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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통님의 글에서 참 뒤늦게 트랙백(?)합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성들을 찾아볼작시면...
우선 현모양처의 대표, 율곡 EE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있을 겁니다.
좀 자유롭게 산 걸로는 황진이가 있겠구요.
섹스심볼로는 어우동이 있겠죠.
그리고 비극적인 삶을 산 여인으로는...
허난설헌이 가장 유명하겠죠.
유교 가치관이 지배한 조선시대, 여성의 지위가 그렇게 낮은 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집 바깥을 책임진다면 아내는 집 안을 책임졌죠. 자식이 크고 며느리가 들어올 때쯤 되면 집안의 가장 큰 어른으로 최강의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구요.
하지만 그건 집 안에서의 얘기일 뿐이었습니다. 힘이 있었다 해도 그 자신이 아닌 친정의 힘이었고 (결혼은 가문간의 결합이었으니까요) 바깥양반의 힘이었으며, 자식의 힘이었습니다. 집 안에서의 힘도 남편이 유교적인 질서를 얼마나 따라주느냐에 달렸죠. 힘이 있는 쪽은 이걸 무시하기가 쉬웠으니까요. 그리고 그 힘을 얻기 위해선 자식이 잘 커야 했고, 그 때까지 자기보다 위인 시어머니를 버텨내야 했습니다.
+) 가령 송시열 같은 경우 아내를 예의로 동등하게 대우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내가 유교 질서를 어기면 어땠을지 모르죠. 그는 유학자였으니까요.
대리청정 등으로 힘을 보여준 왕후들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나라의 안주인으로 일반 집보다 힘이 컸고, 자식이 어릴 경우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딱 유교 사회에서 허용한 범위 내였습니다.
가족들이 다 글 잘 쓰기로 유명했던 허씨집안, 허엽은 딸인 허초희에게도 스승을 붙여 글을 가르칩니다. 글 잘 쓰기로 유명했던 서자 이달이었죠. 그녀는 어릴때부터 천재적인 능력을 보여줬다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양반가의 여식,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가야 했죠.
그리고 참 지옥같은 시집살이를 하게 됩니다.
남편 김성립은 딱히 재능이 없던 자로 공부도 소홀히 하고 기생이랑 놀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허난설헌의 능력에 컴플렉스를 느낀 거라고 설명되죠. 뭐 그게 아니더라도 둘의 궁합이 잘 안 맞았던 모양입니다. 거기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참 모질게 대했구요.
그래도 남편은 남편이라고 그를 걱정하거고 기다립니다. 일침을 놓기도 했죠.
古之接有才(고지접유재) /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今之接無才(금지접무재) /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접은 유생들끼리 공부하는 동아리입니다. 근데 거기서 재주才가 빠지니 첩妾만 남죠 (...) 그래도 이 남편이란 작자는 정신을 못 차렸으니... -_-a
그래도 자식 보는 맛으로라도 살려고 했는데... 아들과 딸이 어린나이에 세상을 뜨죠.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去年喪愛女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今年喪愛子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哀哀廣陵土
두 무덤이 마주 보고 있구나 雙墳相對起
백양나무에는 으스스 바람이 일어나고 蕭蕭白楊風
도깨비불은 숲속에서 번쩍인다 鬼火明松楸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紙錢招汝魂
너희 무덤에 술잔을 따르네 玄酒存汝丘
아아, 너희들 남매의 혼은 應知第兄魂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으리 夜夜相追遊
비롯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縱有服中孩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라리오 安可糞長成
황대노래를 부질없이 부르며 浪吟黃坮詞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도다 血泣悲呑聲
- 곡자
그리고 그 뱃속의 아이마저 사산됩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는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 김씨도 객사했으며, 오빠 허봉과 동생 허균도 귀양갑니다. 참... 남들은 하나만 겪어도 힘들 고통을 차례차례 겪은 것이죠. 그러고도 그녀를 위로해 줄 사람은 없었으니...
그렇게 그녀가 27살 되던 1589년 3월 19일, 외로이 세상을 뜹니다.
이후 허균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난설헌집을 냅니다. 중국에서 먼저 간행됐고, 이후 일본에, 그리고 조선에 전해졌죠. 세 나라에서 모두 큰 인기를 얻었구요.
+) 근데 잘 살았다 해도 이 동생놈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
다만 이 시들은 옛부터 지금까지 표절 의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릴 때 썼다는 백옥루상량문조차도 말이죠. 중국의 시들을 베꼈거나, 허균이 창작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녀가 그 시들을 모방했을수도 있지만 역시 의심이 가는 건 허균일 겁니다. 그 정도로 누이가 좋았던 건지... 애초에 허균이 만든 것부터가 허난설헌은 다 불태웠는데 몇 개 건져냈다느니, 기억을 되살려 썼다느니 하는 식이죠. 지금 그게 어디까지가 사실일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국문학 쪽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 부분이 더 궁금하긴 합니다만... 여기서 얘기할 건 좀 다른 부분입니다.
김성립은 과거에 급제합니다. 딱 그녀가 죽은 그 해입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지 그래도 쌓아놓은 게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37살이니 늦긴 했죠. 이후 그가 어디까지 갔을지 역시 알 수 없습니다. 3년 후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싸우다 죽었거든요.
허난설헌에 대비돼 참 최악의 남편이자 선비로 여겨집니다만... 최악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죠. 공부 안 하다가 뒤늦게 정신차린 케이스는 결코 적지 않을 거구요. 첩질, 기생질이나 일삼았던 선비들 역시 어디 적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남편을 둔 아내들은 어땠을까요.
현모양처로 유명한 신사임당 역시 남편 이원수가 어리고 어린 첩을 들였고, 죽을 때 옛 고사까지 인용하며 재혼을 말렸지만 재혼합니다. 이걸로 그녀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가늠하긴 힘들긴 합니다만... 그녀의 자식들도 그런 아버지를 좋게 안 본 것 같아요. 율곡 이이는 그 때문에 출가하죠. 결국 신사임당이 지금까지 이름이 내려져 오는 건 그녀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이이라는 아들 덕분입니다.
뭐 그렇게 따지면 허난설헌도 그녀의 능력과 그녀의 이름을 남겨준 동생 허균 덕분에 이름이 남게 되긴 했네요. 다른 이들보단 나은 상황일지도요. 그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입니다만...
그 시대의 남자들도 마찬가지긴 했습니다. 유교 사회와 가정에 묶여사는 것 말이죠. 하지만 남자들은 그걸 거부하고 뛰쳐나가기가 쉬웠죠. 그런 남편을 둘수록 아내들은 고통받았구요. 시로 유명한 김삿갓, 그가 사회나 가정에 속박됐다면, 집에 약간이라도 신경을 썼다면 그런 시들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당시의 여인네들은 그런 선택을 하지 못 했죠. 뭐 황진이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녀는 기생이었죠. 어우동처럼 막 놀 경우 죽음을 피할 수 없었구요.
근대에 들어서 신여성들이 등장하고도 비슷했습니다. 아니 가치관이 충돌하는 시기니까 더 했죠. 아무리 신여성답게 살아도 결혼하면 전통적인 며느리가 돼야 했습니다. 남자들은 본처 놔두고 신여성 꼬셨고 말이죠 -_-a 위인 중에 사생활 막장이었던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습니까. 근현대 인물 중에도 여운형 같은 이가 있었죠. 남자들은 꿈을 위해 일하고 싸우다 죽었고, 여자들은 남자나 사회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다 죽습니다. 지금으로 오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꿈과 가정, 이에 대한 갈등은 계속되고 있죠. 음 근현대 얘기는 여기까지.
허난설헌이 좀 큰 꿈이 있었을지 그냥 화목한 가정 속에서 시 쓰고 그림 그리면서 살고 싶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었든 참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여인의 대명사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