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4/03/21 10:33:03
Name 아랑
Subject [잡담] 그들에게 한 다발 꽃을 보내며
지금, 제 책상 위에는 프리지아 반 단이 꽃힌 주스 병이 있습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시장에 리어카를 끌고 나온 한 행상 아주머니가 꽃 한 단을 천원에 팔고 계시더군요. 밤이어서 그랬는지, 떨이를 하시는 모양이었습니다. 한 주 내내 개강 뒤의 번잡함에 폭 파묻혀 정신이 없었던 저는, 끝내는 눈이 멀어(-_-;) 버렸습니다.
집까지 타고 가야 할 버스비로 쓰려고 남겨 뒀던 천원을 털어 꽃을 사 버린 거죠. 시간은 밤 열한시, 집까지는 30분을 걸어가야 했지만 마냥 좋기만 했습니다.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얼마 되지도 않는 꽃을 끌어안고 볼을 부비작거리면서 걸어왔는지. 밤이라 어느 정도 쌀쌀한 바람을 감기 들린 몸으로 헤치고 걸으면서도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가만히 몸을 닫고 그 노란 빛을 살며시 숨긴 꽃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였을까요, 아니면 그날 밤 친구들과 한 잔 살짝 걸쳐서였을까요. 여간 집까지 걸어들어와 꽃을 들고 주접스럽게 집을 뒤지며 꽃병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편의점으로 나가 작은 병에 든 주스 하나를 사 왔습니다. 내용물을 원샷으로 끝내버리고 나니, 분리수거를 기다리고 있는 요쿠르트 병들(보통 작은 사이즈가 아니라.. 좀 큰 사이즈의 병들이었어요.)과 낡은 분무기 통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 병들을 전부 씻어서 꽃을 나누어 꽂았습니다. 안방에, 주방에, 제 방에, 동생 방에, 화장실에, 현관에. 놓을 수 있는 곳에 모두 놓고는 뿌듯한 마음에 잠자리에 들었지요.

침대에 눕고 나니 힘들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다리가 찌르르 떨려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일주일동안 편하게 지낸 날이 없었거든요. 개강 후 동아리에 새내기들이 들어오고, 과에서는 개강 파티를 하고, 지난주의 제 생일 때문에 여기저기서 축하 파티를 열자고 만나자 하고, '개강 기념으로 과제를 주시겠다'는 교수님들의 어이없는 프로젝트(?)에 말려서(한 학기에 전공 과목 다섯개 신청한 제가 바보인지도 모르지만ㅜ_ㅜ).. 버스에서 졸다가 엉뚱한 곳에서 내릴 정도로 정신을 놓고 다녔답니다. 수업은 죄다 아침에 시작해서 집에서 최소 일곱시에는 나가 줘야 하는데, 과제 때문에 새벽 두 시나 세 시에 자야 했거든요.

...나름대로는 이렇게 바빴는데, 목요일날이었던가요, 집에서 청소를 하는 문제 때문에 어머니와 작은 말다툼을 했습니다. "가장 시간 많은 네가 당연히 청소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네가 제일 한가하잖니." 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순간,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한 주를 어찌나 바쁘게 보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냐며 어머니께 항변을 하려 했지만.. 잠깐 생각해 보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직장에 다니시느라 바쁘시고, 동생은 대한민국 고3인데 어찌 명함을 내밀 수 있단 말입니까-_-; 조용히 입 다물고 청소를 시작했지요. 영어 원서 10장을 전부 해석해서 요약하고 그 내용에 대한 자신의 별도의 조사 내용을 첨부하는 과제와 소설 읽고 쪽글 쓰기 과제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결국 전 그 날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요.

억울한 마음이었는지, 그래서 보상이라도 받고 싶었는지. 집안 구석구석 놓인 꽃이 천천히 그 몸을 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주말에는 늦잠을 자리라 마음먹었죠. 하지만 그것도 마음처럼 되질 않아, 어쩌다 보니 주말 아침에 전 미용실에 있었습니다. 미용사가 제 머리를 다듬는 동안, 가져다 준 잡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어요. 거기에 꽃다발에 대한 글이 있더군요. 한 시인이 쓴 글이었습니다.

꽃다발의 축복을 느껴보라, 는 시인의 차분한 어조로 시작되는 글에는 정말이지 편안한 내용들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너무 편안해서였는지 머리 속에 정확하게 남은 말은 별로 없는데(....;;), 제게 와 닿은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꽃다발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기에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죠. 꽃은 우리를 위해 피지는 않습니다만, 그 꽃들을 가지런히 모아 아름답게 장식하여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담는다는 것으로 하여 그 꽃의 다발이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고 받는 이의 마음을 채워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전 저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 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했어, 앞으로는 더 즐거울 거야. 힘내."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칭찬을 하는 김에, 가족 모두에게 그 칭찬을 나누어 주고 싶었나 봅니다. "다음 주는 더 즐거울 거에요. 힘 내세요." 라고.

큰 축제 하나가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수고하실 수많은 이들의 땀방울은 지금도 분명 흐르고 있겠지요. 오늘의 축제를 위하여 노력한 게이머들과 각 팀의 관계자분들, 그리고 스태프들. 또 오늘의 축제를 즐기려 기다리는 우리 게임팬들 모두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제가 저에게 꽃다발을 보낸 것처럼, 또 가족들에게 꽃다발을 보낸 것처럼. 분명 오늘의 축제가 끝난 뒤 꽃다발을 받을 그들이지만 저는 그들에게 마음의 꽃다발을 보내렵니다.
힘이 드셨지요? 우리가 이 시간을 기다렸듯, 여러분이 이 시간을 준비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할지 알고 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이 모든 마음을 보냅니다. 자, 한 다발 마음의 꽃을 받아 주세요.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기를 기원합니다.
* 항즐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3-28 23:51)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04/03/21 10:35
수정 아이콘
와.... 이런 글을.... 감동 입니다.감동의 눈물이...
BoxeR'fan'
04/03/21 11:08
수정 아이콘
흠.................
굉장히.......멋지다는 말밖에.....멋집니다....................
지금 7번쨰 다시 보고 있습니다.......
확실히 애정을 담겨있는 글이란 멋진 거 같습니다....
04/03/21 11:12
수정 아이콘
처음 읽고는 감동 이였는데....몇번 읽고나니....


질투가 나네요... 저도 이런 글을 쓸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아케미
04/03/21 11:26
수정 아이콘
저번의 '4 o'clock'도 인상깊게 읽었는데 이번 글도 역시나 감동적이네요. ^^ 잘 읽었습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이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기를, 저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냉장고
04/03/21 11:52
수정 아이콘
오늘 같은날에 걸맞는 글이네요 ^^ 힘내세요~ 저는 오늘의 축제를 너무 오래 기다려왔답니다 스토브리그동안 힘들었죠..;;
저그맨
04/03/21 12:08
수정 아이콘
너무나도 멋진 글입니다...
아직 감동이 가시지 않네요... 저도 이같은 글을 쓰는게 목표입니다^^
다음에도 좋은 글 부탁드려요
수시아
04/03/21 12:11
수정 아이콘
루넷님에게 오늘도 뮤즈가 가겠지만 루넷님 분꽃의 선전도 바랍니다.^^
04/03/21 13:14
수정 아이콘
루넷님의 글, 감동입니다. 오늘의 축제 화이팅입니다!
안전제일
04/03/21 13:23
수정 아이콘
가끔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고싶어질때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선물을 할때도 있지요.
좋은글 감사합니다.^_^
묵향지기
04/03/21 15:14
수정 아이콘
저도 감동먹었습니다 ^^
슬픈비
04/03/21 15:19
수정 아이콘
아..감사합니다. 꼭저에게 힘내라고 말씀하시는듯한(왠착각을;;)생각이들어서..ㅠ_ㅠ힘이 부쩍부쩍나네요^^
04/03/21 22:46
수정 아이콘
Lunnette입니다. 닉네임을 바꿨습니다. 아이디 그대로인 닉네임이 웬지 싫어져서요ㅡㅡ;;
이렇게 기대를 잔뜩 하고 꽃다발 미리 보내 놓은 주제에-_-; 결승전을 못 봤습니다. 주말밖에 시간이 없다는 허접한 이유 때문에, 친구들과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왔거든요. 유리가면 episode 1. 기적의 사람, 이었는데요. 재미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결승전 못 본건 너무 아쉽네요. 오늘 새벽에 편성 일정이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하루 정액 끊어서 봐야겠어요. 오늘 아니면 또 시간 없을 텐데. 엉엉 ㅜㅜ
04/03/21 22:59
수정 아이콘
lovehis님/ 그간 제가 lovehis님을 몰래 질투하고 있었는데... 설마 눈치채 버리신 거 아니에요? ^^;;
Boxer'fan'님, 저그맨님, 진화님, 묵향지기님/ 감사합니다. 더 좋은 글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케미님/ 감사합니다^^ 아케미님이 쓰신 강민 선수 응원글도 잘 보았습니다. 사실은 강민 선수 이기라고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어요.^^;
냉장고님/ 제 흉중을 꿰뚫어 보셨나이다. 스토브리그는 정말 힘들었다구요ㅜ_ㅜ
수시아님/ 안타깝게도 아직 뮤즈를 건지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분꽃의 선전은 이루어진 모양이라 정말 기쁩니다. 날라만세^^!
안전제일님, 슬픈비님/ 이 글은 pgr 분들을 향한 글이기도 했습니다. 분명 좋은 일들이 있으실 거에요. 제 꽃다발, 잘 받으셨나요? ^^
임마라고하지
04/03/22 10:03
수정 아이콘
아랑님/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운영진여러분~! 이렇게 좋은 글을 왜 추게로 안 보내시는지... 못보신거죠? ^^ 이글을 추게로~ 부탁해요~! ^^
프리지아
04/03/23 01:09
수정 아이콘
앗......저의 닉넴이 프리지아인데;;;
아무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秀SOO수
04/03/28 23:58
수정 아이콘
추천게시판으로 왔군요. ^ ^ 역시 lovehis님의 주간 PGR 리뷰의 힘이 대단...[하지만 이 글 자체가 역시 좋았기 때문도 있었겠지요.]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면 많이 읽을께요
04/03/29 01:30
수정 아이콘
앗.. 진짜 추게로 오다니. pgr에선 눈팅족으로만 살아야지, 라고 나름대로 다짐했던 이전의 제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과분한 영광이로군요. 적극 추천해 주신 lovehis님의 리뷰에 특히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ㅜ_ㅜ;;
04/03/29 01:50
수정 아이콘
뮤즈가 강림한 글인데 추게에 못 올 리가 있겠어요....
04/03/29 09:07
수정 아이콘
오 이런 엄청난 글이 ^.^ 감동감동~ 홈피에도 적극 들러 구경 중 ^^
사고뭉치
04/03/31 14:07
수정 아이콘
이맘때쯤이면.. 프리지아가 참 예쁘게 피지요..
오늘은 집에 가는 길에 프리지아 한다발을 사 들고 가야겠습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
04/03/31 23:05
수정 아이콘
글에서 프리지아 향기가 납니다.^^ 제가 좋아하는 꽃 중 하나랍니다.
좋은 글 감사하고 앞으로도 여러가지 향기나는 글 부탁드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05 PGR 회원들을 위한 ‘좋은 글쓰기’ [33] sylent8891 04/05/27 8891
304 "Gillette 2004 Star League 공식맵 분석 및 설명" [25] 변종석19177 04/04/25 19177
303 [카툰] 한방이당 전당대회, 이윤열 vs 최연성 [45] ijett33251 04/04/18 33251
302 "SKY 2004 Pro League 공식맵 분석 및 설명" [25] 변종석17436 04/04/16 17436
299 [모음]공상비과학대전-자게편2 [7] homy9468 04/04/12 9468
298 [모음]공상비과학대전-자게편1 [1] homy12313 04/04/12 12313
296 [모음]공상비과학대전-유게편 [13] homy15743 04/04/12 15743
294 "Gillette 2004 Star League 프리매치 공식맵 분석 및 설명" [56] 변종석18744 04/04/08 18744
293 그래서 우린 pgr21을 본다... [43] The Essay12238 04/03/30 12238
292 주간 PGR 리뷰 - 2004년 3월 28일 [18] lovehis10495 04/03/28 10495
291 [잡답] 뱅갈라스들의 독백 [16] 총알이 모자라.11018 04/03/24 11018
290 Adios, my Paradoxxx! [21] Forgotten_12485 04/03/23 12485
289 [잡담] 그들에게 한 다발 꽃을 보내며 [21] 아랑7323 04/03/21 7323
288 Gallery Dahab - 꿈꾸는 젊은 거장 Nal_rA [49] lovehis15200 04/03/24 15200
287 OSL 관전일기 - 제우스, 두가지 편견을 버려야. [55] sylent18987 04/03/19 18987
284 [낙서]12 help yO.. [47] 언뜻 유재석16048 04/03/05 16048
283 어느 두 장거리 육상선수 이야기 - Jju편 [17] lovehis9487 04/03/04 9487
282 아직 다하지 못했던, 나의 이야기....... [9] 아제™7744 04/03/03 7744
280 임 빠라고 불리는 막내 종헌이 이야기 [38] 순수나라11635 04/03/02 11635
279 어느 두 장거리 육상선수 이야기 - SC(Silent_Control)편 [23] lovehis9143 04/03/02 9143
278 외계어를 비판하며 이모티콘에 대한 중학 국어 교과서와 저의 보잘것 없는 생각입니다. [21] 작고슬픈나무8076 04/03/02 8076
277 [잡담] What Dreams Are Made Of. [23] Apatheia9210 04/02/29 9210
276 우리집과 스타크레프트. 프로 게이머 이야기 [25] 순수나라11258 04/03/01 11258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