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준이 엄마
나는 콩국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콩으로 갈아낸 걸쭉한 국물 특유의 텁텁함과 비릿한(?) 느낌이 싫었다. 그래서 어릴 적에 엄마가 콩국수를 해주면 면만 대충 건져 먹곤 했는데, 그때마다 국물이 알맹이인데 아깝게 남긴다며 타박을 듣곤 했다. 그래도 난 꿋꿋하게 내 식성을 고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친구인 원준이네 집에 놀러간 날이었다. 한여름이었고 날씨는 뜨거웠다. 그날 점심 메뉴는 원준이 엄마가 만들어준 콩국수였다. 소금으로 간을 치고 얼음 동동 띄운 콩국수였는데 처음에는 마지못해 젓가락질을 했다. 아무래도 남의 집에서 먹는 음식이다 보니 우리 집에서처럼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예의상 한 젓가락, 두 젓가락 먹다보니 웬걸? 묘한 감칠맛이 있었다. 아삭하고 신선한 배추김치를 올려 같이 먹다보니 나름의 풍미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시원하고 담백한 맛에 취해(?) 면은 물론 어느새 국물까지 다 비우고야 말았다. 그 후로 콩국수를 계속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그날의 콩국수 맛은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씩 떠올랐다.
성인이 되고 이십대 초반부터 남들보다 일찍 직업을 가진 원준이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다. 누구보다 효자였던 그는 시골의 부모님께 용돈을 부쳐드리고, 냉장고를 바꿔드리고, 외양간에 소를 사드리는 일들을 자신의 업이자 행복으로 여겼다. 오랫동안 돈을 차곡차곡 모은 친구는 자신이 번 돈과 대출금을 합쳐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집을 장만해드렸다. 그리고 원준이 엄마는 작은 가게를 여셨다. 국수와 묵밥 등을 하는 밥집이었다. 아주 작은 밥집이었지만 워낙에 솜씨가 좋으신 덕에 금방 주변에 소문이 났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꼭 한번 가게에 들러 원준 엄마가 해주시는 콩국수를 다시 한 번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원준이 엄마는 경운기 사고로 돌아가셨다. 농사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던 경운기가 한길 두렁 밑으로 굴렀다고 했다. 경운기를 운전 중이던 원준 아빠는 크게 다친 곳 없이 무사했지만, 뒤에 타고 있던 엄마는 머리를 크게 다쳤다. 급하게 이송된 평택 병원에선 원준이에게 말했다. 여기선 손을 쓸 수 있는 게 없다고. 다시 큰 병원으로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원준이 엄마는 평택에서 수원 아주대 병원으로 급하게 옮겨졌고 중환자실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병원 측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당부했다. 엄마가 혼수상태에 빠진 일주일 동안 원준이는 홀로 병원 복도를 지켰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엄마의 얼굴을 잠시나마 볼 수 있는 시간도, 병원에서 정해준 아주 짧은 시간뿐이었다. 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병원에서 만난 원준이는 의외로 담담하고 침착해보였다. 아니 침착하다기 보단, 믿을 수 없는 이 현실이 아직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머리를 크게 다친 엄마의 상태가, 중환자실에서의 그 모습이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고 했다. 눈을 뜬 엄마와 한마디 대화만이라도 나눠보고 싶다고 했다. 눈을 마주보고, 마지막 작별 인사만이라도 나누는 것이 원준이의 소원이었고, 눈을 감은 엄마는 그렇게 아들에게 묵묵부답이었다.
그날부터 퇴근 후 거의 매일같이 병원을 찾았다. 원준이는 외아들이었고, 아빠와 엄마가 각각 입원해 있었다. 옆에 같이 있어줄 가족이 없었다. 가끔 친척 그리고 지인들이 찾아와 원준이를 위로하고 함께 슬픔을 나누며 걱정해주긴 했지만 같이 밤을 새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원준이는 중환자실 앞 병원 복도에서 항상 혼자였다. 나라도 옆에 있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도 다음 날 출근 때문에 밤을 지새우는 경우보단 막차 끊기기 전에 병원 문을 나서는 일이 더 많았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오래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먹을 게 훤해 보여 퇴근길에 빵이나 컵라면 등을 싸갔다. 적막한 야밤의 병원 복도에서 긴 의자를 몇 개 끌어다 붙여 몸을 뉘이고 같이 밤을 새며 서로 이런저런 어린 시절 추억을 이야기했다. 늦은 새벽 딱딱한 의자에 누워 형광등을 바라보며, 원준이 엄마가 깨어나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나는 천주교 신자도, 기독교 신자도 아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하늘에 계실 하나님께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원준이 엄마는 입원한지 1주 뒤에 숨을 거두셨다. 장례는 안양의 한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장례식 첫날 우리 엄마와 함께 장례식장을 찾았다. 원준이와 나는 불알친구였다. 어릴 적부터 같은 시골 동네에 살았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웃주민이었던 우리 엄마와 원준 엄마는 제법 사이가 돈독했다. 이 황망한 소식 앞에 우리 엄마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너무 일찍,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조문을 마친 후 다음날 저녁, 다시 장례식장을 찾았다. 내가 도울 일이 많진 않았지만 간단한 주변 정리와 신발 정리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밤에 되니 혼잡하던 장례식장도 한산해지고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구석에서는 아저씨들의 화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혼자 어디 조용한 곳에서 좀 쉬고 싶었지만 쉴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문상객 가운데 의외로 아는 얼굴이 적었다. 원준이랑 나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지만, 빠른 생일로 인해 학년이 달라 원준이 또래 친구들과는 서로 잘 몰랐다.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이 혼자 장례식장 주변을 뻘쭘하게 왔다갔다 하다가, 일손이 필요하면 손을 보탰다가, 좀 피곤하면 구석에 앉아 있다가 하다 보니 몸도 가라앉고 축 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장지까지 가려면 잠을 좀 자둬야 하는데 영 컨디션이 좋질 않았다. 한참을 장례식장을 서성이다가, 원준이에게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밤 11시쯤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집에 가서 단 두어 시간만이라도 푹 자고 싶었다. 장례식장에서 집까지는 대중교통으로 20여분 정도 거리였다. 밤늦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것이, 까무룩 깊은 잠에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어느덧 시침이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있었다. 간단히 씻고 황급히 택시를 불러 몸을 실었다.
새벽의 장례식장은 적막했다. 다들 자리 구석구석에 몸을 뉘인 채로 여기저기서 새우잠으로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때까지 안자고 있었는지 원준이가 부스스한 얼굴로 방 밖으로 나왔다. 나를 보더니 언제 왔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상주인 원준이는 잠도 제대로 못자고 저렇게 밤새 퉁퉁 부은 눈으로 늦은 새벽까지 깨어있었다. 그런데 베프라는 놈은 자기 몸 하나 피곤하다고 도망치듯 빠져나와 푹 자고 왔으니 괜시리 죄지은 것 마냥 부끄럽고 미안했다. 뭐라고 답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원준이의 눈을 피하며 뜬소리로 말했다. "글쎄.. 한 두세시쯤?"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모르겠다. 왜 그 순간에 그렇게 사소한 거짓말을 했는지. 그냥..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친구 앞에서, 내 몸의 피곤이나 챙기는 얄팍한 내 모습이 그 순간에 너무 보잘 것 없고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숨기고 싶었다. 그 순간의 뻔한 거짓말이, 나란 사람이 가진 단면의 일부를 베어내어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거의 한숨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원준이는 내가 방금 도착한 것을 아는 눈치였지만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피곤할 텐데 얼른 더 자두라고만 했다. 그 후로 원준이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시간이 흘러서도 오래도록 이 날의 대화가 내내 마음에 쓰였다.
장지는 고향인 안성이었다. 원준이와 내가 나고 자란 고장이었다. 묘자리는 산을 등지고 고향의 저수지를 마주하고 있었다. 운구차량이 도착했고 나와 다른 친구들이 관을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뗄수록 점점 마음이 착잡해져갔다. 관은 너무 가벼웠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묘자리 땅 속에 안치된 관 위로, 삽으로 뜬 흙이 한덩이, 두덩이 덮여갔다. 장례식 내내 침착하고 의연하게 참아오던 원준이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 울며 엄마를 불렀다. 원준이가 그렇게 오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땅에 묻히고 나면 엄마와는 영영 이별인 순간이었다. 아무런 유언 없이, 외아들에게 아무런 당부 한마디 없이 원준이 엄마는 차가운 땅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원준이는 서럽게 울었다. 항상 유머가 넘치고 매사에 재기발랄하던 내 친구가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그 모습을 보다 뒤돌아서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이른 작별이었다.
그 후로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원준이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나는 직장 근무지를 옮겼다. 그리고 작년 가을쯤이었다. 고등학교 친구 H와 우연한 기회에 도쿄여행을 가게 됐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아키하바라를 시작으로, 신주쿠로, 다이칸야마로, 아사쿠사로, 오다이바로 그렇게 이틀 동안 바쁘게 다녔다. 둘째 날 일정이 특히 빡빡해서 밤늦게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둘 다 녹초가 되었다. 마지막 날 일정을 위해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었다. 캔맥주에 취해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골아 떨어졌는데 이상하게도 새벽녘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경이었다. 그 순간에 문득 집에 있을 엄마 생각이 났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집을 떠나오니 괜히 엄마가 보고 싶었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몸을 일으켜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열린 커튼 틈 사이로 까만 도쿄의 불빛이 새들어왔다. 문득 원준이가 떠올랐다. 왜 그 순간에 원준이가 생각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카톡 화면을 열었다. 검지로 밀어 올리며 친구의 이름을 찾았다. 원준이의 프로필 사진에 원준이는 없고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원준이 엄마였다. 동그랗게 걸려있는 사진 옆으로 짧은 프로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보고싶습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나는 한동안 휴대폰 액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사진 속 원준이 엄마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빙긋 웃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과 옆에 적힌 짧은 문구를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얼마나 보고 싶을까. 마지막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황망하게 떠나보낸 엄마였다.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원준이의 그리움이 작은 카톡 화면 안에 꾹꾹 눌러 담겨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언가 마음이 먹먹했다. 그렇게 아침이 될 때까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 3일째는 신주쿠에 있는 토호시네마에 가서 <신 고지라>를 감상한 후 나리타 공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날이 밝자 친구 H에게 말했다.
["내가 어디 들를 데가 있어서 그런데, 먼저 좀 일찍 나갈 테니까 신주쿠에서 만나자."]
친구가 어딜 가냐고 물었다.
["어.. 아사쿠사에 좀 다시 가보려구. 거기 가서 살 게 좀 있어서."]
그렇게 숙소를 먼저 나와 아사쿠사역으로 향했다. 아사쿠사 센소지절 앞에는 기념품샵 거리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어제 들렀던 가게를 찾아 어설픈 영어로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여행 선물을 샀던 가게였다.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기는 어려운 노릇이어서 주로 돈키호테에서 먹을거리 위주로 사뒀고, 몇몇 지인들에게만 기념품을 줄 생각이었다. 어제 스쳐지나가듯 눈에 들어왔던 귀여운 마네키네코(복고양이)가 보였다. 아주 작은 오뚝이 모양 인형이었다. 고양이 배에는 'しあわせ こいこい やってこい.'라고 적혀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행복을 부르는 주문 같아 보였다. 신중하게 여러 개를 골랐다. 낱개로 포장을 요청하다가 세 개를 따로 집어 들었다. 이 세 개는 원준이 몫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원준이와 원준이 아내, 그리고 원준이 엄마를 위한 선물. 비록 원준이 엄마는 하늘에 계시지만, 그리고 살아 생전 선물 한번 드려본 적 없지만 이제라도 챙겨드리고 싶었다. 그리곤 따로 살고 계신 원준이 아버지에게 드릴 먹을거리도 좀 샀다.
여행에서 돌아와 원준이에게 연락을 했다. 연락을 받은 원준이가 며칠 후 우리 직장 앞으로 잠시 들렀다. 도쿄에서 사 온 간단한 먹거리들을 주며 말했다. "이건 아버지 꺼니까, 아버지한테 갈 때 갖다드리고 그리고 이거는 너네 먹구." 그리곤 작은 마네키네코 선물을 내밀었다. "이건 별 거 아니구 그냥 쪼그만 복고양이인데.. 하나는 니 꺼, 하나는 와이프 꺼, 그리고 하나는 엄마 꺼. 이렇게 세 개 샀어." 더 긴 말하지 않아도 원준이가 내 마음을 알 것이라 생각했다. 비록 하늘에 계시지만, 원준이에겐 항상 곁에 계신 분이니까.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사람이고 맛있는 걸 먹어도, 어딜 가서 좋은 구경을 해도 원준이가 가장 먼저 떠올릴 사람이니까. 그러니 나도 여행지에서 원준이에게 줄 기념품을 살 때, 원준이 엄마를 같이 떠올리고 싶었다. 함께 기억하고 같이 잊지 않는 것이, 내가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작지만 유일한 전부였다.
세상을 살다보니 사람들은 너무 쉽게 주변을 애도하고 너무 쉽게 금방 잊었다. 마치 마음에 쌓인 빚을 갚고 짐을 털어버리듯 그렇게 누군가를 애도하고 위로한 후, 뒤돌아서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금방 일상으로 돌아와 까맣게 잊기 일쑤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간 원준이 엄마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엄마를 잃은 원준이의 아픔보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더 아팠다. 아주대 병원에서 같이 중환자실 복도를 지키면서, 그리고 이틀간 장례식장을 방문하고 장지에서 운구를 도우며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당면한 내 삶의 걱정들을 맞이했고, 그 시간동안 원준이는 남들 모르게 홀로 그리움과 싸웠다. 원준이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남들에겐 금방 잊혀져갔다. 이처럼 나도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친구에 불과했다. 원준이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받아들이는 일은 어려웠고, 어쩌면 평생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이제라도 같이 떠올리고 기억하고 싶었다. 원준이 엄마를 같이 보고 싶어 하고, 함께 그리워하고. 이것만으로도 친구에게 위로가 되고 그가 덜 외로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꼭 이런 다짐 때문이 아니라도, 식당이나 집에서 어쩌다 가끔 마주하는 콩국수를 볼 때마다 나는 원준이 엄마를 떠올린다. 나는 원준이를 좋아했고, 원준이 엄마는 자신의 아들을 좋아해주는 나를 아껴주었다. 언제부터인진 모르지만 어른이 된 이후 어느 순간부터 콩국수를 즐기기 시작했다. 시원하고 쫄깃한 면발과 진하게 갈아낸 콩국의 담백한 맛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레 입맛이 변한 탓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원준이네서 한여름에 먹었던 시원한 콩국수의 맛이 추억처럼 오래도록 내 기억에 스며들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시원한 국수에 담긴 따뜻한 손맛을 나도 평생 잊지 못한다. 그렇게 원준이 엄마는 내게도 그리운 사람이다. 내 미천한 요리 실력에 콩국수를 감히 시도해보긴 어렵지만, 언젠가 같이 콩국수집에라도 가서 원준이와 콩국수를 먹으며 도란도란 엄마 얘기를 나누고 싶다. '나도 많이 보고 싶고 그립다'는 이 한마디를, 내 친구에게 해주고 싶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11-29 18:24)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