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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9/01 17:26:07
Name Neo
Subject 서울, 2006년, 겨울


안녕하세요. 눈팅족 Neo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한번 올려봅니다. 어투는 반말이니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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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은 내가 서울에서 살았던 마지막 해이다. 2006년 초에 개인적인 공부를 좀하다가 몇달하고는 집어치웠다. 어렸을 때는 어떠한 일도 항상 열심히 했고 가능성이 1%만 있어도 도전하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까 효율성을 슬슬 따지기 시작했고 지금 내가 사는 것이 행복한가를 많이 따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비효율적인 공부에 의욕이 전혀 생기지 않았고 우울증 증세까지 왔다. 나 자신을 매몰차게 스스로 압박하는 편인데 너무 거칠게 다루었나 보다. 생일 즈음에 찾아온 친구와 술 한잔 하고 피씨방에서 스타를 열심히 한 다음 날 부터는 공부를 접어버렸다. 

한 두달간 주말을 포함해서 쭉 공부를 하다가 그만두고 나니 할 것이 없었다. 친구하나 없이 상경했기에 주말마다 혼자 방바닥을 긁거나 말 없이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면서 누워 있거나 하이퍼텍 나다 또는 코아 아트홀 같은 곳으로 영화를 보러 나가거나 했을 뿐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서울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몰려 사는데 내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외롭고 쓸쓸했다.

스타도 해결책이 되지는 않았다. 영화도 마친가지였다. 사람이 그리웠던 것일까. 각종 동호회에 가입했다. XX 영화 동호회와 XX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이 주로 활동하던 모임이었다. 정모도 자주 나가고 번개도 자주 나가면서 사람들과 자주 친분을 쌓았다.

1. 천국보다 낯선

영화 동호회는 주말마다 정팅을 했다. 처음에는 좀 쭈뼛쭈뼛 했지만 매주마다 정팅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 자기가 본 영화가 최고야를 외치면서 자랑질 하기 바빴지만 나름 얻는 것도 많았다.(세상은 넓고 볼 영화는 너무나 많다는 것) 매주마다 정팅을 하면 매번 이야기를 나누는 구성원이 바뀌기 마련인데 어떤 누나와 나는 꾸준히 정팅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자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오랫동안 알았던 사이처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정팅에서만 이야기 하다가 서로 메신저에 추가시켜서 평일에도 자주 이야기 했다. 그러다가 내가 한마디 했지. 

"누나! 제가 종각쪽에 삼겹살 잘하는데
아는데 만나죠"

사실 그 삼겹살 가게는 예전 여자친구랑 자주 갔던 곳이다. 서울에 지인이 없었기에 아는 곳이라곤 다 데이트 했던 곳 뿐이었으니까. 하여튼 누나도 나의 콜에 흥쾌히 콜 했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서로 둘다 어떤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상대인데, 어떤 사람일까, 인연이 닿을 수 있을까 하면서...

누나와 만나기로 한 종각역 앞 X번 출구에서 난 십여분간 기다렸다. 그러다가 서서히 올라오는 한 남....아니 여자를 보게 되었다. 금색으로 염색한 짧은 머리칼, 하얀색 브라우스에 살짝 동여맨 넥타이, 그리고 긴 다리. 그랬다. 누나는 보이쉬한 스타일의 키 큰 여자분이었다. 서로 인사하고 한 삼분간 말이 없었다. 그 삼분은 마치 삼만년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나보다 큰 여자분과의 만남은 그때가 첨이자 마지막이었으리라.

하지만 곧 삼겹살 집으로 갔다. 국무총리였던 이해찬씨가 보낸 화환이 정문에 세워져 있던 삼겹살 집이었다. 거기서 삼겹살에 소주 잔을 왔다갔다 하다보니 어색함은 눈 녹듯이 사라져버리고 다시 우리는 채팅창에서 노는 것처럼 신나게 이야기 했다.

"누나! 이렇게 키가 클줄 몰랐어. 나한테 키좀 나눠주라"

"나도 나눠주고 싶다. 제발 가져가라 크크"

일차에서 소주를 좀 많이 마시고 이차로 근처에 있던 일본식 선술집 들어가서 따뜻하게 데운 히레사케를 여러잔 마셨다.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내가 어떤 구질의 이야기를 던져도 누나는 다 스트라이크로 받아줬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거기서 부터 슬슬 일이 안좋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

술을 거기서 그만 마셨어야 했다. 왜냐하면 나의 취기가 좀 많이 올라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차로 세계맥주집을 갔고 거기서 부턴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토요일이었던 다음날 오피스텔 창가로 비치는 햇살에 눈이 부셔서 깼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누나랑 빠이빠이 손 흔들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 기억은 난다. 그리고 어제 일을 가만히 추적해보았다. 그러다가 누나에게 잘 들어갔는지 문자를 한 통보내고 그전날 다운 받아놓은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을 보고 있었다.

그 영화는 참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 영화 왜 이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쾌하지 않았던 것은 영화 탓도 있었지만 1mm의 미동도 없이 가만히 정자세를 취하고 있던 나의 핸드폰 탓이 더 컸다.

왜 연락이 없지?.....

뭔가 불안한 부분이 내 마음 귀퉁이에서 조금씩 자라오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큰 줄기를 가진 거목이 되어버렸다. 그때만큼 나의 핸드폰을 열기 싫었던 적이 없었다. 스스로 아닐거야 라는 말을 백번 넘게 되내이고 나서 핸드폰의 발신 목록을 보았다.

50통 .....

그날밤 내가 누나에게 건 발신횟수이다.
아놔....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되었다. 상상하기도 싫다. 술 취한 사람이 전화기 부여잡고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했을 텐데 나 같아도 짜증이 폭발하겠다. 거기다가 계속 전화를 걸었으니...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난다는 것 정도? 

다음주 월요일에 아침에 컴퓨터를 켜 보니 누나가 로긴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걸어보았지. 대답 안할 줄 알았었는데 대답은 하더라. 하지만 곧 적막감과 어색함이 나와 누나 사이의 인터넷 라인을 둘러쌌다. 미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라 다음날 다시 메신저를 켜보았는데 다시는 그녀의 로긴을 볼 수 없었다.

2.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은 검은 색

XX동을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동호회에 가입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사실 XX동의 맛집을 검색하다가 링크의 링크를 타고 가다 보니 우연히 발견했고 가입하게 되었다. 여기는 앞의 영화 동호회보다 오프라인 위주로 돌아갔던 동호회였다. 정기모임도 자주 있었고 번개도 자주 있었다. 어짜피 평일 저녁과 주말마다 할일이 없었기에 혹시 모를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나가게 되었다.

혹시나는 역시 역시나였다. 하지만 혼자 텅빈 하늘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꽤나 재미있어서 자주 참석을 했다. 거기도 정기적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어서 그 사람들과 안면을 튼 뒤 얘기를 많이 나누었다. 음악과 음식 술 영화 사진 책 등 서로 자기가 겪은 것들을 남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왜 연애얘기는 안했을까. 지금도 궁금한 점이다.

연말 정기 모임은 굉장했다. 사람들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검정색 DSLR을 들고 맛집에 모였다. 한식으로 코스 요리를 먹었던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일차로 한식집에서 밥 먹을 때 방송국에서도 취재하러 왔던 걸로 기억한다. 요즘의 인터넷 문화 하면서 그런 것을 촬영하려 했던 것 같다. 

2차로 옮긴 곳은 한 호프집이었다. 그 모임의 좌장격을 맡고 있던 분의 한 말씀 있은 뒤 다들 뒤 섞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이 평소보다 너무 많이 모였기에 평소에 자주 얼굴을 뵈었던 분들을 찾을 수 없었고 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맥주만 홀짝 마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내 앞에 한 여성분이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검은 머리칼, 검은 머리띠, 검은 눈동자, 검은 원피스... 올 블랙으로 치장한 여자였다. 난 중앙에서 말씀하시던 어떤 분을 쳐다보다가 맥주 잔을 찾으려고 몸을 돌릴 때서야 그 여자분이 내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뻤.다.

그녀의 미모에 취한 탓이었을까? 사실 그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둘이서 아주 유쾌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가 올 블랙 스타일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많이 미소를 지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야기를 얼마 나눈 것 같지도 않았는데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흘러 12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2차 모임도 끝이 났다. 집에 갈 사람, 3차를 갈 사람으로 나뉘었다. 그러던 그녀가 한마디 했다.

"xxx번 버스가 곧 끊길거에요"

하지만 그녀의 말은 투정감이 가득차 있었다. 집에 가기 싫다는 투정. 투정. 투정. 투정.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너무나 훈훈했다.














"내가 xxx번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아요. 버스 놓치면 큰일이죠. 자 날따라와요"

그녀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랬다. 난 지리에 밝았던 것이다. 그 동네는 예전 여자친구와 자주 데이트 했던 곳이기에 골목골목을 잘 알았다. 이리저리 코너를 돌다보니 눈 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정류장을 보고 멈춰선 후 그 xxx번 버스가 막 도착했다. 난 그녀의 등을 힘껏 손으로 밀면서

"저 버스 놓치면 큰 일 나요. 택시비 무지 나올 거에요. 걷지 말고 뛰어요. 뛰라니까!"

그녀는 멈칫 멈칫하면서 약간 뛰다가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때 난 손짓으로 어서 서두르라고 했고 그녀는 버스를 향해 달렸다. 난 하마터면 추운 겨울에 버스 놓쳐 추위에 떨뻔한 검은 스타일의 소녀를 구제한 것이다.





물론 안구에 습기가 찬 것을 알아낸 것은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2006년의 마지막 서울 생활을 끝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9-2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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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나의빛
12/09/01 18:24
수정 아이콘
동호회 나가면 어때요? 자기 개인 시간에 구애를 많이 받나요?
12/09/01 18:28
수정 아이콘
진리는나의빛님// 자기 하기 나름이죠. 강제성을 띄지는 않으니.. 전 시간이 그래도 많이 남는 편이었습니다.^^ [m]
똥꼬쪼으기
12/09/01 18:58
수정 아이콘
좋은 음악~ 경험담 잘 들었습니다.
엔딩은 두고두고 아쉬웠겠어요. 그래도 그 덕에 쿨한 추억으로 남을수 있을듯 하고.
서린언니
12/09/01 19:00
수정 아이콘
훈훈함에 추천 하나 누르고 갑니다
Tristana
12/09/01 19:26
수정 아이콘
요즘 참 훈훈하네요.
감모여재
12/09/01 21:00
수정 아이콘
요즘 pgr이 참 따뜻한 곳이라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시지프스
12/09/04 14:51
수정 아이콘
마음이 따뜻해지는 좋은 글이군요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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