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신 엘 테무르가 죽었고, 등극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사라지면서 토곤 테무르는 황제 혜종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그를 잘 알려진 ‘순제’ 라는 표현으로 칭하도록 하겠다.
다만 황제가 되었다고 해도 당장 좋은 날이 닥쳐온 것은 아니었다. 이 새로운 황제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직도 무수하게 많았던 것이다.
엘 테무르가 죽었다고 해도, 가공할 권세를 가졌던 그의 친족들은 여전히 무시하기 힘든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막 즉위한 애송이 황제로서는, 이들을 견제하긴 커녕 오히려 열심히 달래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만 표출을 줄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때문에 세력의 중심인 엘 테무르가 죽었지만 그 일족들은 여전히 우대받는 기현상이 나타났는데, 이에 따른 조치들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엘 테무르의 아들 탕기세이(唐其勢)는 어사대부에 임명되었다. 엘 테무르의 동생이었던 사르둔(撒敦)은 좌승상이 되었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상주국(上柱國)、 녹군국중사 (錄軍國重事)、다르한(荅剌罕)、영왕(榮王)、태부(太傅)、 중서좌승상 (中書左丞相)에 이르는 요란한 칭호를 얻었다. 여기에 더해 여주로(廬州路)를 식읍으로 받고, 철권을 하사받아 9대에 이르도록 사형죄를 면죄해주기로 했다.
얼굴에 금칠하기는 죽은 엘 테무르도 마찬가지였다. 살아생전 최고의 권위를 누렸던 엘 테무르는 죽고 나서도 공충개제홍모동덕협운좌명(公忠開濟弘謨同德協運佐命) 공신, 개부의동삼사, 태사, 중서우승상, 상주국, 덕왕(德王)이라는 기나긴 칭호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우리가 보통 ‘충무공 이순신’ 이라고 칭할 때의 그 충무가 맞다. 황제를 독살한 신하가 충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엘 테무르 생전 순제와 결혼했던 타나실리도 빠뜨릴 순 없을 것이다. 순제가 황제가 된 후 그녀는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되었다. 숙적의 급사 소식을 듣고 조금이라도 들떴을 순제의 마음은, 이쯤에 와서는 싸늘하게 말라버리고 말았다.
다만 그렇다곤 해도, 권력의 중추인 엘 테무르가 죽었다는 건 역시 권력 다툼에 있어서 적은 일은 결코 아니었다. 조정 내에서는 점차 엘 테무르 파에 대한 반대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 세력의 큰 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부타시리 황태후였다.
죽은 문종의 아내이자, 순제에게는 숙모가 되는 그녀의 도움이 있었기에 순제는 즉위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아들 대신 명종의 아들을 세우려고 하였기에 지금의 순제가 있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꼭 선의(善意)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도 이런저런 속셈은 있었다. 다만 황태후 혼자만으론 엘 테무르 세력에 맞서긴 무리였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바얀(伯顔)이라는 이름이다. (1)
바얀은 이 시대로부터 무려 30여 년전 카이두(海都)의 난을 평정하는 와중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었다. 쿠빌라이의 손자인 성종(成宗)을 떠받들며 무수한 군공을 세웠고, 엘 테무르가 문종을 즉위시키기 위해 벌였던 내전에 협력하여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엘 테무르를 제외하면 조정의 2인자라고 볼 수 있는 바얀이었지만, 역시 1인자의 그것과 비교하면 아쉬운 점이 많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얀은 엘 테무르 생전에는 그 위세에 밀려 함부로 나서지 못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본인이라면 몰라도 그 아들들에게까지 숙이고 다다닐 생각 따윈 그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꼭두각시 수준으로 추락한 황실의 권위를 되살리려는 부타시리 황후. 엘 테무르 파벌을 누르고 자신이 1인자가 되고 싶은 바얀. 이 두 사람이 정치적 동맹 관계로 이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 조정은 곧 엘 테무르 일파와 황태후, 바얀으로 이어지는 실력자들의 권모술수, 각축전이 펼쳐지는 전쟁터로 변하게 된다.
다만, 이는 순제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들뿐이다. 이 치열한 정치 다툼에서 황제였던 순제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철저한 방관자였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저 무대에 끼어들 힘도, 역량도 전혀 없었다. 본래 수도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 내에 세력도 없었고, 나이가 원체 어려 믿을만한 심복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양적왕(陽翟王) 아로힉 테무르(阿魯輝帖木兒)라는 자가 있었다. 황실의 종친으로서, 이 당시엔 조정의 원로 취급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막 즉위한 순제에게 다음과 같은 건의를 올렸다.
“천하의 일이 매우 막중하오니, 모두 재상에게 맡겨 처리하도록 하소서. 무슨 문제가 있으면 재상에게 책임지라고 하면 됩니다. 폐하께서 친히 결정하시면 악명을 얻기 쉽지 않겠습니까?” (3)
군주가 나서서 무엇을 하다 실패하면 욕을 먹을 수 있으니, 비난받지 않기 위해 아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실로 궤변이 따로 없는 말이다. 대놓고 군주를 무시하는 발언이니 평상시라면 목을 쳤어도 무방한 수준의 망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꼭두각시 황제로서는 다른 방법도 없었다.
“황제가 이 건의를 받아들여, 자신은 궁중의 깊숙한 곳에 거처하고, 모든 일은 재상들에게 맡겨 버렸다(帝信之,由是深居宮中,每事無所專焉).” (4)
결국 순제는 타의에 의해서 정치에 손을 완전히 놓았다. 그의 가치는, 결국 의전용 장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해도 황제는 황제다. 아무리 재상들이 자기들 선에서 문제를 처리한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황제의 결정이 필요한 법인데, 부타시리 황태후가 상당 부분 이 역할을 처리하게 되면서 사실상 수렴청정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부타리시 황태후 – 바얀의 세력은 점차 강성해졌고, 반대로 엘 테무르의 친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되었다.
이 무렵 사르둔이 사망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엘 테무르의 동생인 그는 지난날 내전에서 형을 따라 상당한 공을 세운 바 있던 원로 공신이었다. 그만한 경험을 갖춘 인물이 죽게 된 것은 엘 테무르 파벌에 있어 큰 비극이었다.
사르둔의 죽음 이후 원나라 조정 내부의 힘겨루기는 갑작스레 바얀 쪽으로 확 기울게 된다. 한때 황제도 마음대로 갈아치우던 엘 테무르 파벌에서는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었을 리 없었다. 엘 테무르의 아들 탕기세이는 공공연하게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천하는 본시 우리 집안의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 바얀이 어찌 내 위에 있다는 말이냐?” (5)
자신 가문의 이은 2인자에 불과하던 바얀 따위가 감히 위에 서려고 하니, 실로 참을 수 없다. 혈기방장한 탕기세이는 결국 손을 쓰기로 결정했다.
1335년 6월 30일. 마침내 거사의 시기가 왔다.
거사 당일, 탕기세이는 동생 타라카이와 함께 재빨리 군사를 움직였다. 일부 병력은 도성 동쪽의 교외에 숨겨두고, 자신은 동생과 함께 별동대를 이끌고 재빠르게 궁궐을 장악, 황제를 손에 넣고 바얀 등의 우두머리 몇몇을 죽여 순식간에 조정을 장악할 계획이었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작전 거행 시간이 되자, 탕기세이는 휘하의 용사를 이끌고 직접 칼을 빼들며 함성을 지르면서 궁궐을 향해 돌진했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무력 시도. 그러나 이 계획은 너무 어수룩하기 짝이 없었다. 쿠데타 음모는 전부 발각되어 이미 바얀에게 결행 시간까지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바얀은 미리 준비해서 궁궐에 매복하고 있다가 탕기세이의 별동대가 들이닥치자 별 어려움도 없이 모조리 일망타진해버렸다.
휘하 용사들은 전부 살해당했고, 탕기세이는 궁전의 난간을 붙잡고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결국 끌려가서 바로 처형당했다. 동생 타라카이는 허겁지겁 달아났지만, 넓고 넒은 황궁에서 달리 탈출할 곳이 있을 리 없다. 결국 그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누나, 타나실리 황후의 거처로 도망쳤다.
타라카이가 급박하게 달려와 황후에게 목숨을 구걸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번에는 바얀이 병사를 이끌고 황후전에 들이닥쳤다. 미처 숨길 틈도 없었는지라 타나실리 황후는 황급히 자신의 옷으로 동생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눈속임은 금세 들통났고, 타라카이는 끌려가 바로 처형 당했다.
손짓 한 번으로 황후의 남동생을 죽인 바얀은 이윽고 겁에 질린 타나실리 황후 본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미 승리자가 된 그는 황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설사 남매라고 해도, 그들은 이미 반역자요. 어찌하여 이 나라의 황후 되는 자가 그 편을 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부하를 시켜 내친김에 황후까지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아버지도 죽었다. 형제들도 죽었다. 만약 이렇게 끌려가면, 자신 역시 어떤 운명에 처해질지는 뻔한 일이었다. 타나실리 황후는 그야말로 살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비통하게 유일한 끈인 황제를 찾았다.
“폐하! 소첩을 살려주십시오! 폐하께서는 소첩을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이 말을 전해 들은 순제는 조금의 애정도 남아있지 않은 냉정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대의 오라비와 동생이 모두 반역을 저질렀는데, 짐이 어찌 그대를 구하랴?”
구하기는커녕, 직접 칼을 들고 베어버려도 시원치 않다. 순제로선 아버지의 원수인 엘 테무르 가문이 몰락하는 것을 통쾌하게 여기면 여겼지 막으려 할 리 없었을 것이다.
결국 타나실리 황후는 그 날로 출궁을 당했다. 출궁이라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궁전에서 황후쯤 되는 자를 바로 죽이기엔 모양새가 좋지 않아 잠깐 장소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개평(開平)으로 끌려간 타나실리 황후는,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한 민가에서 조용히 독살 당했다. 궁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은 병력들은 엘 테무르와 사르둔의 동생이었던 다이리를 찾아 도망쳤지만, 지도부가 괴멸된 잔당들은 쉽게 정부군에 진압 당하고 말았다. (6)
천하를 좌지우지하던 엘 테무르의 세력은 그가 죽고 1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완전히 괴멸했다. 이제부터는 가히 바얀의 천하였다. 순제의 입장에서는 호랑이가 죽고 나니 늑대가 산의 왕이 된 것이나 진배없었던 상황이었다.
순제는 바얀에게 원훈공신의 칭호를 내렸다. 부타시리 황태후도 빠뜨릴 수 없었다. 바얀의 권력은 황태후와의 협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순제는 부타시리 황태후를 태황태후(太皇太后)로 올렸다.
그런데 부타시리 황후는 순제에게는 아버지 동생의 아내, 즉 숙모가 된다. 직접적인 피가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어머니나 다름없이 섬긴다고 할 수는 있다. 다만 그럴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한 세대 위의 어머니와 아들 관계다. 그런데 태황태후는 그보다 한 세대 위일 경우 내려지는 자리다. 즉 사실상 할머니 취급한 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원말에 명신으로 이름을 떨친 허유임
이 어이없는 모순에 중서참정 허유임(許有壬)은 핵심을 찔러서 지적했다.
“황상과 황태후는 모자 사이의 가까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태황태후로 칭한다면 이는 손자 사이가 되니, 예절에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허유임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는 납득하지 않았다고 한다. 쿠데타 진압 이후 조정은 바얀과 부타리시 황태후 세력이 득세했을 테니, 황태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허유임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치를 들어 설명했다.
“본래 법도에서는 조부모의 경우는 추증(追贈) 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보다는 1등급 낮추어 추증하는 것이 원칙 아니겠습니까? 즉 자신을 기준으로 촌수가 가까울수록 무겁게 대우하고, 멀수록 가볍게 대접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황태후를 태황태후로 칭해 권위를 더한다지만, 실제적으론 촌수를 멀리해 가볍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이라 하겠습니까?” (7)
재차 이어진 설명과 주장에도 불구하고 결국 허유임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부타리시 황태후는 이날 이후로 태황태후로 대접받게 된다. 물론 일반적으로 태황태후는 조정의 큰어른으로서 존중받는 위치이긴 하다. 하지만 할머니도 아닌 사람을 억지로 할머니 취급한 것이므로, 유교적 질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사가들이 이 건을 두고 순제를 비난했다. 다만 순제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상황은 이미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조정의 권위는 이제 권신 바얀과 황제의 일을 대신 처리하는 태황태후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이 중 태황태후는 어디까지나 황실 내부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실질적인 권력은 바얀 한 사람에게 집중된 셈이었다.
그렇다면, 바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원 제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지도자 쿠빌라이 칸. 바얀은 스스로를 '쿠빌라이 칸의 의지를 이어가려는 사람' 으로 이미지메이킹 했다.
일반적으로 원말을 다룬 역사서술에서 바얀은 극단적인 몽골 보수주의자, 혹은 복고주의자라는 '캐릭터' 로 인식되고 있다. 즉 원나라가 이어지며 자연스레 묻어온 한족 문화의 묵은 때를 씻고, 과거의 몽골의 규율을 회복하며 느슨한 민족적 차별을 다시금 공고히 하자는 것이다. 과거 초원을 달리던 칭기즈 칸의 시기까진 아니더라도, 제국이 전성기를 세조 쿠빌라이 시기까지의 규율은 회복하자는 것이 바얀의 생각이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연호를 기존의 영통(元統)에서 후지원(後至元)으로 바꾼 것이다. 지원(至元)은 쿠빌라이 황제 시기에 사용했던 연호였다. 연호부터 전성기의 연호를 다시 사용해서 그때의 기상을 회복하자는 의지 천명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없이 연호만 바꾼다고 무너지는 나라가 하루아침에 회복될린 만무했다. 감찰어사였던 이호문(李好文)도 이 부분을 지적하며,
“옛 연호를 답습하는 법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름만 답습한들 실질이 없다면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7)
라고 하면서, 당시의 실정이 쿠빌라이 무렵과 다른 이유 10가지를 조목조목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책적인 면에서 바얀의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은 바로 과거제도 폐지다. 바얀은 전근대 중국 왕조에서 인재 충원의 기반이 되었던 과거제도를 완전히 무위로 돌려버렸다. 비록 원나라가 민족적 차별을 행하고 과거제 시행 횟수 역시 이전보다 줄었다고는 하나, 과거제도는 그래도 한족 지식인들에게 있어 조정에서 뜻을 펼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 중 하나였다. 저 망망한 대하(大河)는 못되더라도, 개천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바얀은 용이 날 수 있는 최소한의 개천마저 메워버린 셈이었다.
당연히 현직 한족 관료들은 바얀이 깜짝 놀랄 정도로 극렬 반발했지만 그는 과거제 폐지에 앞장섰던 실무자를 귀양 보내며 적당히 숙여주는 체하면서도 정작 과거제도 폐지를 되돌리진 않았다. 시행된 정책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이 과거제도 폐지라면, 프로파간다적 성격으로 제창했던 주장 중에 가장 압권인 건 ‘성씨 학살’ 이었다.
“바얀이 청하길 장(張), 왕(王), 류(劉), 이(李) 조(趙) 이 다섯 성씨의 한인을 모조리 주살하자고 주창했는데, 황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伯顏請殺張、王、劉、李、趙五姓漢人,帝不從。) (8)
즉 중국 한족들 가운데 장 씨, 왕 씨, 류 씨, 이 씨, 조 씨 이 다섯 성씨의 사람을 모조리 죽여 없애자는 이야기다. 사실상 중국인 절반은 죽이자는 이야기나 진배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미친 제안은 바로 각하되었다.
이 정책은 단순한 복고주의 차원을 넘었다. 애당초 학살이 빈번했던 몽골제국 초기에서조차 단순히 성씨 하나로 사람을 죽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항간에는 바얀이 이상성격을 가져서 이런 제안을 한 것 아니냐는 말도 있다.
다만 바얀이 그저 살육을 원했던 정신이상자가 아니라면, 이런 주장은 해봐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다. 해서도 안되고, 사실 그렇게 할 능력도 없었다. 그렇다면 바얀이 거절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이런 제안을 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극단적인 주장을 통해 자신의 스탠스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실질적으로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정치적 후폭풍도 없다.
즉 몽골인들 중에 초원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파들의 지지를 받기 위한 정치쇼였다는 해석이다. 가령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 인재 선발은 몽골 부족의 케식(Kheshig)에서 고위 관료를 충원하는 형식이 되어야 했다. 해당하는 부족들에서는 바얀의 과거제 폐지 주장을 여러모로 환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얀을 ‘복고주의자’ 혹은 ‘몽골 보수주의자’ 라고 단순명료하게 칭하기엔 꺼려지는 점이 있다. 이를테면 바얀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 조정에서는 강연 제도가 폐지되지 않았다. 폐지는커녕 오히려 바얀 자신이 나서 순제를 강독했다. 신하가 나서서 황제를 상대로 학문과 이치를 강론하는 강연은 몽골과는 거리가 먼 중국 왕조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얀 자신이 강론에 나서면서 황제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으니, 본인의 권위에 도움이 되자 폐지하지 않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보수주의를 천명한 바얀이 실제로는 몽골의 전통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바얀이 권세를 잡고 있던 어느 날, 조정은 누군가가 제안한 의견 하나로 난데없이 쑥대밭이 되었다.
“설선(薛禪) 두 글자는 본래 사람들이 모두 이름으로 쓸 수 있었는데, 세조 황제의 묘호가 된 이후로는 감히 사용하지 못합니다. 지금 대신 바얀의 공덕이 대단하므로 설선이라는 이름을 수여해도 될 것입니다.” (9)
설선은 몽골어로 ‘현명한’ 을 의미하는 세첸(sečen)을 음차한 말이다. 이는 쿠빌라이 칸의 몽골식 칭호였다. 즉 쿠빌라이는 중국 식으로 따지면 세조 황제고, 몽골식으로 따지면 세첸 칸(현명한 칸)이다.
그런데 이 칭호를 바얀에게 부여하자는 건 사실상 바얀에게 세조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역사상 어떤 왕조에서든 전대의 국왕에게 내린 묘호를 신하에게 하사하지는 않았다. 조선 왕조로 비유하면 한명회나 윤원형에게 조정이 공식적으로 ‘태종’, ‘세종’ 같은 칭호를 주는 것과 같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꺼낸 주체는 이름 없는 사람이었지만, 뒤에서 논의를 부추기는 인물은 어사대부 테무르부카(帖木兒不花)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테무르부카는 바얀의 심복으로 통하던 자였다고 한다. 결국 바얀이 스스로 이 논의를 주도했다고 볼 수 밖에는 없는 정황이었다.
바얀에게 ‘설선’ 두 글자를 내려주자는 논의는 결국 불발되었다. 하지만 그런 논의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이야기다. 그 대신 원덕상보(元德上輔)라는 호칭이 바얀에게 부여되었고, 대승상(大丞相)에 오르면서 공식적으로도 조정의 최고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원나라 100여 년 역사상 그냥 승상도 아닌 ‘대승상’ 에 오른 사람은 바얀 한 사람뿐이다. 유례가 없는 위치였던 셈이다.
여기에 더해 바얀은 몽골 왕공을 탄압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담왕(郯王) 체첵투, 위순왕(威順王) 쿤첵부카 등은 죄가 없는데도 억지로 죄를 만들어내 무리해서 죽였다. 이런 왕공들은 엘테무르 집권 시기에 힘을 키워온 사람들이다. 마치 바얀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들을 정적이라고 본 바얀은 모조리 숙청했다.
공허한 고구려의 영광 타령으로 최영을 홀리는 드라마 정도전의 이인임. 바얀의 복고주의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바얀 본인이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주의자이며 세조 쿠빌라이를 존경하는 인물이었다면 감히 법도를 무시하고 ‘설선’ 이라는 칭호를 받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인들이 조정에 들어와 몽골인의 위치가 예전보다 약해진 것 같다고 분개하는 민족주의자였다면 당장 적대하지도 않는 몽골 왕공들을 무리해서 죽이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얀의 모순적인 행동에는 딱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자신의 권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즉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한인을 죽이자고 한 것, 그러면서도 경연 제도는 굳이 유지한 것, 세조의 칭호를 탐낸 것, 몽골 왕공을 죽인 것 등은 이념적으로 보면 서로 모순되었지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측면에서 보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일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인을 학살하자고 하거나, 과거 제도를 폐지했다는 이유로 바얀이 복고주의자, 보수주의자로 불리는 등 ‘몽골 제일주의에 집착이 강한 꼰대’ 정도로 여겨지는 건, 그의 가증스러운 면모를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선 지나치게 너그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 바얀은(설사 본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고 해도) 그저 복고주의자라는 이미지를 자신에게 덧씌우고, 그 이미지를 이용해 더 많은 권력을 탐낸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에게는 일종의 색깔론을 이용해 “한인을 두둔하는 자.” 같은 명목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바얀은 보수주의자도, 몽골 제일주의자도, 단순한 민족 차별주의자거나 혹은 학살마조차도 못되는 그저 단순히 권력에 대한 집착 하나에 미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의 집권 말기인 1339년, 바얀에게 붙여진 공식적인 직함의 길이는 총 246자에 이르렀다. (10)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긴 직함을 가졌던 고려 무신정권 최충헌의 관직명을 이에 비교해보자면, 최충헌의 경우 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兵部御史臺判事太子太師)로서 이는 총 46자에 이르렀다. 46자만 해도 이 정도인데, 246자라는 직함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집권하는 동안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직함을 바로바로 취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나 탐욕스러웠던 바얀의 집권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권력을 추구하던 중에 몰락하고 만다. 대원제국 대승상 바얀, 그를 무너뜨린 자는 외부가 아닌 내부의 사람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바로 탈탈(脫脫) 이었다.
(1) 쿠빌라이 칸 시절의 명장 바얀과는 동명이인이다.
(2) 권용철, 『카안 울루스 말기 권신 엘테무르와 바얀의 집권』
(3) 원사 순제본기(順帝本紀) 권 38
(4) 위와 같다.
(5) 원사 열전 138
(6) 이와 같다
(7) 원사 열전 183
(8) 원사 순제본기 권 39
(9)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 권2, 권신천정(權臣擅政)
(10) 산거신어(山居新語) 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