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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05 14:44
네. 제 아내에게도 늘 장인, 장모님에게 잘하라고 이야기는 하는데... 전 별로 그러지 못한 것 같아 가슴 한 편이 찔립니다.
20세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그렇게 가슴이 미어지도록 보고 싶지는 않지만 그때 보았던 당신의 앙상한 모습은 아마 제가 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잊혀지진 않을 것 같아요. 때가 되면 우리모두 누군가와 또는 누군가에게 잊혀지는 존재가 될텐데... 미리미리 준비해도 그때가 되면 늘 힘들겠지요. 날씨도 꾸물꾸물한데 오늘은 어머니에게 전화나 한 통 해야겠네요. 공룡님도 늘 즐거운 하루 되시고 친가 처가 부모님에게 사랑 많이 많이 드리세요. ^^
07/03/05 18:26
공룡님 오랜만이시네요..^_^ 언젠가 이 주제로 글 하나 쓰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말이죠.. 비현실적인 현실에 대해서.. 저도 누군가가 제게 붙여준 별명중 하나가 주말연속극 이랍니다.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삶을 살고 있다구요.. 저희 어머님은 담석이신데.. 요새들어 자꾸 허리가 편찮으시다고 하시는게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어떤 드라마이건 간에 배우가 훌륭한 드라마는 반드시 성공하더군요.. 성공한 드라마 만들어보아요..^^/
07/03/06 00:08
저의 할머니는 췌장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 집 이야기니 참고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췌장암 선고를 받았을때, 의사가 '췌장암은 열어봐야 안다. 하지만 기대는 마라'라고 어찌 보면 잔인하게 말했을때 저와 아버지는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모두 할머니와 함께 보냈기에 그 고민은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저와 함께 해온 할머니였고 열여섯에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가 저를 열아홉에 가졌기 때문에 저와의 나이차이는 4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어디 가면 엄마라고 그랬었죠. 제가 스무살 되던 해엔 예순도 되지 않으셨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고민할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애절함은 결국 저 자신의 문제였고 아버지의 애절함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요한건 할머니의 인생이었다고 생각했죠. 우리가 병을 숨기는 것은 결국 할머니에게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조차, 죽음을 맞아 스스로를 정리할 기회조차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의사가 예상한 기간은 6개월이었고 정확히 판정 후 6개월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동안 절에 다니시면서 불공을 드렸고 저와 동생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저희 할머니 성정이 그러한 건지 의외로 담담하시더군요. 돌아가시기 한달 전에 '나는 다음달을 넘기지 못할꺼야'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린 제 손을 잡고 가시던 친척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스무살이나 된 저의 손을 잡고 의자에 앉히시며 가위가 머리를 자르기 시작하자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차를 젓듯이 하시는 말씀이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이후 저는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아무리 안타까워하더라도 그것은 저 자신의 상처일 뿐이라는 것을요. 그 때 숨겼다면 할머니는 영문도 모른체 고통속에서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인생은 할머니 것이기에 알려드렸고 할머니께서 예정된 죽음을 맞아 무엇을 정리하셨으며 무엇을 생각하셨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사실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알려드린 것이 잘 한 것인지, 할머니께서 인생을 돌아보셨다는 것이 저만의 생각인지 스스로 정리할 기회를 드린 것이 잘 한 행동인지를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지만 그것은 저의 오만이거나 혹은 자기 위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할머니의 인생을 할머니 모르게 주위 사람만 알고 있는다는 것이 불공평하다 생각했고 반추할 기회조차 드리지 못할 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07/03/09 14:17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는데, 오랜만에 뵙는군요.
세상이 어수선하고 시절도 하수상한데 다행히 잘 지내시나 봅니다. ^^ 장인어른께서 연세가 어떻게 되셨는지 모르지만 걱정이 많이 되시겠습니다. 정말 사람은 사람마다 각자의 드라마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효자는커녕 불효자에 가깝지만, 근 8년동안 별거아닌 별거하면서 용인의 가족과 떨어져 부산에서 사는 건 어머니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본사에 올라가려면 벌써 갈수도 있었지만, 어머니께서 용인은 시골이라서 답답하시다며 저따라 용인가서 사는 걸 거부하셔서, 이런저런 핑계로 부산에 눌러앉아 있습니다. 어머니께서야 평생을 부산에서 사셨고, 저 외의 자식들 모두, 그리고 일가친척 모두 부산에 있으므로 부산에서 사시는 걸 당연히 좋아하시겠지요. 그래도, 어차피 제가 내년에는 정년퇴직하게 되므로 또다시 어머니와 헤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어머니께 섭섭한 것이 많은데다 제 속이 밴댕이 속이라 어머니 속을 많이 썩여 드렸는데, 저도 나이들고 자식들이 장성하다보니 삼십대 초반에 홀로되어 평생 우리 4남매키우느라 고생만 하신 어머니가 너무 애처롭게 생각되더군요. 사실은 나 편하게 살자고 어머니를 제대로 모셔보지도 못한채 그대로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면 얼마나 비통한 눈물 흘릴까 싶어, 나중에 가슴 찢어지는 후회하지 않으려고 지금은 다소 불편해도 이대로 살고 있습니다. 재작년부터 아이들이 모두 제 앞가름 할 만큼 되자 아내가 부산 내려오겠다고 했지만, 제가 말렸습니다. 아내도 맏딸인데다 팔순 가까운 장인장모님이 이웃에서 두분이서만 살고 계십니다. 도와드리는 것 없이 오히려 늘상 신세만지고 사는 처갓댁이지만, 그래도 거의 매일 병원 나들이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두분께서는 바로 옆에 우리가족이 살고 있다는 걸 은근히 듬직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딸애가 대학 졸업하고 직장 다니긴 하지만, 아직은 엄마가 옆에서 챙겨줘야 할 것 같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 언젠가는 용인의 시골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삶의 터전은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아서 아내가 용인집을 지키고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새 용인집 마당의 잔디가 좋고, 흙냄새 풀냄새, 울 밖의 밤나무 감나무, 이름모를 새소리가 좋은 걸 보니 저도 나이가 먹긴 먹었나 봅니다. 언제한번 체육관에서 공룡님이 사 오시는 빵과 음료수가 먹고 싶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가정에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분수님, 언뜻유재석 모두 올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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