 우리 모두 엎드려 주상 전하께 잘못을 빌자."
어떤 이는 그렇게 말하며 일행을 돌아보는 그 젊은이의 눈이 장난스레 찡긋거린 것을 증거로 그때부터 그들이 황제를 놀린 것이라고 말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믿을 필요는 없다. 아무리 흐린 강물이라도 한 가닥 맑은 흐름은 있기 마련이며, 아무리 이 백성이 몽매하다 해도 그 중 한 둘 쯤 황제를 알아보았다고 해서 이상할 게 무에 있는가. 말하자면 그 젊은이는 드물게 황제를 알아본 사람 중의 하나였고, 또 그런 그의 뛰어난 안목은 곧 나머지 젊은이들에게도 승인되었다....

- 이문열, <황제를 위하여> 中
돈보스꼬
15/02/1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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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은 탈식민주의 인문학이라는 지형에서 가장 희망적인 위치를 점하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독자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고 독자적인 흐름을 가질 수 있으니, 같은 인문학이라고 해도 확실히 처지가 좀 다르긴 하네요. 반면 개념을 사용하는 이론들의 경우에는 한숨만...
구밀복검
15/02/15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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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 뒤집어 말하자면 탈식민주의적 인문학의 <미적 가치>는 통화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학적 가치>로 반드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겠고...여러 모로 난감한 문제인 듯 합니다.
검은책
15/02/15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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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지의 [누나] 가 동인문학상 후보에 올랐다가 상을 못받았어요.
애인과 서점에서 수상작을 살펴보다가 책 집어던질 뻔 했다는... 푸하하
도대체 [누나]가 못받은 상을 어떤 대단한 작품이 받았나 했지요.
하일지 [누나]는 단연코 작년 문학계의 최고작품 입니다.
삼공파일
15/02/15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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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맥락에서 "역사가 끊긴"이라기보다 "역사가 시작되지 못한" 같기도 하네요.
돈보스꼬
15/02/15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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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텍스트 전승에 관한 연구들을 별로 보질 않아서, 학문 내에서의 역사성이 현대 이전에는 어떠했는지, 혹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어땠는지 등등도 궁금해집니다. 어쨌든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이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왜 그렇게 되었고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지 등등 더 공부하고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ohmylove
15/02/1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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쩝..
확실히 서양은 동양보다 자연과학적 성취를 크게 이뤘죠.
철학이 본문의 언급처럼 나름 주변의 토양에서 자라날 수밖에 없다는 걸 생각해봤을 때,
더 우수한 과학의 토양 위에서 자라난 철학이
열등한 과학 위에서 자라난 철학보다 우수한 것은 어찌됐든 필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신중함
15/02/1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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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 과학이 태어난게 아닌가요?
구밀복검
15/02/15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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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은 그렇기는 한데, 어쨌거나 오랜 세월을 걸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고, 과학적 성과가 철학으로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해부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해서 인간의 신체를 둘러싼 환상을 벗겨내고 철저하게 물질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인간과 세계를 기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유물론적 경향이 강해졌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가령 홉스 같은 경우 <인간론>이나 <리바이어던> 같은 저작에서 인간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거의 인간을 로보트 수준으로(물론 당시에는 로보트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만) 간주하는데, 이는 당대 자연과학적 연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후대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들에게도 일정 부분 계승되는 태도이죠.
ohmylove
15/02/15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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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과학에 영향을 주고, 또 과학은 철학에 영향을 줬죠.
카미트리아
15/02/15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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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고민하고 자신의 답을 내는 것이 인문학 아닌가요?

그것에 대한 답을 한국의 인문학자가 안내면,
누가 내줄수 있을까요?

60년 역사 밖에 안된다고 인문학자들이 가치를 안주면...
100년후에는 가치가 있을까요?
돈보스꼬
15/02/15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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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시는 '그것'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글에서 제가 의도한 바는, 애초에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좀 더 고민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과거의 사유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역사가 짧다고 해서 반드시 무가치한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의 학자들은 그렇게 인식하는 듯 보이고, 또 그에 따라 점점 학계의 상황도 황폐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탱크로리
15/02/15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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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지식과 식견을 갖춰서 하루빨리 이런 글을 쓰고 싶네요.
돈보스꼬
15/02/22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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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ohmylove
15/02/1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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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거의 모든 학문이 동양의 학문보다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대체가 이루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돈보스꼬
15/02/15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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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게 학문 수준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수준을 말할 기준이라는 게 불명료하거든요. 그보다는 학문과 기술력의 발달을 통한 자연지배력이 산업혁명 이후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학문의 수준에 대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는 의문입니다.
마스터충달
15/02/1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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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이 서양철학보다 수준이 낮지 않습니다. 서양에서 근대 이후에 등장한 철학사조와 대응할 수 있는 동양사상을 제자백가 시절에서 찾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느 쪽이 수준이 높다 낮다라고 보기 보다는 서로 집중한 분야가 달랐다고 봐야 할 겁니다. 서양이 '나-우주'의 관계에 집중한 반면 동양은 '나-너'의 관계에 먼저 눈을 뜬 셈이죠.

자연과학 분야도 17세기까지는 그렇게 뒤진다고 보기 힘들다고 봅니다. 실제로 대항해시대 시작 때만 하더라도 과학수준은 동양이 서양보다 월등히 앞섰습니다. (명나라가 맘만 먹었으면 대항해시대 100년 전에 동남아에 제국주의 식민지를 구축할 수도 있었습니다.) 서양은 이것을 학문으로 체계화하는데 노력했고, 이것이 산업화와 맞물리며 폭풍성장을 이뤄 지금의 차이가 벌어진 것이죠.

결국 인문학이건 자연과학이건 서양이 동양보다 수준이 높다고 평가할 순 없습니다.

사실 역사가 더 확실하게 끊어진 것은 인문학보다 자연과학입니다. 위 본문처럼 자연과학은 공통의 언어를 쓰고 있으니까요. 아무런 고민 없이 서양의 텍스트로 갈아탔고, 동양의 텍스트는 무용지물이 되어 대가 끊겼죠. 여기에 잡학이라며 과학기술을 무시한 유학 특유의 사상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동양의 과학수준은 이제 유물에서나 찾아보게 되었죠;;
돈보스꼬
15/02/15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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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 점은 생각을 못했네요. 비서양 전통의 과학기술이 끊어졌다는 점은 별로 염두에 두지 못하고 있었는데,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마스터충달
15/02/15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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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사실 끊어져도 상관없다고 봐요. 물이 0도에서 녹고 100도에서 끓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가진 문화와는 전혀 상관 없으니까요. 사실 이공학도 입장에선 차라리 텍스트가 전부 영어로 통일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많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본의 영향이 커서 똑같은 개념을 부르는 말들이 국어, 영어, 한자어까지 중구난방이라 애를 먹을 때가 많거든요.

예를 들면 부피가 일정한 변화를 일정부피변화, 등부피변화, 등적변화, 일정체적변화... 이렇게 부르는 말이 중구난방입니다. 서양은 체계화를 일찍 시작해서 그런지 영어로는 대게 Constant Volume process라고 하거나 Isochoric process같은 용어도 있구요.
ohmylove
15/02/1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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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100% 상관 없지는 않을 겁니다.
아인슈타인이 마흐의 원리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든지 하는, 철학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흔하거든요.
마스터충달
15/02/15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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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은 마흐의 원리와 상관 없이 상대성이론은 그 자체로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과학 발전에 문화적 영향이 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패러다임론이죠) 하지만 그 사실 자체는 문화와는 관련이 없죠.
마흐의 이론이 아니라 다른 사상에서 상대성이론을 이끌어 낸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ohmylove
15/02/15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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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현상을 여러 과학이론이 근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현재 과학이 과학의 최종판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다른 문화에서 과학이론이 발전되었다면 더 진보된 과학이론이 탄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통일장 이론을 봐서라도 말이죠.

과학은 사실이기 이전에 과학자들의 합의입니다.
마스터충달
15/02/15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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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합의된 것을 따르면 되죠. 굳이 시작부터 다시 자국의 문화를 기반으로 연구해야 하나요? 설령 다른 접근을 통해 기존 이론을 뒤집는 결과를 도출한다 하더라도, 기존 이론의 검증을 통과해야 합니다. 결국 기존 학문과 동떨어져서 연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또한 말씀하신대로 동양에서 과학발전이 이뤄졌으면 지금보다 더 진보된 과학업적을 이뤘을지도 모르지만... IF일 뿐이잖아요. 굳이 문화적 색깔을 입히려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근사적 설명은 과학에서 아무의미 없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명확하게 사실을 설명하는 것만이 학문으로써 가치가 있죠. 마흐의 이론, 에테르 이론, 열물질 이론 이런 것들은 다 폐기되었습니다. 그것이 탐구적 시각이나 연구 윤리로써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과학적 사실로는 가치가 없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과학적 사실은 문화와 100% 상관 없습니다. 뉴턴의 미분학이건, 라이프니쯔의 미분학이건 미분법은 바뀌지 않아요.
ohmylove
15/02/15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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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제 말은 문화에 따라 합의된 것이 다르니, 문화에 따라 따를 수 있는 과학이론이 여럿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문화적 색깔을 입히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미분학은 수학입니다. 수학은 항상 옳습니다. 수학의 경우를 가지고 과학의 경우를 따지는 건 말이 안됩니다.

그리고 상대론은 일상적인 조건에서 뉴턴 역학과 근사적으로 일치하지만, 아무도 상대론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조건에서는 근사적으로 일치하지만, 극단적인 조건에서 달라질 수 있거든요.
마스터충달
15/02/15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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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깐 제 말은 문화에 따라 과학이론이 여럿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상대성이론을 아인슈타인이 발견했건, 아이유가 발견했건 E=mc^2라는 공식이 바뀌진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과학과 수학은 불가분입니다. 왜 과학 '공식'이 중요하겠습니까;;
뉴턴이 미분을 만든 것도 과학 때문이었습니다. F=ma를 위해 미분이 나온거죠.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신데, 일상적조건에서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일상적 조건에선 뉴턴 역학으로도 현상을 설명하기 충분할 뿐이죠. 만약 미시적 상황과 일상적 상황에 따라 다른 과학논리를 적용해야 했다면 양자역학은 이론이 아니라 가설에 그쳤을 겁니다.
ohmylove
15/02/15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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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은 다른 공식이 근사적으로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을 거라는 겁니다. 당연히 문화에 따라 과학이론이 여럿이 될 수 있죠. 뉴턴역학만 있는 문화와 상대론까지 있는 문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수학은 공리가 참인 걸 가정하고 시작하니 논리에 문제가 없다면 항상 참.
과학은 실험으로부터 출발하니 100% 참인 걸 보장 못함.

오해 안 했습니다. 어떤 조건에서는 근사적으로 모두 맞더라도 다른 조건에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근사적 설명도 의미가 있습니다.
마스터충달
15/02/15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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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힘과 가속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다른 과학이론이 있나요?

만약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근사적 설명만 한다면, 위에 말씀드렸듯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에테르 이론으로도 열현상을 근사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어요;;; 근데 '근사적일 뿐'이니 폐기되었죠.
그리고 그 설명이 현상을 더 잘 설명한다면? 그럼 그게 새로운 이론이 되는 겁니다.

이미 밝혀진 과학이 뒤집어질수도 있다는 점까지는 동감합니다만, 그게 과학적 사실을 상대주의적으로 바라볼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ohmylove
15/02/15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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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이론이 상대론에 비해 덜 정확한, 근사적인 설명을 한다고 폐기하나요?
근사적인 설명임에도 계산이 단순해 버리지 않습니다.

서로 교류가 없는 문화권 둘이 서로 다른 과학이론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물론 서로 활발한 교류가 있으면 그 문화권들은 하나의 과학이론을 채택하겠지만요.
마스터충달
15/02/16 00:00
수정 아이콘
제가 언제 분절된 문명이 다른 과학이론을 가졌다는 점을 부정했습니까?
대항해시대 이전에는 중국이 오히려 과학이 발전됐다고 쓰지 않았나요?
그리고 그런 과학 발전의 차이가 가능한 점을 인정하더라도
과학적 사실이 상대주의적이지 않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ohmylove
15/02/16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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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과학의 발전과정이 절대적 100% 맞는 법칙에 지름길로 가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화에 따라 과학의 발전방향을 왼쪽으로도 잡아보고, 오른쪽으로도 잡아보는거죠.
궁극적으로 향하는 목적지는 같지만 그 궁극의 이론을 얻어내기까지 여러 철학이 과학에 여러 방향을 제시할 겁니다.

이론의 우월 개념을 넘어서 방향성 문제입니다.
마스터충달
15/02/16 00:42
수정 아이콘
그런 개방성은 저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ohmylove님에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제가 [물이 0도에서 녹고, 100도에서 끓는다는 사실은 문화와 상관없다]라는 말에 [문화와 100% 상관 없지는 않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이건 과학 발전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고,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다른 방향성으로 과학이 발전하였더라도 결론은 물의 녹는점은 0도고 끓는점은 100도라고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 과학적 사실은 문화와 상관없이 정답이 정해져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것에 과학 발전의 방향성에 적용하는 상대주의를 들이대면 흔한 의사과학의 논리와 똑같아집니다.
ohmylove
15/02/16 00:50
수정 아이콘
제가 그 말을 적을 때 딱히 물의 녹는점과 끓는점을 겨냥하고 적은 게 아니었습니다.
물의 녹는점과 끓는점은 그냥 간단한 실험만 하면 끝납니다.

그런데 코펜하겐 해석이라든지 이런 과학적 발전에 철학적인 생각이 들어가는, 물리학의 중요한 기점들이 있어서 그걸 말한거 입니다.
마스터충달
15/02/16 01:10
수정 아이콘
코펜하겐 해석의 옳고 그름을 인문학적 관점, 즉 철학적으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이 워낙 비상식적이다 보니 이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대부분 의사과학 취급을 받습니다;;; 양자역학은 논리적 연산과 실험에 의해 밝혀진 것만을 가지고 접근해야하는 과학의 영역입니다. 물의 어는점과 끓는점은 그냥 간단한 실험만 하면 끝난다고 하셨죠? 양자역학은 복잡한 실험만 하면 끝나는 셈입니다. 그 실험 결과가 전부입니다. 여기에 철학이나 심리학을 접목시키면 사이비입니다;;

해석이나 문화에 따라 과학적 사실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 시점에서 이미 과학이론이 아닙니다. 가설일 뿐이고 아직 더 연구해야 하는 분야일 뿐입니다. 통일장 이론이나 초끈 이론도 실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가설로 남게 되겠죠. 아직 명백하게 밝힐 수 없는 분야에 대해 이론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 다른 확실하게 증명된 이론까지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ohmylove
15/02/16 01:19
수정 아이콘
제가 말하는 철학은 그런 사이비가 아니라
현상을 물리적으로 해석하려는 하나의 방편을 말하는 겁니다.

코펜하겐 해석과 같은 것도 철학이라 할 수 있죠.
코펜하겐 해석을 주장한 보어가 음양론, 상보성 원리에 푹 빠져있던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마스터충달
15/02/16 01:35
수정 아이콘
현상을 물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학의 영역입니다. 이건 이론과 실험으로 파악해야지 철학적으로 파악할 영역이 아닙니다.

그리고 보어가 음양론이나 상보성의 원리에 심취했다고 해도 그것이 양자역학의 과학적 사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아까부터 말씀드리지만 [과학적 사실][과학탐구의 방향성]은 엄밀하게 다릅니다. 음양론 같은 철학이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과학적 사실을 설명해주진 못합니다.

물론 과학적 사실로부터 철학을 제창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문학자들이 양자역학을 접한 후 '모든 것은 random이다'라는 사상을 제기하기도 했죠. 이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을 [과학적 사실]로 둘 수는 없습니다. 코펜하겐 철학과 코펜하겐 해석은 구분하셔야 합니다.
ohmylove
15/02/16 01:42
수정 아이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긴 시간 답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과학에 조예가 깊으신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만나뵜을 때에도 좋은 말씀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만 자러 가야겠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마스터충달
15/02/16 01:48
수정 아이콘
저도 마무리를 지어야 겠습니다. 마치면서 몇 마디 드리겠습니다.

제 말이 맞다고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ohmylove님의 시각에 대해 이런 비판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에 이야기 나눈 정신분석학이나 지금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이 의사과학 쪽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굉장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진심으로 우려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런 해석이 의사과학인지 아닌지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저 공대 학부 졸업생입니다. 그저 학부수준의 소양밖에 없습니다 ㅠ,ㅠ
3배빠른
15/02/1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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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실재'를 포착하고 기술함으로써 진리에 다가가는 학문 방식이긴 합니다만, 그 '학문적 사실'은 '실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구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합의 과정에서 실험 데이터와 사회적 이해관계의 결합은 필연적이구요.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패러다임 전쟁에서 승리한 것들을 ‘과학적 실재’라고 하죠.

극단적 구성주의 시각은 경계할 필요가 있지만, 현재의 서양의 실험 방식에 근거한 자연과학을 '실재'와 동일시 하는 것 역시 그 이상으로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 이과 출신으로서 후에 사회학을 기웃거리다가 과학지식사회학에 매료된 학생이었습니다.

+ 유사과학의 범위는 아직 학계에서조차 확실히 정리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15/02/16 00:14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에 서양 학문이 쏟아져 들어오고 물갈이가 될 무렵에는 학문의 깊이 면에서 수준 차이가 났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근대 이후 철학사조와 제자백가의 사상과는 비슷은 해도 상당한 차이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본문에서 언급된 대로 학문은 토양을 필요로 하고 근대를 겪은 철학과 그렇지 못한 철학에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학문적 수준의 차이가 있지 않더라도 이런 식으로 됐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만..
소오강호
15/05/05 20:48
수정 아이콘
위잉스는 동양에 과학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17세기 이전의 발전한 그것은 공학이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스터충달
15/05/05 21:12
수정 아이콘
공학은 과학이 받쳐줘야죠. 그 바탕이론을 서양에서 수입하였거나 아니면 경험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면 동양의 여러 공학도 자체적인 과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세종의 해시계만 해도 이를 제작한 이유가 중국과 시간이 다른 이유를 찾기 위함이었으니까요. 이건 천문학이라는 과학으로 봐야죠.
아수라발발타
15/02/15 22:03
수정 아이콘
특히 한국은 그놈의 한글 덕분에 알토란 같은 인문유산이 다 불쏘시개가 되었습니다

중국,일본과 단절된 상황에서 한국의 학자가 할거라곤 철지난 유행의 해석이죠
ohmylove
15/02/15 22:06
수정 아이콘
? 한글 때문이란 건 적절치 않아보이는군요.

학자들만 한문을 배우면 되지 일반인들까지 그 어려운 한문을 배워야겠습니까?
15/02/16 00:31
수정 아이콘
예전에도 서양 사람들이 학술 언어로 라틴어를 썼고 지금은 대다수의 논문이 영어로 나오죠. 언어가 다르다고 학문을 못 하는건 아닌 것 같습니다.
몽키.D.루피
15/02/15 22:07
수정 아이콘
일단 한국적인 학문이란 허상이라고 봅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하면 무엇을 하든지 한국적인 학문이 되는거죠. 오히려 한국적인 걸 한다고 학문을 게토화 시키는게 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근데 게토화고 나발이고 한국 환경에서는 학문 자체가 안되는데 한국적인 뭘해봅니까. 교수가 되고 아는게 많아질수록 학문할 시간은 줄어들고 각종 행정 업무와 학교와 학계 행사 그리고 학내 정치를 해야 살아남는게 현실이죠. 오죽하면 학생들보다 교수들이 더 바쁘고 잠을 못 잡니다. 각종 행사 수업 자잘한 저널 논문 등으로 정작 자기 연구할 시간은 없습니다. 가장 지식이 왕성할 시절을 그렇게 낭비하게 만드는 게 한국 현실이죠.

그리고 한국은 아이디어가 반짝일 시절의 어설픔을 못 참아줍니다. 학문적으로는 어설퍼도 머리는 비상하게 번뜩이는 시절이 있거든요. 근데 아이디어는 까이고 형식이 중요해집니다. 그걸 채워줘야 되는게 지도교수의 역할인데 결과는 그저 지도교수 입맛에 맞게 무난무난 열매를 먹고 나오게 되죠.
인문학 중에서도 철학은 특히 개념을 만드는 학문입니다. 근데 그 개념의 아이디어는 주로 40 이전에 완성된다고 그러더라구요. 한국의 학생들은 대학원을 거치면서 자신만의 개념이나 아이디어가 영그는게 아니라 그저 기존 학문을 되풀어 설명하는 선생에 그치고 맙니다.

철학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해요.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나 헤겔처럼 꾸준히 연구하며 모든 것을 집대성하는 스타일, 또 하나는 셸링이나 비트겐슈타인처럼 젊은 나이에 새로운 개념이나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천재형 스타일. 결국 우리나라는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못 탄생시키는 환경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교수들은 연구는 커녕 자리보존에 지쳐있고 학생들은 앵무새가 되어야 졸업을 하는데 무슨 학문이 되겠습니까. 한국의 인문학의 역사는 60년이 아니라 지금도 단절상태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돈보스꼬
15/02/15 22:19
수정 아이콘
제일 첫 줄은 좀 커다란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딱히 학문의 게토화가 한국화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학문이 자기 선배들의 이론적 유산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는 데에서 오는 제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도 적었지만 이건 보편성을 추구하는 이론들에게도 해당된다고 보는데, 사유전통과 그 수용자들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어떻게 설명할 지는 아직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생각만 하던 거라... 어쨌든 물론 요즘처럼 교류가 쉬워진 시대에는 그 경계가 무척 낮아진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단부터는, 제가 해외의 학계 상황을 잘 모르기에 뭐라 말하기가 조심스러운데, 과연 이게 학문사회 일반의 문제인지 아니면 한국만의 문제인지 모르겠네요. 더 정확히 말해, 한국 학생들이 기존 이론을 달달 설명하는데 그친다면, 교수들이 자잘한 업무 때문에 바빠서 연구를 못 한다면, 다른 곳은 어떤가요?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지라, 뭔가 더 자세한 비교가 이루어지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소오강호
15/05/05 23:03
수정 아이콘
크게 공감합니다.

철학의 미래에 대한 저의 아이디어입니다.

기호 이전의 세계
http://blog.naver.com/wholesavior/220346555802

한국에선 오직 수능-내신으로 획일적 인재 뽑고 교육도 재생산, 대학원도 재생산 뿐이니
(논술은 획일적 답을 요구하고, 전공 학문과 무관한 주제가 나오면 특정 주제로 미리 공부한 학생만 유리하기에 공정성이 떨어지며, 그리하여 서울대 시작으로 없애는 추세입니다.)

이를 발전시키려면 유학 뿐인 것 같습니다.
검은책
15/02/15 22:27
수정 아이콘
한국적 철학의 정체성을 분단에서 찾은 윤노빈의 [신생철학]이 있지 않나요?
저도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철학자 김영민의 책중 여러 꼭지에서 그가 자신의 철학과 철학함을 일치시키기 위해 1983년도에 월북한 사실을 거론해서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만...

여담으로 돈보스꼬님 글 좋아합니다.
저번에 써주신 산수수업과 인식론적 전환에 관한 글도 재밌었어요.
돈보스꼬
15/02/15 22:35
수정 아이콘
잘 몰랐던 내용인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찾아봐야겠네요.
그리고 김상봉은 518 민주화운동에서 어떤 특수성을 발견하기도 하더군요. 다만, 이런 현대사의 특수한 경험들이 문학이나 예술, 사상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건 분명 있을텐데, 그 영향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시간이 충분히 지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우리가 그걸 설명할 충분한 개념들이 없어서인지...
검은책
15/02/15 22:38
수정 아이콘
문장도 아름답다 들었습니다.
저는 김영민의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라는 책을 통해 이런 문제를 고민해본적이 있었고 그 책을 통해서 철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윤노빈이 월북하기전에 자신의 철학노트를 김지하에게 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돈보스꼬
15/02/15 23:07
수정 아이콘
추천해주신 책 다 도서관에 있군요. 학교에서 빌려볼 책이 생겨서 즐겁네요. 다시 한 번 추천 감사드립니다.
15/02/15 22:44
수정 아이콘
글쓴분께 궁금한게 있는데 조선의 실학이 일본의 난학과 비슷한 맥락에서 봐야하는 것 아닌지요 ?
그리고 그 실학이 바탕이 되서 19세기의 개화사상으로 이어진 거구요.
물론 일본의 식민지화로 자력 근대화를 할 기회를 잃어버렸지만 본문에서
일본의 난학을 언급하시면서 조선의 실학을 언급하지 않으신건 쫌,,,,
돈보스꼬
15/02/15 22:59
수정 아이콘
깊이 공부하지 않은 내용들을 막 언급하려니 좀 부담스럽긴 합니다만, 난학은 한국의 실학과 비교할 때 조금 다른 맥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난학은 서양 학문을 직접 일본에서 수입하고 다루는 데에서 생겨난 학문입니다. 이게 가능했던 건 일본에서 일찍부터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특히 네덜란드와의 교류는 상당히 깊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양 문명과의 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유학 문명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학문들이 생겨납니다. 반면 실학은 어디까지나 유학 문명권 내에서 생겨난 학문입니다. 또한 실학자들의 경험은 멀리 잡아도 겨우 청나라와의 교류가 전부였는데, 청나라에서도 서양과의 문물 교류가 있긴 하지만 매우 협소했죠.
이런 차이는 이후 개화기에 더 두드러지게 되는데, 메이지 유신 때 일본은 천황제를 제외한 정부 체제 및 산업 구조를 서양식으로 뜯어고쳐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내홍도 있긴 했지만 어떻게든 넘어갔죠. 이처럼 자신의 과거 구조를 내던지고 외부의 문물을 수용함에 있어 일본은 훨씬 적극적이었습니다. 사실 조선은 그런 적극성을 발휘할 틈도 없이 열강들에 의해 먹잇감으로 전락해버렸기에 실학과 개화파, 자력 근대화 등의 연관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좀 막막하긴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은 제가 역사학도가 아닌지라 더 함부로 떠들면 안될 것 같고, 다만 실학과 난학을 곧바로 연결짓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일본이 난학을 통해 서양 문물과 자신들의 학문을 동시에 유지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도 자신들의 전통 텍스트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본문에 일본의 사례를 적었던 것은, 학술대회에서 일본 학생들이 중국이나 한국의 학생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일본의 불교 전통과 서양의 사유들을 연관짓는 시도를 많이 하는 걸 보아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난학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15/02/16 00:32
수정 아이콘
네. 저도 여러모로 그런 점에서 아쉽습니다.
사대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과 유연성이 있었던 일본과 비교했을때 그 교류는 질적과 빈도수에도 차이가 있었겠지요.
그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지 그래도 요만큼이라도 교류가 있었지 않았는가 ? 라고 싶어집니다. 크크크
하지만 그럴수록 냉정하게 봐야겠지요.

궁금하게 또 있는데 돈보스꼬님께서는 구한말에 생긴 동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예를 들어 김용옥씨 같은 분은 동학의 평등사상과 뒤의 이어진 동학혁명을 근거로 내세우면서
구한말때 이미 대중들에게 평등사상이 받아들여졌다. 라는 식으로 주장을 하던데요.
물론 김용옥씨 특유의 국뽕스러움은 필터해서 받아들여야 할 측면은 있겠지만요.


쓰신 글의 요지와는 다르게 곁가지 질문을 던져서 죄송합니다.
돈보스꼬
15/02/16 01:48
수정 아이콘
평등의 이념만 따지고 보자면 동학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서학의 포교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수행했을 테고요. 하지만 동학이나 서학의 포교가 어떤 맥락에서 일어났던 건지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조선 후기에 사회적 혼란이 극심해졌고 그 와중에 민중들이 엄청나게 착취당했죠. 아마 이런 억압에 대한 해방이 동학운동의 한 가지 중요한 목표였을 겁니다. 여기에 당대의 외세 침탈을 막자는 목표가 더해졌고요. 이런 사회적인 맥락들을 함께 보지 않으면 이념적 차원의 다소 피상적인 유사성만 보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김용옥 씨의 정확한 워딩을 봐야 하겠지만요.
도들도들
15/02/15 23:33
수정 아이콘
실학이 하나의 학문이나 학파로 존재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특히 내용을 따지고 보면 실용적 주자학에 불과할 뿐 자본주의 근대화와는 관련성이 미약했다고 합니다. 실학 담론은 일본 식민지 시대를 정신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개발된 측면이 있지요.
15/02/16 00:15
수정 아이콘
음.. 그러니까 실학은 해방후 사학자들이 정신승리를 위해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처음 듣는 얘기지만 흥미롭네요.
돈보스꼬
15/02/16 01:38
수정 아이콘
실학이나 조선 후기 농업/상공업의 발달로 인한 소위 '자본주의 맹아론' 등이 강조되는 이유가 비슷한 맥락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자립적으로 근대화 할 수 있었는데 괜히 옆에서 끼어들었다는 거죠. 실제로 '자본주의의 맹아'가 어느 정도나 현실적인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15/02/15 22:47
수정 아이콘
김영민이 쓴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추천합니다. 새책으로 구하긴 어려울텐데, 학생이시라니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면 되겠네요. 아마 있을 겁니다.

마침 피지알에도 예전 에디파님께서 올려두신 관련글이 있어 소개겸 첨부합니다.

https://pgrer.net/?b=8&n=55545
삼공파일
15/02/15 23:03
수정 아이콘
이런 좋은 글들을 왜 못봤죠ㅠㅠ 피지알 헛했네요
돈보스꼬
15/02/15 23:06
수정 아이콘
저도 나름 헤비 피지알러(...)라고 생각했는데 피지알 헛했군요...
검은책
15/02/15 23:09
수정 아이콘
이 글은 제가 에디파라는 닉네임으로 쓴 글인데 이중닉네임이 안된다고 해서 계정을 없애버렸습니다.
김영민은 제 삶의 스승입니다.
근데 쑥스럽네요. ^^
도들도들
15/02/15 23:14
수정 아이콘
한국 인문학의 정체성을 식민지 이전에서 찾으려고 하다보니 허무함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일단 여기는 접어둡시다. 필요할 때, 즉 서양적 전통으로 설명이 안될 때만 찾아보면 됩니다.

오히려 시급한 것은 현재 한국의 상태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고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현대 한국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한국 경제의 위기를 떠드는 이야기는 많아도 정작 한국 정치나 사회에 대한 놀라운 통찰은 찾기 어렵습니다. 인생이 총력전인 사회라 시야 자체가 경쟁과 진영논리에 오염되기 쉬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구요.

사실 한국 60년사가 굉장히 흥미롭잖아요. 역동적이죠. 식민지였다가 독재정권을 겪으면서도 압축성장과 민주화를 이뤄냈고 1세계의 주변부로 간신히 편입했습니다. 미일중러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분단국가로 살아가기도 하고. 엄청난 교육열과 부동산까지. 이를 일반이론으로 엮어내기엔 어려울지라도 특수이론의 대상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듯 싶어요.

아프리카나 동남아 남미 등 역사가 단절된 나라가 한둘이 아니잖아요. 식민지 이후 사람들이 정체성에 극심한 혼란을 느끼고, 때론 만들어진 민족주의에 휩쓸리기도 하고 극도의 이기주의가 만연하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죠. 이러한 모습들을 하나의 이론으로 잘 엮어내 본다면 이것 또한 하나의 일반이론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것이 1세계의 일반이론을 대체하지는 못하겠지만 1.5세계를 관통하는 일반이론으로서 기능할 기초가 될 수도 있겠죠.
돈보스꼬
15/02/16 01:35
수정 아이콘
저도 말씀하신 바와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꼭 과거가 정체성을 그대로 규정하지는 않지요. 완전히 다른 뿌리로부터 자신을 설명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일 테고요.

그런데 저는 가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서양의 사상가들 글을 읽다 보면, 자신들이 속한 문화권의 텍스트를 과거에서부터 쭉 활용하며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고, 그런 이론사적 통찰이 자신의 설명/이론에 굉장한 무게감을 준단 말이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게, 가령 그리스/로마 문화권이 실제로 서유럽의 문명 토대를 이루며 이어져 내려왔으니까요.
근데 우리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삼국시대의 문화권이나 고려/조선의 문화적 유산을 가져와서 지금의 사회를 설명한다는 건 왠지 이상하죠. 그렇다고, 흔히 한국에서 인문학 강의들을 때 그러하듯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부터 출발해서 중세와 르네상스와 근대 산업혁명을 거쳐 우리 사회까지 도달하는 설명방식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이기도 하고요. 한국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 역사를 가졌던 적이 없는데 마치 가상의 연결고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설명하는 건 역시 이상하니까요.
이런 차이는 뭘까, 하고 생각했을 때 제가 떠올렸던 건 지적 전통의 차이였습니다. 피식민지 국가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지적 전통이 어딘가에서 끊기는 경험을 하고, 그 결과 굉장히 이색적인 설명들을 마치 자신들의 과거인 양 설명해야 하는 어색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거죠.

하지만 또 이런 흥미로운 경험 자체가 분명 하나의 이론적 기원이 될 수 있겠지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한국만이 이런 경험을 하는 게 아닐 테고, 그래서 다양한 문화권에서 이런 사태를 어떻게 이론화하는지 혹은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과제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과제가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지는 모르겠지만...
15/02/16 00:25
수정 아이콘
졸려서 눈 껌뻑껌뻑 하는 상태였는데 글을 잘 쓰셔서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잠이 깨네요 ^^

일반적으로 인문학은 문사철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현대철학의 경우 말씀하신 대로 분석철학 쪽은 동서고금이 중요하지 않아 보이고, 문학과 철학은 단절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 내용이 이해는 되는데 말씀하시는 인문학이 어떤 것인지 조금 추상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제가 인문학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돈보스꼬
15/02/22 18:45
수정 아이콘
지적 감사합니다. 사실 예전부터 글쓸 때 항상 느끼는 점이지만 인문학이라는 분야는 범위 설정이 참 어렵네요. 'A는 B다' 식으로 정의내리는 것도 어렵고요. 그래서 아예 특정 학문으로 좁혀서 쓰고 싶은 생각도 있는데(가령 '역사학'처럼) 그렇게 하면 또 너무 좁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15/02/22 21:34
수정 아이콘
제가 학술적인(?) 글을 볼때는 항상 구체화를 시키는 편이라서 이런 생각이 든 같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흐흐.
王天君
15/02/16 01:1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어쩔 수 없이 기독교, 그리스 문화, 서양 철학 등을 접하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 오는 허무함은 어쩔 수가 없죠.
나는 삼겹살 뜯고 양념 치킨 먹는 한국 사람인데 도대체 왜 공부는 양놈(?)들의 것만 한국말로 하고 있는건가.
15/02/16 01:36
수정 아이콘
[주어진 언어로부터 당대의 문제의식을 새 것을 얻자.]

허나 본문에서 지적하신대로 우리가 쥔 언어는 우리 게 아니거나 그보다 낯설 만치 옛된 것 뿐이지요. 그러나 이 딜레마를 해결할 단초조차 없는 건 아닙니다. 형이상학적 전통에 비추어 썩 그럴듯하며, 어쩌면 학도의 노력에 따라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어요.

[당대의 문제의식에서 없던 언어를 구하자...]는 겁니다.

오늘날의 언어를 말미암을 구시대의 기반이 없다면 같이 만들어야합니다. 무엇으로부터? 당장 눈 앞을 쳐다봐야죠. 당대의 학도가 제 언어의 한계를 깨칠 수밖에 없었을 바로 그 사건/문제의식이 적절하겠네요. 언어에 앞서 문제가 먼저 놓이고, [이 땅의 언어]가 없을지언정 [작금의 문제]는 엄존하니 문제에서 언어를 끄집어내야죠(최인훈의 [광장]이 지난 반세기 한국문학의 가장 앞자리에 언급된 이유를 떠올려보기 바랍니다.). 해방 이후까지 한국학계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기쳤던 여러 선생들이 그저 정치적 정당성이란 근거로, 민족 단위의 정신승리만을 이유로 동학과 분단 문제와 5.18을 주워섬긴 게 아니거든요. 각각에 대한 평가야 별론이라도 만 육십도 되먹잖았다는 한국 인문학계에서 찾을 고유성, 혹은 고유성의 파편은 당대의 학도들이 당대의 문제의식을 통해 언어를 배태하려던 노력뿐일 겁니다. 그 가운데 뚫어낸 걸음따라 길이 닦이길 바라면서요.

이는... 학도가 처음 인문학적 비약을 제 안에서 상정할 때마냥 아름다운 도약입니다만... 학적 의미로든, 해당 학도가 끌어나간/나갈 스스로의 삶에 있어서든 위험천만할 여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에디파님께서 거론한 윤노빈이 대표적인 사례겠네요. 송두율도 있을 거구요. 이들이 이 땅의 인문학도로서 분단 문제를 마주하리라 다짐했을 과정들을 가만 짚어보면 참으로 서글프지요. 월북과 방북에 이른 필연성을 논하기에 어처구니 없다 말할 이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제/우리 안의 인문학을 마주하려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땅의 인문학도로선 이보다 안타까울 건 그네의 걸음이 길로 닦이지 못한 채 각각이 발자욱으로만 남겨졌다는 겁니다. 본문의 문제의식이 바로 이에서 비롯한 것이구요. 문제에서 언어를 끄집어낸 후유증일수도 있고, 사실 윤노빈이건 송두율이건 다른 누구건 여기서 완전히 자유롭다곤 (이렇게 섣불리 말하는 제 자신이 참으로 건방지게 느껴지긴 합니다만)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만, 단정하긴 석연찮죠. 오늘날 이러저러한 인문학도들이 써내는 '단절'이니 '세대론'이니 하는 수사를 넘기다보면, 그리 이름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과거 그네가 그러했듯 이네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뭐, 어느새 물리적인 시간보다 먼저 옛 된 발자욱 따라 길을 닦을지, 새로 뚫을지, 그도 없이 풀섶이나 건들고 볼진 앞으로 이 땅 위에서 인문학도를 자처할 이들이 답할 문제겠지요.
15/02/16 15:25
수정 아이콘
유시민 씨가 <자대 박사학위를 그다지 인정해주지 않는> 한국 대학들을 비판하는 걸 들은 기억이 있네요. 뭐 꼭 유시민씨 발언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가끔은, <유럽 또는 미국으로의 유학>이 강제되는 한국의 풍토가 짜증(?)스럽기도 하고, 또 옆나라 일본이 막연히 부럽기도 했는데.. 어째 이 글을 읽고 나니 더 답답해지는 느낌이 드는건..뭐..;;
어쨌거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와이써시리어스
15/05/04 15:16
수정 아이콘
끊긴 실을 이을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현대의 인문학과 한국의 근대이전 학문들 사이에 놓인 근대성과 과학이라는 강을 건너게 해줄 실마리가 어디에 있을지 인문학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좋은 연구주제가 될 수 있을것 같아요. 문제의식을 가지신 본인부터, 천천히 연구해 보실 기회를 가지면 좋지 않을까요? 저는 다산을 좋아하는데, 다산이 학문의 방법론에 관하여 말할 때, "인간관", "도덕"을 자신의 학문의 토대에 가장 먼저 놓는 것을 봤습니다. 예기와 명심보감과 같은 바른 삶에 대한 책들을 가장 먼저 읽히고, 그 다음에 역사를 공부하게 했습니다. 선경후사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동양의 것이든 서양의 것이든 우리 것이든 남의 것이든 '사람'에 대한 학문을 한다는 점은 공통된 것일 겁니다. 우선은 사람에 대한 관점에 대해 , 서양 내지는 한국의 것과 현대의 것을 비교 검토하고, 그 이후 그 사람이 살아야 할 바에 대한 관점을 또 그렇게 비교합니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한국이 살아내야 했던 서양사회와는 다른 식민지로서의 특수한 근대를 연구한다면 끊긴 실을 이을 수 있지 않을까요? 힘들고 지난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시도조차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뜻있는 분이 계시고, 이에 대해 안타까워 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언젠가는 이러한 작업이 완성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허의지팡이
15/05/05 09:4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역사가 끊긴 듯하면서 그래도 안끊긴 학문을 하는 입장이라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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