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씻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다. "전공의"의 영어 단어가 "거주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Resident"인 이유는 말 그대로 깨끗하고 쾌적한 집이 아니라 허물처럼 벗어던진 수술복과 종류를 구분하고 싶지 않은 오물이 이리저리 튀어 있는 가운이 나뒹구는 더럽고 좁은 당직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밥, 잠, 개인 위생 중 어느 한두가지를 포기해야만 하는 사정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먼저 개인위생을 포기하게 되고 만다. 그렇지만 나는 잠을 자지 못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다크써클을 무릎까지 늘어트린 채 병동을 좀비처럼 배회할지언정 씻는 것을 포기하지는 못했다. 적당히 시원한 물이 정수리부터 쏟아져내리는 느낌과 향긋한 샴푸 린스 바디워시 냄새는 매일매일을 버티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직전까지 얼마나 힘들었든 간에 일단 씻고 나면 잠시라도 상쾌한 기분에 젖어 당장의 힘듦이 좀 잊혀지는 것 같기도 했다. 또한 나는 굉장히 "냄새"에 예민한 사람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어딘가 아프며 아픔으로 인해 모든 감각이 예민해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후각 또한 예민함에서 예외일 수는 없으므로 더더욱 잘 씻고 다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오랜만의 오프에 나는 평소 사용하던 샴푸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푹신한 내 방 침대에 쓰러지고 싶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근처 마트에 갔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샴푸가 이제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고, 마트 샴푸 코너에는 여러가지 샴푸의 향을 맡아볼 수 있는 테스터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적극적으로 후각을 피로하게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아무거나 집어 맡았던 여러 가지 샴푸 향 중에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냄새가 있었다. 그건 꽤 강렬하고 향긋했으며 아주 슬픈 기억이라서, 순식간에 나는 몇 년 전의 비가 추적추적 오는 어느 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신경외과 인턴 시절의 일이다.
비오는 화요일이었고, 웬일로 정규수술이 없는 날이라 나는 중환자실 일을 마치고 인턴숙소에 올라와 단잠에 빠져 있었다. 밖은 비가 꽤 많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창문 밖은 밤처럼 어두워 더더욱 잠을 자기 좋았다. 한 두시간 반쯤 잤을까, 달갑지 않은 벨소리에 잠을 깼다. 외과 컴바인한 응급 개두술이 잡혔으니 수술방에 내려와 준비하라는 치프 선생님의 전화였다. 억지로 눈꺼풀에 매달려 있는 잠을 쫓으며 내려가 보니 수술방에서는 이미 외과 수술을 마치고 배를 닫는 중이었다. 희고 부푼 배를 제외하고는 모두 푸른 수술포에 가려져 있던 환자의 차트에는 21/F, TA(교통사고)라고 쓰여 있었다. 새벽 6시, 학교에 가던 길에 차에 치였다고 했다.
"이런 수술은 의미가 없겠지만, 그래도 보호자가 너무나 원해서 하는 수술이야. 머리도 못 깎고 올렸으니 GS(외과) 나가면 머리 깎고 포지션 잡자."
나는 치프 선생님에게 컴퓨터 자리를 비켜 주고 수술실 한 구석에서 충전 중인 바리깡을 찾았다. 외과가 배를 다 닫고 수술포를 걷어내자, 스물 한 살이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을, 소생을 위해 쏟아부은 수액 때문에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환자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수술모자를 벗겨내자 축축하게 젖은 검은 머리카락 한아름이 쏟아졌다. 군데군데 피가 엉켜 있는 긴 머리카락은 바리깡으로는 절대 밀 수 없었기 때문에, 막가위를 써서 최대한 두피에 붙여 짧게 잘라낸 후 남은 머리카락은 면도기와 바리깡을 이용해 미는 방법을 선택했다.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들추며 한움큼 쥐자 코끝에 샴푸 냄새가 훅 끼쳤다. 뭐가 그리 바빴길래 이 추운 겨울에 머리를 말리지도 못하고 집을 나왔을까. 바닥에 깔아놓은 포 위로 한 무더기의 머리카락을 떨궈낸 뒤 마침내 수술이 시작됐다. 나는 세컨드 어시스트로 들어가, 오른손에 석션을 쥐고는 어정쩡한 자세로 필드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두개골을 조금 잘라 끌 같이 생긴 도구로 들어내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뼈가 없어진 자리로 얇은 막에 싸인 뇌가 꾸역꾸역 나오고 있었다. 막을 조금 자르니 뇌척수액이 말 그대로 분수처럼 높이 솟아올랐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반쯤 넋이 나간 상태인 내게 교수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인턴 선생, 석션!"
나는 정신없이 그 물줄기를 향해 석션을 갖다댔다. 두개골로 단단히 감싸진 한정적인 공간에 담겨 있던 퉁퉁 부은 뇌가 머리뼈를 제거해 압력이 낮아진 곳으로 끊임없이 탈출했다. 이 수술은 두개강내압을 낮추기 위한 수술이다. 뇌의 어느 엽 반 정도는 될 것 같은 양을 전부 석션해내고 나서야 뇌 탈출이 멈췄다. 이건 신경외과 수술 중 가장 슬프고 끔찍한 수술이야. 교수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씀하셨다. 이제야 수술 전 치프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됐다. 환자의 생명 연장에 대해서는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환자의 문제는 머리 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수술 내내 스크린 너머에서는 혈압이 계속 떨어지는지 시끄럽게 알람이 울렸고 수술을 마칠 때까지 이 환자를 세상에 붙잡아 놓으려는 마취과의 분주한 움직임이 어깨 너머로 느껴졌다.
수술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 세 시간이 좀 안 되는 수술을 마치고 환자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중환자실 앞에 부모로 보이는 사람 둘이 서 있었지만 나는 차마 그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볼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묵묵히 침대를 끌었다. 환자를 중환자실에 데려다 놓은 뒤 수술방으로 돌아와 기구들을 정리하는데 한쪽에 급하게 수술하느라 미처 쓰레기통에 넣지 못하고 구석으로 밀어 놓은 포에 담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치우려고 포를 집어들자 거기서는 아직도 향긋한 샴푸 냄새가 났다. 생기 넘치는 냄새였다. 스물 한 살 여대생과는 너무나도 잘 어울리지만, 이 곳이랑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그런 냄새.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예상한 것처럼, 얼마 못 가 그 환자는 사망했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래도 그날 밤은 버텨주었다는 것.
"죽음을 예측한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 중 가장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 때때로 더 이상의 치료가 환자의 생명 연장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거다. 그럴 때마다 이 직업은 냉정한 판단력을 늘 요구한다. 무조건 쓸 수 있는 모든 약을 쓰고 할 수 있는 모든 처치를 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결정은 아니다. 남겨진 가족이 감당해야 할 비용과, 그 과정에서 환자 본인이 경험해야 하는 고통, 뒤늦게 하게 될지도 모를 '뭐라도 해봤으면 혹시 달라졌을까'하는 후회에 대한 두려움,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들이 뭔가를 하거나 하지 않기 위한 의미가 되고 나는 그 '의미'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던 것 같다.
그 수술 이후,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일이 어떤 의미나 이유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보진 못했지만, 뭐라도 해보고 싶었을 보호자의 심정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라서, 아마 그 자체만으로 이 수술은 큰 의미를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도 그래서 이 수술을 하신 거겠지. 축축히 젖은 긴 머리카락에서 나던 샴푸 냄새는 지금 하는 이 행위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이건 환자를 위해 좋은 결정이었을까. 끊임없이 스스로를 향해 던져왔던 질문에 대한 슬프고 향기로운 대답이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12-14 15:54)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